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1)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습니다(갈 5:22~23) -마경훈목사 - YouTube
저는 어릴 적에 북아현동에 살았습니다. 제가 살던 시민아파트는 높은 지역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자전거를 타고 굴래방다리 쪽으로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었습니다. 그 길은 경사가 심해서 제 능력으로 자전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 길을 계속 내려가면 큰 도로가 나옵니다. 저는 달리는 자동차와 부딪혀 죽게 생겼습니다. 내리막 길 중간에 공사를 위해서 쌓아둔 모래가 있었습니다. 저는 쌓여있는 모래에 몸을 던져서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천만 다행이지요. 이 사건의 원인은 브레이크 고장입니다. 브레이크만 튼튼했어도 제가 그런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는 생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는 [1955년형 벤츠]입니다. 금년에 무려 1812억 원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대단하지요. 저는 이 자동차의 주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비싼 자동차를 샀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써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자동차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브레이크가 고장 난 이 자동차로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고갯길을 내려간다고 가정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사고가 날 것입니다. 자동차는 박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운전자는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운전자는 사망이죠.
신앙생활에도 브레이크가 있습니다. 바로 절제입니다. 자동차에 있어서 브레이크가 생명인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는 절제가 생명입니다. 절제는 그만큼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그들과의 구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그들이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한 가지를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뱀을 통해서 여자에게 접근했습니다. 뱀은 선악과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봤습니다.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와는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했습니다. 절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절제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선악과를 주었습니다. 아담도 절제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운전자는 운전 중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는 밟아야 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는 절제하지 못해서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싶은 충동을 절제했다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절제했다면 땀을 흘리는 수고와 임신하는 고통을 격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절제했다면 사망의 종노릇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발생한 문제이며,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절제를 하지 못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아홉 번째는 절제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절제입니다.
박봉수 목사님이 재미있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박목사님은 돼지가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져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 먹는 것 절제하지 못해서 과체중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박목사님은 개미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과로로 쓰러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 과로로 쓰러지거나 심지어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박목사님은 원숭이가 알코올 중독에 걸려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갖가지 중독으로 치료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박목사님은 그 어떤 동물들도 살기 힘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는 절제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에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절제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 중에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이유는 다른 열매를 다 갖췄어도 절제의 열매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다른 열매들을 잘 맺는데 절제가 안 된다면 그가 맺는 다른 열매들은 빛을 잃게 됩니다.
연예인들 중에는 외모는 아름답고,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다방면에 뛰어난데 음주운전 때문에 방송에서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조건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기에 충분한데 아쉽게도 절제가 부족해서 방송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절제를 못해서 자신의 장점을 다 깎아먹은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고,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고, 희락이 충만해서 늘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잘 지내고, 성격도 착하고 온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성에 대한 절제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바람기가 발동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그가 맺었던 모든 성령의 열매가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맺은 성령의 열매들을 부정적으로 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랑했고, 충성했고, 밝게 행동했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행했던 모든 것들을 여자를 꼬시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볼 것입니다. 절제의 부족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인이 절제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 핵심만 짚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이 절제하는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 절제해야 할 것들
제가 2020년 3월 8일에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원하면 절제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가 절제해야 할 것 여덟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제해야 할 것이 여덟 가지만 되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절제해야 할 것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핵심적인 것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인격적인 요소입니다. 인격은 3요소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균형 잡힌 사람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감정이 지성의 통제를 받고, 지성은 의지의 통제를 받고, 의지는 영의 통제를 받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적당한 선에서 통제가 되어야 합니다. 過猶不及(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사자성어입니다. 감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제 아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 아내는 무슨 일을 하면 몰두하는 형입니다. 제가 볼 때는 지나치게 열심을 낼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제 아내는 오른손 엄지손가락 관절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경 필사 때문입니다. 한 번 마음먹으면 죽기 살기로 하는 성격이 성경 쓰기에서도 발휘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한 달 만에 써버렸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목표는 4개월 만에 신구약 전체를 필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보니 밤낮없이 성경을 쓰더군요. 제가 과유불급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않고 열심히, 정말 열심히 성경을 쓰다가 그만 손가락 관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적당한 절제가 필요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늘 실실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웃고 있으면 매너 없는 사람입니다. 과유불급입니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절제가 필요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은 절제를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인격을 갖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27개 정도입니다. 많은 감정 가운데 기쁨은 짧게 지속되는 반면 슬픔과 원망은 다른 감정보다 최고 240배 더 오래 갈 수 있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보다 무려 240배나 길게 간다니 놀랍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슬픔과 분노 미움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잘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따라 산다면 그는 하나님과도 멀어질 것입니다. 그는 변덕이 심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왕이었고 다윗은 사울의 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사울을 다윗에 대한 감정으로 공격했습니다. 악한 영들은 사울의 시기심과 질투심 그리고 분노 등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사울은 마땅히 감정을 절제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하나님의 뜻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결심하셨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사울은 감정의 기복 때문에 심한 변덕을 부리며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떤 때는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목회를 아주 잘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설교도 잘하고 교우들과 관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목사님께 반기를 들고 목사님을 자주 화나게 하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 집사는 회의를 할 때마다 목사님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마다 잘 참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의 중에 그 집사가 목사님의 감정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 목사님이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 집사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집사의 깐죽거림을 참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버렸습니다. 화가 난 목사님은 회의 중에 그 집사의 멱살을 잡고 업어치기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종료된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이긴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목사님이 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교인들은 등을 돌렸고, 그 목사님은 결국 목회를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행입니다.
약 1:20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사람이 성내는 것은 분노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감정이 통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감정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영성과 지성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하고 의지의 통제를 받아서 절제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慾求(욕구)를 절제해야 합니다.
欲求(욕구)는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한문으로는 慾求(욕구)가 아니라 欲求(욕구)입니다. 앞의 욕구는 ‘욕심慾(욕)’에 ‘구할求(구)’입니다. 뒤의 욕구는 ‘하고자 할 欲(욕)’에 ‘구할求(구)’입니다.
사람에게는 欲求(욕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욕구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먹고자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먹고자하는 욕구가 없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회 발전은 사람들 속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선 안에서의 바라고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영이 갖는 욕구는 인정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갖는 욕구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육신의 욕구는 다른 말로 육신의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육신의 욕구와 영의 욕구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롬 8:5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욕구가 그 사람이 육신을 따르는지 영을 따르는지 보여줍니다. 롬 8:6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 육신의 욕구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 영의 욕구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롬 8:7-8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 육신의 욕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의 욕구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고 굴복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헬라어로 σάρξ(사르크스 sarx)이며 ‘살, 육체’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flesh입니다. 사르크스는 성경에서 몇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영은 거듭난 영을 말하고 또 거듭난 영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욕구에 관해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욕구가 있고 하나님과 관련 없는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욕구는 인정하시지만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인간적인 욕구는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관련 없는 욕구는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육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손톱이 길면 때가 끼듯이 욕심이 자라나 때가 끼네. 손톱을 깎고 나면 개운하듯이 욕심을 잘라내니 개운하네. 한동안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자라있는 손톱. 한동안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또 자라있는 욕심. 수시로 들여다보고 잘라야겠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손톱이 자라듯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 없는 욕구가 계속해서 올라올 것입니다. 그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손톱을 잘라내듯이 하나님과 관련 없는 욕망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욕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신령한 삶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절제할 수 있습니까?
1) 자기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저는 군대생활을 할 때 보초가 주 임무였습니다. 하룻밤에 2시간 씩 두 번 혹은 세 번씩 보초를 섰습니다. 제가 보초를 설 때 눈보라가 몰아쳐도 저는 자리를 지켰습니다. 제가 만약에 무슨 이유 때문이든 근무지를 이탈했다면 저는 영창을 가든지 아니면 엄청난 기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왜 눈보라를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을까요? 그 당시 저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때 저는 군인이고 초병이었습니다. 제가 만약 민간인이었다면 저는 얼른 눈보라와 폭풍을 피했겠지만 저는 군이었고 초병이었기 때문에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절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영벌을 받아야 할 죄인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이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고 원해야 합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은 절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성경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신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2) 훈련해야 합니다.
딤전 4:7-8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경건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강조하던 것이 있습니다. “반복이 힘이다” 같은 것을 반복하면 그것이 몸에 익게 되고 거기서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의 훈련이 그런 것입니다. 같은 동작을 수천 번 혹은 수만 번 반복하면 능숙하게 되고 그런 선수가 우수한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경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도 자꾸 연습하고 훈련하다보면 몸에 익고 결국은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됩니다. 절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절제가 잘 안 되던 것도 반복적인 훈련을 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는 두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①분별입니다. 무엇이 육신이고 무엇인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의 인도와 영적인 감각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것인지 영의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반복적인 훈련을 하면 점점 쉽고 익숙하게 육신과 영을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욕구가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분별하는 훈련해야 합니다.
②실천입니다. 분별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은 물리치고 영이 원하는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적인 실천으로 점점 실천이 쉬어지는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천사가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문으로 갔습니다. 에스겔이 보니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흐르는데 그 물이 강을 이루었습니다. 그 강 좌우편에는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여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았습니다. 천사는 그 물이 흘러 들어가면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각처에 모든 것이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강 좌우 가에는 각종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할 것이고 신기하게도 달마다 새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입니다. 요 7:38을 보겠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주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의 배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수의 강이 무엇일까요? 다음 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주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입니다. 요 7:39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에스겔 47장은 그로부터 약 600년 후에 있을 성령강림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의 강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는 성령님의 역사로 많은 생명이 살아날 것의 예언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열매입니다. 그 강가의 나무들에게서 풍성한 열매가 열리는데 그 열매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성령충만할 때 절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결론은 제가 전에 설교 했던 내용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주님께서 40일 금식하신 뒤에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습니다.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는데 세 가지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이 되게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40일 금식을 하신 뒤에 배가 많이 고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식의 유혹 앞에서 절제하셨습니다. 식욕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이 시험을 이기신 비결이 있습니다. ➀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모든 시험을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➁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직전에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시다가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실 때도 성령에 이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떡의 유혹을 절제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아홉 번째는 절제입니다. 성령님은 절제의 영이십니다. 성령 충만하면 영적인 면에서 좋은 브레이크가 생깁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제동이 안 되던 자동차도 브레이크가 바뀌면 쉽게 제동이 됩니다. 그런 것처럼 과거에는 절제가 안 되던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절제가 됩니다. 운전사가 달리는 자동차를 브레이크 없이 자신의 힘으로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운전사가 브레이크를 밟아주면 아주 쉽게 자동차는 멈춥니다. 성령충만하면 영적인 브레이크가 생깁니다. 그래서 전에는 절제할 수 없었던 것들을 성령충만을 받으면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범사에 절제를 잘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