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 ---「작가의 말」중에서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 p.40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 pp.88~89
우덕순이 말했다. -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 온다고? 항구 앞 루스키섬의 등대 불빛이 어둠을 휘저었다. 불빛은 술집 안까지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 p.104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42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 p.159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 pp.166~167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으로 실려가서 살아났다면, 이토의 세상은 더욱 사나워지겠구나.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토를 쏜 이유에 대해서 이토에게 말할 자리가 있을까. 세 발은 정확히 들어갔는데, 이토는 죽었는가. 살아나는 중인가. 죽어가는 중인가. --- p.193
안중근은 용수를 벗은 눈으로 우덕순을 바라보았다. 우덕순도 안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안중근은 우덕순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메마른 눈동자가 버스럭거리는 듯싶었다. --- p.227
빌렘은 겟세마네의 예수 앞에 꿇어앉았다. 빌렘은 조선에 부임한 이래 이 작은 반도 안에서 벌어진 죽음과 죽임을 생각했다. 교회 밖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지를 빌렘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으므로 이토의 사람들은 또 안중근을 죽일 테지만, 안중근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아직은 며칠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빌렘은 안중근의 생명이 살아 있는 그 며칠을 생각했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