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위 8년(1408) 4월 16일, 태종은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의 명을 받아들여 그날 중으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했다. 영락제에게 바칠 진헌녀(進獻女)들을 선발할 전담기구였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아름답고 품위 있는 조선의 처녀를 매우 귀히 여겨 전조(前朝)에서도 종종 황제의 후궁으로 맞아들이곤 했었다. 개국 초라 상굿도 정국이 불안하던 시기였으므로 태종은 감히 영락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강력한 몽골제국(원나라)을 물리치고 건국한 지 40년밖에 되지 않은 명나라는 여차하면 주변 어느 나라라도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각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반 처녀들을 대상으로 전국에 금혼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전국에서 뽑혀온 30명의 처녀 후보가 진헌색에 도착했다. 의정부 3정승은 전문 궁녀로부터 처녀감별을 마친 이들을 한 사람씩 면담한 뒤, 그 중에서 가장 외모가 준수하고 예의범절이 반듯한 처녀 5명을 추려 10월 6일 태종에게 보고했다. 공조판서를 지낸 권집중의 딸, 형조판서를 지낸 임천년의 딸, 영주자사를 지낸 이문명의 딸, 정5품 사직(司直) 여귀진의 딸, 수원향리 최득비의 딸 등이었다. 10월 1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태종과 명나라 사신 황엄은 이들 5명을 다시 심사하여 전원 무사히 통과시켰다. 의정부에서 올린 심사평대로 5명 중에서는 권집중의 딸이 단연 출중한 미모와 훌륭한 자질을 지닌 것으로 재평가되었다. 11월 12일, 명나라 사신 황엄은 진헌녀로 선발된 처녀 5명을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태종은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를 진헌사(進獻使)로 임명하여 함께 보냈다. 이문화는 이문명의 친형으로, 질녀를 진헌녀로 바치기 위해 동행하는 꼴이 되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따질 계제가 못되었다. 권집중의 아들 권영균도 여동생을 따라갔다. 『태종실록』에는 진헌녀들이 떠나던 날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마을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행은 태종 9년(1409) 2월 9일 북경에 도착하여 영락제를 알현했다. 영락제는 진헌녀 가운데서 후궁 한 명을 뽑기 위해 수도 남경에서 먼길을 올라온 터였다. 영락제는 5명의 진헌녀를 꼼꼼히 살펴본 뒤 권집중의 딸을 선택하고 즉석에서 후궁인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여동생을 수행해온 권영균에게는 광록시의 경(卿)이라는 정3품 벼슬을 내렸다. 광록시는 외빈 접대를 담당하는 기관이라 실권이 없었지만, 황제 직할관서라 광록시 소속 벼슬아치들 가운데는 막강한 월권을 행사하는 자들이 많았다. 권영균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의 국왕들이 그의 눈치를 보느라 수시로 집안에 엄청난 재물을 하사하고 권속들을 등용시켜야 했다.

현인비에 대한 영락제의 총애는 황후와 다른 후궁들이 질투할 정도로 남달랐다. 그녀는 고려 말의 기황후나 오빠 권영균과 달리 겸손하고 현명한 처신으로 황실 내외에서 큰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현인비는 영락제의 후궁이 된 지 2년도 채 안 된 태종 10년(1410) 10월 24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영락제는 크게 애통해하며 사인을 조사하라 명했고, 조사를 맡은 관리들은 여귀진의 딸이 현인비를 독살했다고 보고했다. 실인즉 현인비를 독살한 것은 황후의 밀명을 받은 중국인 궁녀들이었지만 그렇게 조작한 것이다. 여씨는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고, 명나라 황실로부터 통보를 받은 태종은 즉각 여씨의 가족들을 하옥했다. 현인비가 비명횡사하자 여동생 덕에 과도한 허세를 부리던 권영균은 귀국도 못하고 타국의 원귀가 되었다.
진헌녀 진상(進上)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제3차 진상 때는 한확의 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확의 누이는 영락제의 후궁인 여비(麗妃)에 봉해졌고, 그녀를 수행한 남동생 한확은 15세의 나이에 명나라 광록시의 종3품 소경(小卿)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경(卿)으로 승차했다. 재위 18년(1418) 태종이 세자(양녕대군)를 폐하고 3남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었을 때였다. 영락제로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처사라 선뜻 책봉을 내리지 않았다. 남경에 머물며 광록시경의 소임을 다하고 있던 18세의 한확은 영락제 알현을 자청하여 조선의 실정을 설명하고 책봉교서를 받아냈다. 조선으로서는 한확에게 크나큰 신세를 진 것이었다.

영락제는 한확에게 책봉교서를 들려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한확의 누이인 여비를 총애하는 영락제로서 유능한 처남에게 크게 생색을 낸 것이었다. 세종 1년(1419) 1월, 한확이 명나라 사신 자격으로 책봉교서를 가지고 귀국하자 조정에서는 최고 예우로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한확은 명나라 사신이기 이전에 조선의 백성이라면서, 세종과 상왕으로 나앉은 태종의 예를 극구 사양했다. 영락제에 대한 예가 아니라며 세종이 강권하여 임금 앞에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세종이 베푸는 환영연에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한확은 영락제가 사위를 삼으려는 제안도 고사하고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주저앉았다. 젊은 나이에 교만하지 않고 분수를 아는, 참으로 고매한 선비였다. 대신 한확의 집안은 조선 초의 최고 명문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세종 6년(1424) 영락제가 죽자 한확의 누이인 여비는 30여 명의 다른 궁인들과 함께 영락제의 능 곁에 순장(殉葬)되었다. 이로써 3차에 걸쳐 명나라 황제에게 진상된 진헌녀 8명은 모두 비명에 가고 말았다. 세종 10년(1428)에 진상된 제4차 진헌녀에는 한확의 막내여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명나라 황제인 선종의 후궁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확은 여전히 아무런 허세도 부리지 않았다. 이후 한확은 순전이 본인의 고매한 인품과 실력 덕분에 좌의정까지 오르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확의 딸은 수양대군의 맏아들인 도원군 이숭(李崇)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올랐다. 그때 이미 보위를 노리고 있던 수양대군이 조선제일의 세도가인 한확과 정략혼인을 맺은 것이다. 도원군은 수양대군이 보위를 찬탈한 뒤 의경세자에 책봉되었지만, 보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함으로써 한확의 딸은 왕비가 되지 못했다. 대신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보위(성종)에 오름으로써 사후 인수대비로 추존되었다.
첫댓글 진헌녀라 이런 방법으로
조선의 여자들이 중국으로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