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6. 문경 장수황씨 종가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 가풍으로 베풂의 삶 실천 |
▲ 장수 황씨 종택 사랑채.
전통이 있는 가문일수록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나 가훈 또는 유훈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수대에 걸쳐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후손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집안마다의 가풍을 잇도록 갖은 애를 쓴다. 아무리 넉넉한 살림이라 해도 자녀교육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집안은 그리 오래가질 못한다는 교훈쯤이야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덕을 쌓아 자손에 교훈을 주라는 적음덕(積陰德) 위자손지계(爲子孫之計)의 명심보감 '계선편'의 명구를 집안 유훈으로 대대로 잘 간직하며 문경시 산북면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장수 황씨.
▲ 장수 황씨 21대 종손 황규욱.
장수 황씨(長水 黃氏)가 문경에 터를 잡게 된 시점은 익성공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의 증손자인 승의부위(承義副尉) 부사정(副司正) 황정(黃珽)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부터다.
황희라면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호는 방촌(尨村)으로, 고려 공양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고, 1431년부터 1449년까지 영의정이 되어 세종대왕을 도와 국정을 통치하였으며, 관직을 벗은 후에도 중대사에 대해 세종의 자문을 해 주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4군 6진의 개척, 외교 및 문물제도 정비, 문화진흥을 지휘하여 세종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여, 조선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칭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분의 증손자가 이곳에 정착했으니 그 피가 면면히 흐르는 집안이라 하겠다.
장수 황씨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이었던 황 락(黃 洛)이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 현재의 베트남 북부 하노이지방 교지국(交趾國) 사신으로 가다 동북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현재의 울진군 평해(平海) 월송(月松)지방에 표착(漂着)한 후 그곳에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시조가 됐다. 자칭 황장군(黃將軍)이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황 락(黃 洛)은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기성군(箕城君, 평해의 옛이름)·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즉 맏이 황갑고(黃甲古)의 후손 황온인(黃溫仁)은 평해 황씨의 시조,둘째인 황을고(黃乙古)의 후손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이며 시중벼슬을 지낸 황 경(黃 瓊)으로 장수 황씨의 시조(始祖)가 되며, 셋째 황병고(黃丙古)의 후손인 황충준(黃忠俊)은 창원 황씨의 시조다.
고증(考證)할 문헌이 유실돼 역사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조선시대 4대 명상(名相)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정승의 증조부로 증(贈) 참의(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지금의 계보를 잇고 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자리한 장수황씨 종택.
장수 황씨가 문경 땅에 토착화되는 시간까지는 몇 대를 더 내려가 고손인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 1558~1642)때 부터라 할 수 있다. 삼가(三嘉)현감을 지낸 황시간은 7대조 황희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숙청사(肅靑祠)를 비롯한 종택을 마련했고 '정우정'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황시간이 살았던 종택 또한 그 기개를 아직까지 간직하며 산북을 지키고 있다.
단순한 '고택(古宅)'이 아닌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가.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을 가풍으로 여기며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문경 장수 황씨 종택은 400여년전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건립됐으며,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됐다.
장수 황씨 종택 안에는 약 400년된 탱자나무가 높이 6m쯤 되는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13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 옛날 종가를 세운 조상은 세상을 떠났지면 종택은 지금도 건재하며 베품의 철학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황시간은 마지막 임종 시 "내 자손되는 자들은 악이 적다하더라도 절대 행하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다. 이 말은 아마도 어떤 일이라도 선하게 행하라는 뜻 일게다. 이러한 유훈이 자손만대 이어지니 그 후손들이 옳지 않을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좋은 글귀나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행동으로 어떻게 옮기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결국 말이 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천은 늘 어렵다.
일제시대 생계가 막막했던 종택에서는 생존을 위해 사당의 제목까지 팔아야 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 신주를 모시고 사당삼아 제사를 모셨지만 이마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자 모든 신주를 조매하고 말았다. 대신 종택에서는 매년 2월 10일 황희의 생일에 자손과 파손, 유림들이 모여 방촌선조 다례를 올리고 있다. 이 밖에 종택에서는 음력 10월 묘사를 지낸다.장수황씨 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셨던 분은 15대조 황시간과 13대조 황상중이지만 현재 불천위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 맛 좋기로 유명한 가양주 '호산춘' 1990년 민속주로 문화재 등록.
종택 음식으로는 가양주인 '호산춘'이 유명하다. 이는 수 백년간 장수황씨 집안에 이어져온 전통주로 1990년 민속주로 문화재 등록됐으며 지금도 이 집안에서 빚어지고 있다.
'쌀 한되에 술 한되가 나온다'고 하며 술이 너무 좋아 술에 빠져 지내다가 몸과 집안을 망친다고 해서 망주(亡酒), 신선이 좋아한다 하여 호선주, 관리들이 이 술맛에 취해 임무도 잊고 돌아갔다 하여 망주(忘酒)로 불렸다는 유명한 술이다.
이 집은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그리고 안채에 출입하기 위하여 사랑채 오른쪽 전면쪽으로 중문채가 있었으나 수 십년전 화재로 중문간과 마구부분이 소실되고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퇴칸을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측 2칸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두고 2칸 온돌방과 연결시켰다. 우측칸은 전면에 다락방을 설치하고 하부는 수장공간으로 활용하며, 뒤쪽에 반 칸 정도의 감실을 두고 다시 온돌방을 설치한 3겹의 칸살로 구성되었다. 2009년 경상북도에서 직영사업으로 사랑채를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언제라도 거주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이 집안에는 방촌 황희의 유품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황방촌 유물은 바로 황희 정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로서 옥서진(玉書鎭, 옥으로 된 종이누르개) 1쌍, 산호영(珊瑚纓,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연(玉硯, 옥벼루) 1개. 서각대(犀角帶, 코뿔소 뿔로 된 허리띠) 1개, 분재문서(分財文書, 재산분할문서) 1매가 그것이다.
연산군(燕山君) 6년(1500) 9월에 분재기에 재주(財主)인 황정(黃珽)이 아들 사웅(士雄)에게 전답(田畓)을 특별히 별급(別給)하고, 증조(曾祖)가 손수 사용하던 물건인 산호갓끈, 옥연, 옥서진 등의 몇 가지 보물(寶物)을 종가(宗家)에서 간직하여 삼가 지킬 것을 밝혔다.
옥서진은 27.3㎝, 1.8㎝, 1.4㎝ 크기로 1쌍인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서진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특히 옥서진의 경우 도산서원의 퇴계유품 등 몇 안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산호영은 29개의 산호주로 연결된 100㎝의 갓끈으로 조절 없는 간결한 유물이다. 갓끈을 싸고 있는 보자기 바느질 또한 매우 귀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경주손씨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는 '송첨삼보(松詹三寶 : 경주손씨 종가의 당호)) 중 하나가 산호영이다
옥연은 길이 27.3㎝, 너비 17 ㎝, 두께 1.5㎝로 손을 댄 자국에 노결현상(露結現象)이 생겨 무수연(無水硯)이라고도 한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종에게 하사받은 벼루이며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6년에는 상주 김선치의 벼루(1330년)가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서대는 길이 100㎝, 너비 3.5㎝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보관하는 각대통도 좋다.
분재기는 가로 48㎝, 세로 54㎝의 장지(壯紙)에 황희의 증손인 황정(黃珽)이 쓴 것으로 아들 황사웅(黃士雄)에게 논밭을 특별히 내리고, 옥서진·서각대·옥연 등을 종가에서 간직하여 지킬 것을 언급하였다
이곳 산북에 있는 장수황씨 종택을 지키는 종손 황규욱씨(66)는 고교 역사교사로 재직하며 고향을 지키며 지역사회활동에 적극나서는 등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무엇보다 "종가는 베푸는 삶을 실천하며 공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는 이곳 종택을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다.즉 누구나가 종손도 되어보고 종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종가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 때문이란다.이러하듯 예나 지금이나 종가의 사람들은 보통사람하고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장수 황씨 황희 정승의 21대 종손의 자긍심은 꿋꿋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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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문경 장수황씨 종택
영월에서 단양을 거쳐
문경에 이르는 지방 도로를 자주 이용하는데
이 번에는 늘 지나치기만 했던 민속문화재를 들러 본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경북 민속문화재 163호)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은 문경지방의 지방형을 간직한 양반가옥으로
세종대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의 7대손인 칠봉 황시간이 거주했다고 한다.
주택의 건립시기는 1800년대로 추정되며
솟을대문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정면에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섬돌
[출처] [종가] 6. 문경 장수 황씨 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