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68)> 장욱진, 대중문화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인문학 연구강좌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12강은 10월 10일(화요일) 오후 2시-4시 장하윤 박사(이화여대)가 <장욱진, 대중문화>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장욱진은 삶과 작품이 하나 된 진정성의 작가로 평가한다. 아내와 함께 수강하는 이번 연구강좌는 앞으로 3번 더 이어져 11월 28일에 종강한다.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1917년 11월 26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에서 그 지역의 대지주 가문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시.서.화에 안목을 지니고 아들에게도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장욱진의 고모의 권유로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다. 장욱진이 7살 되던 해에 부친이 타계한 후에는 고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장욱진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에 열중하였으며, 3학년 때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전일본 소학생미전’에 출품하여 일등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 후 장욱진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학교)에 진학하여 미술반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역사교사에 항의한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당했다.
장욱진은 서양화가 공진형의 화실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공진형(1900-1988)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일제 강점기의 몇 안 되는 서양화가였다. 장욱진은 전염병인 성홍열(猩紅熱)을 앓아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6개월간 지내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고, 수덕사를 찾은 화가 나혜석과 만났으며, 나혜석이 장욱진의 그림에 칭찬을 했다고 한다.
장욱진 화가의 생애를 초기(1937-1949, 21세-33세) ‘향토적 주제’, 중기(1950-1974, 34세-58세) ‘이상적 세계’, 후기(1975-1990, 59세-74세) ‘종합, 자유, 도원’으로 나눌 수 있다. 장욱진의 작품에는 한정된 소재들이 평생을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나무, 집, 까지, 해와 달, 산과 같은 자연 그리고 아이, 여인, 가족 등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초기> 장욱진은 1936년 20세에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37년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에서 ‘공기놀이’ 작품으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공기놀이’는 그의 서울 내수동 집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가족의 시중을 들던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이때 받은 최고상과 100원의 상금을 계기로 장욱진은 집안의 반대를 받지 않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장욱진은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1939년 4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유학시절 그는 고향에 대한 소재와 주제를 많이 그렸다. 1941년에 결혼을 했으며, 슬하에 1男 4女가 있다. 1943년 학교 졸업 후 귀국했으며, 1945-1947년 국립박물관 진열과에 재직하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국립박물관에서 사직한 후 그는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하였다. ‘신사실파’는 조형적으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번안을 연구한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이다. 또한 그들은 당시의 이념적 대립이 극심하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에 열중하자는 취지를 지녔다. 장욱진은 1949년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독>, <마을>, <까치>, <원두막>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중기> 장욱진은 1950년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 시기의 그림은 화면의 색감은 선명해지고 형태도 더욱 간결하게 정돈되어 갔다. 작품의 내용도 이전 시기의 향토성을 뛰어넘어 이상적인 세계, 혹은 탈속적인 공간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평화롭고 서정적이다. 중기의 특징을 집약할 수 있는 것이 자전적 성향을 바탕으로 한 이상세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9월에 비교적 전쟁의 상흔이 덜한 고향 충남 연기군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서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회복하며 대표작 <자화상>을 제작한다. 그는 풍성한 황금들판, 공중의 새, 길의 강아지를 그렸으며, 작가는 논 사이의 길로 신사 정장을 한 채 팔자걸음을 하고 있다. 그는 이 그림에서 외롭지 않은 대자연 속의 고독을 이야기 하지만, 당시의 전쟁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은 아이러니이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지만, 재직 6년만인 1960년에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학교를 사직한 후 1962년에 경기도 덕소에 화실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장장 12년 동안 생활했다. 덕소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반추상의 형식과는 달리 대상과 재현이 완전히 사라진 추상작품을 1962-64년의 기간 동안 시도해보기도 했으나 왠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만두었다고 한다.
<후기> 1975년 5월 장욱진은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1970년대 그림이 여러 가지 세계관이 혼합되는 양상으로 변화되어 가며 표현방법도 화면의 질감이 약화되고 담채식의 느낌이 강조되는 수묵유화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후기의 대표적인 특징을 이루는 것이 종합적 이상세계의 표현이다.
1986년 그의 나이 70세 되던 봄에 마지막 거처를 정한 곳이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한 고택이었다. 장욱진 화백이 세상을 떠나는 1990년까지 용인에서 지낸 5년간은 평생에 걸쳐 제작된 720여 점의 작품 중에서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220여 점을 그린 가장 왕성한 창작의 시기였다. 1990년 12월 27일 별세 전까지 그는 그림을 그려도 판매하기보다는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대가 없이 주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에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있다.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서구식 미학 개념의 화가가 되기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간 소위 ‘유학 2세대’의 작가에 속한다. 이들은 이미 그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학 1세대’의 작가들이나, 일본인 미술 교사에게서 서구식의 회화개념, 기법, 미학 등을 배웠거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유학을 떠난 세대이다.
정하윤 박사는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와 한국 현대미술> 작가로 현존하는 이동기(1967년생), 송동현(1980년생), 최정화(1961년생) 등을 소개했다. 1990년대는 순수미술에 대중문화를 영입하는 경향이 증가했다. 이는 문화에 대한 정치적 개입 약화, TV 및 PC 보급률 증가 등의 영향이다.
이동기는 홍익대학 미술대학원 재학시절 아토마우스(아톰+미키마우스)를 탄생시켰다. 송동현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외국의 영화 캐릭터(배트맨, 슈렉 등)를 한국화시켰으며, 한국화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했다. 최정화는 홍익대학 졸업생으로 일상적이고 저렴한 상품을 활용하여 설치작업을 했으며, 미술뿐 아니라 영화 미술, 공간 디자인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사진> (1) 장욱진 사진과 자화상, (2) 장욱진 작품들.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2 October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