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 360도 회전
봉혜선
책상이나 식탁, 혹은 접이식 상에 유독 눈이 머문다. 탁자, 책상, 식탁 같은 무얼 받치는 것들이 내게는 흥미 대상이다. 그것들은 무엇을 받치고 그 위에서 이루어졌을 수많은 것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상들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숨은 공신이다. 찻잔 하나도 바닥이나 쟁반보다 작은 상에 받쳐 내놓으면 이야기가 오가는 장이 금세 마련된다.
식당의 규모와 크기를 가름 짓는 것은 탁자의 수다. ‘탁자 두 개’로 시작했다는 입지전적인 성공 사례를 말하는 상인의 앞에도 어김없이 펼쳐져 있는 탁자. 재질이나 크기, 모양에 관계없이 탁자는 사람을 모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특히 탁자가 원형일 때 내 마음은 저절로 둥그러진다. 중국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운데 놓인 마음까지 둥그러지는 원형 회전 식탁 때문이기도 하다.
동네 놀이터 가운데 자리한 나무에 나무를 둘러싸는 모양으로 둥그렇게 의자를 둘러놓았다.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그 의자에 앉기를 좋아한다. 재재거리는 아이들은 짧은 다리를 한껏 뻗어 다리를 안으로 모은다. 강강술래 하듯 마음을 모으는 모양새이다. 놀이터 원형 의자에서 따로 또 같이라는 평등을 배우는 아이들. 서로를 마주 쳐다보면서는 각을 세우게도 된다.
몸을 빼 바깥으로 발을 두면 바로 옆에 앉은 사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원형 의자를 오래 쳐다본다. 서로에게 방해받지 않고 다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생각이 한 방향으로만 쏠리면 편집증이 되고 외곬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동해안의 돌들은 크고 모나고 제각각인 데가 많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거기서 나온 듯하다. 강물은 서해로 흐르고 흐르며 모난 돌은 깎이고 깎여 조약돌이 되고 둥근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된다. 서해 쪽에 모난 돌이 동해안보다 적은 이유이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에서 막히는 길을 헤쳐 나오기만 한다면 아웅다웅하는 삶이 무색해지는 변방에 금세 닿는다. 삶에서 실패하고 경쟁에서 밀려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길 줄 알게 되었다. 숨 막히는 공기, 매연, 옆과 위아래로 얽히고설켜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고리가 방사선 모양의 중심으로만 모여들면 솟구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순환이 중심을 변방이게도 하고 변방 역시 서서히 중심으로 돌고 돈다. 돌고 도는 것이야말로 원형의, 생의 속성이 아닌가.
빗방울 같은 작은 자극에도 동심원을 그리며 넓어지는 호숫가에 앉아 수없이 돌팔매질을 한 후 일어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른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원형으로 둘러앉아 따듯함과 안온함을 느끼는 것은 태양이나 달을 숭배하던 속성이 전해 내려온 형태라는 말에 고개를 새삼 끄덕인다. 원심력에 이끌리는 사람과 구심력에 이끌리는 사람들 모두 둥그런 마음을 가졌으리라. 근처에 호수가 있다면 좌절이나 슬픔으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때, 혹은 서로 다툰 상대와 호숫가로 나가보기를 추천한다.
둥근 형상은 기하학자들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다. 난자는 태양처럼 둥근 형상이며 어머니는 아이를 완전한 형상으로 품는다, 세계가 완전한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건 낙원이이리라. 우리가 태아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낙원의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라 했다. 소설가 정찬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둥근 형상으로 품는다.’고 했다. 이어 ‘형상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상이 둥근 형상’이라고 했다.
평생 사는 곳 외에 나간 일이 없다고 알려진 칸트는 하루의 중심인 점심 식사에 9사람 이하의 손님을 초청해 둥글게 앉아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의 온상지는 원탁 위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심지어 여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칸트는 원탁을 요구했다. 사상가 칸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혹시 「원탁의 기사」가 아닐까.
아이들이 어릴 적 뻐꾸기시계가 있었다. 벽시계로는 가족들이 수시로 쳐다보니 둥그런 모양이 좋다고 했다. 친정아버지는 학교 강당에나 쓸 법한 커다란 벽시계를 가지고 나를 위로하러 오셨다. 그 벽시계는 지금은 남편 회사의 생산 현장에 가 있다. 대신 작아도 둥근 모양의 시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제야 밝힌 속사정을 들은 남편은 새로 건 시계 건전지가 다 되어 시간이 맞지 않으면 불에 덴 듯 건전지를 바꾼다. 전에는 내가 그 큰 시계를 떼어 건전지를 바꾸어 달든 말든 시간이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게으른 내 탓을 했다. 뻐꾸기시계를 부순 남편은 동그란, 모나지 않은 각지지 않은 시계를 보며 마음을 둥글렸을까.
정월 대보름 아래 모인 여인들의 강강술래 놀이는 집안에 갇혀 지내던 우리네 여인들의 합동 춤 이다. 멍석을 깔아주면 멈칫거린다고? 온 동네 여인들이 다 모여도 원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당의 한계가 없는 한 원은 한없이 확장한다.사람이 많이 모이면 가까이 손잡은 곁 사람과의 결속이 떨어질까 더욱 세게 손을 잡는다.
하늘의 달과 해처럼 부드러운 건 다 둥글다. 모서리가 없는 각을 세울 필요 없는 둥그런 원탁이 나는 좋다. 원에 대한 성찰은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원불교의 상징에서 보듯 돌고 도는 순환과 윤회 사상을 앞세웠다. ‘원 밖의 존재는 무슨 삶이나 슬프다.’ 라는 글귀가 스친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7권에서 에드몽 웰즈는 원처럼 도는 인생의 회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말년에 다다르면 초년에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 하게 된다. 요양원이 유치원을 대신하고 병원이 유아원을 대신한다. 늙으면 아기가 된다는 말대로 이유식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따뜻한 침대를 떠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애로운 존재들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다. ~마지막 며칠 동안은 태아를 보호해 주는 어머니의 배 속처럼 따뜻하고 습도가 높고 어두운 곳에 누워 있다가 눈을 감는다. 그럼으로써 순환이 와성되고 버리고 떠났던 것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모여 앉아 살 수 있기 바란다. 빙글빙글 돌다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필미학 2024 가을>>
서울 출생
한국산문 2019.12 <투명함을 그리다> 로 등단
한국 문인 협회 회원
한국산문 편집위원
2022, 2024 선수필, 2023 더수필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