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 손창현 <에세이문학>
갈기 세운 파도가 귓전을 때린다. 무어에 떠밀려 왔는지, 뭔가에 이끌려 왔는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닿은 섬. 외로움도 절규도 삼켜버린 차가운 바다는 지친 영혼을 작은 섬에 풀어놓는다.
남도 바닷가의 햇볕은 따사롭다. 빛을 등에 업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천연 원시림이 빼곡하다. 동백나무가 숲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계단이 끝나면서 완만한 오솔길로 접어든다. 길을 따라 북쪽 망루로 가는 코스는 전망이 좋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와 굵직한 동백나무의 밑동이 나목의 군상으로 다가온다. 잎들은 얼기설기 지붕처럼 덮여있고 그 사이로 동백꽃 송이송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이 길의 백미는 동백꽃 터널이다. 성근 잎 사이로 하늘빛이 부스러져 들어온다. 한 망울의 선혈을 머금고 송이째 나뒹굴고 있는 처연한 꽃. 이 꽃의 절정은 낙화에 있다. 동백꽃은 망설이거나 바둥거리지 않는다. 후드득 냅다 떨어진다. 정념의 빛깔처럼 생의 마지막도 정녕 붉다.
빛이 수런거린다. 바다는 빛을 부수는 분쇄기 같다. 부서진 빛들은 멸치 떼처럼 몰려다니면서 빛을 튕겨낸다. 은빛 조각들은 바다에만 머물지 않고 바람에 실려 섬으로 섬으로 퍼져나간다. 동백나무 숲에도 빛이 들끓고 있다. 두툼한 잎은 윤이 나서 마치 빛이 사는 집 같다. 해풍이 실어 나르는 소금과 빛이 축적된 시간의 무늬다.
망루에 주저앉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노라니 내 몽매한 호기심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진다. 찬바람 눈보라 속에서 저 홀로 핀 동백꽃을 바라본 유배객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역모에 몰려 가족과 세상을 등진 이의 가슴에서 묻어나는 피멍은 아니었을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파도는 끝없이 섬에 닿는데 동백꽃의 붉은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육지길이 멀고도 아득한 시절,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는 섬 처녀의 마음이었을까. 소설《춘희》(알렉상드르 뒤마)를 각색해서 더 유명해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베르디 작곡)의 비올레타가 토해낸 사랑의 각혈인가.
언제부터인지 내 마음속에도 동백꽃이 아롱져 있다. 문학과 노래의 서정이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홍도가 고향인 문우와 한잔 술에 흥취 되면 절로 터져 나오는 곡이 <동백 아가씨>다. 그의 구성진 노래가 가파르게 치달을 때 ‘툭’ 하고 동백꽃 한 송이 술잔 속에 뛰어든다.
욕지도의 작은 섬에 집을 둔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겨울방학 며칠을 함께 보낸 적 있다. 난생처음으로 간 섬은 마치 영화 <빠삐용>의 배경이 된 기아나섬 같았다. 깎아지른 절벽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섬을 에워싼 동백꽃은 아직도 내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를 외딴 섬에서 맞는 기분은 사뭇 달랐다. 고구마 빼떼기죽을 나누어 먹으며 밤을 지새웠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과 함께해서인지 더 설레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곳이라 촛불을 밝혔다.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듯 내 마음도 흔들렸다. 섬을 떠나오며 마음 한편에 동백꽃 한 송이 여울졌다.
아픔은 또 희망으로 재탄생하는 것인가. 섬은 오랫동안 군사시설로 통제되어 있다가 최근에야 풀렸다. 아우성으로 자랐는가. 시위하듯 키 큰 동백나무에서 붉은 꽃송이 낭자하게 터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자색 동백잎은 산란스런 쪽빛에 그을린 걸까, 뭍을 그리워하다 지친 것일까. 통제된 땅에서 외롭고 처절하게 지낸 섬, 지심도.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때, 동백나무를 집 안에 심지 않았다고 한다. 동백꽃이 통째로 지는 모습은 사람의 목이 잘려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선혈은 붉은 동백꽃을 닮았다. 조금 망설여졌지만 내 뜰에 동백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한산도가 고향인 친구가 내게 직접 가져왔다. 내 동백 타령에 자기 뜰에도 심었다고 한다. 예사롭게 보아 왔던 동백꽃이 언제부터인가 달리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동백꽃은 애잔한 삶의 한 표정이다. 닫힌 섬에서 열린 뭍으로 나아가려는 섬사람들의 몸부림이다. 문학 속에는 굳은 절개와 순정의 에스프리를 담았고, 유배객에게는 단절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인고의 상징이었다. 섬 꽃 동백은 내게 자꾸 손짓을 한다. 팍팍한 삶의 절벽에 섰을 때, 세상의 파도에 떠밀릴 때마다.
짙은 초록 잎 사이로 봉오리가 봉긋이 터져 나오더니 꽃망울을 터뜨린다. 겨울 섬 하나가 다가온다. 쪽빛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따라왔다. 홍도 문우의 <동백 아가씨>와 사춘기 시절, 빨간 동백꽃 한 송이도 내 뜰을 채운다. 아니, 지심도처럼 외로웠던 내 마음을 메운다. 퍼렇게 얼어버린 가슴을 녹여주던 섬 꽃. 아궁이 속 불꽃처럼 잡념을 태우고, 엄마의 품처럼 안온함을 주었다. 내 뜰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꽃이여. 어느 날 붉은 송이 투욱, 툭 떨어지면 떠날 것이다. 나의 꽃이 그리워했을 붉은 섬으로. *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