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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른말 바른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알마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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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 발해의 지리적 위치
우리는《산해경》을 중국의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조선사람이 저술했다는 인식은 도무지 없는 모양이다. 그《산해경》을 풀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신통한 해답은 없는 것 같다. 이런 난해한 내용 가운데서 재미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산해경》에 “密山”이 있다. 그 “密”자는 지금의 글자와는 다르게 생겼지만, 지금처럼 쓰고 있다.
이 “밀산”을 뿌리로 한 지명 가운데 “밀산현(密山縣)”이 있다. 이 밀산현은 발해의 상경 룡천부(上京 龍泉府)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밀산”은 《산해경》을 풀이한 사람들은 “俱密山”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이 “합밀현(哈密縣)”이라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이곳은 아다시피 신강성 동부요, 외몽고 서남부 어름에 있다. 그렇다면, 신강성 동부와 외몽고 서남부의 어름에 있는 합밀현과, 조선의 歷史 속에 나오는 발해(渤海)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일까?
현재 “북한지도”에는 압록강 너머에 자강도에서부터 그 동쪽으로 백두산 서쪽까지 3개 고을에 걸친 맞은편에 “二道溝”에서부터 “十三道溝”까지 있는데, 단지 “一”과 “十”이 붙은 ‘道溝“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11개의 道溝가 있는 셈이다.
이것을《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그 위치를 찾아보면, 료녕성(遼寗省)/봉천성(奉天省) 어디어디로 나온다.
분명한 것은 그 두 명칭은 동일하다. 그 동쪽에 길림성(吉林省)이 있다.
그런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중국지도》를 펼쳐보면, 신강성 동부에 있는 합밀현을 지나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을 합밀하(哈密河)라고도 하며, 흑수(黑水)라고도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二道溝”와 “六道溝”가 적혀 있다. “道溝”라는 말은 웬만한 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어대사전》의 풀이로 보면, “道路旁邊的水溝”라고 하였다.
“水溝”는 우리 말로는 “도랑/하수구/배수구”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북쪽 료녕성(遼寗省) 압록강 너머에 있는 강들을 “도랑”으로 적은 셈이다. 과연 강을 도랑으로 볼 수 있는 것이 歷史의 기술(?)이다. 그런 강들이 한반도 북쪽, 조선사와 관련된 강들이 신강성 동부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산해경》에 나오는 산명(山名)의 “密山”이 합밀현(哈密縣)에 있는 합밀산(哈密山), 즉, 구밀산(俱密山)과 같은 유래를 가진다는 사실과 발해사(渤海史) 속에 나오는 “밀산현”이 흑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그곳이 상경 룡천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로 신강성 동부 합밀현이 있는 지역이 바로 료녕성(遼寗省)이 있어야 될 지역이라는 말과 같다. 바로 그곳에 “二道溝”가 있는 移動된 지역이 바로 길림성이 있어야 될 지역이라는 말이다.
조선사에서 료동(遼東)이니, 료서(遼西)니 하는 遼의 기준이 되는 곳은 바로 신강성 동부의 합밀현이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遼의 위치가 다를 수 있지만, 지명의 이동(移動)에서 “도구(道溝)”라는 이름의 강(江) 또한 재미있는 테마라고 본다. 지금 중국지도에 “七道溝”의 위치는 북한지도에서는 “二道溝”이다. 그 “七道溝”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현재의 북한지도에 기재된 것이 옳게 된다.
이런 것은 역시 歷史를 왜곡(歪曲:비뚤어질 외 / 굽을 곡)하기 위한 지명의 혼합작업을 말해준다. “道溝”라는 명칭의 지명을 찾아보면, 그 고을들은 대개 “光緖32년”[1906]에 설치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는 사실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모두 최근의 일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대 歷史는 현재의 거울이요, 근대의 歷史는 고대에서 비롯되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리적 위치가 그 歷史를 대변하는가? 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조선의 歷史와 조선의 지리적 강역과는 매우 판이하다. 그것은 상황이나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조상들의 활동무대가 전혀 동떨어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강역이 중국대륙이었고, 발해의 강역이 중국대륙이었고, 고려의 강역이 중국대륙이었고, 조선(=대한제국)의 강역 또한 중국대륙이었다는 말은 이젠 좀더 세부적인, 좀더 체계적인 論理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북방지역에 존재했다는 고구려의 강역에는 그 전에 많은 부족국가들이 존재하였다. 그 고구려의 뒤를 이은 국가가 발해라고 하는데, 그 발해란, 과연 어디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前身의 부족은 어디에서 활약을 하였겠는가?
“발해국은 옛고구려에 비등한 넓은 령토와 매우 강한 국력을 가지고 옛고구려 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부강하고, 문화가 발전한 나라로서 이백수십년간 존속하였다.” [박시형 지음, 송기호 해제,『발해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9;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1995. 3쇄), p. 34.]
“新唐書 발해전(篆:전서 전)에는 발해국가가 그 초기에, 옛날 읍루(말갈-녀진족의 조상)의 땅인 동모산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은 영주(오늘의 조양)의 동쪽 2천리에 해당하는 곳이며, 그 때 발해국의 영역(領域)은 이미 남쪽으로는, 니하(尼河)를 경계로 하고, 신라와 접하였으며, 동쪽은 바다,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고 하였다.” [상게서(上揭書), p. 150.]
이런 설명에 대하여, 이 발해국(698-926년)의 지리적 위치를 어디로 비정(比定)해야 할 것인가?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로서 한반도 북부의 지역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구태여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일단 최치원(신라말기 발해국 존속 기간 중)은 발해국의 중심지역에 대하여 태백산 북쪽 지방이라고 했다. [상게서, p. 151.] 이 “태백산”은 오늘날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이[상게서, p. 151.] 아니라, 천산(天山)이라고 본다.왜냐하면,《산해경》에 언급된 사실을 보자.
<大荒北經 3>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대황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국이 있다.]
<海外西經 21> 肅愼之國 再白民北. [숙신국은 백민국의 북쪽에 있다.]
여기서, 숙신씨국=숙신국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이 불함산이 있는 곳에 숙신(肅愼)이 있다. 이 불함산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不咸山: 卽吉林長白山.”[p. 100]
“長白山: 在奉天長白縣北, 古名不咸山.”[p. 550.]
여기서, 불함산이 곧 장백산이니, 우리로 보아서는, 그것이 곧 백두산이요, 태백산이다.
그런데, 이 두 사실은 한 가지 지명을 지리적 위치가 전혀 다른 이름, 즉, 길림성(吉林省)과 봉천성(奉天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불함산(=장백산)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치 한반도 북쪽에 장백산이 있는 것처럼 꾸며진 것이고, 현재는 그렇게들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은 歷史 속에서 서로 모순이 된다.
그것이 동일지역의 장백산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길림성=봉천성이며, 봉천성=료녕성이다. 그러면 길림성=봉천성=료녕성의 해괴한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결국 동의이명(同意異名)일 따름이며, 그 중심지는 天子 내지 皇帝가 계셨다는 뜻의 흥경(興京), 승덕(承德), 성경(盛京)과도 같으며, 수원주(綏遠州)니, 귀화성토묵특(歸化城土黙特)이니, 발해발리주(渤海勃利州)와도 [p.1045.]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불함산은 동경 110도 중심의 선상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렇게 옮기면, 그곳은 바로 음산산맥(陰山山脈)이므로, 이 음산이 장백산이요, 백두산이요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고 조선사에서는 불함산이 대황중심(大荒中心)인 천산(天山), 곤륜산(崑崙山)이며, 파미르[茐嶺]고원지대였다. 이것이 시대를 지나면서 歷史의 이동에 따라 장백산, 즉 음산산맥으로 이동(移動)이 되었으며, 바로 이곳에, 발해가 섰던 것이며,그 뒤를 이어서, 료(遼), 금(金), 원(元)이 북방의 지역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해외서경(海外西經)에 있다는 숙신국은 모두 22개국 가운데 21번째이니, 서북쪽에서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또, 헌원국(軒轅國)도 있었던 지역인데, 이 헌원국은 대황서경(大荒西經)에 나오며, 여기에 대황산(大荒山), 곤륜구(崑崙邱)가 있는 곳이다.
즉, 해외서경과 대황서경에는 동일한 이름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장부국(丈夫國), 여자국(女子國), 녀추시(女丑尸), 헌원국(軒轅國), 일비국(一臂國: 一臂民), 장경국(長脛國: 長股國) 등 6개나 되어, 상당한 지역이 거의 동일한 범위로 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발해는 본디 숙신이라는 여부(與否) 등을 확인해 보면서, 이곳을 차지했던 그 근거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 보자.
(1) 渤海者肅愼之苗裔也 … 更稱靺鞨. … 震國公舍利乞乞中象 姓大氏 本粟末靺鞨. [維翰 黃申甫,『渤海國記』1929-1933; 國學資料院, 1996), p. 9]
(2) 震國公 姓大氏 名乞乞中象 粟末靺鞨人也. 粟末靺鞨者 臣於高句麗者也. [得恭 柳惠風,『渤海考』(송기호 옮김, 홍익출판사, 2000), p. 11]
(3) 五代史 黑水靺鞨本號勿吉 當後魏時見中國 其國東至海南界高麗, 西接突厥, 北隣室韋 蓋肅愼氏之地也. [『滿洲源流考』(乾隆43 1778; 홍익재, 1993), p. 147 ]
위 사료에서 확연히 나타나듯이, 발해=숙신=말갈=물길임을 알 수 있고, 그 범위가 서쪽으로 돌굴(突厥)에 붙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돌궐이란 곧 거란(契丹: 키탄, 키타이)이다. 이 키타이는 곧,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부족이다.
바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그 키타이의 동쪽에 숙신국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발해의 뿌리 민족인 숙신국은 본디 그 터전이 곤륜구(곤륜산)의 끝부분이라고 보며, 그곳은, 추하(楚河: 垂河 Chu R.)와 이시크호(Issyk L.: 伊塞克湖), 이리하(Ili R.: 伊犁河)와 발하수호(Balkhash L.: 巴爾哈什湖), 아무하(Amu Darya: 阿母河) 및 시르하(Syr Darya: 錫爾河)와 아랄해(Aral Sea)가 있는 중앙아시아의 넓디 넓은 지역이 된다.
부족의 변천과정을 보면,
읍루> 숙신> 물길> 말갈> 발해> 료(거란)> 금(女眞)> 원(몽고) 등으로 이어지며, 이들은, 동경 80도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동경110도 중심으로 이동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 북쪽의 만주(신만주), 지금은 동북삼성 지역이라는 곳은 그렇게 편재(編載)되었을 뿐이지, 만주라든가, 그와 관련된 歷史와는 하등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다.
산해경에 언급된 발해의 위치를 파악코자 지리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중국지명대사전에,
“不咸山: 卽吉林長白山.”[p. 100]
“長白山: 在奉天長白縣北, 古名不咸山.”[p. 550.] 라고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을 다시 산해경의 <大荒北經 3>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대황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국이 있다.] 라고,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渤海者肅愼之苗裔也 … 更稱靺鞨. … 震國公舍利乞乞中象 姓大氏 本粟末靺鞨.
[維翰 黃申甫,『渤海國記』1929-1933; 國學資料院, 1996), 에서도구체적으로 대조영(大祚榮:크게 복되고 영화롭게 번성하리라는 뜻)이 창업해 세운 大氏의 姓과 그를 지칭한, 진국공(震國公)을 붙여 발해를 대진국이라고도 지칭된 것이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누구인가? 지난 2004년 3월 9일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해를 다루었다. 한달이 지나는 오늘 4월 6일의 <조선일보>에서도 발해를 다루었다. 과연 발해란 정체성은 무엇인가?
발해는 분명 속말말갈인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중국사의 일부인가? 발해는 분명,고구려인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다. 그렇다면 속말말갈인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구려/발해가 중국사란 말인가?
발해는 통일신라와 대륙조선땅의 북쪽/남쪽에 있었던 나라였다. 그 발해 땅에 금나라가 섰고, 료나라가 섰고, 청나라가 섰다.
모두 조선의 북방국가요, 제후국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조선의 중심은 산서성/섬서성/하남성 지역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강역이 넓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했다.
이 중심지역에는 그 뒤에 고려가 있었고, 그 뒤에 조선이 있었다. 그렇다면, 발해는 그 중심지가 호화호특이며, 그곳이 중경이 될 수밖에 없다. 상경/동경/남경/서경이라는 큰 고을들이 한반도 북쪽에 있었다면서 한반도 함경도 함흥에 남해부가 있었다는 말은 터무니 없다.
그래서, 고구려/발해가 중국사라고, 지금의 중국사람들이 우기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빼먹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중국사는 바로 조선사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국사는, 사마천이 지었다는 史記는 그 단어의 의미그대로 史記가 아닌 詐欺(?)인 것이다.
조선은 중국(中國: 中央朝廷國의 준말)과 사이(四夷)를 다스린 중국대륙을 통치했던 나라였다.
한(漢)나라는 중국의 한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한나라였고, 당(唐)나라는 중국의 당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당나라였고, 명(明)나라는 중국의 명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명나라였다. 그러므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할 수도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와 역사를 존재하였다고 억지를 부리는 그 자체가 바로 사기(詐欺)이며, 날조(捺造)인 것이다.
<날조[捏造: 도장찍을 날/지을 조][명사]: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밈>
다시 말해서,
발해=숙신=말갈=물길(본래의 호칭)의 등식이 성립됨을 명확하고, 확연하게 기술(記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3)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五代史 黑水靺鞨本號勿吉 當後魏時見中國 其國東至海南界高麗, 西接突厥, 北隣室韋 蓋肅愼氏之地也.[『滿洲源流考』(乾隆43 1778; 홍익재, 1993), p. 147 ], 그 범위가 서쪽으로 돌궐(突厥)에 붙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新唐書 발해篆에는,
발해국가가 그 초기에, 옛날 읍루(말갈-녀진족의 조상)의 땅인 동모산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은 영주(오늘의 조양)의 동쪽 2천리에 해당하는 곳이며, 그 때 발해국의 영역(領域)은 이미 남쪽으로는, 니하(尼河)를 경계로 하고, 신라와 접하였으며, 동쪽은 바다,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고 하였다.” [상게서(上揭書), p. 150.] 라고,
사마천의 사기 25사 중, 신당서(新唐書)의 발해篆에서 언급된 내용조차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역사의 발해사는 두리뭉실하게 뭉게져 있으며, 너무도 간략하게만 기술되어 이런 왜곡.날조된 역사서를 보고서 발해의 위치와 역사적 근거의 실체들을 부정하고자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도 없으며, 그들의 입에 회자되는 역사라는 단어조차도 가치적 측면에서는 사치(奢侈)라고 규정짓고 싶다.
자, 그럼 여기서,
사마천이 지었다는 신당서에 기술된 위치는 “신라와 접하였으며, 동쪽은 바다,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라는 내용과,
청나라 건륭43년 1778년에 지었다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五代史 黑水靺鞨本號勿吉 當後魏時見中國 其國東至海南界高麗, 西接突厥, 北隣室韋 蓋肅愼氏之地也. [『滿洲源流考』(乾隆43 1778) ]라고 기술하였는 바,
위에 언급된 중국(中國)이라는 용어가 1770년대에도 중국(국가의 명칭이 아님)이라는 국가명(?)이 언급되었는데, 과연, 1770년대에 중국이 국가(나라)를 칭하는 용어였다면, 청나라(1636∼1912)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루인가?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우리 시조는 신라인"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또한,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청나라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중국과 청나라와 관계좌표를 설명하다보니, 본 내용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관련되는 자료까지 언급되어 내용이 많이 길어졌다...
그렇다면, 중국은 또, 무슨이유로 언급된 것일까? 계속해서, (當後魏時見中國)라고 기술하였는데, (當後)마땅히 뒤에는 (魏時見中國) 위나라 때에 중국이 나타나니, 여기서 위(魏)라고 하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221년~589년]에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 368년 동안의 魏晉의 시대를 일컫는 것인데, (위나라를 구분하면,北魏:後魏·元魏 / 東魏, 西魏로 구분) 위(魏)나라는 왜 나오는 것이며, 위나라가 존재했던, 이 당시에도 과연 중국이라는 국가명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는지?...!!!
게다가, 계속하여 언급되는 내용이 (其國東至海南界高麗) 그 나라(中國)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해남(海南)이 고려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해남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도무지 무슨 말을 뜻하는 것인지?......!!!
지금 CHINA [지나(支那)]의 지도상 광동성 아래에 있는 해남성(海南省)을 뜻하는 것인지? 그러면, 중국의 동쪽 끝에는 고려와의 경계인 해남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또 무슨 내용인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중국의 동쪽끝이 고려(918~1392)와의 경계이며, 그 경계선상에 위치한 국가가 고려이라면, 발해(698~926)년의 위치를 설명하는 청나라 건륭43년 1778년에 지었다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발해의 위치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위치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 중국의 동쪽 끝 해남의 경계선상에 고려가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그렇다면, 고려의 강역은 도대체 어디까지였는지~...?!!!
이와같이 어떤 역사적 사료를 추적하여 비교검토를 하다보면, 뒷받침할만한 추가적인 역사자료와의 접목부분에서 언급되는 부분의 연관성이 상당한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역사적 실체와 진실과 연결되는 부분에 대한 전면적인 날조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될 수 밖에 없는 모순과 불일치가 묘사되는 해괴한 현상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역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의미가, 원초적 불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나만의 착시현상일까?
일본(倭)놈들은 대조선의 해체와 필수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대규모 역사왜곡작업의 예정된 시나리오들을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치밀하게 수립하여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그들 내부적으로는 조선총독부와 조선통감부가 그 핵심요체가 되어, 메이시유신의 신교육을 받은 각 분야의 수 많은 엘리트들을 동원하여한반도의 대한제국에 대조선을 이식시키는 大役事(?)작업의 불을 당기는데, 가장 중요한 사적지와 유적지등 조선역대왕들의 부분적인 이식과 지리적 위치와 특성등이 부합되게끔, 대규모 토목공사를 80년 가까이 진행을 해 왔으며, 그 음흉한 전말들의 본격적인 실행들은 경술치욕(庚戌恥辱:1910년)싯점부터 조선사편수회, 조선어학회, 한글학회 일진회 등등의 친일어용단체들을 조직하여 총동원시켜 대대적인 역사.문화, 종교.철학.사상, 예술 등 사회전분야에 걸쳐서 왜곡.개조.식민지화작업의 가속패달을 힘차게 가동하게 되는 국면에 접어드는데,그 구체적인 사항의 전말의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씌어진 각 분야의 서적들을 모아 각색 및 도색된 전집 명들은 朝鮮群書大系라는 분류로서아래와 같은 저서들이 1911~16년에 간행되었으며, 속집·속속집·별집등이 줄줄이사탕(?)으로 출간되고 있었다. 이미, 대조선국이 도륙되어 해체가 된 마당인데 말이다...
조.일병탄[경술치욕] 바로 직후부터 활기차게 한반도식민지화라는 대역사의 대열에 거침없이(?) 동참을 한다. 조국을 생각한다는 각 분야의 식자들과 위정자들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차원에서 민족의 역사정신을 발현해내고~ 고취시키기 위한~ 살신성인의 대역사(大役事)였었더라면, 더 바랄나위조차 없었건만~~~......!!!
朝鮮群書大系라는 각 책마다 시제자손(示諸子孫)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보존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자들이 읽고, 그 좋은 뜻을 알기 바란다는 음흉스러운 친절함까지 배려(?)하여 당부하는 글도 있다.
1911년에는 〈용비어천가〉·〈발해고〉, 〈북여요선 北輿要選〉·〈북색기략 北塞記略〉, 한재렴(韓在濂)의 〈고려고도징 高麗古都徵〉,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을 간행했다.
1912년에는 〈동국통감〉 상·하,
1913년에는 유성룡의 〈징비록〉,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유성룡의 〈해동명신록〉,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김성일의 〈해양록 海樣錄〉,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 海遊錄〉, 경섬(慶暹)의 〈해양록〉, 오윤겸의 〈동양상록 東樣上錄〉, 이경루(李景樓)의 〈부상록 扶桑錄〉, 강홍황(姜弘皇)의 〈동양록〉, 임광(任)의 〈병자일본일기〉, 김세렴(金世濂)의 〈해양록〉, 황상(黃床)의 〈동양록〉, 조동(趙同)의 〈동양록〉, 김지남(金指南)의 〈동양일록〉, 조엄(趙)의 〈해양일기〉, 그리고 〈동문선〉을 간행했다.
1915년에는 김창업의 〈가재연행록 稼齋燕行錄〉,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익의 〈성호사설〉, 이수광의 〈지봉유설〉, 윤정기(尹廷琦)의 〈동고록 東錄〉이 나왔고,
1916년에는 정몽주·이색·길재의 〈삼은집 三隱集〉을 간행했다.
또 1915년에서 다음해까지는 별집으로 이황의 〈퇴계집〉, 정도전의 〈삼봉집〉,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 欽定滿洲源流考〉가 나왔다.
왜곡.날조된 사료들을 들추어 내어 사마천의 사기 25사와 조선왕조 500년 통사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비들의 분야별 저서들,그리고, 이러한 사료들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언급되는 野史 및 외국인의 시각에서 기록한 방문기 내지는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십 수년간에 걸친 체류를 통한 견문기(見聞記)등에서 그들의 눈에 비쳐진 보았고 들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묘사되는 내용들을 일삭일첨(一削一添)의 가감(加減)없이 풀어내는 그 속에는~ 결코, 결단코 한반도에는 뭉그러진 대조선의 머리카락 한 올 조차도 없었음을~~~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태양을 향해서도 민족의 슬픔을 알기도 하는 양, 한 줄기 희미한 빛줄기를 토해내는 이지러진 저 달을 향해 나는 또렷이 말 할 수 있다......
역사의 진실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와 반도식민사관이라는 더러운 손바닥으로는 결코 가리워질 수 없다는 추상(秋霜)과 같은 역사의 올곧은 몸부림을~~~
자연은 스스로 시공의 운행묘법 따라 자연스레 순응하건만, 싯점과 공간의 구분도 버거운 육(肉)의 空殼만 뒤집어쓴 갸냘픈 사슴들이여! 너의 그 본디 순하고 순한 본성도 버거워, 뜨거운 심장조차 내동이쳐 버린~ 싸늘한 그림자의 주인은 누구일진저...!!! 그대들[반도식민사관주의자들]은 정녕코 미몽(迷夢)속을 헤메는~ 호접몽자(蝴蝶夢者)이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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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천하의 중심에 있다 !
《산해경》은 가장 오래된 력사의 하나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력사학이니, 지리학이니, 등등의 망라된 가치있는 문헌이라면서, 대개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신화'로 다루어왔다.
그러나 그《산해경》에서 의미하는 지리적 구도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서경호 박사의 학위논문에서 언급되었지만, 바깥에서부터 "대황경·해외경·해내경·해내경(중)"으로 풀고 있다.
물론 그 중심지가 어딘지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 속의 "조선"이란 이름도 지리적으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산해경》의 서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서술의 차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더구나 요즘 새로이 번역했다는 리중재씨의《완역판 산해경》(아세아문화사, 2000)마저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우선 그《산해경》의 서술구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 서술 차례가 "오장산경(五藏山經)"에 이어 "해외경(동남서북), 해내경(동남서북), 대황경(동남서북), 해내경"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천하(天下)를 해(海)라고 하면,
그 천하의 가장 바깥지역이 "해외경"에 서술된 내용의 지역이며, 그 안쪽이 "해내경", 그 안쪽이 "대황경", 가장 안쪽에 있는 지역, 즉 중국에 해당되는 곳이 "해내경(별권)"의 내용의 지역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장 중앙에 있는, 즉 중국에 해당되는 위치가 "해내경"에 해당되는 내용들인데, 여기에 맨 처음에 "조선"이 있다고 한 말이다.
이것은 곧 천하의 중심에 조선이 있다는 것이며, "중국"이라는 지리적 중앙 위치에 '조선"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해내북경"에도 "조선"이 있다고 했으며, 거기에 "불함산·숙신"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중앙적 위치에서 북쪽으로 먼 지역까지 조선의 터전이었다는 말이며, "해외경"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외경"에는 우리들이 통상 "오랑캐"라는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천자가 직접 통치하지 않는 지역에 해당된다.
"해내경"에는 천자가 제후들을 두어 통치하는 지역이며, 천자들의 무덤을 쓰는 곳이다.
"대황경"에는 천자와 그 가족들의 활동 지역이며, 이곳은 특히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이라고 했다.
특히 이 "대황경"에는 "곤륜허"라는 말이 많다. 그 중심지가 곤륜산맥, 파미르고원이라는 말이다.
"해"는 "천자/황제"를 의미하므로, 황태자/왕자들의 출생지임을 뜻한다. 그리고 "해내경(별권)"은 그야말로 "천자/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신주(神州)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산해경》속에서 의미하는 지리적 위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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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환인이 대승불교의 시작
일연 스님이 쓴《삼국유사》에 이런 글이 있다.
(1)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熊.[《三國遺事》卷1 古朝鮮]
이것은 고조선의 시작의 이야기인데, 환인(桓因)이 "제석환인(帝釋桓因)"임을 말하였다. 이는 단군 임금의 아버지이며, 그 출신지역을 말하기도 한다.
桓은 devanam이며, 因은 因陀羅Indra이며, 帝釋은 帝釋天이며, 이것은 곧 샤카라Sakara이므로, 제석환인은 샤카라 데바나민Sakara devanamin이다.[리중재,《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아세아미디어, 2001), p.51]
이 사실로써 제석환인의 지리적 위치를 알 수 없다. 물론 불교적인 내음은 진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의 설명을 위해서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즉 중앙아시아에 있는 "아무하(阿木河)"가《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만, 다른 글자로 "阿姆河"인데, 그 말이 무엇이며, 왜 그곳에 붙여졌는가? 혹시 불교와 관련이 없을까? 더 설명을 하기 전에 다음의 강을 알아보자.
(2) Jaxartes(약살테스)> 약살수(藥殺水) > 시르 다르여(Syr Dar'ya: 錫爾河)
이 (2)의 강은 천산산맥 파미르고원에서 서쪽으로 흘러서 아랄해로 들어가는 아무하의 북쪽의 강이다. 물론 그 상류는 압록강이며, 하류는 시라무렌(Sira Muren)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파베트로 "Jaxartes"는 한자로 "藥殺水"의 음차인데, "藥殺"은 무엇인가? 이것은 "약살류리광여래(藥薩琉璃光如來)=약사불(藥師佛)"이며,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를 말한다. 그만큼 그 강의 역할이 그곳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이익되게 한다는 말이다.
이 강이름은 그만큼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남쪽에 있는 "아무하(阿木河: 阿姆河)"는 당연히 "아미타불(阿彌陀佛)=무량수불(無量壽佛)"이며,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부처를 말한다. Amu=Ami임을 알 수 있다.
역시 불교와 관련이 있다. 어떤 불교일까?
(3) Sacae > Saka > Sakya > Sakara
(4) 塞·索·釋·釋迦
위의 (3)(4)는 결국 같은 표기의 다른 글자이다. 위의 (3) 사카 지역은 B.C. 8세기에 북위 40도 동경 70도 중심의 ±10도 범위에 있는 지역이다. 이것은 뒷날 B.C. 2세기에는 사카스타나(Sacastana)라 하여 북위 30도 동경 66도 중심의 지역으로 이동되며, 기원후 2·3세기에는 사카왕조가 북위 25도 동경 70도 중심 지역에 서게 된다.
이들은 결국 본디 아랄해에서 발하슈호·이식크호 사이에 있는 사카 지역이며, 여기에서 남남동쪽으로 옮겨왔고, 불교와 관련이 있으며, 불교의 시원지이고 그 터전이었다. 바로 이 지역은 특히 간다라 미술이 융성했던 지역이며, 월지국(月支國: 月氏國)이 있는 지역이다.
바로 이 월지국에 아무하가 있다. 그 월지국은 마한(馬韓) 54국의 하나이기도 하다.
(5) 월지국: 漢나라 때 흉노에 의해 말했는데, 월지국의 신하가 서쪽으로 아무하로 달아나 大夏를 건국하고, 도읍지를 河北에 정하여 大月支라고 하였다. 月支國이 있었던 고향을 소월지(小月支)라고 한다. 이 대월지가 강성했을 때 인도 항하유역까지 강역이었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p.157]
월지국의 강역의 범위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만하다. 바로 이 월지국이 있었던 지역이 불교국의 터전이었다. 그 지리적 범위가 얼마이든.
지금은 사카왕조가 있었다는 인더스 강의 중류·하류이었다고 하지만, 본디 이 뿌리는 그 북쪽의 사카Sacae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경 70도 ±10도의 범위의 모든 지역이 불교의 터전이었으며, 그곳에 간다라 미술문화가 융성했던 터였다. 대월지국이 있었던 곳이며 제3세 단군 가륵(嘉勒)이 강거(康居)반란을 평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돈황이 불교의 시원지가 될 수 없다. 불교의 발상지는 사카Sacae에서 비롯하여 약살수(藥薩水·藥殺水: Jaxartes)·아무하(阿木河·阿姆河: Amu dar'ya)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Sacae는 Scythai의 Scy와 같으며, 흑해·카스피해 북쪽 아리안(Aryans) 지역인 볼가강 유역(북위 50도 동경45도) 중심지역이다. 이 때의 백두산(白頭山: 雪山)은 코카서서(Caucasus: Kavkas) 산이며, 제석환인의 발상지역이기도 하다.
이것이 고대 조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자.
(6) 우리 환이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어느 신이 시베리아 땅에 있었으며, 홀로 된 신이 밝은 빛으로 우주를 비추었다. …어느 날 동남동녀 800명을 흑수·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吾桓建國最古, 有一神在斯白力之天 爲貊化之神 光明照宇宙. …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桓檀古記》<三聖紀全>上篇]
이 (6)은 1911년 계연수가 기록한《삼성기전》첫머리에 나온 것인데, 한국(桓國)이 시베리아(Sibir: 斯白力)에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내려온 곳이 흑수(黑水)·백산(白山)이라 했다. 그 지명이 함께 있는 곳은 바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서서 산이다. 이를 두고 흑수를 흑룡강 또는 바이칼이니, 백산을 백두산이니 하면서 한반도와 그 북쪽의 곳을 들먹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 하나의 지역에 두 이름이 있고, 불교의 발상지, 즉 대승불교의 발상지가 있는 지역이라면 당연히 흑해와 코카서스 산이 있는 그 지역이다.
이것은 그 동안에 위서(僞書)라는 낙인이 찍혀 력사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시아가 고대조선의 터전"이었다는 사관에 들어오면 활력을 얻게 된다. 더구나 불교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한반도에서는 서로 섞여서 무엇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고 그 시작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대승불교는 북방의 스키타이·사카 지역에서 시작한 것으로 아예 제석환인부터이며, 소승불교는 남방의 인도에서 있었던 고타마 싯달타부터이다. 전자는 매우 오래 되었고, 후자는 그보다 매우 늦은 시기였다.
고대조선이 차츰 동쪽으로 이동해온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다. 그리고 그 땅에서 부여·고구려·발해가 있었고, 그 남쪽으로 삼한도, 백제·신라가 있었으며, 그 신라는 나중에 천산산맥 동쪽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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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발이 기자를 찾아간 까닭은?
세계의 력사를 리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장에 조선의 력사를 리해하기에도 사실은 버겁게 느껴진다. 도대체 조선의 력사는 있으되, 그 글과 지리적 강역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대륙조선사 연구회에서 사실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여러가지 주제들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들임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력사적 사실들이 아시아를 덮고 있다.
언젠가《서경》이 고대 조선의 력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 책 제4편 주서(周書) 제6장 홍범(洪範)을 보자.
(1) 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 王乃言曰 嗚呼箕子, 惟天陰 下民, 相協厥君 我不知其彛倫攸敍.
[13년째 되는 해에 무왕이 기자를 찾아갔다. 무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오, 기자님이여! 하늘은 몰래 백성들의 운명을 정하여 놓고, 그들의 삶을 도우시나, 나는 그 떳떳한 일정한 윤리가 베풀어지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周나라 무왕이 임금이 된지 13년째에 기자를 찾아갔다. 그러면 기자가 동쪽으로 이동해왔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를 인정한다면, 무왕이 기자가 있는 한반도로 찾아왔다는 말인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따져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위의 책 그 앞장에는 "태서상(泰誓上)"이 있다. 그 내용을 보아야 한다.
(2) 맹진(孟津)에 우방(友邦)의 몽군( 君: 大君=諸侯)들이 함께 모여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 수(受)를 치겠다고 훈시[誓]를 했다.
무왕은 바로 13년째 되는 해의 봄에 하나라 폭군이라는 주왕을 치겠다고 여러 제후들을 모아놓고 맹진에서 훈시하였다.
바로 이런 시기가 막 지난 때이면 일단 여름과 그 이후에 무왕이 기자를 만났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1)에서 설명을 이어가면, 무왕이 기자를 찾아갔다는 위치가 어디이겠는가?
당연히 한반도일 수가 없으므로, 상(商)나라[뒷날에 殷으로 고침]의 서울 박( )이나 그 근처의 고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왕이나 기자가 멀지 않는 지리적 위치에서 왕래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무왕이 기자를 찾아갔던 것은 바로 하나라 주왕을 치고 나서이며, 그래도 민심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정치자문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기자는 어떻게 하면 성공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9가지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천하 대륙의 황제라면, 작은 제후가 되는 사람에게 와서 정치자문을 구할 성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것은 기자가 오히려 더 큰, 더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기자는 오히려 상왕(上王) 내지 천자의 자리에 있었고, 무왕은 기자를 받들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주조(周朝)인 것이다. 그래서 력사에서는 주(周)를 "대조명(代朝名)", 즉 조정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周라는 것은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며, 그 조정의 이름이 "주조(周朝)"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나라의 서울 박( )은 곧 바그다드(Baghdad)를 음역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박"도 "동박·서박·북박·몽박·경박"이 있고, "박주·박현"이 있고, "박주"가 있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바그다드"를 나타낸 말로 보아야 한다.
이런 위치에 있는 력사적 설명이라야 고려때에 유행했던 쌍화점(霜花店: 雙花店)의 노래가 리해될 수 있다.
(3) 쌍화점에 쌍화사라 사고신댄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가니]
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페르시아(色目) 사람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삼에 이 店밧긔 나명들명 [이 가게 밖에 나며들며 하면]
… [… ]
긔 자리예 나도 자라가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 ]
긔 잔대 가티 덤ㅅ거츠니 업다. [그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이 고려가요 쌍화점의 가사 속에 "回回"가 있고, "回回"는 이슬람국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페르시아 지역이다. 그곳 사나이가 한반도에 왔겠는가? 물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내용이 음란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고려 땅의 예쁜 아가씨의 손목을 유혹하며 덥석 잡았던 사람이 한반도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하필이면 그 아가씨가 왜 回回 사나이에게 손목을 잡혔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이것은 반드시 조선의 고대 지리적 위치가 서-아시아에서부터 동-아시아에까지 걸쳐 있는 방대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한다면 더더욱 쉽게 리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기자조선의 뒤에 여러 나라를 거쳐 고려·조선으로 이어진 나라의 터전이 아시아 자체였다는 사실에서 周의 무왕(武王) 발(發)이 그곳에 있던 상왕 아니 황제였던 기자(箕子)를 찾아가 정치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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