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4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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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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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죽음 전문가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제 인생도 돌아보니 참삶을 살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고, 숨을 부단히 쉬고 있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살아있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이, 정신이 죽어버렸던 순간들입니다.
여기저기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좀비 영화의 등장인물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은 축복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그러나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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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늘나라의 참된 행복>
오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을 예로 들면서 부활이 있다면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결혼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하늘나라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어지고, 이 세상의 모든 관계도 의미 없이 사라지게 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예수님과 함께했던 열두 사도가 그분 곁에 계실 것이고, 성모님은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로 계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은 당신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던 대로 남성이고, 그분의 어머니는 당연히 여성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갔다고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분들 성(性)에 혼란이 올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육신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 이 세상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혼인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혼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부활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후에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혼인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셨는데, 또 요셉과 부부관계로 사셨다면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맺었던 혼인관계는 온전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한 배우자와 혼인하였으면 더 이상 새로운 배우자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장 완전한 단계인 그리스도와 혼인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또 혼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배우자도 부모도 자녀도 형제들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진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중요한 관계가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동정부부 순교자가 계시지만 부부이면서도 동정을 지키려고 하신 이유는 이 세상의 애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식의 이 세상의 시각으로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해하려하지 말고, 하느님과의 혼인으로 오는 참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라도 느껴보려 하고 또 그 행복을 위해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을 던져버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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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 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 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 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하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 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는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절하는 할머니에게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절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 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 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 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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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29-30) 하셨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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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 논쟁 장면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은 사두가이 몇 사람, 율법 학자 몇 사람, 예수님이며, 구성은 ‘액자형 구조’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안에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라는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일곱 형제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였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예시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논쟁을 시작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떨기나무 발현 이야기를 끌어오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이름까지 알려 주신 구약 성경의 가장 탁월한 계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여러 성조의 하느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시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활을 받아들였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동조하는 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복음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봅니다. 나의 옳음과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다 사용하는 사두가이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경쟁 상대를 끌어내리려고 그분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가운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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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누구나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나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저마다의 기대와 상상이 다르기에 모든 체험은 나에게 언제나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 미지의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십니다.
부활의 세계는 서로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맺고 풀리는 불교적 세계관과는 다릅니다. 부활은 차원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느님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부활의 세상을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것인지 직접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지, 그 나라의 실체를 인간에게 직접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상과 부활한 인간의 모습을 믿는 것이 허황한 상상에 불과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한이 묵시록에서 말한 수많은 상징은 원수인 사탄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영광을 알려 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표징을 통하여 실체를 바라보기에 표징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과 모순의 표징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선과 자비가 승리하고 있음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이 아니며, 세상의 악과 사탄이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산 이들의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서 하늘나라를 맛보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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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비유의 인생>
요즘 귀가 잘 안 들린다. 병원에 가 봤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청력이 떨어지고 있단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고 우스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소리는 어느 정도 들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것이겠거니 하고 알아듣는다. 그야말로 불 가져오라면 물 가져가는 식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체험과 기억을 총동원해서 이리저리 조합해 보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도 한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통해서 모르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그만큼 한계와 오류의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와 부활을 결혼이라는 일상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예견되는 결과를 보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단정지으려고 한다.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기억과 체험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결코 그것이 하느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알고 만나는 하느님은 늘 한편에 여백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현실 안에 ‘깃들어 있고’, ‘배어 있는’ 하느님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다.
현실에서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부활이요, 부활을 통해 살아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비유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아니 그 후에도 우리가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환희, 고통과 괴로움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비춰 보이신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배우기 위해 오늘도 비유의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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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과 죽음>
루카 20,27-40 (부활 논쟁)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삶과 죽음>
삶을
죽음 뒤로
미루지 않겠습니다
오롯이 삶으로써
오롯이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삶 앞으로
당기지 않겠습니다
오롯이 죽음으로써
오롯이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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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비록 사람의 눈에는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배 속에서 생명을 받았을 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우리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 사랑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함이나 숨막힘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거부해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난 스토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스토커의 그 사랑과 다릅니다. 스토커는 나를 소유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어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당신과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한 명의 자유로운 인격체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시고 다가오는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과거에 따라 하느님께서 그 사랑을 거두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하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사랑을 마음껏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와 행복 또한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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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 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 39,18)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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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최근 통계청 ‘생명표’(2021) 발표를 보니, 한국 평균 기대수명(평균 생존 연수)이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5세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51.1세, 여자는 53.7세였습니다.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평균 수명이 는 것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기대수명 순위가 2위라고 하니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면 고집만 세진다고 하면서 특히 성격이 괴팍한 노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힘이 점점 없어져서 일할 기회 역시 사라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내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선 인정해야 합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고독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음의 장점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성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후손에게 지혜를 넘겨줘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는 계속된 생각으로 깊어지는데, 계속해서 자기 처지를 부정하며 고집만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간직하는 삶이 먼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만이 고독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두가이파와 함께 부활 논쟁을 하십니다. 사두가이는 솔로몬 왕 때의 대제관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는 유다의 귀족 계급이며, 에제키엘서에서는 경건한 레위족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가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침략군 로마와 가까웠고, 종교적으로는 모세와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자부심이 있던 사두가이는 사실 편협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편적으로 한 곳만 떼어 읽으면서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했습니다.
또한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된 성경 이해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삶, 지식이 아닌 지혜를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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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의 희망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 선종의 죽음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죽음 소식을 듣고 장례에도 참석하지만 내 죽음에 대해서는 먼 일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요셉수도원에 34년 정주후 얼마나 많은 친지들이 세상을 떠났는지요.
선종의 죽음보다 큰 축복도 없고 남은 이웃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누구나 희망하는 바,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에겐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4년 안식년때 미국 뉴튼 수도원에 약 3개월 머무를 때 날마다 찾았던 수도원 묘지도 생각납니다. 특히 마음이 착잡하여 묘지를 찾을 때는 마음의 평화를 찾곤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안식년 그해 산티아고 순례시 길가에 있었던 순례하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무수한 묘지들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2019년 한 해에는 무려 27명의 순례자가 카미노 중에 지상 순례를 마치고 귀천하였다 합니다. 특히 수시로 목격했던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는 공원같았고, 산자와 죽은자가 주님 안에서 평화로이 공존하는 듯, 따뜻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여 제가 어디든 방문하면 우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묘지이고 묘비석의 생몰연대, 그리고 묘비명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마을 공동묘지에 스페인어로 묘지 입구 돌판에 쓰여져 있던 글귀도 생각납니다.
“그대의 현재 모습이 나의 과거 모습이었고, 나의 현재 모습이 그대의 미래 모습이다.”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에서 수없이 성인의 말씀도 듣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희 두라.”(머리47)
그 누구도 마지막 최종 시험이자, 마지막 봉헌이요 순종인 죽음의 날을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시험이자 봉헌이요 순종인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선 은총과 더불어 평생 훈련의 준비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언젠가의 죽음 준비가 아니라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권고하는 사항, 역시 죽음 준비 훈련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부분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 여정을 압축했을 때, 오전 오후 과연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 일년으로 압축했을 때 과연 어느 시점의 계절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늘 밝혔지만 제 경우는 하루중 오후 4시, 일년중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이런 영적훈련이 환상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에 감사하며 겸손히 깨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잠시 우리와 함께 지내시다 오늘 떠나시는 영원한 현역의 90세 진문도 토마스 모어 선배 수도신부님의 2022년 분도 가을 계간지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터뷰 기사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작년에 선종한 동생 울리히 신부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인들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썼어요. 나도 빨리 동생을 따라 가면 좋겠어요. 동료 장 엘마르 신부가 떠났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하지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제 빨리 천당에 가고 싶지만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안남았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상시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하고 훈련하며 준비했을 때 선종의 죽음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앞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는 부활신앙이,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부활신앙에서 샘솟는 부활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길다 싶지만 전문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을 함구하게 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증인의 부활을 통해 역시 우리는 부활신앙과 더불어 부활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 진리는 날마다의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깨닫습니다. 미사신청이 생미사, 연미사 반반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 살아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죽은 이들을 위한 연미사입니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 안에 다 살아 있는 영혼들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 아름다운 위령감사송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참으로 이런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지상 삶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아름다운 인생 마치고 아름다운 선종을 맞게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날마다 온마음, 온정성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잘 살다가 잘 죽는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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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부활 논쟁!>
오늘 복음(루카20,27-40)은 '부활 논쟁'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인 예를 들면서, 이들이 죽어 다시 부활하는 때에는 "그 여자가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루카20,34-35)
'부활신앙!'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겨내시고, 죽음까지도 이겨내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부활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
그런데 부활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입니다. '영원한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큰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20,38)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언제나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가?'
'부활 논쟁'은 지금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내 마음 안에 있는 '두 마음의 충돌'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마음과 세상 가치를 따라가려는 마음의 충돌(싸움)'입니다.
이제와 영원히 부활하기 위해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잘 믿고 따라가는 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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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jJgMpRtOt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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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가장 소중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나간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오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나간 어제가
아닌 오늘을
더더욱 기쁘게
나누게 하시는
살아계신 오늘의
하느님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오늘의
새로운 날입니다.
지나간 것은
맡겨드리고
오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오지 않는
내일(來日)이 아닌
오늘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미움은
미움을 부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미움과 아픔을
봉헌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새 마음입니다.
새 마음과
새 땅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을
이사악을
야곱을
끝내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끄시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가장 좋은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어제의
사랑을 되살리는
오늘이며 오늘은
내일의 사랑을
향하게 하는
오늘의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
참된 생명의
살아계신
하느님의
빛나는
새날입니다.
+++++++++++++++++++++
(2)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가슴 뛰는 감사의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부활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누구의 것이냐며 지극히 인간적인 물음만을 던지게 됩니다. 삶이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제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 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더 없이 소중한 우리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혼인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를 누구의 아내로만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삶의 참뜻을 우리는 참된 사랑으로 깨닫게 됩니다.
부활의 삶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의 삶으로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로 이끕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소중한 만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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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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