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충숙공 이상길(忠肅公 李尙吉, (1556 년~ 1637년))은 충강공 이상급(忠剛公 李尙伋)의 형으로 묘소는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충숙근린공원] 내 《벽진이씨충숙공묘역》에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관련 자료를 옮기고, 《한국고전번역원》《송자대전(宋子大全)》卷一百五十九(159권)에서《工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를 옮겼다.《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충숙공 이상길의 문집인 《동천집(東川集), 1911년》을 열람할 수 있다.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개관◇
조선 인조때 좌의정을 지낸 이상길의 신도비로서 현종 2년(1661년)에 건립되었다.공은 명종 11년(1556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30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인조 15년(1637년)병자호란시 청나라 군대의 침입에 항거하여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82세에 순절한 충신으로 효종 8년(1657년)에 충숙공으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묘비의 공식명칭이 충숙이공신도비이다. 충숙공신도비는 당대 명문인 성균관좨주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해석문◇
/성광동
충신(忠臣) 증의정부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시충숙(諡忠肅)이공신도비명(李公神道碑銘) 병서(竝序).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우찬성 겸성균관좨주(議政府右賛成兼成均館祭酒)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성균관좨주(議政府左參賛兼成均館祭酒)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동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藝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한다.
정축년 강화의 변란에 마치 하늘에 빛나는 해와 달처럼 죽음으로써 절의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람은 고(故) 김문충공(金文忠公, 仙源 金尙容), 이충숙공(李忠肅公), 심도정(沈都正), 이태상(李太常:李時稷), 송태복(宋大僕) 등 몇몇 분이었다. 충숙공(忠肅公)은 당시에 명예직에 있으며 도성 밖 십리쯤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사태가 매우 다급하여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제들은 “주상께서는 안전하시고 아버지께서는 분사(分司)에 계시며, 또 현직에서 물러나셨으니 이곳에서 부질없이 돌아가신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청하였다.
공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곳에 종묘와 사직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는가.”라 하시고는 집안일을 정리하신 후 마침내 강화성으로 달려가 종묘와 사직에서 통곡하시고 여러 공과 함께 순절하시니 이 날이 정월 이십육일 이었다.
대저 모든 일이 잘못되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절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공은 살 수 있는 길이 있었고 아울러 반드시 죽어야할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죽고 사는 데에 용감하여 앞일을 생각하고 뒷일을 걱정함이 없었으니 옛사람에게 비추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뛰어난 분이 아니겠는가!
인조대왕께서 교서를 내려 표창하시고 정려와 시호를 내렸으며 좌의정에 추증하시었다. 온 나라의 선비들은 도성에 사당를 건립하고 문충공 등과 함께 향사하였다. 이제 모든 군신과 부자들이 충의를 숭상하고 구차히 목숨을 위하여 비겁하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은 알게 된 것이 누구의 공인가? 대개 이 몇몇 군자들은 하늘이 만백성을 위하여 내신 분으로 더 이상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되자 죽음으로써 후세의 백성들의 마음을 바로잡았으니 그 또한 위대하도다.
공의 이름은 상길(尙吉)이고 자는 사우(士祐)이니 성주(星州)사람이다. 고조부 소원(紹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증조부 유번(有蕃)은 전옥서참봉을 지냈다. 조부인 석명(碩明)은 군수를 지냈고 부친 희선(喜善)은 동몽교관을 지냈는데, 증조인 참봉공 모든 분이 공으로 말미암아 추증되는 은혜를 받았다.
선조인 총언(悤言)은 고려의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장군으로서 성주에 개호하여 대대로 성주 사람이 되었다. 오대조 약동(約東)은 명망이 높았고 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어머니는 창원 정씨(昌原丁氏)인데 도사 환(煥)의 딸로서 가정(嘉靖) 병진년 십이월 삼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뜻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었으며 서른살에 이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규례에 따라 여러 관청의 직장(直長)에 임명되었고, 사헌부감찰, 호조 · 병조 · 예조의 좌랑, 사복시주부를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의 정언을 두 번 지냈고 지제교와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또 호조좌랑을 지내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는데 이때가 만력(萬曆) 신묘년이었다.
이에 앞서 정여립(鄭汝立)이 모역하여 그 일족을 멸하였는데 이때 여러 가지 유언비어로 인해 옥사가 최영경(崔永慶)에게 미치게 되었고 당시에 공은 정언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의논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최영경(崔永慶)이 옥사하자 그의 도당이 이를 빌미로 모든 사람을 모함하여 곤경에 빠뜨렸고 이 때문에 공은 더욱 심하게 배척당한 것이다.
임진년 선조대왕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 당시에 중국으로 들어가 복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논이 일어나자 예조정랑으로 재직하고 있던 공은 주상에게 나아가 잘못된 계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함경도로 들어가 수복을 도모하자고 청하였다. 이때 중전은 이미 함경도로 출발한 뒤였다. 주상은 특별히 공에게 호위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 의정부에서 공이 관동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니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삼아서 군량을 징발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어 공의 부친인 교관공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에 적병이 곳곳에 가득 했지만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급히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교관공의 시신은 금화(金化)에 안치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이미 남쪽으로 떠난 뒤였다. 공은 시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슬피 울었다. 이듬해 돌아가 장사지내고 전라도 남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상(喪)을 입었다. 삼년상을 마친 후 병조정랑으로서 익산군수가 되었다.
공은 성심으로 봉직하니 전후에 부임한 관찰사들이 모두 그 실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공은 특지에 따라 예빈시부정에 승진되었으며 군수의 직무는 그대로 계속하게 하였다. 정유년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공은 군의 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싸웠다. 당시에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규율이 무너져 병사와 장수들 사이에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공의 부대에는 한명도 도망치는 병사가 없었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은 공에게 탄복하며 자신도 미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공을 전주부윤으로 삼아서 남쪽지방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주상의 대답을 받지 못하였다. 얼마 후 광주목사로 옮겨가게 되었고 치적이 가장 높아 통정대부에 올랐다.
임인년 정인홍(鄭仁弘)이 최영경(崔永慶)의 일을 들춰내어 우계(牛溪:成渾)선생 이하 모두를 모함하니 공은 임소에서 바로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귀양가 있는 육년 동안 공은 한 번도 불만을 얼굴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면을 받은 후 회양부사에 기용되었지만 부임한지 일 년 만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당시에 이미 오십의 나이였지만 상례를 거행함에 더욱 삼가하였다.
후에 안주목사와 호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인홍(仁弘)이 다시 그의 도당을 시켜 공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니 이때부터 공은 동대문밖 노원에 물러나 살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또한 재상에서 파직되어 교외에 물러나 있었는데 공과 왕래하며 형제처럼 어울렸다.
당시에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워져 흉측한 무리들의 세력도 높아만 갔다. 어떤 이가 공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이롭다는 말로서 공의 마음을 슬며시 흔들어 보았다. 공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의 영욕은 다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인력으로 바꿀 수가 없다. 내가 차라리 굶어 죽을 지언정 차마 나의 지조를 버리고 더러운 무리에 영합할 수는 없다.”
정사년 하지사(夏至使)로서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공은 일행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감히 재물을 탐하지 못하게 하니 중국인이 모두 칭송하였다. 무오년에 요동(遼東)과 계주(薊州)가 건주(建州)의 오랑캐에 의하여 점령되자 명나라의 신하인 모문룡(毛文龍)은 요동의 백성을 이끌고 우리나라의 가도(椵島)로 들어왔다. 공은 왕명을 받들어 식량을 운송하여 그들을 구제하였다.
그때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서궁에 유폐되었다. 공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분승지로서 수직할 때면 언제나 비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항상 교대한 후에는 곧바로 노원으로 돌아와 오직 농사에 힘쓰고 자제를 훈계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았다. 광해군이 특별해 용천부사에 공을 임명하였다. 부가 있는 용만(龍灣)은 모문룡(毛文龍)의 병영과 매우 가까이 인접해해 있었다. 어느 날 건주의 오랑캐가 성을 곧바로 공격하였는데 사실은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은 새로 부임하여 방비를 제대로 갖출 틈이 없었으며 한밤중 창졸간에 당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공은 곧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정에 알리는 한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병사 오백 명을 모아서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아울러 별장들로 하여금 인산(麟山)에 매복하게 하여 돌아가는 적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적이 황토령으로부터 철수하자 공은 징을 치면서 그들의 후미를 공격하여 그들이 버리고 간 우마와 장비를 모두 노획하였다. 모문룡(毛文龍)장군은 공에게 글을 보내 칭송하였다.
공은 당시에 정사를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공을 부모처럼 받들고 사랑하였다. 적의 장수가 성에 들어와서 공을 찾아내지 못하자 군사와 백성을 잡아 목에다 칼을 들이대며 공이 있는 곳을 물었지만 서로 모른다고 잡아떼며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공은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이듬해 체직되어 돌아가자 용천부의 농민과 학도와 무사들이 각각 송덕비를 세웠다. 당시에 인륜이 땅에 떨어지게 되니 공은 서울에 머물 마음이 없어 마침내 남원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계해년 인조가 즉위하자 즉시 승지와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대궐로 달려가 보니 공이 오래전부터 모문룡(毛文龍)과 사이가 좋다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모문룡(毛文龍)의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모문룡(毛文龍)은 처음에 바른 임금이 반정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을 만나자 모든 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모문룡(毛文龍)은 즉시 사실대로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였다. 주상께서 완벽한 중국의 책봉을 받게 된 데는 공의 힘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 공은 지중추부사로서 돌아오게 되었는데 특별히 공조판서를 겸직하게 하고 갖옷과 비단을 내려 표창하였다. 관서에 관찰사의 자리가 비게 되자 관서의 임무를 맡는 데는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공을 관찰사에 임명하고 조정으로 돌아와 숙배하는 예를 생략하도록 명하였다.
갑자년에 부원수 이괄(李适)이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을 향하여 들어왔다. 당시에 공은 철산에 있었는데 즉시 수하의 병교를 이끌고 추격하는 한편 여러 읍의 수령들에게 각각 휘하의 부대를 인솔하여 합세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격문을 지어 바르고 그름의 도리로서 적병을 효유하니 적의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원수 장만(張晩)은 공에게 더 이상 진군하지 말고 본도에 머물러 인심을 진정시키라고 권하였지만 공은 듣지 않고 말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황주에 당도하니 적의 세력은 더욱 불어나고 관군은 곳곳에서 패주하였다. 공은 장차 죽음으로써 결전할 것을 눈물을 뿌리며 군사들에게 맹세하였다.
때마침 본도로 돌아가라는 왕명이 내리자 공은 부득이 군사를 원수에게 맡기고 평양으로 돌아와서는 평안도 내에 남아있던 적의 권속을 처형하였다.
얼마 후 사태가 매우 급박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은 참모들을 모아놓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다만 한 번 죽어서 상하의 절개를 세우는 일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毛)장군의 십만 군사가 우리 땅에 있으니 진나라 조정에서 통곡한 신포서(申包胥)와 같이 구원을 청하여 다행히 모문룡(毛文龍)의 승낙을 받게 된다면 괴수를 잡이 그 목을 벨 수 있으며 불공대천의 원수로 갚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부하가 없자 공은 개연히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으로 달려갔다. 순안에 이르렀을 때 모든 적이 토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돌아왔다. 이 공로로 공은 가의대부에 올랐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주상께서 친히 불러 보시고 위로하였다.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공에게 관찰사의 임무를 맡기려 하였지만 공은 늙고 병든 몸이라고 사양하니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임명하였다.
그때 갑자기 모문룡(毛文龍)의 병력이 움직이려 한다는 변방의 보고가 들어오자 주상은 공에게 그곳의 사정을 살펴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공은 명을 받자 즉시 떠났는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공이 당도하자 모(毛)장군은 매우 환대하며 진심으로 이야기하니 모든 의심이 마침내 풀어지게 되었다.
정묘년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동쪽을 침범하자 주상이 강화도로 몽진하였다. 주상은 특별히 공을 서울에 남아있도록 하여 행재소인 강화도로 식량을 운송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창졸지간에 명을 받아 동분서주하며 온 힘을 다하였다. 당시에 적이 나타났다는 오보가 자주 있었지만 공은 의연히 배에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떤 낭관이 관곡으로 배를 사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후에 매우 심하게 추궁을 당하자 그는 공이 그 일을 알린 것이라 생각하고는 깊은 앙심을 뼈에 새겼다. 그의 권세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공은 벼슬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을 굽히고 화해하려 하지 않았다. 오랑캐의 사신이 강화도에 이르자 주상은 굴욕적인 맹약을 주장하는 그들의 요구에 따르려고 하였다. 공은 운검으로 입시하였다가 물러나 자제들에게 “오늘 주상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욕을 당하시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화의가 성립되자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을 오가며 여러 가지 의혹을 풀게 하니 주상이 진심을 다하여 주선한 것을 칭찬하시고 마필을 내려 위로하였다. 공은 예조참판에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전주부윤에 제수되었다. 이는 공이 스스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중앙에서는 다만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뿐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정말 백성을 위하여 일해 보고자 청한 것이다. 공은 정사를 하면서 늙었다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어사는 칭찬하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얼마 후 어떤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후에 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지냈다. 두 번 대사간에 되었으며 한성부의 좌우윤을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자 공은 임금의 알아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였다. 공은 양사에 있을 때 잘못을 들어 논박함에 권세가 높은 사람이더라도 회피하지 않았으며 또한 절친한 사이라 하여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니 공론이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을해년 공이 여든 살에 이르자 조정 신하들의 청에 따라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중전이 돌아가셨다. 공은 재궁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장례에 소용되는 기물에 잘못이 생기자 아전이 문책을 당했고 이 때문에 공도 파직되었다.
병자년 오랑캐의 기병이 졸지에 침입하자 공은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다. 주상의 행차는 서울의 남대문을 나와 강화도로 가다가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공이 강화도에 들어온 지 사십일 만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공은 종묘와 사직에서 물러나와 빈 창고로 들어가 허리띠로 목을 매었으며 적이 뒤따라 활을 쏘았다. 장남 경(坰)은 그때 나루에서 파수를 보고 있다가 시신을 찾아 돌아왔다. 이해 사월 양주 불암산 서쪽 기슭에 있는 선영에 장사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판관 개윤(愷胤)의 딸이다. 모두 삼남을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일찍이 죽었다. 경(坰)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참판이 되었다.
측실의 소생으로는 감(堪)과 □ (缺字는 계(垍)이다.)
가 있는데 감(堪)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딸은 생원인 이안방(李安邦)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의 소생으로는 직장인 지원(志遠)과 진사인 지손(志遜)이 있으며 정(正)인 신□(申□ 缺字는 양(湸)이다. 신양)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參判生志遠。直長。志遜進士。女適正申湸。 여기서 正은 조선시대 관청(예빈시, 군기시, 제용감, 종부시 등)의 정3품 당하관 관직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약간 있다.
공은 천성이 관대하였으며 뜻은 강직하였다. 남에게는 너그러웠지만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였다. 젊은 시절에 빈한하여 마음껏 봉양하지 못하자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하였다. 그러나 복록이 부모에게 미치지 못하니 공은 그것을 언제나 통한으로 여겼다. 따라서 동기간에 베풀리라 생각하고는 동생인 참지 상급(尙及)과 함께 기거를 같이 하여 한 번도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참지공이 현달하게 되자 곁에 집을 짓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만났다.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정말 어진이가 있으면 모두 천거하여 성취시켰으며 가난한 자가 있으면 도와주면서도 모자란 듯이 하였다. 때문에 모든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오십년을 조정에 있었지만 조그마한 흠도 없는 청백한 절개를 끝내 지켰다. 공은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매양 떠들썩하게 술자리가 벌어지면 반드시 머뭇거리며 피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에 당해서는 이해를 따지지 않았다. 폐조 광해군 때에 사람들을 무력으로 겁박하고 복록으로 유혹하니 비록 스스로 꼿꼿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모조리 무릎을 꿇었지만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평소의 지조를 능히 지켰다. 이런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위하여 순절할 수 있었겠는가!
모문룡에게 사신 가서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것으로 공을 평가한다면 공을 모르는 사람이다.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자 비록 벼슬에 몸 둔 선비라 하여도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명나라 천자의 신하라 하여 시종일관 변치않고 성신으로 대하니 모문룡(毛文龍)도 또한 공경하고 감복하여 매년 용천을 지날 때 공의 송덕비가 보이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곤 하였다. 공의 중국을 흠모하는 마음은 이렇듯 그 바탕이 깊은 것이었다.
따라서 공이 창졸지간에 순절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강개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아! 더욱더 숭상할 만하다. 나는 일찍부터 공의 지우를 받았으며 순전한 공의 덕을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병자년 여름 오랑캐가 참람하게 스스로를 천자라고 부르니 조정에서 대의를 지켜 배척하고 절교하였다. 오랑캐의 사자들은 황급히 돌아가게 되었고 온 나라가 술렁이며 불안하였다.
그때 내가 강도에서 공을 만났는데 공이 탄식하며 “내가 늙고 또 관직이 없으니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나라가 위급하게 되면 신하로서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성 밖에서 머뭇거리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공이 왕실을 생각하는 간절한 충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공의 묘비문을 지어 달라는 분수에 넘치는 부탁을 참판공에게 받았다. 아! 도리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제 대략 그 전말을 서술할 뿐 감히 한 마디도 덧붙이지 못한 것은 공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위대하다. 충숙공이여, 순후한 성품 호방한 기품에 그 소신 굳세도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솜으로 강철을 싼다더니, 공을 두고 한 말일세. 선조대왕 피난할 때, 미관말직 있던 공은 비분하고 강개하여, 주상 뵙고 간한 말씀 나라 버리고 복속함이 장구지책 아니며, 이 백성 이 군사를 돌보고 키워서, 우리 강토 찾으소서. 광해군이 어미를 유폐하자, 공은 서궁에 수직(守直)하며 여러 번 눈물을 뿌렸네. 서쪽 변방 일 생기어 용만(龍灣: 의주)이 다급해지니, 공이 맡아 지켰네. 모문룡(毛文龍)이 의탁하니, 순치같은 형세되고 적등에 창을 겨눈 듯, 적군이 습격하여 방비 못한 우릴 치니, 황망한 저 군사들 백성은 공을 위해 죽고, 공은 계략을 내어 도망하는 적을 추격했네. 성주가 등극하시어, 평안관찰사를 맡기시니, 어진 정사 널리 퍼지네. 역적이 일어남에 충성을 다하였지만, 패하기도 하였네. 주상께서 위로하여 참판을 삼으시니, 총애가 남달랐네. 정묘년 봄에는 심한 국치 당하자, 피눈물을 닦았으며 모문룡(毛文龍)이 의심하자, 공이 가서 정성으로 풀어주었네. 크나 큰 임금 은혜 갚고자 애쓰시니, 나라는 안정되었네. 양사의 장관되어 권귀(權貴)를 꺼리지 않고 기강을 세웠으며, 드디어 높이 올라 공조판서 되었지만, 많은 노고에도 댓가가 없었네. 병자,정축 큰 난리에 종사는 서쪽으로 철옹성이라 하였지만, 잘못된 계책에 일조에 무너지니, 양처럼 내몰렸네. 공은 도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사직에 통곡하니, 그 소리 하늘에 사무쳤네. 드디어 몸을 버려 살신성인 이루시고, 천성을 지키셨네. 해같이 빛나고 눈처럼 맑으니 고금에 누가 더하랴? 나라에선 정려 내리고 백성들은 사당 세우니, 그 표창 빛나도다. 세상이 공으로써 밝게 되고 나라가 공으로써 서게 되니, 그 이름 빛나지 않으리오. 후손은 비석을 마련하고 나는 글을 지어 공의 행적 길이 전하노라.
숭정(崇禎) 병자 후(後) 26년 신축 칠월 일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판독문◇
/성광동
李尙吉神道碑銘
忠臣贈議政府左議政 有明朝鮮國資憲大夫工曹判書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諡忠肅 李公神道碑銘并序
崇祿大夫議政府右賛成兼成均館祭酒 宋時烈 撰
正憲大夫議政府左參賛兼成均館祭酒 宋浚吉 書
嘉善大夫吏曹參判兼藝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金壽恒 篆
工曹判書李公神道碑銘
江都丁丑之變 其死義著白 可與日月爭光者 故金文忠公 李忠肅公 沈都正 李太常 宋大僕若而人也 忠肅公時以散班 寓在城外十里地 聞事急 子弟請曰 大朝安全 父於分司 且無職守 徒死於此何益 公不可曰 廟社在此 去將安之 遂處置家事旣已 則遂馳走入城 哭於廟社 與諸公皆死 是正月二十六日也 夫使理窮勢㞃 事已無奈何 而定計於鮮者 猶爲難矣 況公有可生之路而無必死之義 然且勇於捨取 無所顧慮之心 尤豈非卓卓然無愧古者乎仁祖大王下敎褒嘉 旌閭易名 贈官左議政 京外章甫 立祠於城中 與文忠諸公腏享焉 今使有君臣父子之倫者 知忠義之可尙而偸懦之可耻者 而誰之功哉 盖是數君子者 天爲生之而生 不能扶一世 故死而能礪百世之人 其亦偉矣哉 公諱尙吉 字士祐星州人 高祖紹元 文科刑曹佐郎 曾祖有蕃 典獄署參奉 祖碩明 郡守 考喜善 童蒙敎官 自參奉以下 以公推恩 皆有贈職 上祖忩言 佐麗祖有功 以將軍開號於星 世遂爲星人 五代祖約東 有大名 官知樞諡平靖 妣昌原丁氏 都事煥女 以嘉靖丙辰十二月三日生公 公厲志爲學 年弱冠選上舍 三十 中第第二名 例拜諸司直長 歷司憲府監察 戶兵刑三曹佐郎 司僕寺主簿 再爲司諫院正言 兼知製敎春秋館記事官 又由戶曹佐郎 黜爲高山道察訪 則是萬曆辛卯也 先時鄭汝立謀逆族夷 以飛語獄事延及崔永慶 公以正言 同僚議啓請鞫治 竟致瘐死 其黨以是爲機阱以擠陷一番人 以故公坐斥尤甚 壬辰 宣廟西幸 有內附之議 公以禮曹正郎 請對力言其非計 請移蹕北關 以圖興復 於是中殿先向北路 上特命公從衛 己而廟議以公熟諳關東形便使從其觀察使事 以調兵糧 俄聞敎官公遇賊被害 時賊兵充斥 公舍命奔喪 則敎官公寓殯金化地 而大夫人己向南鄕矣 公晝夜號擗 不離殯側 翌年歸葬 奉大夫人守制于全羅之南原 服除 以兵曹正郎 爲益山郡守 公盡心奉職 前後奉使者 皆擧實狀于朝 有旨陞叙 爲禮賓寺副正 仍守郡職如故 丁酉 倭奴再逞 公領郡兵 從戰南原時搶攘之中 兵將不相維係 而公所部終無一人逃散者 天將劉綎歎服以爲難 及體察使李公德馨請移公尹全州 以奠南服不服 未幾竟移牧光州 以治行第一 陞通政 壬寅 鄭仁弘追論永慶事 自牛溪先生以下 皆被誣罔 公自任所編配豊川 公在謫六年 無幾微見乎色 旣蒙宥 叙爲准陽府使 厪一期遭內艱 公時年已五十 而執喪彌謹 後爲安州牧使 戶曹參議仁弘又使其徒彈去之 公自是退處于國東門之外蘆原 白沙李公恒福亦罷相郊居 公杖屨相從 懽然若塤箎也 時光海政亂凶徒勢張 或有以利害微撼公者 公顰蹙曰 人之榮悴 自由分定 難容人力 吾寧枯死 不忍捨所守以合汚也 丁巳 充賀至使朝京 公嚴束一行 使不敢耽貨 華人稱之 戊午 遼薊爲建奴所破 王人毛文龍 率遼民居我境之椵島 公承命轉粟以濟之 仁穆王后時幽閉在西宮矣 公自西歸 以分承旨常直守 不勝悲憤隱痛 常掩泣不能已 每遞直則直歸蘆原 唯以力田訓子爲事 光海特以公爲龍川府使 府在龍灣上 與毛營聲勢相接 建奴一日直擣府城 意在毛營矣 公新到無備 又當夜倉氏 籍慶州 判官愷胤之女 凡三男 其二夭 坰登第爲參判 側出堪垍 堪生員 女適生員李安邦 參判生志遠 直長 志遜進士 女適正申湸 內外曾玄摠若干人 公天性寬和而內實剛介 待物甚恕而持己則嚴 少時貪無以養 遂勤學以立揚 則祿不逮親矣 公常痛恨之 思有以施于同氣 與弟參知尙伋 同居共爨 未嘗分異 參知公旣顯 則爲築室于傍 朝夕相對宗族雖疎遠 苟顯則沒引成就之 其貧者則撫血如不及 故所在親族 皮家歸焉 立朝五十年 淸白一節 終始無玷 不喜紛華 每遇酒塲喧譁處 則必逡巡引避 當事不擇利害爲趍捨計 當廢朝時 威武以驅之 爵祿以誘之 雖自謂矯矯者無不失脚而公不懾不莛 能保其素守 不如是 安能終就此大節哉 㝡其王人之羈旅者 末也 頗爲西氓疾 雖薦紳之士 無不應且憎 而公以爲天子吏也 以誠以信 終始不渝 故王人亦相敬服 每過龍川 見公碑版 必下馬焉 公之萬折必東之心 盖自平素而然矣 然則倉卒殉節非出於一朝之慷慨者明矣 鳴呼尤可尙也 余早蒙公知獎 仰服醇德久矣 丙子夏 虜人僭帝 朝廷舉義斥絶 虜使遁還 中外洶懼 余拜公於江舍 公歎曰 吾老且無官 非不知遠去 而時事至此 臣子有見危授命之義矣 以故徘徊郊坰而不忍去也 余又竊歎公睠戀王室之忠也 今者參判公猥託以墓碑之文 嗚呼 余義不敢辭 略叙顚末而不敢以一言贅者 公自不朽故也 銘曰 猗歟忠肅 質醇氣庬 其執則剛 古人有言 以絮裏鐵 公是宜當 宣祖播遷 公時眇然 感憤慨慷 求對敭言 捐國內附 此䇠非長 宜撫我民 宜募我兵 以復我疆 廢朝讐母 公直西宮 屢泚其眶 西方有事 龍灣最棘 公任保障 王人寄我 勢成唇齒 虜背如芒 潜師來襲 乘我不戒 軍士劻勷 民爲公死 公授以略 以追其亡 聖主改玉 公伯于西 仁風扇敭 逆竪披猖 我奮其忠 或顚或僵 上眷其拳 處以亞卿 寵異尋常 丁卯之春 國有深耻 抆血以裳 王人疑怒 公往敷誠 孤脫其張 乃紆隆恩 曰有奔奏 晉錫之康 屢長兩司 不憚權貴 挈持維綱 遂躋正卿 以領起部 勞猶未償 丙丁大艱 宗社西遷 人謂金湯 人謀不臧 一朝淪陷 衆驅如羊 公入自外 哭于廟社 聲徹穹蒼 遂捐其軀 義就仁成 天賦不爽 皎爲日星 潔爲霜雪 在古誰亢 聖朝旌閭 邦人立祠 巨扁煌煌 世敎以明 大防以賴 不顯其光 後承伐石 我作銘章 昭示茫茫 崇禎 丙子後二十六年 辛丑 月 日 卒 乃草啓報知于朝 募得死士五百人 爲死戰計 且令別將設伏麟山 以要歸路 會賊從黃土嶺撤還 公鳴金追躡 盡得其所棄牛馬器機 毛將遺帖稱賀 公時爲政未久 而府人愛戴 賊將初至 求公不得 則執軍民 拔劍擬頸脇 問公所在 而相與抵諱 終始不言 不然則危矣 翌年遞歸 府之農民學徒武士 各立石以頌之 時彜倫斁塞 公不樂於京輦 遂歸南原 爲終老計 癸亥 仁祖卽位 卽拜承旨 兵曹參議 旣赴闕則朝議以公舊得毛將懽 特加嘉善階 差毛儐 毛將始未知眞主反正及見公 群疑洞釋 毛將亟以實狀 馳奏天朝 聖上封典之完 實有賴焉 公始以知樞來 有旨攝工曹判書 因賜貂綵以褒之關西缺方伯 廷議以爲西任無出公右者 遂仍以授之 命除朝辭 甲子 副元帥李适與巡邊使韓明璉叛 直向京城 公時在鐵山 卽率手下兵校追躡之 且令諸邑守宰各率所部來會 又草檄諭賊以逆順 賊衆氣沮逃散者甚多 元帥張晚勸公母前 且留本道以鎭人心 公不聽 策馬先驅 至廣州則賊勢益張 官軍所在奔敗 公灑泣誓衆 將決死一戰 會有旨令還本道 公不得已以兵屬元帥 退還平壤 戮殺賊孥之在界內者 俄有東來說甚惡 公會僚屬曰 吾儕今日只有一死 以樹臣節而已 然毛將將十萬師在我境 若效秦庭之哭 幸而見哀 則賊首可梟 大讐可雪 不成而死未晚也 參佐莫有應者 公遂慨然馳赴毛營 到順安聞三賊就滅 遂止 以勞進嘉義 秩滿還朝 上賜對勞問 廷議欲仍授前任 公辭以老病 乃貳度支兼摠管 忽有邊報毛兵將動 上使公往察其情形 公聞命郎行 了無怖色 旣至 毛將懽迎款語 危疑遂定 丁卯 建奴東搶 上幸江都 特留公船粟于行在 公倉卒受命 奔走竭力 時虛警數起 而公堅坐不動 有一郎官捐官米買船逃去 後被重究 意公發其事 御之次骨 而其人甚有權力 故公坐枳仕道 然公未嘗爲和解取容之計 虜使至行在 上勉副要盟 公以雲劍入侍 退謂其子曰 今日主辱至此 生不如死 因涕泣如雨 事定 復往毛營 以銷疑阻之端 上嘉其盡心周旋 又賜廐馬慰寵之 由禮曹參判求外尹全州 盖公自以受國厚恩 在內只隨行逐隊而已 故欲自效於吏事也 公爲治 不以衰老而小倦 御史褒啓 未幾 因事罷遞 叙拜中樞 參貳禮兵曹 再爲大司諫 歷漢城左右尹 爲大司憲 公感激知遇 在兩司舉劾 不避權貴 亦不饒所親 公議倚以爲重 乙亥 公年滿八十 用筵臣請 陞秩資憲 拜工曹判書 參耆英會 冬中殿上賓 公陪進梓宮 匠事有次闕 對吏因罷遞 丙子 虜騎卒至 公陪廟社主 先往江都 大駕自京城南門 回蹕入南漢城 公至江都 凡四十日而城破 公退自廟社入空廠 以袴緊自縊 賊又從後射之 長男坰時把守津口 尋尸以歸 以其年四月 葬于楊州佛巖西麓之先兆 夫人李籍慶州。判官愷胤之女。凡三男。其二夭。坰登第爲參判。側出堪,垍。堪生員。女適生員李安邦。參判生志遠。直長。志遜進士。女適正申湸。內外曾玄摠若干人。公天性寬和而內實剛介。待物甚恕而持己則嚴。少時貧無以養。遂勤學以立揚。則祿不逮親矣。公常痛恨之。思有以施于同氣。與弟參知尙伋。同居共爨。未嘗分異。參知公旣顯。則爲築室于傍。朝夕相對。宗族雖疏遠。苟賢則汲引成就之。其貧者則撫恤如不及。故所在親族。皆家歸焉。立朝五十年。淸白一節。終始無玷。不喜紛華。每遇酒場喧譁處。則必逡巡引避。當事不擇利害爲趨捨計。當廢朝時。威武以驅之。爵祿以誘之。雖自謂矯矯者。無不失脚。而公不懾不荏。能保其素守。不如是。安能終就此大節哉。最其王人之羈旅者。末也頗爲西氓疾。雖薦紳之士。無不應且憎。而公以爲 天子吏也。以誠以信。終始不渝。故王人亦相敬服。每過龍川。見公碑版。必下馬焉。公之萬折必東之心。蓋自平素而然矣。然則倉卒殉節。非出於一朝之慷慨者明矣。嗚呼。尤可尙也。余早蒙公知奬。仰服醇德久矣。丙子夏。虜人僭帝。朝廷擧義斥絶。虜使遁還。中外洶懼。余拜公於江舍。公歎曰。吾老且無官。非不知遠去。而時事至此。臣子有見危授命之義矣。以故徘徊郊坰而不忍去也。余又竊歎公眷戀王室之忠也。今者參判公猥託以墓碑之文。嗚呼。余義不敢辭。略敍顚末而不敢以一言贅者。公自不朽故也。銘曰。
猗歟忠肅。質醇氣厖。其執則剛。古人有言。以絮裹鐵。公是宜當。 宣祖播遷。公時眇然。感憤慨慷。求對敭言。捐國內附。此算非長。宜撫我民。宜募我兵。以復我疆。廢朝讎 母。公直西宮。屢泚其眶。西方有事。龍灣最棘。公任保障。王人寄我。勢成唇齒。虜背如芒。潛師來襲。乘我不戒。軍士劻勷。民爲公死。公授以略。以追其亡。 聖主改玉。公伯于西。仁風扇敭。逆豎披猖。我奮其忠。或顚或僵。 上眷其拳。處以亞卿。寵異尋常。丁卯之春。國有深恥。抆血以裳。王人疑怒。公往敷誠。弧脫其張。乃紆 隆恩。曰有奔奏。晉錫之康。屢長兩司。不憚權貴。挈持維綱。遂躋正卿。以領起部。勞猶未償。丙丁大艱。 宗社西遷。人謂金湯。人謀不臧。一朝淪陷。衆驅如羊。公入自外。哭于 廟社。聲徹穹蒼。遂捐其軀。義就仁成。天賦不爽。皎爲日星。潔爲霜雪。在古誰亢。 聖朝旌閭。邦人立祠。巨扁煌煌。世敎以明。大防以賴。不顯其光。後承伐石。我作銘章。昭示茫茫。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문화유산연구원》자료를 보면 후반부 자료가 누락되어 있어《송자대전》자료를 첨부하였다. 파란색으로 구분한 부분이다.
崇禎丙子後二十六年 辛丑七月日 --- 《東川集, 1911년》에 나온다.
숭정(崇禎) 병자 후(後) 26년 신축 칠월 일
《東川集, 1911년》에 나오는 《충숙이공신도비명》
◇송자대전(宋子大全)◇
宋子大全卷一百五十九
碑
원문
《工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江都丁丑之變。其死義著白。可與日月爭光者。故金文忠公,李忠肅公,沈都正,李太常,宋太僕若而人也。忠肅公時以散班。寓在城外十里地。聞事急。子弟請曰。 大朝安全。父於分司。且無職守。徒死於此何益。公不可曰。 廟社在此。去將安之。遂處置家事旣已。則遂馳走入城。哭於 廟社。與諸公皆死。是正月二十六日也。夫使理窮勢㞃。事已無奈何。而定計於鮮者。猶爲難矣。況公有可生之路而無必死之義。然且勇於捨取。無所顧慮之心。尤豈非卓卓然無愧古人者乎。 仁祖大王下敎褒嘉。旌閭易名。 贈官左議政。京外章甫立祠於城中。與文忠諸公腏享焉。今使有君臣父子之倫者。知忠義之可尙而偸懦之可恥者。而誰之功哉。蓋是數君子者。天爲生之而生不能扶一世。故死而能礪百世之人。其亦偉矣哉。公諱尙吉。字士祐。星州人。高祖紹元。文科刑曹佐郞。曾祖有蕃。典獄署參奉。祖碩明。郡守。考喜善。童蒙敎官。自參奉以下。以公推恩。皆有 贈職。上祖忩言。佐麗祖有功。以將軍開號於星。世遂爲星人。五代祖約東。有大名。官知樞。諡平靖。妣昌原丁氏。都事煥女。以 嘉靖丙辰十二月三日生公。公厲志爲學。年弱冠。選上舍。三十。中第第二名。例拜諸司直長。歷司憲府監察,戶兵刑三曹佐郞,司僕寺主簿。再爲司諫院正言,兼知製 敎,春秋館記事官。又由戶曹佐郞。黜爲高山道察訪。則是 萬曆辛卯也。先時鄭汝立謀逆族夷。以飛語獄事延及崔永慶。公以正言。同僚議啓請鞫治。竟致瘐死。其黨以是爲機阱。以擠陷一番人。以故公坐斥尤甚。壬辰。 宣廟西幸。有內附之議。公以禮曹正郞。請對力言其非計。請移 蹕北關。以圖興復。於是 中殿先向北路。 上特命公從衛。已而廟議以公熟諳關東形便。使從其觀察使事。以調兵糧。俄聞敎官公遇賊被害。時賊兵充斥。公舍命奔喪。則敎官公寓殯金化地。而大夫人已向南鄕矣。公晝夜號擗。不離殯側。翌年歸葬。奉大夫人。守制于全羅之南原。服除。以兵曹正郞。爲益山郡守。公盡心奉職。前後奉使者。皆擧實狀于朝。有旨陞敍。爲禮賓寺副正。仍守郡職如故。丁酉。倭奴再逞。公領郡兵。從戰南原。時搶攘之中。兵將不相維係。而公所部終無一人逃散者。天將劉綎歎服以爲難及。體察使李公德馨請移公尹全州。以奠南服。不報。未幾竟移牧光州。以治行第一。陞通政。壬寅。鄭仁弘追論永慶事。自牛溪先生以下。皆被誣罔。公自任所。編配豐川。公在謫六年。無幾微見乎色。旣蒙宥敍。爲淮陽府使。廑一期。遭內艱。公時年已五十。而執喪彌謹。後爲安州牧使。戶曹參議仁弘又使其徒彈去之。公自是退處于國東門之外蘆原。白沙李公恒福亦罷相郊居。公杖屨相從。懽然若塤箎也。時光海政亂。凶徒勢張。或有以利害微撼公者。公顰蹙曰。人之榮悴。自有分定。難容人力。吾寧枯死。不忍捨所守以合汚也。丁巳。充賀至使朝京。公嚴束一行。使不敢耽貨。華人稱之。戊午。遼薊爲建奴所破。王人毛文龍。率遼民入居我境之椵島。公承命轉粟以濟之。 仁穆王后時幽閉在 西宮矣。公自西歸。以分承旨常直守。不勝悲憤隱痛。常掩泣不能已。每遞直。則直歸蘆原。唯以力田訓子爲事。光海特以公爲龍川府使。府在龍灣上。與毛營聲勢相接。建奴一日直擣府城。意在毛營矣。公新到無備。又當夜倉卒。乃草啓報知于朝。募得死士五百人。爲死戰計。且令別將設伏麟山。以要歸路。會賊從黃土嶺撤還。公鳴金追躡。盡得其所棄牛馬器機。毛將遺帖稱賀。公時爲政未久。而府人愛戴。賊將初至。求公不得。則執軍民。拔劍擬頸脅問公所在。而相與抵諱。終始不言。不然則危矣。翌年遞歸。府之農民學徒武士。各立石以頌之。時彝倫斁塞。公不樂於京輦。遂歸南原。爲終老計。癸亥。 仁祖卽位。卽拜承旨,兵曹參議。旣赴闕。則朝議以公舊得毛將懽。特加嘉善階。差毛儐。毛將始未知 眞主反正。及見公。群疑洞釋。毛將亟以實狀。馳奏 天朝。 聖上封典之完。實有賴焉。公始以知樞來。有 旨攝工曹判書。因賜貂綵以褒之。關西缺方伯。廷議以爲西任無出公右者。遂仍以授之。命除朝辭。甲子。副元帥李适與巡邊使韓明璉叛。直向京城。公時在鐵山。卽率手下兵校追躡之。且令諸邑守宰各率所部來會。又草檄諭賊以逆順。賊衆氣沮。逃散者甚多。元帥張晩勸公毋前。且留本道。以鎭人心。公不聽。策馬先驅至黃州。則賊勢益張。又官軍所在奔敗。公灑泣誓衆。將決死一戰。會有 旨令還本道。公不得已以兵屬元帥。退還平壤。戮殺賊孥之在界內者。俄有東來說甚惡。公會僚屬曰。吾儕今日只有一死。以樹臣節而已。然毛將將十萬師在我境。若效秦庭之哭。幸而見哀。則賊首可梟。大讎可雪。不成而死未晩也。參佐莫有應者。公遂慨然馳赴毛營。到順安聞三賊就滅。遂止。以勞進嘉義。秩滿還朝。 上賜對勞問。廷議欲仍授前任。公辭以老病。乃貳度支兼摠管。忽有邊報毛兵將動。 上使公往察其情形。公聞 命卽行。了無怖色。旣至。毛將懽迎款語。危疑遂定。丁卯。建奴東搶。 上幸江都。特留公船粟于行在。公倉卒受命。奔走竭力。時虛警數起。而公堅坐不動。有一郞官捐官米買船逃去。後被重究。意公發其事。銜之次骨。而其人甚有權力。故公坐枳仕道。然公未嘗爲和解取容之計。虜使至 行在。上勉副要盟。公以雲劍入侍。退謂其子曰。今日 主辱至此。生不如死。因涕泣如雨。事定。復往毛營。以銷疑阻之端。上嘉其盡心周旋。又賜廏馬慰寵之。由禮曹參判。求外尹全州。蓋公自以受國厚恩。在內只隨行逐隊而已。故欲自效於吏事也。公爲治。不以衰老而少倦。御史褒啓。未幾。因事罷遞。敍拜中樞。參貳禮兵曹。再爲大司諫。歷漢城左右尹。爲大司憲。公感激知遇。在兩司擧劾。不避權貴。亦不饒所親。公議倚以爲重。乙亥。公年滿八十。用筵臣請。陞秩資憲。拜工曹判書。參耆英會。冬。 中殿上賓。公陪進 梓宮。匠事有欠闕。對吏因罷遞。丙子。虜騎卒至。公陪 廟社主。先往江都。大駕自京城南門。回蹕入南漢城。公至江都。凡四十日而城破。公退自 廟社入空廠。以袴緊自縊。賊又從後射之。長男坰時把守津口。尋尸以歸。以其年四月。葬于楊州佛巖西麓之先兆。夫人李氏。籍慶州。判官愷胤之女。凡三男。其二夭。坰登第爲參判。側出堪,垍。堪生員。女適生員李安邦。參判生志遠。直長。志遜進士。女適正申湸。內外曾玄摠若干人。公天性寬和而內實剛介。待物甚恕而持己則嚴。少時貧無以養。遂勤學以立揚。則祿不逮親矣。公常痛恨之。思有以施于同氣。與弟參知尙伋。同居共爨。未嘗分異。參知公旣顯。則爲築室于傍。朝夕相對。宗族雖疏遠。苟賢則汲引成就之。其貧者則撫恤如不及。故所在親族。皆家歸焉。立朝五十年。淸白一節。終始無玷。不喜紛華。每遇酒場喧譁處。則必逡巡引避。當事不擇利害爲趨捨計。當廢朝時。威武以驅之。爵祿以誘之。雖自謂矯矯者。無不失脚。而公不懾不荏。能保其素守。不如是。安能終就此大節哉。最其王人之羈旅者。末也頗爲西氓疾。雖薦紳之士。無不應且憎。而公以爲 天子吏也。以誠以信。終始不渝。故王人亦相敬服。每過龍川。見公碑版。必下馬焉。公之萬折必東之心。蓋自平素而然矣。然則倉卒殉節。非出於一朝之慷慨者明矣。嗚呼。尤可尙也。余早蒙公知奬。仰服醇德久矣。丙子夏。虜人僭帝。朝廷擧義斥絶。虜使遁還。中外洶懼。余拜公於江舍。公歎曰。吾老且無官。非不知遠去。而時事至此。臣子有見危授命之義矣。以故徘徊郊坰而不忍去也。余又竊歎公眷戀王室之忠也。今者參判公猥託以墓碑之文。嗚呼。余義不敢辭。略敍顚末而不敢以一言贅者。公自不朽故也。銘曰。
猗歟忠肅。質醇氣厖。其執則剛。古人有言。以絮裹鐵。公是宜當。 宣祖播遷。公時眇然。感憤慨慷。求對敭言。捐國內附。此算非長。宜撫我民。宜募我兵。以復我疆。廢朝讎 母。公直西宮。屢泚其眶。西方有事。龍灣最棘。公任保障。王人寄我。勢成唇齒。虜背如芒。潛師來襲。乘我不戒。軍士劻勷。民爲公死。公授以略。以追其亡。 聖主改玉。公伯于西。仁風扇敭。逆豎披猖。我奮其忠。或顚或僵。 上眷其拳。處以亞卿。寵異尋常。丁卯之春。國有深恥。抆血以裳。王人疑怒。公往敷誠。弧脫其張。乃紆 隆恩。曰有奔奏。晉錫之康。屢長兩司。不憚權貴。挈持維綱。遂躋正卿。以領起部。勞猶未償。丙丁大艱。 宗社西遷。人謂金湯。人謀不臧。一朝淪陷。衆驅如羊。公入自外。哭于 廟社。聲徹穹蒼。遂捐其軀。義就仁成。天賦不爽。皎爲日星。潔爲霜雪。在古誰亢。 聖朝旌閭。邦人立祠。巨扁煌煌。世敎以明。大防以賴。不顯其光。後承伐石。我作銘章。昭示茫茫。
[주-D001] 箎 : 篪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