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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묵상글 ( 주님 만찬 성목요일. -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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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길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그분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가슴을 애달프게 하며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떠나기 전에 더 잘해 주려고 합니다. 저며 오는 아픔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하시며 평소보다 더 간절히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 행동이었습니다. 거창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당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발은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곳을 닦아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더러운 곳을 깨끗이 씻어주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주는 것, 닦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장 아픈 곳에 행동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서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그는 평생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 하느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정체를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이 깊어집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13,15).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으니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다 알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안 만큼만이라도 실천하면 복이 옵니다. 그리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았다면 아는 바를 미루지 말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신속,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허리를 굽혀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그 일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바닥으로 내려오심은 곧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행하는 봉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닦는 행위는 용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발뿐이 아니라 더 추악한 죄를 씻어주십니다. 발을 내밀기도 전에 먼저 물과 수건을 준비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하늘같은 스승이 제자들의 발치로 내려오셔서 용서와 자비,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계속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시고 성체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성체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몸소 내어주시는 사랑 덩어리입니다.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이 되어 우리를 풍요케 하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으로 영원한 천상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비롯하여 다른 성사와 더불어 은총의 전달을 위해 성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살가운 사랑의 전달을 위해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를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연장으로 삼아 일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능력이 더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와 더불어 성품성사가 제정된 날이기에 ‘사제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과연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권위만 내세우고 무작정 따라오라는 식의 아버지, 자기중심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열린 아버지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처럼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자녀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를 품고 끝까지 사랑하는 가슴이 넓은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혹시라도 사제의 부족함을 보거들랑 더 간절히 성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13,1)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먹는 제자 유다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품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모쪼록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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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끝이 없는 사랑
오늘 복음을 어제 미리 읽고 오늘 강론 주제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로 잡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사실 이 주제는 올해뿐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되는 주제인데
오늘 새벽 일어나자마자 탁 떠오른 생각이
‘치유될 때까지’, ‘회개할 때까지’ ‘구원받을 때까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늘 저의 기도에는 임종을 앞둔 분, 수술을 앞둔 분을 위한 기도도 있는데
어제는 어떤 분이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걱정하고 기도하다 잠이 들었기에 일어나자마자 그분 생각이 났던 겁니다.
그러면서 옛날 어떤 기업 광고 문구,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인지
‘고객이 오케이 할 때까지’인지 모르지만, 그 광고 문구가 생각나면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육신이 치유되고, 죄를 회개하고,
더 나아가 영혼이 구원받을 때까지 사랑하실 거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전 저의 강론에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주로 제자들이 배신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싫다고 떠나가도
아버지가 작은아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 사랑, 거기에 초점을 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올해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의 상태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회사의 노력이 기준이 아니라 고객의 감동이 기준인 것처럼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은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까지이고,
주님의 끝없는 사랑도 도망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참 제자가 될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초점을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
아니 저의 사랑이 자주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의 사랑이 무시될 때,
나의 사랑이 부담스럽다고 할 때,
더욱이 나의 사랑을 배신으로 응답하고, 흔히 얘기하듯 배은망덕할 때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포기할까, 그래서 그를 위한 기도를
이젠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드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래서는 안 되지’ 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그것이 실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가 더 큰 이유이니,
저의 사랑은 진정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함이 정직합니다.
사실 그에 대한 저의 사랑은 이미 정나미가 떨어졌거나
적어도 전보다 현저하게 식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저의 사랑에 비하여 주님의 사랑은 진정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우리가 구원받을 때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께 돌아와 당신 사랑에 머물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당신 사랑의 표시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시고,
이 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을 기억하고 당신 사랑에 머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는 강론을 올리지 않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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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 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전에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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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는 오늘부터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성삼일은 거룩한 삼일이라는 뜻입니다. 성 목요일은 ‘주님의 만찬미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깊이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우리들 또한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도록 다짐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도록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도록 다짐합니다. 성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경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반으로 잡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성 금요일에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려야 합니다. 성 토요일에는 ‘부활 성야 미사’가 있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부활을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파스카’는 성삼일의 정점입니다. 파스카는 ‘대신한다, 대속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 건너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세 가지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을 대신할 ‘양’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 양이 아들 이사악의 죽음을 대신한 속죄양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둘째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문설주는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셋째는 홍해바다이야기입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는 홍해바다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파라오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면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뒤로 가면 이집트의 군대에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홍해바다를 마른 땅으로 갈라 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안전하게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파스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와 산 이들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는 성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이 시대의 ‘파스카’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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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잘 아는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바라볼 것 같습니까? 엄청난 행운아라고 하면서 부러워할까요? 지금 내가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할까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하겠습니까? 그의 행운에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요?
로또 당첨은 814만 5,060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하지요. 불가능한 확률을 뚫고서 당첨된 것은 분명히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힘든 확률을 극복한 사람은 어떨까요? 더 엄청난 행운아가 분명합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그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남자가 가진 1억 개의 정자 중 단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게 됩니다. 즉, 우리 각자는 1억분의 1의 확률을 뚫고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로또 당첨보다도 어려운 확률을 극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부모가 만날 확률을 따져보면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날 확률까지 더해보면, 지금 우리의 존재는 거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기적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제가 주님의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주님의 큰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기적만이 계속 주어지는 삶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 삶의 기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과거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교회는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체성사를 이 땅에 새롭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도 미사 안에서 커다란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커다란 기적입니다. 혹시 배반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오히려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제자가 자기를 팔아넘기고, 가장 믿었던 제자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끝까지 따르겠다는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하던 이스라엘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적의 담긴 말을 외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최후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은총에 은총을 계속 더해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주님께 계속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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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빠져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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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축제(미사)의 생활화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겸손한 섬김의 사랑”
바야흐로 지금 주님 만찬 성목요일부터 파스카의 성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겨울 추위를 통과한 인동초같은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 부활을 경축하는 듯 합니다. 배밭의 배꽃들이 참 장관입니다. 계절의 순환이 전례주기와 정말 잘 맞는 우리나라같습니다. 예전 써놨던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주님을 믿는 우리는 꽃입니다. 주님 파스카의 꽃입니다. 그러니 꽃처럼 아름답고 품위있게 살아야 합니다. 요즘 절정을 이루는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이 참 예쁩니다. 해당화, 산당화가 특히 그러합니다. 이런 사진을 전송할 때 마다 다들 예쁘다고 감탄하면 저는 지체없이 덕담의 답글을 보냅니다.
“자매님은 더 예뻐요!”
사실입니다. 파스카의 꽃인 사람보다 더 예쁜 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꽃처럼 삽시다.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바로 이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답을 알려드립니다.
파스카 축제의 생활화, 일상화, 현재화가 답입니다.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겸손한 섬김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인 미사전례입니다. 오늘 지금 거행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전례가 파스카 축제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눈물나게 감동스런 사랑의 성체성사, 파스카 축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일년 한 번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냈지만 우리는 파스카 축제의 생활화, 일상화, 현재화를 위해 매일 파스카 축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구약의 파스카 축제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메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바로 파스카의 순례 여정중인 삶임을 자각하면서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지 말고 깨어 준비된 자세로 정성껏 미사축제를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날마다 미사 축제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이날은 일년중 한날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이날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의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꽃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는 신약의 파스카 축제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축제입니다. 다음 두 말마디는 늘 들어도 감동적이고 새롭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날마다를 집어 넣어 “날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로 바꿔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파스카 축제의 미사 전례 거행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망각이 영혼의 치명적 병입니다. '아남네시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한결같이 상기하여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축제의 현재화를 통해 종살이에서 자유인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으로 파스카 신비의 삶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전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상에서 겸손한 섬김의 사랑으로 실현될 때 파스카 축제의 완성입니다. 어제 영문주석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복음, 전례, 일상생활과 상호작용 사이의 이음매 없는 옷입니다.”
복음, 전례, 일상생활이 완전 하나된 이음매 없는 옷은 그대로 파스카가 생활화된, 일상화된, 현재화된 삶을 지칭합니다. 오늘 복음의 발씻김 예식이 바로 파스카 삶의 결정적 요소임을 자각하여 몸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유언적 장면이 주님께서 친히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입니다. 겸손한 섬김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복음 서두 말씀도 감동이고 마지막 유언적 행위와 더불어 유언이 감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죽음은 허무로 끝나는 마지막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다가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희망입니다. 지상에서 천상의 기쁨을, 파스카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후 다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이 거룩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유언입니다. 꼭 잊지 마시고 평생 날마다 미사봉헌때 마다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 겸손한 섬김의 사랑을 ‘선택’하고 ‘배워' '훈련’하고 ‘습관화’하라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입원하여 재활 훈련중인 고마웠던 분이 방문했을 때 드린 충고가 생각납니다.
“자매님도 재활 훈련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평생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영육의 재활 훈련을 잘 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한결같이 신망애(信望愛)의, 진선미(眞善美)의 재활 훈련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잘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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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만 서양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먼 길을 떠나는 자녀들이 머리 위에 부모가 손을 얹어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행위는 몇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축복입니다. 여정을 소화하면서 다치거나 사고가 없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 축복을 주시기를 간청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여정을 통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빌어주는 청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의미가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여정을 소화하며 지치고 힘들 때 내가 함께 있음을 기억하는 의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렸다.’라는 말씀은 바로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기쁨 속에도 함께 걸으시고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 걸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하시며, 죄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이마에는 이미 주님의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세례와 견진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는 주님과 하나로 생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걸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이들과 죄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에 기름 부음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여정 안에도 많은 어려움이 다가올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고, 두렵고, 지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름 부음 받은 모든 신앙인이 늘 주님의 축복 속에 함께 하루하루를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부페피-
짧지만 아주 강한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마음 한쪽에 주님을 모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이 사람, 다른 한쪽에는 여러 가지 세상 것을 쌓아 두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더욱 산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란한 마음은 우리 마음속 주님과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이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집중하세요.
그분의 고통에 집중하세요.
그분의 아픔에 집중하세요.
그럼 주님께서 우리 고통에 찾아오시고,
우리 아픔에 손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친구처럼 따뜻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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