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7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이 하루도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소서.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거듭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쇠하고 썩어 결국 없어지고 마는 풀과 풀의 꽃과 같은 허망한 인생에 목숨 걸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주의 말씀에 온 마음을 쏟아 붓게 하소서.
틈만 나면 나의 영혼 또한 육신에 속한 세상으로 눈을 돌리려 합니다.
이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자를 심판하사 주의 공의로 세우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서게 하시고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도 거룩한 불구자로 서게 하시고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고전 8:1-13
제목 : 사랑 없는 큰 지식보다 사랑하는 작은 지식이 덕을 세웁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 나의 묵상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할 때 지식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행동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교만이지만 사랑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겸손의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아는 대로 행동하면 사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다.
사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 진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상은 이방인들이 믿는 신이요 그들이 만들어낸 헛된 우상일 뿐이다.
이런 우상들은 은금이나 나무로 사람이 만든 것이며 말하지도 듣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다.
(시 115:4-8)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그래서 하늘과 땅 곧 온 세상에서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많아서 많은 신과 많은 주들이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계시지 않는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님은 곧 삼위 하나님이요 우리를 비롯한 세상 만물이 다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진리의 지식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우상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교리에 젖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리 자유함을 누리며 우상이나 우상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험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한편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다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이교도들은 우상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나서도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기독교인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상 제물을 먹게 되면 그것을 보고 마음에 걸림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이 그것을 담대하게 먹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꺼림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양심에 걸림이 되어 믿음이 약하여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도 음식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먹고 안 먹고에 따라서 양심에 저촉을 받는다면 그로 인하여 신앙에 큰 저해요인이 되는 것이다.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삶에 유익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먼저 믿는 자들의 자유함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있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믿음의 자유함이 있어서 거리낌이 없이 우상 신전에 앉아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보면 이 사람도 마음에 담대함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먹되 그 양심에 조금이라도 거리낌을 가지게 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해서 그 담대한 믿음이 그 연약한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면 문제는 그 실족한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결국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연약한 양심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곧 주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나 바울은 그런 이유로 만약 음식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도 지식의 담대함이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어려서부터 주일 성수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배워 온 사람은 주일에 돈을 쓰는 문제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거나 아니면 복음을 통하여 그런 율법적인 문제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주일에 돈 쓰는 문제에 대해서 자유하다.
물론 늦게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예 주일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몰라서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 주일에 돈 쓰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에는 돈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었다.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는 부모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크게 벗어날 일이 없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를 떠나 나 혼자 생활을 하다보니 주일에 돈 쓰는 문제가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모른다.
먹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주일에 교회에 가려면 돈을 내고 버스를 타야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걸림이 되기는 했지만 아예 돈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돈을 쓰지 않고서는 도시에서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에는 꺼림칙한 느낌이 남아서 나를 괴롭히곤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서는 주일에 돈을 쓰고 안 쓰고와 같은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내 안에서 확신하게 되었다.
더구나 복음을 확실히 알고 난 이후에는 이런 외적인 경건의 모양에 대해서는 더욱 자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담임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성도들과의 교제 모임이 있으면 주일 오후예배 마치고 다함께 식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볼링을 치러 간다든지 하면서 성도 간의 교제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자신이 주일날 식당에 가서 밥을 사먹는 일이 맘에 걸린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말을 그냥 흘러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본인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치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 분에게 좀 더 복음 안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지 아니면 그 분이 거리낌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차라리 주일날 외부에서 식사를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여야 했을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지도자로써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섬세하게 듣고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오늘 묵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바울은 음식으로 인하여 형제를 실족시키게 되면 그의 평생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내 친구 중에 이런 친구도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 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학생부 지도 교역자가 주일날은 절대 돈을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 친구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철저히 그것을 지켰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침에 엄마가 돈을 주면서 가게에 가서 무엇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 친구는 자기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사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돈을 들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옆집 동생에게 돈을 주면서 그 물건을 좀 사오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통해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이 친구는 아마도 심각한 신앙의 갈등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친구는 복음을 알고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지식의 담대함이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 있다는 영적 민감함으로 늘 깨어서 내가 누리는 자유함이 아니라 형제를 세워갈 수 있음이 더 크고 놀라운 영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깊은 공감을 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오늘 묵상을 통해서 새삼 깨닫습니다.
내가 복음을 깨닫고 나서 나의 교만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할 정도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은 다들 바보 멍텅구리로 취급하고 형제들을 다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원수들로만 치부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복음을 알게 되었기에 그런 과정까지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나이다.
야곱의 우물은 영생의 주변부에서만 돌아다니는 것이어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야곱의 우물을 마시고자 하는 사모함이 없었다면 주님을 만날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머리카락이 쭈뼛하며 섬뜩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연약한 형제들을 더욱 섬세하게 섬길 것과 또한 나의 교만의 날카로운 부위를 좀 부드럽게 다듬질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모든 것 주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