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포지교(管鮑之交)
옛날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교제 또는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관계나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이다.
管 : 대롱 관(竹/8)
鮑 : 절인어물 포(魚/5)
之 : 갈 지(丿/3)
交 : 사귈 교(亠/4)
(유의어)
고산유수(高山流水)
교칠지교(膠漆之交)
교칠지심(膠漆之心)
금란계(金蘭契)
금란교(金蘭交)
금란지계(金蘭之契)
금란지교(金蘭之交)
금란지의(金蘭之誼)
금석지계(金石之契)
금석지교(金石之交)
단금지계(斷金之契)
단금지교(斷金之交)
담교(淡交)
담수지교(淡水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문경지교(刎頸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
백아절현(伯牙絶絃)
수어(水魚)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
심우(心友)
어수지교(魚水之交)
어수지친(魚水之親)
어수친(魚水親)
유어유수(猶魚有水)
지기(知己)
지기지우(知己之友)
지란지교(芝蘭之交)
지음(知音)
지음인(知音人)
(상대어)
시도지교(市道之交)
제(齊)나라는 본래 주(周)나라 창건의 일등 공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봉해진 나라로,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왔다.
희공(僖公)은 태공망 여상으로부터 13대째인데, 그에게는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白)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태자인 큰아들 제아가 왕위 계승자였다. 그런데 제아는 자기 친누이인 문강(文姜)과 근친상간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소백이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백은 패륜적인 형 제아를 제거하고 자기가 왕위를 차지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즈음 둘째 아들인 규의 스승이 은퇴하자 포숙이 규에게 관중을 추천했고, 관중은 규를 섬기게 되었다. 이로써 관중과 포숙은 각각 규와 소백을 섬기게 되었다.
BC 697년, 희공이 죽고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양공(襄公)이다.
양공 즉위 4년에 노(魯)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과 함께 齊나라로 근친(覲親)을 왔다.
1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다시 사련을 불태웠다. 그런데 문강의 남편이 이를 눈치 채고 뒷조사를 하여 그들의 불륜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문강의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문강을 죽이려고 했다. 문강은 오빠에게 달려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양공은 완력이 뛰어난 그의 아들 팽생(彭生)을 시켜 문강의 남편을 죽이도록 했다.
팽생은 문강의 남편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고, 魯나라 사람들에게는 급질로 죽었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魯나라에서는 주군의 사인이 늑골 골절에 있음을 확인했고, 범인 팽생의 처벌을 요구해 왔다. 양공은 팽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양공은 누이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머물게 하고 불륜을 계속했다. 사생활이 문란해지니 정치도 그에 따라 문란해졌다. 왕은 포악무도 했으며,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고 간사한 무리가 판을 쳤다.
이렇게 되자 공자 규와 소백도 자신들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규는 관중과 함께 魯나라로 피했고, 소백은 포숙과 더불어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양공을 원망하는 신하들이 자꾸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양공을 가장 원망한 사람은 양공의 사촌 동생 무지(無知)였다.
희공이 살아 있을 때 희공은 동생 이중년(夷中年)을 아주 아꼈는데, 이중년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 무지를 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물론 규와 소백은 아버지의 이런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제아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사촌 동생 무지에 대한 대우를 폐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무지는 사촌 형 양공에 대해 매우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무지는 비밀리에 불평분자들을 모았다. 마침 교체를 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계획하던 국경 수비대장들이 양공의 정치가 날로 포악해지자 급기야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지를 앞세워 궁중에 침입하여 다락방 속에 숨어있는 양공을 찾아내어 죽여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무지가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경영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양공처럼 포악무도하게 정치를 하다가 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샀고 왕이 된 지 수개월 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BC685년의 일이다.
齊나라에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찾아왔다. 이로부터 齊나라 주인의 자리를 놓고 규와 소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시작되었다.
魯나라에 있던 규는 관중을 군사(軍師)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고, 莒나라에 있던 소백은 포숙을 군사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다.
소백이 망명해 있던 莒나라는 齊나라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규보다 소백이 먼저 齊나라에 당도하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귀국하는 길목에 미리 가 매복을 했다.
소백이 눈에 들어오자 관중은 활시위를 당겼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소백의 배에 명중했다. 소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관중은 이 사실을 魯나라에 있는 규에게 보고했고, 규는 齊나라의 주인이 다 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귀국했다.
그런데 관중의 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은 다행히도 화살이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는 바람에 죽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척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齊나라에 귀국하여 권좌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환공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사를 풀어 규와 관중 일당을 소탕하고, 규와 관중을 수배했다.
그러자 규가 망명해 있던 魯나라도 대군을 일으켜 齊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魯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魯나라가 齊나라에 화의를 청하자 齊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의 조건으로 규를 잡아 죽이도록 요청했다.
魯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齊나라 사신이 관중은 자기 나라 임금을 사살하려고 한 사람이므로 자기 임금께서 직접 처단할 것이라고 하면서 관중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관중은 죄수를 압송하는 함거에 실려 齊나라로 압송되었는데, 관중은 이것이 자기를 살려 주기 위한 포숙의 계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중이 齊나라에 도착하자 포숙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과연 관중이 예상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숙은 환공에게 정권을 잡은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면 자기로 족하지만, 중원의 패자가 될 생각이 있다면 자기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관중을 강력 추천했다.
환공은 포숙의 추천을 받아들여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포숙은 기꺼이 관중의 아랫자리로 들어갔다.
환공은 관중을 임용한 이후 패자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제후들과 9회에 걸쳐 회맹함으로서 천하를 바꿀 수 있었다.
관중이 齊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맡자 변변치 못했던 齊나라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중은 바다를 낀 지리적 이로움을 살려 해산물을 팔아서 나라를 부하게 하여 군비를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 항상 민중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영을 내리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이 잘 순응했다.
나라에서 의논한 정책은 백성들이 쉽게 행할 수 있었고, 백성이 바라는 것을 나라에서 잘 들어주었으며, 싫어하는 것은 제거하여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좌전(左傳) 장공(莊公) 8년 · 9년에 나온다.
후에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於天下也.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鮑叔旣進管仲, 以身下之.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齊나라의 녹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 대나 하였는데, 항상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에 알려졌다.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를 가리켜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관포지교’라고 하게 되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관포지교’와 같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은 최소한 실패하지는 않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이라는 뜻이다. 친구 간의 깊은 우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지란지교(芝蘭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지음(知音) 등이 비슷한 뜻을 가진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따르면 '관포지교'는 춘추전국 시기 제(齊)나라에 살았던 관중과 포숙아,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제나라 군주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저(諸), 즉 제양공(齊襄公)이 왕위에 올랐다. 제양공은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졌다. 반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포숙아는 또 다른 태자인 소백(小白)과 함께 거나라로 피신했다. 관중은 또 다른 태자 규(糾)와 함께 노(魯)나라로 망명했다.
얼마 후 제양공이 살해당하자 태자 규를 왕위에 올리려던 관중은 소백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관중은 활을 들어 소백을 쏘았다. 화살을 맞은 소백은 큰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화살은 그의 혁대를 맞추었을 뿐이었다. 관중은 소백이 죽은 것으로 착각했다. 결국 소백은 규보다 먼저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제환공은 포숙아를 상경(上卿)에 봉하려 했다. 하지만 포숙아는 관중을 상경으로 추천했다. 제환공이 '관중은 나를 죽이려 한 원수다'라며 크게 화를 냈다.
포숙아는 '관중은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며 관중을 감쌌다. 관중은 상경에 봉해졌고, 포숙아는 스스로 관중의 부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관중은 온 힘을 다해 제환공을 보좌했다. 부강해진 제나라는 춘추전국 시기 처음으로 천하를 제패한 나라가 됐다.
훗날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세상에 낳아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生我者父母), 세상에서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知我者鮑叔).'
세상이 소란스럽다. 그래서인지 '관포지교'가 마음에 더 다가온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대립과 혐오, 차별과 비하가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한다.
▶️ 管(대롱 관/주관할 관)은 ❶형성문자로 筦(관)과 동자(同字)이다. 竹(대나무 죽)과 官(벼슬 관)을 합쳐 대롱을 나타낸 글자이다. 후에 관악기, 맡다의 뜻으로도 쓰였다. 음(音)을 나타내는 官(관)은 위에서 보면 둥글다는 것이고, 또 貫(관)과 음(音)이 같고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고, 官(관)은 여섯개의 구멍이 있는 대나무로 만든 퉁소를, 또 붓대 따위 관 모양의 것을 말한다. ❷형성문자로 管자는 ‘대롱’이나 ‘주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管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官(벼슬 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官자는 높은 곳에 지어진 관사를 그린 것으로 ‘벼슬’이라는 뜻이 있다. 管자는 본래 육공악기(六孔樂器)로 불리던 악기의 일종을 뜻했었다.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竹(대나무 죽)자가 의미요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管자는 이렇게 피리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지만 지금은 주로 ‘맡다’나 ‘주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발음요소로 쓰인 官자의 의미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管(관)은 (1)속이 비고 둥글며 기름하게 된 것. 대롱 (2)아악기(雅樂器)의 한 가지로서 오죽(烏竹)으로 만든 피리. 한쪽 편을 베어서 두 개를 맞대어 붙임. 길이가 한 자 남짓하며 다섯 쌍의 구멍이 있음 등의 뜻으로 ①대롱, 관 ②피리(악기의 하나) ③붓대, 붓자루 ④가늘고 긴 대 ⑤고동(기계 장치), 추요(樞要) ⑥열쇠 ⑦집, 저택(邸宅) ⑧맡다, 다스리다 ⑨주관(主管)하다 ⑩불다, 취주(吹奏)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을 통제하고 지휘 감독하는 것을 관리(管理), 권한에 의하여 지배함을 관할(管轄), 차지하여 맡아봄을 관장(管掌), 관리하는 구역 안을 관내(管內), 관리하는 지역 밖을 관외(管外), 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관악(管樂),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그 가죽의 얼룩점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견식이 좁음을 이르는 말을 관규(管窺), 거느리어 다스림을 관제(管制), 관형으로 된 우물을 관정(管井), 모습을 살펴 봄을 관형(管形), 물건을 어느 곳에 안전하게 두는 것을 보관(保管), 책임을 지고 맡아 관리함을 주관(主管), 관할을 옮김을 이관(移管), 혈액을 체내의 각부로 보내는 관을 혈관(血管), 맡아 관리하거나 관할하는 바 또는 그 범위를 소관(所管), 전체를 총괄 관리함을 총관(總管), 물이나 김 등을 통하게 하는 관을 도관(導管), 호흡기의 일부분을 기관(氣管), 두 가지 일을 겸하여 주선함을 겸관(兼管), 연기를 뽑기 위하여 만든 관을 연통관(煙通管), 배전선을 넣으려고 쇠붙이나 플래스티크 따위로 만든 대롱을 전선관(電線管),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에 공기를 보내기 위한 관을 통풍관(通風管),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말로 친구 사이의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교제 또는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관계나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을 관포지교(管鮑之交),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표범의 얼룩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시야가 매우 좁음을 이르는 말을 관중규표(管中窺豹),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소견이 좁은 것을 이르는 말을 관중지천(管中之天), 대롱으로 엿보고 송곳이 가리키는 곳을 살핀다는 뜻으로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을 관규추지(管窺錐指),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을 통해 하늘을 살핀다는 뜻으로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이르는 말을 용관규천(用管窺天) 등에 쓰인다.
▶️ 鮑(포)자는 형성문자로 蚫(포)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물고기 어(魚; 물고기)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包(포)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절인 물고기를 말한다. 용례로는 물 속에 들어가서 전복을 따는 사람을 포척(鮑尺),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소금에 절이는 일을 포작(鮑作),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관포지교(管鮑之交)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交(사귈 교)는 ❶상형문자로 䢒(교)는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종아리가 교차해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이 글자에서 咬(교; 씹다), 絞(교; 묶다), 校(교; 학교) 등의 글자가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交자는 ‘사귀다’나 ‘교제하다’, ‘엇갈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交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交자는 다리를 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交자의 갑골문을 보면 양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交자는 이렇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사람을 그려 ‘엇갈리다’나 ‘교차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交(교)는 ①사귀다, 교제하다 ②오고 가다 ③주고 받다, 바꾸다 ④인접(隣接)하다, 서로 맞대다 ⑤엇걸리다 ⑥맡기다 7넘기다, 건네다 ⑧내다, 제출하다 ⑨섞이다, 교차하다 ⑩성교하다, 교배하다 ⑪되다, 도래하다 ⑫임무를 마치고 보고하다 ⑬교제(交際), 우정(友情) ⑭벗, 친구(親舊), 동무 ⑮무역(貿易), 거래(去來), 흥정 ⑯서로, 상호(相互) ⑰곤두박질, 공중제비 ⑱옷깃 ⑲일제히, 동시에, 함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서로 번갈아 드는 사람 또는 그 일을 교대(交代), 통신을 주고 받음을 교신(交信), 2개 이상의 선상의 것이 한 곳에서 마주치는 것을 교차(交叉), 암수 양성의 교접을 교미(交尾), 다른 종류의 암수의 배합을 교배(交配), 벗을 사귐 또는 친구와 교제함을 교우(交友), 섞어 합함을 교합(交合), 서로 맞붙어 싸움을 교전(交戰), 서로 바꿈을 교환(交換), 서로 물건을 사고 팔아 바꿈을 교역(交易), 자리나 역할 따위를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것과 바꿈을 교체(交替), 서로 주고 받음을 교류(交流), 일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의논함을 교섭(交涉), 막힘이 없이 서로 오가는 일을 교통(交通), 서로 사귀어 왕래함을 교유(交遊), 서로서로 어우러져서 뒤섞임을 교잡(交雜), 사귀어 담박하기가 물과 같다는 교담여수(交淡如水), 벗을 사귐에 신의로써 사귐을 교우이신(交友以信), 벗을 사귀는 도리를 교우지도(交友之道), 벗을 사귈 때에는 서로가 분에 맞는 사람끼리 사귀어야 함을 교우투분(交友投分), 사귄 지는 오래지 않으나 서로 심중을 털어놓고 이야기 한다는 교천언심(交淺言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