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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필로 그린 세묘화
'런던 뉴스' '그래픽'
'스피어' 등 19세기
영국 주간 화보신문에
실렸던 조선의 풍경을
담은 세밀화와 희귀 사진
261컷이 널찍한 국배변형판
(266x304㎜) 책 < 근대 조선 >
이책은
개국 전후(1858~1884),
거문도 사건(1885~1887),
조선여행 서양인(1887~1890),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897~1905),
대한제국 멸망(1906~1911)
당시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
거문도 삽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 양반 웃어른 3인.
서양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3선비의 위풍당당함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풍경.
병풍 그림은.,분명 4군자 동양화.
3명 선비가 앉아있는.,서양식 의자.
그 곁에 서있는 군인은.,영국인 같다.
'거문도(巨文島)라는 한자 지명은
큰 문장가들이 있는 섬이란.,뜻 이름.
이들이 있어 "거문도"라고 명명된걸까?'
.......귤은(橘隱) 김류(金瀏).......
거문도(巨文島)는 김류 대문장가가
태어난 섬이라., 클 거(巨), 글월 문(文)
섬 이름을 "거문도"로 삼았다고 전해온다.
.
거문도 유촌 귤동에서
1814년(순조 14)에 출생.
.
장대한 체격을 갖춘 김류는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문장에 능숙하고 자손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했기에
일찍부터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거문도의 서도(西島)에 살던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1806~1885],
장흥(長興)의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추려(秋旅) 김대원(金大源) 등과 동문수학.
학문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판단한 김류는
과거 합격하기는 티끌 줍는 것과 같다고 생각.
서울로 향했으나, 그 결심은 이내 바뀌고 말았다.
장성에 이르렀을 때 성리철학 대가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문하생이 되어 서른 나이에 전법(典法)과
예의의 강령을 터득하고, 사물의 본말을
종합하여 밝히며, 문장의 중심을 배웠다.
스승 기정진의 질정을 받으며
수학한 끝에 학문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게 되자 김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54년(철종 5) 러시아 뿌찌아찐(1803~1883]
해군 중장이 이끈 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한 거문도 점령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류는 조선과 통상교섭을 원한다는
러시아 측의 뜻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김류의 문집에 포함된 「해상기문」은
조선과 서양이 최초로 맺은 외교문서로 평가.
일찍이 성리철학의 이치를 깨우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남해고도인
거문도 낙영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
김류는 궁벽한 도서 문물을 고치고
벽촌을 변화시킨 문인, 애향 운동가,
교육자로 살았으며 1884년(고종 21) 4월
우환으로 완도 땅 청산도에서 별세하였다.
청산도에는
그의 사당인
충모사가 있다.
"청산도에 가면,
글 자랑을 말라."
그에게 학문을 배웠던
그의 후학들이 많은 탓.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유촌에
유학자 김류를 모신 사당.,귤은당(橘隱堂)
귤은당은 1904년 김류(金瀏)[1814~1884]의
학식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인
박규석(朴圭錫)[1885~1923] 등이 건립.
김류는 성리학의 대가인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사사하여 40년간 의심나는 부분을
질의하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귤은당.....
부지 면적 약 330㎡,
건축 면적 13.2㎡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사주정자형(四柱亭子型)
기와집 형태이며 주위로는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귤은당(橘隱堂)이라는 현판은
기정진 후손 기우몽(寄宇蒙)이 썼고,
당기(堂記)는 1904년 일본 사신으로 가다
풍랑을 만나 거문도에 머문 이지용(李址鎔)이 썼다
귤은당은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유촌마을
거문초등학교 동도분교장 뒤편에 위치한다.
유촌마을 이장이 관리하고 있으나 행정적·
재정적 지원 부족으로 규모도 협소하고,
주변 경관 또한 매우 초라한 상태이다.
...................................................
1885년 거문도사건 때 청 제독 정여창 등이
영군동양함대 거문도 불법점령사건 조사 차
조선사신들과 함께 거문도 김상연 집에 들려
선대 훈장들의 문집을 보며 그 학문 선견에 탄식.
제1대 훈장 김윤해(金胤海 : 1720-1741)
제2대 훈장 김득택(金得澤 : 1763-1822)
제3대 훈장 김석재(金錫載 : 1786-1847)
제4대 훈장 김순태(金舜泰 : 1828-1886)
제5대 훈장 김상연(金相演 : 1856-1902)
이들은 거문도 촌장으로 섬의 어른이었고
거문도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들이었으며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며, 문장에 밝은 대문장가.
제1대 훈장 김윤해부터
제6대 김준현까지 200년 동안
장손자로 이어진., 문장가 가문.
제1대 훈장 김윤해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공신
이괄에 난을 평정했던 학성군 김완의 현손이다.
...............김완(金浣)........
경주김씨 18세 김을초 파조(派祖)
경순왕 3남 규정공파(糾正公派) 후손
김을초 장남 호연당 김자양(金自養)은
김완(金浣)의 5대조로 영천 입향조이다.
.
김완은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고,
1589년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첨사(蛇島僉使)
힘을 다해 진지를 구축해 관찰사의 장계로 승진.
옥포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右斥候將),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 척후장으로 활약.
이순신 참전 해전에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순신이 원균 모함으로
파직 당하자 원균을 보좌.
1595년(선조 28) 소금과 군량미로 비축한
미숫가루가 500석에 이르러 통제사(統制使)
이순신 장계로 한산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
1597년(선조 30)에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伏兵都將)이 되어
도장포. 다대포(多大浦)의 적을 격파
풍신수길과 맺은 삼혈맹장 등을 획득
통제사 원균(元均)에게 바쳤다.
그해 7월 부산 앞바다에서 크게 패퇴
포로가 되지 않으려 바다에 투신했으나
뜻을 못이루고 적선에 실리는 몸이 되어
안골포 왜적 본부로 압송후 왜국으로 압송.
1598년 1월 야밤에 탈출 감행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으며,
다음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여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하여
군수 박응창이 전후 사실을
보고하니 순찰사가 그 동안의
우여곡절과 적의 형세를 묻고는
공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경위를 상세하고 적고, 또한
왜국 및 부산과 동래 지역 적의 형세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왕에게 장계를 올렸다.
선조는 크게 감탄을 하며 칭찬.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사호하고,
충성과 용맹을 표창해 함안 군수 제수.
김완은 함안군수로 부임한 뒤에도
전쟁으로 부상한 군사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여 완전히 활력을 되찾게 하였으며,
사방 사람들을 화합하니 칭송이 널리 퍼졌다.
.............................................................
거문도에서 제1대 촌장이자
제1대 훈장 김윤해(1720-1741)
영조시대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통훈대부 흥양현감(고흥군수) 중
나라에 죄를 짓고 자신이 다스렸던
거문도 서도리로 귀양을 와서 서도리
북쪽해안 산짓골 옹달샘 옆 움막에 거주.
김윤해는 거문도 귀양 당시
재산은 모두 나라에 몰수되고
빈몸으로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가 서도리 북쪽해안으로 정해진 것은
조선의 모든 신하는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에
북쪽 임금을 바라보며 절(望倍)해야 하기 때문.
김윤해가 거문도로 귀양을 갈 때
아내와 여동생 독자아들 흥형(興亨).
그 내외와 흥형의 어린아들 득택(得澤) 등
모두 5명이 김윤해 따라 유배지 거문도 거주.
거문도에 들어간
김윤해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이때 서도리마을 승근네 할멈이
보리 한바가지를 건네 주었던 것.
김윤해 가족들은 양반이라 일이 서툴러
농사, 고기잡이, 해초 채취 등을 할줄 몰랐다.
김윤해 며느리는 주민에게 해녀 물질을 배웠다.
이때 거문도 주민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하며
조선. 일본. 중국 간 해상무역.
제1대 훈장 김윤해의 아들 독자 흥형은
무역선단을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할
목적으로 울릉도로 가다가 난파로 인해 숨졌다.
거문도 주민들은 장자로 이어진
이 집안의 훈장들을 '장재훈장' 즉
훈장 집안을 "짱째훈장"이라고 불렀다.
장재서숙(長齋書塾)
즉, 장재학당(長齋學堂)
거문도 사람들은.,장재(長齋)
이를 "짱째"라고 한다.
재(齋)는 학교를 말한다.
따라서 장재란 한자의 뜻은
장촌에 있는 학교라는 뜻이다.
.
청나라 제독 정여창은
삼도를 '거문도(巨文島)'로
고치도록 명령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 지명.
"3도" "해밀튼 섬".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었던.,청나라.
조선땅에 해밀튼 지명이 기분나빴던듯.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청나라 제독 정여창.
이때 청나라에서 파견한 조선사신이자
청나라 수군의 총제독이었던 정여창 등이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거문도에 들어와서
필담을 나눈 거문도 석학.,김상연(1856-1902)
김상연 선생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유
조선의 모든 사신들이 일본에 오고 갈 때
거문도에 들려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단다.
.......정여창(1836.11.18 ~1895. 2. 12)........
청일전쟁 대패 후 자살했던 청나라 해군 제독
청나라 후기에 내란, 반란과 국외문제에서 활약.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조선에 와서 임오군란 제압.
세계 8위 함대 북양함대 제독으로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과 격전을 벌렸으나 패전후 웨이하이 후퇴.
그러나 웨이하이 전투에서도 패해 일본에 항복하였다.
이후 이홍장(李鴻章)에게
일본에 패했다는 전보를
보내고., 음독 자살했다.
.............................
거문도
거문도., 영국군 수병(水兵)묘지.
영국 대사관에서 매년 방문을 하며
2009년 4월 영국여왕이 방한 했을때
제일 먼저 꼭 가보고 싶어했던 거문도.
'1926년생 영국 여왕은
왜 8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섬에 가려고 했던 것일까?'
당시, 영국여왕은
'하회마을'을 방문.
만약, 이곳도 찾았다면
거문도 백도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 않았을까?
1999년 4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3박4일 일정으로 방한.
1883년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은 이래
영국 국왕으로서는 최초의 방한이었다.
2017.10.27
'조선시대 거문도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걸까?'
'1885년(고종 22) 3월 1일~1887년 2월 5일'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한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대영제국이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 공격을 위한
공격책의 일환이었다."고 전한다.
영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해 있던
'동양함대 소속' 군함 6척과 상선 2척을
조선으로 출동시켜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
.
'거문도등대 아래 피고지는
'거문도수선화(금잔옥대)'는
처음에 누가 그곳에 심었을까?'
수선화는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
생김새가 옥대에 받혀놓은.,금 술잔.
하여, 금잔옥대(金盞玉臺)라고 부른다.
'그리스 신화' 나르시즘.,유래.
그리스 나르키소스 미소년이
'네메시스' 요정의 저주를 받아
호수에 비춰진 자기 얼굴을 사랑.
결국 호수로 뛰어들어 빠져죽는데
그 자리에 미소년의 혼이 담겨 피어난
꽃이 수선화(水仙花 ; 라틴어 나르키수스).
거문도사건 그 무렵에
거문도 주둔 영국군 수병이
고향을 그리며 심었다고 전한다.
또는 거문도처녀를 사랑하다가
물에 빠져 숨진 영국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었다고도 전한다.
거문도에 주둔했던 영국군 수병들과
거문도 주민들은 사이가 좋았다고 하며
서로 필담(筆談)으로.,의사소통을 했단다.
......................................
전남 거문도항이 서남해역의
영해관리 전진기지로 탈바꿈.
......................................
여수 12: 30 ~거문도 15:00(1회)
114.7km( 2h 30분, 요금 36,100원)
'제주도~ 거문도' 110km보다 더 멀다.
여수 ~ 나로도~ 손죽도~ 초도 ~거문도.
'여수 오동도~ 여자만' 자전거도로 41km
여자만.,소뎅이 마을
새꼬막껍질이
산을 이루고 있는
여수시.,소뎅이 마을.
'새조개 껍질'산에서.,하산.
여수 봉전(소뎅이)마을
우리나라 새꼬막(피조개)의 약65% 생산.
하늘이 닿을듯 쌓인 새꼬막(피조개)껍질과
바다 가운데 줄줄이 떠 있는.,새꼬막 잡는 배.
새꼬막 잡는 철에 소뎅이마을에 오면,
막 삶은 새꼬막과 소라를 덤으로 듬뿍 .
자연산 회 맛을 볼 수 있어 찾는 이 많다.
전어회
.
인류의
패총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소뎅이마을 갯펄.'
소뎅이 마을.,일출
..............소뎅이 마을................
1684년 함양 '강위행'이 사화를 피해
광양에서 살았으나 그의 4세손 강선호가
호랑이와 싸우다 죽어 그의 부인 달성서씨가
아들 강정열을 데리고 입향하였다고 전해온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조라포면 화로미(禾老味)라 하였다.
.
1914년 여수군 율촌면 봉전리가 되었다.
1949년 여천군 율촌면 봉전리가 되었다가
1998년 여수시 율촌면 봉전리에 속하게 되었다.
..............................................................
.
'소뎅이 마을~두렁이 마을' 비렁길.
.........................금오도(金鰲島)........................
여수시 남면에 있는 섬으로, 금오열도에서 가장 크다.
남면에서 가장 큰 섬으로 남면의 9개 리(두라리, 두모리,
심장리, 안도리, 연도리, 우학리, 유송리, 화태리, 횡간리)
중 4개 리(두모리, 심장리, 우학리, 유송리)에 걸쳐있다.
우학리에 남면사무소가 있다.
큰 자라를 닮았다하여.,金鰲島.
금오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신석기시대.
남면 유송리 여천(汝泉)마을 동쪽 바닷가 패총.
조개더미 면적은 동서 30m, 남북 15m 규모이다.
토기류는 14점으로.,굵은줄무늬, 가는줄무늬,
세모점줄무늬토기, 점줄무늬, 겹아가리토기 등.
남해안 신석기시대 출토유물들과 비슷한 편이다.
금오도는 조선시대부터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데,
바닷길과 왜구의 침입, 소나무를 기르던 봉산(封山),
금오도에 닿은 난민, 금오도 개발 등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시대 금오도는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 관(棺)을 짜거나 판옥선 전선을 만들 재료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다.
소나무 중요성 때문에 봉산으로
민간인 출입통제 기간도 길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금오도에는 항일운동 사건이 많다.
1936년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했는데,
1938년 9월에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반대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우학리 교회목사 이기풍도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기풍은 여수경찰서 투옥 중에 고문.
죽기 직전 금오도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1942, 6. 20(일) 우학리교회 목사관에서 별세.
1885년(고종 22)부터 본격적으로
금오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
어업발달로 1960년대까지 인구 급증.
하지만, 공업화 시작 후
이촌향도 현상을 가져와
1970년대부터 인구 감소.
최근, 우학리를 제외한
대부분 마을에서 인구 감소.
하여, 전설들도 빛을 잃어간다.
.
금오열도에 전해지는 전승 설화.
내외진마을의 다시랑[新郞峰] 전설,
우실마을의 옥녀봉 전설,
허민령(許民令)을 주청한 이주희,
함구미마을 비사리 구시.
용머리 바위 전설·절터 전설,
두포마을의 신선대 전설.
불무골 전설,
심포마을의 대감 산소등 전설,
안도마을의 두만안에 관한 전설,
연도마을 바위에 서씨과차(徐氏過此)
장서린(張書隣) 도둑 괴수에 관한 전설·
장군묘에 관한 전설·
속평굴 보물에 관한 전설·
용(龍)의 승천에 관한 전설,
횡간마을 원님과
강씨 벼슬 매수 전설,
신령스러운 괴목나무 전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전라남도 승주군 승주읍에
송광사와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금오도에 송광사를 짓고
왕래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영은등오기(靈隱燈蜈記)』와
『귀객기』에 전하여지고 있다.
..........................................
.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남쪽 약 25㎞.,금오열도.
.........금오열도.........
본섬 금오도를 중심으로
유인도.,안도· 연도·수항도
무인도.,대부도·검둥섬·알마도·
형제도·오동도·초삼도·외삼도 등
유인도인
안도와 연도에는
각각 출장소가 있다.
..........................
무늬오징어 낚시
..........비렁길.........
여수 금오도 비렁길은
제주도 올레길 못지 않은
여수만의 둘레길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려진 길이 되었다.
이제까지 그 어느 길도 이런 기분,
신비의 세계를 경험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울적한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다와 해안가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보는 것.
'그 섬에 가보고 싶다'
도시인 누구나 같은 생각
제주도는 멀어서 가기가 힘들고,
육지에서 가까운 섬은 섬 답지 않다.
그럴때, 현대인 마음을 사로잡는 비렁길.
.......................................................
금오도 비렁길., 트래킹
오동도~ 여자만'
자전거도로 41km
여자만
전남 여수시 화정면.,여자도
중심으로 보성군·순천시·여수시·
고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여자만.
'여자도가 있어 여자만이라 할까?'
'여자만이 있어 여자도라고 할까?'
...............여자도(汝自灣)..............
전남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에 있는 섬.
본래는 넘자섬인데, 섬의 높이가 낮아서
파도가 섬을 넘어 '넘자'가 되었다고 한다.
넘자란 말의 뜻을 한자화 한 이름으로
넘은 남이란 뜻을 가진 여(汝)로 해석하고
자는 소리 대로 표기해 자(自)로 하여 여자도.
여자도 곁에 있는 '송여자도'는
'작은 여자도' 뜻으로 본래 "솔넘자".
여기서 ‘솔’ 자는 작다는 의미라 한다.
한자로 송여자도(松汝自島)라 표기.
소나무가 많은 섬으로 오인하기 쉬워
소여자도(小汝自島)라 하는게 좋을듯.
전라남도 편찬 『도서지』에는
명칭 유래를 다음 같이 설명한다.
본 섬을 중심으로 주위에 몰려있는
도서 배열이 하늘에서 보면.,여(汝).
육지와 원거리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여
모든 생활수단을 자체 해결해야 했으므로
자(自) 자를 붙여 여자도라 하였다고 설명.
.
소여자도는 섬에
거송(巨松)이 있었으므로
송여자도(松荔自島)라고도 하였다.
400년전 낙안군 선조(보성군 벌교읍 장양리)에서
남원방씨(南原房氏)가 입도하여 마파(馬把)에 거주.
그뒤 대동에는 초계최씨(草溪崔氏)가 입도하여 거주.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대여자도와 소여자도.,2 섬.
주위에 대운두도· 장도 등 산재
대여자도는 51m,
소여자도는 48m
완만한 구릉지와 평지.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중성화산암류.
토양은 신생대 제4기 과거 고온 다습한
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진 적색토가 넓게 분포.
식생은 난대성식물 상록 활엽수림 자생지.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여수 시내에서 동쪽 44.5㎞ 지점 순천만 중앙.
대여자도 모양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다.
해안선 7.5㎞이며, 2003년 현재 면적은 0.59㎢
인구 369명, 114세대 주민 대부분 농어업을 겸.
주요 농산물은 고구마·보리·무·마늘·녹두 등.
연근해 조기·멸치·낙지·새우·장어 등이 잡히며,
새꼬막· 피조개 등의 양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취락은 주로 대여자도 북단 여자마을에 분포.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빗물을 받아 식수로 이용
여자마을에는 능선을 따라서 작은 길이 나 있다.
대여자도 북쪽에 소라초등학교 여자분교장.
교통은 소라면 복산리 섬달천에서 대여자도까지
하루 4회 운항되며 소여자도를 거쳐 30분 정도 소요,
.....................................................................
화정면 여자리.,여자도
붕장어 다리 & 여자도.
여자도.
....................여자리.........................
여수시 화정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
여수반도 서쪽 여자만의 중앙에 있는 섬마을.
여자리는 대동, 마파, 송여자 3개 마을로 구성.
여자도 마을로는 가장 큰 마을.,대동마을.
남쪽 마을은 남풍(마파람) 부는 마을.,마파지.
여자도의 작은 섬인 송여자도에는.,송여자마을.
여자도 본래 이름은 솔넘자섬.
솔은 작은 섬이란 의미를 갖지만
솔을 ‘소나무 송(松)’으로 표기하여
소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으로 오해.
마을에서 떨어진 외막골,
붉은 바위의 해변인 붉은독,
길이 만나는 곳의 의미인 질고지,
활처럼 휜 해변 활꼬밭, 효
성 깊은 며느리의 전설이 내려오는 각시바,
왜적으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최장군의 전설이 내려오는 샘북넘과 장사바구
등의 땅이름들이 전해오는데 임진왜란 무렵에
승주군 낙안에 살던 남원방씨가 이주하여
마파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초계최씨가
대동마을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뤘단다.
광산김씨, 김해김씨,
남원방씨, 초계최씨
후손들이 많이 산다.
.
1896년 돌산군이 설치되며
옥정면 여자도리가 되었다.
1914년 여수군 화정면 여자리
이때 인근의 운두도와 달천도가
여자리에 포함되었다가 1983년
운두도는 화양면으로, 달천도는
소라면으로 편입되었다.
1998년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여수시로 삼여통합됨에 따라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
해안선 길이 7.5㎞인 여자리는
대여자도와 소여자도.,2개의 섬.
가장 높은 곳도 41m로 섬 대부분이
낮은 구릉과 평지로 되어 있다.
여자도 주변의 여자만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남해안 연안 지역의 특징인 반폐쇄성 해역이다.
1982년 수산자원보전지구로 지정될 만큼
수산 자원의 서식 및 산란에 적합한 환경.
피조개, 키조개를 비롯해 각종 어종이 풍부.
2007년 말 현재 면적은 0.7㎢
총 131가구 349명 주민이 산다.
순천만, 득량만, 여자만의 중심에 위치.
면소재지 백야리 북서쪽 27.5㎞에 위치.
동쪽 4.5㎞ 지점에 화양면과 소라면,
북서쪽으로 벌교읍, 서쪽은 고흥반도.
주민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고구마·보리·무·마늘·땅콩 등이 생산되고,
참조기·멸치·낙지·새우·붕장어 등이 잡힌다.
여수시 소라면 섬달천마을 입구 도선장에서
여자리와 수시로 연결되는 나룻배가 있다.
1941년 개교한 초등학교는
1984년부터 분교가 되었다가
현재는 교사 한 명에 학생 1명.
'여자리'의 식수 사정은 좋지 않은 편인데,
그래서, 주민들은 장수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
여수 여자도 개미허리 슬롯길.
6.25전쟁 당시 전선이 여수 지방까지 남하하자
위기를 느낀 미군은 전선과 무관한 여자만 해상에
폭격해 민간인까지 피해입은.,여자만 미군폭격사건.
.............여자만 미군폭격사건............
1950년 8월 9일 여수시 여자만 해상에서
새우잡이 어부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
여자만 장도, 고흥군과
역면 백일리 원주도 사이
바다 위를 무차별 폭격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여자도 최종순(77세)
"넘자바닥을 때리고 남면으로 가서 피해가
컸다는 말을 들었다"(두룩여 사건과 같은 날)
피해 상황은 보성군 벌교읍에 속한 장도에서는
김계순[당시 40대 중반], 박산수[당시 40대 중반]와
20대의 김영희씨가 폭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박산수씨는
부상후유증으로 사망, 김영희씨는 평생을 불구로 살다가 사망.
고흥 원주도에서는 당시 2명이 사망.
자세한 사항을 아직 확인하질 못했다.
여수시 화정면에 속한 여자도에서는
기총소사로 섬 주민이 대피하던 정도.
순천에서 피난 왔던 사람이 돌아가는 배에
사격하자 물로 뛰어들어 피해를 모면했단다.
이 사건은 피해자 가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서 사건 규명을 해야하지 않을까?
.......................................................
너.,汝
스스로.,自
물굽이....,灣
여자만(汝自灣)
여자만 갯벌은 약 2,640만㎡의 광활한 지역.
전혀 훼손되지 않은 자연상태 갯벌에 다양한
생물상이 군집하여 살아가는 희귀 철새 도래지.
갯벌에 99만㎡ 갈대숲은
수산 생물서식지인 동시에
습지 생태계 유지 핵심이며,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여자만의 뛰어난 경관은 옛부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진 작품의
대상이 되며 미학적 기능이 뛰어나다.
여자만.
.............백야도 등대........
1929년에 세워진 백야도 등대는
여수와 목포간 항로의 주요 표지.
...........................................
백야도에는 백야산성이 있었고,
말을 사육하던 백야목장이 있었는데,
목장은 논과 밭으로 변하였고 백야산성터와
산봉우리에는 봉화대의 기단 일부만 남아 있다.
2012.09.02
..............백야도 조개더미.................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조개더미란 수렵·어로·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선사시대의 인류가 식료로 채집한 조개를 먹은 뒤
버린 껍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패총(貝塚).
조개더미 안에는 조개 껍질 외에도
당시의 인류가 잡아먹은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 실생활에 사용되다가
버려진 토기·석기·골각기들, 일상생활에서
남겨진 재 등도 버려져 있는 선사인 쓰레기장.
조개더미 주변에서는
이 조개더미를 조영한
사람들 집터, 매장 유구가
대규모로 조사되기도 한다.
이 유적들은 조개더미 안에서 검출된
다양한 내용물과 함께 선사시대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
................여자만(汝自灣)..................
내해는 굴곡이 심하며, 대여자도·소여자도·
대운두도·소운두도 등을 비롯한 많은 섬들과
공진반도. 운두만(雲斗灣)이 있어 해안선 복잡.
고흥반도 해창만은
우리나라 유수 간척지.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여자만 바다에는 여자도·장도·달천도
등이 있으며 청정해역으로 전어·멸치·갈치·
문어·조기 등의 어로와 김양식이 활발하다.
한편, 해안에는 넓은 개펄이 발달해 있어
제염업을 비롯해 예로부터 꼬막·피조개·굴·
바지락 등이 많이 채취되었으나, 현재 천일
제염업은 쇠퇴, 개펄을 이용한 양식업이 발달.
특히 화양면 이천리·옥적리·감도리에서는 꼬막,
소여자도에서는 피조개 양식이 행해지며,
감도에서는 전어가 많이 잡힌다.
.
우리나라에서 갯벌상태가 가장 좋은 2등급
생태적 가치가 국가적 자연 자산으로서 가치.
2003년 12월 26일 연안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
여자만 갯벌은 약 2,640만㎡.
.
국제적으로 희귀 철새 도래지.
갯벌 99만㎡ 갈대숲은 수산 생물
서식지이자 습지생태계 유지.,핵심.
만(灣) 북쪽은.,순천만.
여수 지역에서는.,여자만
이 만의 중앙에 위치한 섬
명칭 여자도에서 유래된 것.
여자만은
남북 길이 30㎞,
동서 길이 22㎞로
해수면 상승에 의해
형성된 바다이다.
최대 조차는 밀물 때 나타나며,
만 중앙부 여자도 근처에서 4.22m,
'만 입구' 낭도 근처에서는 3.88m다.
여자도 근처
밀물 썰물 때
최대 유속은
54~63㎝/sec.
낙조 시 약간 크다.
여자만 내의 수심은 27m이며,
많은 섬이 천연의 방파제 역할.
여자만 남동쪽에 있는.,조발수도.
평균 수심이 40m 내외로 가막만에서
여자만으로 들어오는.,해상 길목 요충지.
특히, 여자만은 흑두루미의 월동지
갈대가 고밀도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갈대 군락은 새들의 서식 환경에서
은신처와 먹이를 제공, 자연정화 역할을 한다.
여자만은 여수반도에서 접근할 경우,
여수시청~ 죽림~ 지방도 863호선 타고
율촌면 상봉리 연화천 하구에 이르면 도달.
여수시청에서 연화천 하구까지
승용차로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여수항에서 선편으로
여자만까지 1시간 30분.
순천 지역에서 접근하면,
순천시에서 강변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국도 2호선을 타고
목포 방향으로 들어선 다음 순천
청암대 사거리~남동쪽 대대동으로
내려오면, 여자만에 이를 수 있으며,
호남고속국도 서순천 나들목에서 15.1㎞
.....................................................
'여수 ~제주' 항로 상에서.,
중간 지점에 위치한.,거문도.
고흥반도 남쪽 끝에서.,40km.
.................녹동항(鹿洞港).................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어항이다.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관리청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관리자 고흥군수.
소록도 동측 돌출부에서 정동으로 250m.
점(해상)에서 정북 육지부를 연결하고
소록도 산 정상에서 정서로 650m 점(해상)과
이점에서 육지부를 잇는 선 따라 형성된 공유수면.
녹동항은 인근 섬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이며
각 섬에서 생산되는 활어, 선어, 김, 미역, 멸치 등
고흥군 유인도 16개, 무인도 154 섬의 해산물 집산지.
.....................................................................
1박2일 바다낚시 매니아들이
즐겨찾는.,녹동항 앞 갯바위 낚시.
고흥 갯바위 포인트.,병풍도 '중간여'
고흥 앞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바다 양식장들도 있다.
낚시배는 거미줄 같은 미로 사이로 다닌다.
낚시배가 길을 벗어나면
위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무수한 암초와 어장 그물들.
'1박2일' 새벽 일찍 낚시배를 타고
먼동이 터오는 바다를 누비면.,황홀경.
새벽 밤하늘에서 은하수 별빛이 스러진다.
그위로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허공에 솟는다.
형광물질 빛나는 새벽 밤바다.
형광물질을 뚫고서 솟는 물고기.
마치, 별천지에 사는 생명체 같다.
번쩍거리는.,물고기 비늘.
마구, 용솟음치는 지느라미.
물때 맞으면 쉴새없이 잡힌다.
어설프게 큰 놈은
미끼가 아까울 정도.
가끔, 장어와 도다리가
낚시바늘에 동시에 걸리면
허공에서 빙빙 돌며.,야단법석.
"놓아 줘~
애원하잖아"
"놓아주기도 그렇고
"잡아서 담기도 그렇고~"
"횟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요란 떨기는.,쯧쯧."
하루에 섬 한군데씩 쏘다녀도
일년 365일에 구경 못할 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섬들과 갯바위 낚시터.
고흥반도 앞바다에
이렇게 많은 섬들은
언제 형성되었던걸까?
고인돌이
1천여 기나
있는 고흥반도.
청동기시대
1만2천년 전후.
지구온난화 전까지
섬이 아닌 뭍이였을듯.
두원면 운대리 출토 비파형동검편·석검.
소록도 출토 구리거울·돌도끼·돌살촉을 비롯
반월형돌칼·유구석구 등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고인돌은 저지대민족들이
지구온난화 대홍수 시절 전후
저지대에서 육지로 탈출했던 흔적.
'거문도, 백도 일대까지
바다물이 비워져 있었던
저지대 육지가 아니었을까?'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m 전방에 작은 사슴처럼 아름다운.,소록도.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는 섬.
고흥반도 녹동항 남쪽 400m,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섬이다.
남쪽으론 거금도(居金島)와 인접.
동경 127°07′, 북위 34°31′에 위치.
지형이 '어린 사슴'
같아.,'소록(小鹿)'
1950~60년대 소록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
즉, 2곳으로 나눠진다.
환자 탈출을 막기 위해
철조망이 둘러쳐 있다.
아무리 나환자촌이라도
사랑은 꽃을 피우는 법.
병사지대 원생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에
육지에서는 이들 자녀를
받아주는 보호소가 없었다.
결국, 전염을 우려하여 직원지대
소록도 내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자식 간 생이별.
그러나, 아이들 부모와 자식 간에
철조망 도로 즉 경계선 양편에 서서
한달에 단 한번씩 면회시간을 가졌다.
면회장소 위치는
바람 방향에 따라
매달 바뀌었다 한다.
이들 자녀는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부모와 자식 간 상봉.
수심과 탄식의
부모 자녀간 면회처
소록도 수탄장(愁嘆場)
.
부모 자식 간, 거리는 불과 5m 남짓.
그러나,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 수 없었다.
병이 전염될까봐 마주보며 서로 넘지 못한 선.
엄마 품에 몹시 안기고 싶었던 아이.
그 아이를 바라만 보아야 했던 모정(母情)
그저 자식의 이름만 부르면서 눈물만 흘릴 뿐.
엄마가 눈물로 던져주는 사탕조차
전염을 우려하여 받을 수 없는 자녀들.
그러한 아이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
1916년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
1959년 마리안느 수녀 소록도에 첫발.
1962년 마가렛 수녀가 소록도를 찾았다.
.
오스트리아에서 소록도로 온.,두 수녀.
'마리안느 스퇴거' & '마가렛 피사레크'.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국립간호학교 졸업.
수많은 사람들이 꺼리던 한센인들을
고국 구호단체에 의약품 지원도 요청.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지면서 치료.
.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환자마을을 돌았다.
소록도 환자들은 두 수녀를 '할매'라 불렀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80평생 살아왔던 '할매'
.
두 할매는 상이나 인터뷰 거절.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 만 받았다.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소록도까지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던 두 할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 우유 간식비로 사용.
그리고 치유가 되어
소록도를 떠나는 이들
노자로 나눠줄 정도였다.
또 한센인 자녀를 위한
유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사업에 헌신.
그랬던 두 할매가
80대 고령으로 인해
더 봉사할 수 없게 되자
2005년 40여 년간 머물렀던
섬에 편지 한장 남긴채 떠났다.
.......두 수녀의 편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떠납니다.
이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
두 수녀의 귀향길에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낡은 가방 하나씩 뿐이었다.
.
2017년 8월
오스트렐리아
치매 요양원에서
"소록도를 떠날 당시
대장암 판정을 받았는데
짐이 되고싶지 않아 떠났어요."
현재, 치매 요양원에
계시는., 마가렛 수녀.
"요즘 나이가 들어
기억이 잘 안나는데
한국말과 소록도는.,
잊혀지지가 않아요."
"잊을 수가 없지
너무 행복했으니까"
'고흥 녹동항 ~ 거문도' 58km
'여수항 ~ 거문도' 114.7km
'거문도 ~ 백도' 28km.
........거문도 뱃노래............
전남 거문도 어민들의 노동요.
<고사소리>·<술비소리>·<놋소리>·
<월래소리>·<가래소리>·<썰소리>가 있다.
<고사소리>
고기잡이 배가 떠나기 전에
풍어(豊漁)를 비는 의식요인데,
자진모리장단으로 길게 엮어 부른다.
<술비소리>
배의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소리.,"술비소리"
‘에이야라 술비야’
하고 받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 소리는
3분박(三分拍)의
보통 빠른 3박자로
세마치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을 메기면
어부들이.,"에이야라~ 술비야"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는데,
‘솔’로 마치는 5음음계로 평조.
웅장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놋소리>
어부들이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들고 나며
부르는 소리이다.
이 소리는
3분박 좀 빠른 4박자로
늦은 자진모리에 맞는다.
도사공(都沙工)이 한 장단을 메기면
어부들이 ‘어야듸야’ 하면서 장단을 받는다.
<놋소리>의 선율은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는데,
‘미’로 마치는 5음의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으나 경상도 민요보다 시김새
(표현기법)가 단순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월래소리>
바다에 쳐놓은 그물을
여러 어부들이 힘을 합하여
한가닥씩 끌어당겨 배에 올려
놓으면서 부르는 소리로, 이 소리를
"월래소리"라고 함은 이 소리의 뒷소리가
‘월래보자’라고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월래보자’라고 함은
올려 보자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사공이
한 장단을 메기면
어부들이 ‘월래보자’
하고 받는다.
선율의 구성음은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는데,
‘미’로 마치는 5음의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고
씩씩하게 들린다.
<가래소리>
그물에 걸려 들어온 고기를
가래로 퍼담으며 부르는 소리.
이 소리는
3분박 좀 빠른 3박자로
세마치장단에 맞는다.
도사공이
두 장단을 메기면
어부들이 두 장단을
‘어낭성 가래야’
하고 받는다.
선율은
<놋소리>와 같이
5음의 메나리토리.
.
<썰소리>
만선이 되어 들어오며 부르는 소리
기능은 다른 고장에서<배치기소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입상.
"♬거문도뱃노래 ♬"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필자 주............
1882년에 고종에 의해 파견된
검찰사 이규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울릉도에 거주하는 주민 80%가
거문도 등 전라도에서 건너온 사람들.
또한 이들은
거문도에서 출발,
울릉도 어업활동 이후,
선박을 건조해서 가을에
거문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
거문도 뱃노래
.
♬ 올레보자."
동에는 청제용왕신 (올레보자)
남에는 적제용왕신(올레보자)
서에는 백제용왕신(올레보자)
북에는 흑제용왕신(올레보자)
중앙으로 황제용왕신(올레보자)
용왕신께는 빌었으니(올레보자)
수중 해물을 만났어도(올레보자)
도장원을 허였네그려(올레보자)
우리 배에 만선을 허여(올레보자)
돛대 우에다 봉기를 꼽고(올레보자)
봉기 우에다 연화를 받어(올레보자)
선영봉제를 잘도나 허겄네(올레보자)
♬ 올레보자(올레보자) ♬
여수 여자만 낙조
여자만 여자도
여자만(汝自灣)은 바다 가운데
여자도(汝自島)라는 섬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여수, 순천, 벌교,
보성을 포함한.,서남해에서는 큰바다.
.....여자만 갯벌., 노을축제.........
여자만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과
해안도로에 군데군데 위치한 카페촌,
점점이 떠있는 아름다운 섬들을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바다를 거닐며, 낭만을 느끼고,
연인 및 가족들과 다양한 바다체험을 통해서
두고두고 잊지못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축제.
.............................................................
2017년 9월 23일~24일
여자만 갯벌노을 체험행사.
소라면 해넘이길 일원에서 개최
2017.09.23
2013.06.23
2013.06.23
여자만 장도 & 벌교 꼬막정식
...........여수·순천10·19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 반란과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에
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
여순사건 주동자였던 김지회(金知會),
홍순석(洪淳錫)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
그중 좌파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
이는 당시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신경쓰지 않은 점에서 기인.
이후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新月里)에서
제14연대가 창설되었고, 창설 요원 가운데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
창설 과정에서 좌익계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 모병하였으며, 그 결과 연대 내에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제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 감정도 봉기 원인이 되었다.
창군 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제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경 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제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적개심을 갖는 계기.
여수·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을 보면,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좌·우익간 공존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 간 충돌은 유혈사태로도 이어졌고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 투쟁이 점차 급진·폭력화되자
이 지역에서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 형태로 변모되어 갔던 것이다.
제14연대의 반란은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이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
1948년 10월 15~16일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 진압목적으로 제14연대
제주도 파병계획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는 연대 내 남로당 조직에도 전파.
이때는 반이승만 계열로 간주되던
전임 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이
상부에 의해 체포된지 한달쯤 전 시점.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
연대 내의 남로당 조직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14연대에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소집시킨 지창수.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 사병들이 여기 찬동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여수로 진격.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은
1,000~2,000명 정도로 추산.
무방비 상태 여수는 곧 함락.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진격.
순천 경찰은 이에 응전하였으나
패퇴했고,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제4연대
소속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
22일 전남 동부 6개 군을 장악.
.
한편 여수·순천 지역에서는
반란군의 점령에 호응하여
지역의 좌익 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인민위원회가 설치
일부 학생들이 반란군 가담
이 지역의 좌익 지하조직은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 시작.
남로당은 급격하게 진전되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 우익 인사·경찰관 및 그들의
가족들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에서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
제14연대 반란소식이 상부로
전해진 시기는 19~20일 새벽.
20일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백선엽.
정보국장이 맡았고,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섰다.
10월 21일 정부에 의해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
같은 날 반란군과 진압군 간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
여기서 승기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하루 교전 끝에 23일 순천을 장악.
반란군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
진압군에 대항한
반란군 잔여 병력과
무장 시민들뿐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
10월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 준장이 이끈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 반란군 기습을 받고 후퇴.
여수 공략전이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 25 재차 탈환 작전.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
이미 반란군 주력이 빠져나간 여수.
극소수 반란군과 무장한 일부 민간뿐.
이틀간 시가전 끝에 여수는 10.27 장악.
이로써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반란군 진압 과정에서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초기 진압작전 실패로
궁지에 몰렸던 진압군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했던 것.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를 색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
반란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 통해 계속.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빨치산로서 활동.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은 1
195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며,
민간인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1949. 10. 19~27'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피해에 관해서 다양한 통계가 확인.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호로 집계.
여순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통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좌파 계열 공세에 나섰다.
김구를 비롯한
반이승만 계열의
우파도 공격받았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건 직후
‘극우의 정객’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기도하였다고 주장
김구를 비판하기도 하였고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
1948. 12. 1일 국가보안법 제정.
이 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
숙군사업 강화로 이어졌고,
하여, 5% 장병이 군을 떠났다.
........................................
..........벌교(筏橋)..........
북쪽과 동쪽으로는 순천시,
남쪽으로는 고흥군에 접한다.
본래 낙안군 고상, 고하, 남상, 남하면
1908년 고상면 남면으로 통폐합되어 보성군 편입
1915년 고상면과 남면이 병합되어 벌교면이 되었다.
1922년 이후 경전선 철도가 지나면서
벌교역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일제 강점기 동안 전남 동부지방의 물산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창구가 되며, 이에 따라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1937년 읍으로 승격.
해방 이후 쇠락하였으나,
여전히 보성군 인구의 30% 이상
벌교읍은 보성읍보다도 인구가 많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
특산물로는 꼬막 , 딸기 가 유명.
벌교 꼬막은 겨울철에 먹어야 별미.
..............................................
고흥벌교.,해안도로
2017.09.19
여수 여자만 일몰.
여수시 여자만 갯벌.
여수시 여수만 노을산책 팬션 길.
..................여수항(麗水港)..................
면적 4.15㎢ 무역항이며, 한국 제2의 수산항.
자산공원 중심으로 신항인 북항과 구항인 남항.
여수항은 많은 섬들이 천연방파제, 수심이 깊고
항만이 넓어 훌륭한 천연적인 자연조건을 갖췄다.
옛부터 군사상 중요한 해상전략기지,
일제가 대륙진출 목적으로 철도부설 때
신항을 축조했으며 출항화물 244만 5,288t
유류·양곡·비료·시멘트 등 유류가 95%를 차지.
구항은 수산물 집산
및 유통의 중심지이며,
연안항로의 기항지이다.
신항은 일반 화물을 주로 취급한다.
여수항은 한려수도와 뱃길로 이어지며,
동백나무숲과 시누대 숲이 우거진 오동도를
비롯 돌산도·금오도·남해도가 연결되는 관광항구.
.................................................................
.
.........여수 하멜전시관..........
1663~ 1666 여수에 억류되었다가
일본 나가사키 항으로 탈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하멜등대와 함께 건축.
하멜은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해
1663년 7월 여수 전라좌수영 배치.
온갖 잡역에 종사하면서 억류 생활.
하멜등대 위치가 하멜이
우리나라를 떠난 곳이다.
2005년 3월 국제 로터리클럽
창립 100주년을 맞아 여수지역
로터리인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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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불카에서 바라본.,여수항.
한려수도 관광 1번지.,오동도
오동도., 유람선 선착장.
오동도
오동도 용굴
오동도 용굴
오동도 등대
여수항 일출
.
.
조선시대 - 여수(麗水) 이야기
.
.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요충지.,여수.
선사시대부터 일본과 교류한.,한 중 일 해상항로.
기원 전 4~5세기경 연안을 따라 요동반도와도 교류.
삼한시대 철 무역을 통해 왜, 낭랑, 대방과 교류
옛부터 여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한 항구.
신석기시대 패총과 문헌 기록에 따르면
남해안의 중심 항구로 크게 번성한 여수.
'고려~조선시대 조운로'의 거점항이었다.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 마지막 종착지.,일본.
여수는 일본을 오가는 해상실크로드 국제항구.
한반도 내에서는 남해안의 중심 항구였던.,여수.
서울에서 새벽에 떠나면
여수항 앞바다를 바라보며.,
복지리국 아침도 즐길 수 있다.
1968년 우리나라 최초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한려수도. 한산도에서 여수까지 300리 아름다운 뱃길에서 유래되었다. 공원의 범위는 거제 지심도 ~ 여수 오동도에 이르는 6개 지구.
거제, 통영, 사천, 하동, 남해, 여수 오동도 전체 면적 545.627km2 중 해상 면적이 72% 매년 100만명 이상 탐방 관광객이 즐겨찾는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기점이자 종점.,여수 오동도. 오동도는 1,213m 방파제로 육지와 이어져 있는 섬. 오동도 섬안을 일주하는 산책로의 길이는 1,350m 정도.
여수 한가운데 바다에 둥둥 떠있는.,오동도. 면적 0.12㎢, 해안 14㎞, 인구 11, 가구 4(2003). 해삼·멍게·소라·성게·전복 도미·민어 등이 잡힌다.
오동도 갯바위에 가면 해삼 멍게 등을 맛볼 수 있다. 50년 간 물질 했다는.,2~3 해녀 할머니가 벌린 좌판. 오동도 앞바다에서 갓 잡아와 먹음직한., 해삼, 멍게.
멀리서 보면, 마치 오동잎 같은.,오동도. 옛날에 오동나무가 울창해 명명된 지명이다. 또한, 신이대(시누대)가 섬 전체에 자생해.,죽도.
임진왜란 당시 수군 연병장으로 이용되었으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신이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10만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소라바위, 병풍바위, 지붕바위, 코끼리바위, 용굴 등 기암절벽이 절경이고 다양한 난대성 식물이 자생한다. 동백,·신이대, 후박, 예덕, 광,·돈 등 193종 수목 자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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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따뜻한 전남 남쪽 미항.,여수
여수(濾水)는 “물이 좋다”는 뜻 지명이다.
우리나라 대표적 미항이자 손꼽히는 휴양지.
고려 왕건이 삼국 통일 후에 전국 순행 중 여수에 들러,
“이 곳이 인심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이냐?”
묻자 신하들이 “물이 좋아 인심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
여수(濾水)라는 지명의 유래가 흥미롭다.
고서(古書)에 여수(呂水)라는 지명도 있다.
여수의 지형을 쏙 빼 닮은듯한 한자어.,呂水.
여수는 유인도 51개와 무인도 269개 등 총 317개 섬이
바다 위에 연꽃처럼 내려앉아 넓은 바다에 꽃이 피어난듯..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보여주는.,화려한 물의 도시.,여수(濾水)
....................여수시(麗水市 )..........................
동쪽은 여수수도(麗水水道)를 끼고 경상남도 남해군,
서쪽은 순천만을 끼고 고흥반도의 동남쪽과 바다로 경계
남쪽은 남해, 북쪽은 순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3′∼127°54′,
북위 34°00′∼34°53′
면적 508.84㎢
인구 29만 168명(2015)
행정구역 - 1개 읍, 6개 면,
20개 행정동(51개 법정동),
208개 행정리(63개 법정리)
시청은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으나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안도·돌산도·연도
특히 ‘안도 조개더미’에서 신석기시대의
다양한 토기·토기편, 돌칼, 돌도끼, 골각기,
어망추, 사람 머리뼈 등이 발굴된 바 있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유물
석기와 토기가 돌산읍 둔전리·죽포리,
남면 소리도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돌산읍·율촌면·
소라면·화양면,
둔덕동·오림동·
봉제동·중흥동
등에 약 500기
분포되어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여러 소국 중에서
원지국(爰池國)이 여수반도에 있었다는
견해가 주장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으로서
지금의 여수지역에 원촌현(猿村縣)이,
지금의 돌산지역에 돌산현(突山縣)이 두어져
감평군(欿平郡) 또는 삽평군(歃平郡)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이 감평 또는 삽평이라는 칭호는
꽂을 삽(揷)이 오기되어 마실 삽(歃) 또는
감(欿)으로 변이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삽평군(揷平郡) 또는 고지들이라 해야 옳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감평군
(昇平郡)으로 개칭되면서
그 예하의 원촌현은
해읍현(海邑縣)으로,
돌산현은 여산현(廬山縣:
『세종실록지리지』에는
盧山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으로 개칭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견훤이 기병하여
무진주에 근거를 두자 후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940년(태조 23)해읍현이 여수현(麗水縣)으로,
여산현이 다시 돌산현으로 개칭되었다.
이 두 현은 여전히 승평군의 속현이었다.
현지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를 통해 이 지역에는
여수현·돌산현 외에 삼일포향(三日浦鄕)·
정방향(正方鄕)·진례부곡(進禮部曲)·
소라포부곡(召羅浦部曲) 등이 있었다.
1350년(충정왕 2)
처음 현령이 파견되어
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공민왕 때 유탁(柳濯)이 장생포(長生浦)에서,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장생포곡 長生浦曲〉
이라는 전승가가 불리게 되었다.
이 후 남해안 방위의 요충지가 되어
많은 진포가 설치되는 군사지역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폐현이 되었다가
다시 순천도호부에 편입되어
조선시대 동안 계속되었다.
같은 때 진례(進禮)에 진이 설치되었다가,
1423년(세종 5)진례만호진이 폐지되었고,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이 설치되었다.
1479년(성종 10) 진이 폐지되었고
대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됨으로써
전라도 동남부의 수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1485년부터 전라좌수영성이
5년 8개월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이 좌수영함대를 주축으로
하여 일본의 해군을 격파했다. 이 고장 출신
황득중(黃得中)도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전라·경상·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601년 통제영이
경상도 거제로
옮겨감으로써
좌수영만
남게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
(統制李公水軍大捷碑)
가 세워졌다.
1725년(영조 1)여수도호부가 설치되어
전라좌수사를 겸임하게 했다가
이듬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진남관(鎭南館)과
오림동·문수동·미평동 등에 성지가 있다.
1885년(고종 22년) 4월 23일
영국군이 삼산면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1887년 3월 1일까지 주둔한 거문도점령사건.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군이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하여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었고,
1896년 도서지방에 돌산군이 신설.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되어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었는데,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
뒤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종래의 4개 면이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년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관내의 5개 면이 여수군으로
편입되어 10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31년여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정용수(丁龍洙) 등
유림 30여명이 백기통곡단을 조직하여
국권상실을 애통해하였다. 또한 유봉목(兪鳳穆)·
이선우(李善雨) 등이 여수간이수산학교를 중심으로
거사계획을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여수수산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함께 궐기하였다. 이 밖에 김백평(金百枰)·
이상호(李祥昊) 등을 중심으로 한
맞돕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1948년 10월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10여 일 후에 진압되었으나
이곳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49년 6월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8월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12월 1일에는 돌산대교가 착공되어
1984년에 준공되었다. 1986년 1월 1일에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다.
1987년경호동 일부가 여천시로 편입되었다.
다시 1998년 4월 1일에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여수시가 되었다.
................
................
이순신 전적지(戰跡地)였으므로
그와 관련된 무용담이 많이 전한다.
삼산면 동도리 죽촌마을의 바닷가에
오척단구(五尺短軀)의 늙은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마을의 한 선주가 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리고 와서 몸을 주무르고,
미음을 먹이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는 오돌래(吳突來)라는 사람으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정신을 잃은 것.
고향을 묻자 아무것도 묻지 말라며,
일자리나 하나 마련해주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선주가 마침 울릉도로
일을 나가려던 참이라
배젓꾼이 필요했기에
그를 쓰기로 하였다.
동도를 떠나 한 달 만에
울릉도에 무사히 도착하여
마른 미역과 재물을 가득
싣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오영감은
배를 타고나서부터
계속 먹고 자기만 할 뿐
통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다른 선원들이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배가 바다
한중간에 이르렀을 때,
해적선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선원들은 오영감을 발로 차 깨우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오영감은
어이없게도 해적 배가 우리 배보다
훨씬 좋으니 그 배로 갈아타고
고향에 돌아가자며,
돈궤를 짊어지고
다른 선원들을 재촉하며
앞장서서 해적선으로 올랐다.
해적들이 빼앗은
재물과 선원들을 싣고
뱃머리를 일본으로 돌리려 하자,
오영감은 선수를 빼앗아
동도 쪽으로 돌리고,
돛대를 쑥 뽑아 던져버렸다.
오영감의 엄청난 용력에
혼비백산한 해적들은
그를 두목으로 받들겠다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오영감은 해적들의
재물 절반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절반을 돌려주며 다시는 해적질을
하지 말라고 타일러 보냈다.
그 뒤부터 이쪽 뱃사람들은
해적선을 본 일이 없게 되었고,
힘세고 의리 있는 사람을 일컬어
오돌래 같은 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
......................
.
이 밖에도 종고산은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던 날 종소리도 같고
북소리도 같은 소리가 연 3일간이나
났다 하여, 이순신이 이 산의 이름을
‘종고산(鐘鼓山)’ 이라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
...........
...........
또 오동도에
동백꽃이 피게 된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에 오동도에 귀양온 한 쌍의 부부가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어
아내의 몸까지 요구하였다.
아내는 달아나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던 남편이
물 위에 떠오른 아내의 시신을
거두어 섬 정상에 묻었다.
그 뒤 아내의 무덤에서는
눈보라 속에서도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동백꽃이고,
이 꽃이 온 섬으로 번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
...........
또 옛날 자산〔尺山〕에 살던 토끼가
오동도 구경을 하고 싶어 거북이에게
데려다주면 좋은 보물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거북이 등에 올라 오동도를 구경했다.
구경을 다한 토끼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거북이는 토끼의 껍질을 벗기고 가버렸다.
이곳을 지나던 토신이 토끼를 가련히 여겨
억새풀밭에 가서 뒹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토끼는 전보다
더 좋은 옷을 입게 되었으나
벙어리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
...........
그 밖에 태몽을
발설하지 말라는
삼신(三神)의 말을 어겨
벙어리장수를 낳았다는
「영구이야기」,
화정면 화상마을의
「마녀목전설」,
「백도 매바위전설」,
소라면 현천리의
「쌀굴과 메뚜기바위전설」,
삼산면 서도리의
「용연(龍淵)의 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는
다양한 어업노동요와
「시집살이노래」·「화투타령」·
「가래질노래」·「목화 따는 처녀」
등을 비롯하여 줄다리기할 때 부르는
「덜이덜롱」 등 많은 민요가 구전되고 있다.
다른 지방의 「강강수월래」나
「쾌지나칭칭나네」에 상대되는
「덜이덜롱」이라는 민요는
전라좌수영 일대인
여수·순천지역에서도
많이 불리었다.
남해바다와 면해 있어
어로행위(漁撈行爲)와 관계되는
어업노동요가 전승되고 있다.
특히 「거문도뱃노래」와
「거문도술비야」가 많이
불리는 어업노동요이다.
「거문도뱃노래」는
‘놋소리’·‘월래소리’
·‘가래소리’
·‘썰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만선의 꿈을 안고 출어하는 데에서부터
어로작업을 통해 고기를 잡아서 가족을 생각하며
귀항하는 과정까지의 내용을 각 노동의 속도에 맞추어
부르는 이 노래는 이 고장 특유의 어로노동요이다.
“어야듸야/어야듸야/
어서들가세/어야듸야/
가가가가 어서가세/어야듸야/
어장터로 가세…….”하는 ‘놋소리’는
8박(拍)으로 배 위에서 그물을 정리하면서
속도에 맞추어 힘차게 부른다.
“월래보자/월래보자/
그물을 당겨보세/월래보자/
이그물을 안헝크러지게 어서당그소/
…….”하는 ‘월래소리’는 그물을 당기는
속도에 맞추어 4박, 8박, 12박으로 점점 빨라진다.
‘가래소리’는
고기를 풀 때 부르는 소리로
“어랑성 가래야 어랑성 가래야/
여기도 퍼실코 저기도 퍼실코/
어랑성 가래야 어랑성 가래야/
이가래가 뉘가래꼬…….”와 같다.
‘썰소리’는
고기를 많이
잡아 돌아오면서
부르는 소리로,
“어허 어기어/어허―어허기어/
우리쥔네 마누라 궁둥이를 친다/
어허―어허기어/에―이멸치잡어 보리폴고/
어허―어허기어/쌀팔아 자식들먹고……
만선이다 만선이다/이영차/
이웃집 마누라도/
이영차/궁둥이 춤이오/
이영차/…….”
처럼 육지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또
“에이야라 술비야/
에이야라 술비야/
너는주고 나는받고/
에이야라 술비야/
까지까지 돌려보세/
에이야라 술비야/
이번막고 금쳐놓세/
에이야라 술비야/
살살비벼라 꼬시락든다/
…….”하는 「술비소리」가 있는데
칡넝쿨과 새끼 등을 엮어 큰 밧줄을
만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밖에
「흥글노래」, 「베틀가」,
「방아타령」, 「물레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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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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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손죽도(巽竹島)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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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이 섬 앞바다에서
이대원(李大源)이 왜구들과 싸우다
순국하여 이곳 주민들은 장군을 잃었다는
뜻으로 이 섬을 손대도(損大島)라 부르다가
손죽도로 개칭되었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은
장군을 모신 사당을 짓고 매년 3월 3일에 제사.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손죽도라는 지명은 존재했다.
섬에 시누대가 많아 시누대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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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동경 127°21′, 북위 34°16′에 위치
여수에서 남서쪽으로.,58㎞ 지점.
면적은 2.92㎢
해안선 11.6㎞.
손죽도를 비롯
주변의 여러 섬이
손죽열도를 형성한다.
2009년 인구 155명(남 74명, 여 81명)
84세대 취락은 북쪽 해안의 만에 위치한
선착장을 중심으로 한 완경사지에 집중 분포.
논 0.02㎢, 밭 0.58㎢, 임야 2.16㎢.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치중하며
고구마·마늘·감자·보리·양파·콩 등이 생산
연근해의 수심은 10~30m로
문어·삼치·방어·도미 등이 잡히고,
자연산 톳의 채취와 미역·김 양식 활발
교통은 여수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
교육기관 - 초도초등학교 손죽분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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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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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 백도'
행정구역 상으로.,
여수시 삼삼면에 속.
...........................
'거문도~백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거리 상으로는., 고흥군에 가까웁지만
생활권역으론., 여수시에 밀접한 편이다.
'거문도 ~백도' 해역은
남해안에서도.,황금어장.
한때는 국내 4대 파시 어장.
.
거문도에는
조선 후기에
내란, 전란을 피해
입도한 주민들이 많다.
고흥군의 역사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고흥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봉래면 외나로도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민무늬토기와
군의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
.
고인돌 아래에서 발견된 간돌칼·김해토기편·
간돌화살촉·돌도끼·잔무늬거울·세형동검편
등이 있으며 도화면 일대에서는 석실분이 발견.
.
마한 54국 중에 초리국(楚離國)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
백제의 영역에 들어간 뒤 이 지방은
분차군(分嵯郡: 낙안)의 영역에 속했고
비사현(比史縣: 동강)·조조례현(助助禮縣 남양)·
두힐현(豆肸縣: 두원) 등의 여러 현이 있었다.
신라시대를 통해 이들 현 외의 고흥지역은
보성군에 소속된 부곡지역이었다고 전한다.
1285년(충렬왕 11)묘부곡 출신 유비(柳庇)가
몽고어에 능통해 자주 원나라에 사신으로 내왕
능란한 외교수완을 발휘해 국왕의 총애를 얻자
고이부곡(묘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켰고
비로소 감무를 두게 되었으며, 보성군의
식촌부곡과 장흥부의 도량부곡을 거느렸다.
고려 말의 인물로는
왜구의 격퇴 및 내정에
업적을 남긴 유탁(柳濯).
1395년(태조 4)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현치소를 보성군 속현 조양(兆陽)으로 이전
1397년 진을 설치해 병마사로 하여금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했다가
1423년(세종 5)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바꾸어
지현사(知縣事)를 겸하도록 하였다.
1441년장흥부의 속현인
두원현으로 다시 옮겨갔다가,
보성군의 남양현 및 동강·풍양·도화
등의 여러 현을 편입시켜 고흥과 남양의
이름을 따 흥양현(興陽縣)으로 개정하였다.
이 때 흥양읍성을 쌓았다.
예하에 발포진(鉢浦鎭)·
사도진(蛇渡鎭)·여도진(呂渡鎭)·
녹도진(鹿島鎭) 등의 4영을 거느렸는데,
이 영들은 1480년(성종 11) 설치된 좌수영 소속.
1587년(선조 20) 왜구 침입시에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과 군관인
박관·박면 등 전사를 기려 쌍충사 건립.
.
1592년 임진왜란 때
송대립(宋大立)의 의병군이
한천령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이일을 추모하는.,한천령노래.
조선 세종 때 대마도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유습(柳濕) 또한 유명하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 때는
유희도(柳希道)·구기서(具起瑞)·
송연호(宋年浩) 등이 이끄는
3천 동학군이 백산전투에 참여,
이어 9월의 재봉기 때도 참여.
1895년의 관제개혁 때
흥양군으로 되어
13개면을 관할.
1906년부터 1907년까지는
신기휴(申基休)·이병태(李秉泰)
등의 의병장이 활약하였으며,
1906년이근택(李根澤) 암살사건의
주모인물 기산도(奇山度)가
도화면에 거주하면서
교육활동에 종사했고
3·1만세시위도 주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흥양에서 다시 고흥군으로 개칭
완도군에 소속된 득량도와
돌산군 소속의 금산·봉래·옥정
등의 면을 편입해 13개 면
132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9년 3·1만세시위 때는
오석주(吳錫柱)·신의구(申義求)
등이 주도해 4월 14일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는
이 고장 출신 김재용(金在鎔)이 순국
그의 사적비가 과역면 과역리에 세워졌다.
1948년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의 여파로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
1973년 7월 1일도양면이 읍으로 승격
1979년 5월 1일고흥면이 읍으로 승격
1983년 2월 15일도양읍 도덕출장소가
도덕면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은 순천만을 건너 여수시,
서쪽은 보성만을 건너 보성군·
장흥군·완도군과 마주보며,
남쪽은 제주해협과 임하고,
북쪽은 보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05′∼127°40′,
북위 34°18′∼ 34°50′
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807.34㎢
인구는 6만 8601명(2015.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14개 면,
515개 행정리
(131개 법정리).
군청은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다.
고흥반도와 벌교읍 간 지협 사이로
소백산맥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
산이 62.4%를 차지할 정도이나
대부분 500m 내외의 낮은 구릉.
동쪽에 팔영산(八影山, 609m),
중앙에 운람산(雲嵐山, 487m),
남서쪽에 조계산(473m) 천등산(554m),
남쪽에 마복산(539m) 등이 솟아 있어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은 지형이다.
팔영산은 고흥군의 진산으로서
원래 팔전산(八顚山)이라 했으나
중국 위왕의 세수대야에 팔봉이 비치어
신하들을 보내어 찾게해 고흥반도에서 발견
팔영산 위용이 중국까지
전해졌다는 고사에 의해
여덟 봉우리를 의미하는
팔영산으로 고쳐 불렀단다.
또 다른 설화로는
산봉우리 그림자가
한양까지 드리워졌다
하여., 팔영산(八影山)
고흥군에는.
고인돌이 1,000여 개
유물로는 두원면 운대리
출토 비파형동검편·석검과
소록도 출토 구리거울·돌도끼·
돌살촉을 비롯해 반월형돌칼·
유구석구 등 많은 석기류가 발견.
삼국시대의 고분인 석실분이
도화면 봉룡리와 당오리에 있다.
동강면
고흥유둔리덕암지석묘
(전라남도 기념물 제159호),
남양면 고흥중산리지석묘군
(전라남도 기념물 제160호),
과역면
고흥과역리민등지석묘군
(전라남도 기념물 제161호),
고흥도청리지석묘군
(전라남도기념물 제197호) 등.
...............
...............
고흥군 대표적 설화
<쇠섬[牛島] 이야기>
옛날 세상이 어지럽고 흉년이 겹쳐
민심이 흉흉한 때 책 읽기에 골몰하던
어느 가난한 선비가 혼인을 했는데,
그 아내가 절세가인이었다.
산간벽지라 살기 어려워
차라리 섬이 먹고 살기에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섬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빠지면
육지와 이어져 생활에 편리하였다.
하루는 뭍에 나간 남편이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더니
사흘 만에 전장에 나간다는 서찰을
인편에 보내왔고, 그로부터 얼마 후
남편이 전사했다는 기별이 날아들었다.
선비의 아내는
기별 받은 날로
기일을 정해 시묘했는데,
건너편 뭍에 사는 부잣집 아들이
그녀의 미색을 탐내어 묘막으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얻고 싶거든
뒷산 상봉에 올라 동쪽을 보고 크게
소 울음소리를 세 번 내고 오라고 하였다.
부잣집 아들이 뒷산에 오르는 사이에
그녀는 옷고름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 슬픈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섬 이름을 쇠섬이라 불렀다.
「용추와 용바위 전설」
점암면 우천리 해변의
넓은 암반에 얽힌 이야기.
옛날 서로 다투며 등천하기를
기다리던 두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유시인(柳時仁)이라는 사람이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죽이지 않으면 그 마을이
폭삭 망해버릴 것이라는 웬 노인의 현몽에 따라
용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마을을 구했다는 내용,
지금도 그 암반에는
용이 기어오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
.................
두원면 용당리 구룡마을
미륵불에 얽힌.,이야기.
하루는 중이
시주를 받으러 왔는데
시어머니가 구박해 쫓아 보냈다.
이것을 본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시주하였다.
중이 사례하며 미구에 큰 장마가
닥칠 것이니 몸을 피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며느리는 중의 예언대로 무사히
홍수의 재난을 피하기는 했으나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탓으로 미륵불이 되었다고 한다.
..................
..................
이 밖에도 화살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말을 목베고 나자 화살이 뒤따라
날아와 백마 등에 꽂혔다는
「송팔응(宋八應) 장군의 전설」,
갓난아이가 방 안에서 천장을 날고
좁쌀로 수많은 군졸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다 역적으로 몰려 한 팔을 베이자 자결했다고
하는 「봉대산 말바위터 박장사 이야기」,
하룻밤 인연으로 사랑에 빠진 어느 과부가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죽어 구렁이로 변신,
출세한 애인을 죽이려 했다가 도승이 지내준
위령제로 원한이 풀렸다는 「홍총각과 임과부」
등 많은 전설이 있으며
도서로는 유인도 16개,
무인도 154개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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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초도(草島) 이야기
.
.
초도는 임진왜란 당시
군마 마초를 공급하기 위해
마초(馬草 )를 길렀던 초지였다.
한때 황금어장이었을때
주민 인구가 3천명에 육박.
수산업이 활성화되었던.,초도.
쾌속선으로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50분을 가면 고흥 나로도항.
나로도항에서
30분 가면.,손죽도
손죽도에서 초도군도를
20분 더 가면.,초도(草島).
.
......초도(草島)........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속.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67㎞
여수와 제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동경 127°15′,
북위 34°13′.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67㎞,
거문도에서 북쪽으로 25㎞
면적 7.72㎢, 해안선 22.6㎞.
풀이 많은 섬이라 하여
초도라 부르게 되었다.지
질은 중성화산암류와
소량의 불국사화강암.
중앙에 위치한 상산봉(上山峰, 339m)은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이지만 경사는 완만.
해안은 돌출한 갑(岬).
깊숙한 만(灣)이 교대.
해안선이 복잡하다.
동쪽과 남쪽의
일부 해안에는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1월 평균기온은 2.1℃,
8월 평균기온은 24.7℃,
연강수량은 1,247㎜이다.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478명
(남 249명, 여 229명), 204세대.
취락은 대동마을을 중심으로
해안가의 만입부에 예미·의성·경촌·
진막·정강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다.
논 0.16㎢,
밭 1.56㎢,
임야 5.19㎢.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주로 종사.
벼농사는 미약하나 마늘·감자·보리·콩
등의 산출이 많아 식량자급률이 높으며,
돼지·닭·염소·소가 많이 사육된다.
근해에는 문어·삼치·방어·감성돔 등이
어획되며 톳과 미역 양식도 활발하다.
교통은
여수와
고흥 녹동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
교육기관 - 초도초등학교,
거문중학교 초도분교장.
...............................
초도.,목섬
..................목섬..........................
초도에서 유일하게 바닷길이 열리는 곳.
초도와 목섬 사이의 물이 빠져나가면,
둘 사이를 잇는 바닷길이 열린다.
두 섬 사이에 길이 500m
폭 7~80m 정도의 바닷길.
3월 말 무렵을 전후로
한달에 4일 정도 열린다.
목섬의 갯가에서는
멍게와 해삼, 전복, 소라
등 다양한 것을 잡을 수 있다.
......................................
.
.
................가장골.................
초도 '가장골'이란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하던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가매장은 여수의 매장 풍습 중 하나로,
초도를 비롯하여 여수 곳곳에 존재한다.
가매장은 당초에는 호상일 때나
발복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행하다가
나중에는 횡사나 객사, 익사, 형사 등
주로 좋지 않은 경우에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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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
거문도.,불탄봉
.
.
조선시대 - 거문도(巨文島) 이야기.
.
.
거문도 전망대.,불탄봉
거문도 불탄봉 ^
불탄봉 정상.,남근바위.
불탄봉 정상은
거문도 해역 전망대.
'거문도등대'가 들어서기
전까지 등대 역활을 했으리라.
'불탄봉'이란 지명이
그러한 사실을.,대변한다.
'불을 피웠던 봉우리란 뜻 지명.
불탄봉.,가는 길.
불탄봉에서 바라보이는.,거문도등대
거문도
거문도.,등대
거문도 등대.,가는 길
2015.01.27
거문도등대.,숙박.
거문도 트래킹
거문도 관백정
거문도~ 백도
거문도 ~백도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나가사키 항을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
거문도사건은 영국이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 공격책이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거문도 철수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시기는
1887년 2월 5일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였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상호 간 정치적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냈다.
조선은 거문도사건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 요구와
열강 제국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일제에 조선은 주권을 빼앗긴다.
1885. 2. 29~1887.2.5
'거문도사건'으로부터
일제강점기 옛흔적까지
그대로 남아있는.,거문도.
.
목넘어(수월목)
높이 20~30m 암반 위를
파도가 거세게 치는 날에는
마구 넘나든다고 하여 '무넹이'
파도가 넘나들기 전까지는
하나로 연결된 섬이었으리라.
오랜 세월 파도가 갈라놓은 두 섬.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강은 결코 산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바다는 산을 넘는 것 같다.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영국군이 거문도에 상륙 전까지
동도와 서도 가운데 고도는 무인도.
영국군은 고도에 부대 막사를 짓고,
통신시설 설치, 죽은 군인묘소 조성.
지금도 고도에 옛 영국군묘지가 있다.
병영생활을 하다가 병이 나서 죽고,
사고로 죽고,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이곳 고도에 묻어 놓았던 것이다.
현재 거문초등학교 자리는
영국군이 막사를 지어 주둔.
인근에는 테니스장 터도 있다.
이렇게 거문도에는
영국군의 옛 자취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2006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때 꼭 가고 싶어했던.,거문도.
영국 수병과 거문도 처녀가
국경을 뛰어넘어 사랑한 일화.
거문도 처녀를 사랑한 영국 수병
.......영국군과 거문도 처녀의 사랑......
당시 거문고 아낙들이 초혼굿을 벌린 동도.
이때 그 초혼굿을 주재하였던 처녀 무당을
망원경으로 본 영국 수병이 처녀애개 반했다.
그후 사랑에 빠진 영국 수병은
밤마다 몰래 동도로 헤엄쳐나와
처녀 무당집에 양과자 통조림 선물.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처녀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 인근 다른 섬으로 떠났다.
무당 처녀가 동도를 떠나는 날에
영국 수병은 그녀가 떠난 길을 따라
헤엄쳐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후 동도에 처녀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귀신이 잡아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동도에 전한다.
..........................................................
초혼굿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주둔하면서
거문도 주민과 영국군과 다양한 교류
영국군을 통해 서양문화가 전파되었다.
거문도 주민들이 임금을 받고
영국 해군막사 건설을 도왔으며
당시 테니스가 가장 먼저 전파된 섬.
그후 영국군이 물러가고나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전부터
거문도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정착.
뱃길로 부산을 가는 것보다
큐슈로 가는 것이 더 가깝다.
조선시대 왜구침략이 잦았던 거문도
이곳의 해류가 독도, 울릉도까지 연결.
일본 어부가 이곳으로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 지역적인 배경이 있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거문도를 지배했던 것.
영국군이 물러간 거문도항을
둘러싸고있는 고도 바닷가에는
2층 일본식 건물과 옛골목 모습들.
다만 그 주인이 바뀌었고,
집들이 일부 수리가 되거나
개축은 되었어도 골목 풍경은
옛모습 그대로라는 느낌을 준다.
거문도 야경
일본인들은 이곳 거문도에
신사를 지어 참배도 행하였다.
그들이 세웠던 신사 탑 옛흔적들.
.
거문도는 섬이라서
열악한 환경의 도서관.
"원래, 해수부 건물인데,
지역 주민들이 무료임대.
거문초교 등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필요하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
보내주시면 도움 되겠다."
2019년 9월 서도분교가 있는 곳으로
4개의 본교와 분교들을 통합을 하여
'거문초등학교'로 거듭날 것이라 한다.
이곳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수가 집인데,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백령도 및 11항
국가 관리 연안항
2017.02.20
2017-11-20
전남 거문도항이
서남해역의 영해관리
전진기지로 탈바꿈 한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 영국은
청·러시아·일본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 불법점령.
"해밀턴항(Port ㏊milton)"
그뒤, 1887년 2월 27일 철수.
당시 영국군이 전기불로 밝혔던
등대가 사실 상으로는, 최초의 등대.
...................거문도(巨文島).................
고흥반도로부터 남쪽으로 40㎞ 지점에 있다.
'삼도(三島)' '삼산도(三山島)' '거마도(巨磨島)'
고도(古島 ; 0.42㎢).,해안선(3.70㎞)
동도(東島 ; 3.43㎢)
서도(西島 : 7.77㎢)
거문도는 3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도 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한다.
서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섬으로서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 연중 푸른데,
이곳에 위치한 수월산(水越山, 128m)에는
다도해 뱃길을 비춰주는 거문도 등대가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영속.
백제의 원촌현에 속하여.,삼호(三湖).
1396년(태조 5) 흥양현(고흥) 속.,"삼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여수군 소속.
1949년에는 여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98년에 통합 여수시 삼산면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 영국은 청·러시아·일본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 불법점령.,"해밀턴항(Port ㏊milton)"
그뒤 영국은 섬 매수 등 온갖 수단을 강구 중
결국, 1887년 2월 27일에 이곳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종래 '삼도'를 "거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한해협 문호로서
과거 '러시아 태평양 출구'
"동양의 지브롤터(Gibralter)"
.
옛부터 삼도에는 문장가가 많아서
거문도(巨文島)라고 하였다는 기록.
또한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에 ‘왜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왜’와 훈이 비슷한 "외섬"으로.,훈차(訓借).
"고도(孤島)" 후에 고도(古島)가 되었다는 설.
고도·동도·서도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도내해(島內海)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출입이 자유롭다.
고도는 섬의 동쪽으로 비교적 높은 산지
서도를 바라보는 서쪽으로는 만입이 형성.
해안은 암석해안.
연평균기온은 14.4℃,
1월 평균기온은 2.1℃,
8월 평균기온은 24.8℃,
연강수량은 1,247㎜이다.
2009 기준인구 704명(남 386명, 여 319명)
307세대 취락은 섬 서쪽 선착장 주변에 집중.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11㎢, 임야 0.25㎢.
수산업이 주민의 주업이며,
농산물은 콩·고구마 등 생산.
고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역(水域)은
순천·여수 방면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는
여러 선박의 기항지로서 근해어업 근거지.
갈치·삼치·고등어·방어 어장
김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전복 양식이 활발하며,
갈치는 특산품이다.
성어기에는 파시(波市)가 섰는데,
파시 역사가 길어서 현재의 마을들은
대개 파시에서 유래되어 발달한 것들이다.
주민들 구전으로 전해온 거문도뱃노래.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되어 있다.
여수· 녹동 등지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
거문도사건은 영국이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거문도 철수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시기는 1887년 2월 5일.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제국주의 상호간 정치적 대립.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 사건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낸다.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는다.
개항 후 조선은
청·일과 구미 열강의
침략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1860년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점거함에 따라 조선과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은 물론
극동에서의 새로운 위협적 존재.
19세기 전반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대립했다.
.
대서양·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팽창정책을 군사력과
외교수단을 총동원하여
저지하자, 러시아는 크림전쟁
이후 태평양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
그리하여
'1860년~1900년' 약 40년간
일본· 조선· 중국 연안지 대상으로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었으므로
좋은 항만조건을 가진
조선에 대한 지배욕을
욕심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하여
영국·청·일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개항 전부터 청·일본은 누차 러시아 접근을 경고.
황준헌(黃遵憲) 〈조선책략〉에
나타난 방아책(防俄策)이 대표적
.
대원군 집권 이래 수차례나
수호통상을 요청해온 러시아.
조선이 구미제국에 문호를 개방하자,
반러시아적인 청나라 중재를 통하지 않고
조선정부에 직접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
1884년 6월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K.I. 베베르를 조선에 파견, P.G. 묄렌도르프의
알선으로 7월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베베르의 노련한 외교활동
갑신정변 후 지나친 청의 내정간섭.
이에 반발하는 조선 내 친러세력을 부식.
조선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을 무렵인 1885년 3월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전투.
조선에서도 영국과 러시아 간
양국의 충돌위기가 예상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계획설,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책으로
거문도점령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천연의 요항(要港)인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지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포대구축, 병영 건설.
항내에는 수뢰까지 부설했다.
거문도 주둔군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
영국은 3월 3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고했으나,
영국의 통고가 통리아문에 접수된
때는 거문도 점거 1개월 후인 4월 6일.
영국 측이
조선에 통고한 공식적인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변(變)을 막으려고
잠시 거수(居守)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실에 불과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영국이 거문도 점령 초에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국제 사회에 인정했던 것.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협정안을 제시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조선 내 영토점령을 요구하고 나서면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
지금까지 애매한 태도로 있던 조선정부는
우선 거문도 현지 실정을 탐사하기로 결정.
.
이에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외교협판 묄렌도르프는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서 영국함대사령관에게 점령이유를 힐책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측과 외교교섭 추진.
4월 6일 영국측의 점령통고문이
정식으로 전해지자 다음날 통리아문은
강력 항의를 주청하고, 영국공사에 타전한다.
한편, 공함을 발송, 청·일·독·미 공관에
영국의 불법점령 사실을 연락하는 한편
영국이 조선정부의 항의에 불응하는 경우
조정에서 취할 방책과 각국공관 협력을 요청.
이에 대해 각국 대표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여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우선 조선과 영국
두 나라가 원만한 타협을 이루길
바랄 뿐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조선정부는 사건해결에
주체적인 구실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교섭에 의존.
한편 영국도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W.G. 에스턴을 통하여
협상을 제의했다.
즉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과 동시에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
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자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 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열린 회담으로
청의 이홍장과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는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조회장(照會章)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이에 청나라는
10월 5일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했다.
주청 영국 공사 웰샴은
11월 24일 청국정부에,
12월 23일 조선정부에
철수를 통고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으며,
22개월간 점거한 뒤
철수한 셈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상호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조선정부는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더불어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사건해결에
중개역할을 했던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
...........................................
.............한러밀약............
1885년(고종 22) 조선 정부가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
러시아와 맺으려 했던 비밀협약
제1차 밀약/2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추진
청·일본·영국 등의 압력과 방해로 실패했고
그 결과 청의 제국주의적 간섭이 강화되었다.
.
1884년 5월 러시아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의
대립으로 청·프랑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에
한국에서 청의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하여 그해 7월
톈진[天津] 주재영사인
베베르를 전권대신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한편 한국정부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의 지나친 내정간섭을 경계하고
청일 간의 세력 다툼에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3세력으로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 직후
청일군대가 주둔하여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고종은 김용원(金鏞元)·
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조약 추인과 육로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1885년 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한 개화파의 체포 및 송환을
교섭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대리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하고 묄렌도르프를 규탄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러시아와 대결하고 있던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는 등
같은 해 7월
밀약문제가 표면화되어
국제적으로 말썽이 나자
고종은 김윤식 등의 의견에 따라
묄렌도르프를 사직하게 하고 사건을 무마.
.
거문도사건 때
사건해결에 중재를
맡았던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저항감이
생기게 되고, 청이
대원군을 귀국시키고
고종을 폐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씨 척족정권은
러시아 세력에 다시 의존하려고 했다.
그리고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국인 데니 역시
러시아에 의지할 것을 권고했다.
한편 러시아는
1885년 11월 베베르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여
조존두(趙存斗)·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등과 접촉했고,
이들은 '인아거청'(引俄拒淸)의 논리로서
고종과 척족들에게 러시아의
한국 보호문제를 설득했다.
그러나, 친청반러 노선을 취했던
이를 알림으로써 러시아의
접근에 제동을 걸었다.
위안스카이는
같은 해 8월 13일
이홍장(李鴻章)에게
'러시아의 개입을 호소한
고종의 밀서'를 보고하고
청군의 파견과 고종의
폐위를 건의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러시아와의 밀약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조존두 등을
유배시키는 한편, 서상우·
이응준(李應俊) 등을
베이징[北京]에 파견하여
사건을 해명했다.
이홍장은 8월 16일
러시아 정부로부터
밀약사실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고종의 폐위음모를 중지시켰으나,
러시아와 한국의 접촉에 대해서는
계속 감시·간섭할 것을
위안스카이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유언사조(喩言四條)와
시무십관(時務十款)을 제시하여
내정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한국의
자주적 외교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이후 1890년대초까지
청은 한국에서 독단적인 종주권을
주장하고 내정 간섭을 계속했다.
.........................................
미국은 구미의 어느 나라 보다도
오래 전부터 조선과의 수교를 원하여
이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
183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포함외교를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종래의 무력시위를 통한 방식
대신에 일본의 우호적 알선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일본의 중재가
걸림돌이 되어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슈펠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조선과의 수교는
거중조정 의사표명으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당시 청은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조선침략을
견제하는 '연미론'을 구상하고 있었다.
1880년 8월 톈진[天津]에서
이홍장과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곧 귀국 길에 올라 조미교섭에 관해
이홍장으로부터 알선의 확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미국 정부에서는
조미조약의 체결을 교섭할 특별사명을 그에게 부여했다.
1881년 7월 톈진에서
이홍장과 2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그 내용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고, 미국 정부에서는
11월 14일자로 조미조약 체결에 필요한
일반훈령과 이에 필요한 전권위임장,
미국 대통령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 밀서를 보내
미국과의 조약체결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연미론에 호응하여
미국과의 수교에 어느 정도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위정척사론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청의 힘을 빌려 이를 추진하되
그 과정은 비밀에 붙여지게 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1882년 1월 영선사로 파견된
김윤식(金允植)과 이홍장의
4차례에 걸친 비공식 예비회담과
3~4월의 이홍장과 슈펠트와의
회담을 통해 기안되었다.
여기서 이홍장이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고 하는
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주장하자
슈펠트 역시 조선이 내치와
외교에 자주권이 있다면
중국의 종주권과 관계 없이
미국은 조선을 대등하게
취급할 권리가 있다고 맞서
결국 별도 조회문을 통해
속방 부분을 밝히기로 하는
선에서 타결을 보게 되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김홍집(金弘集)과
미국 전권 슈펠트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관계가 시작되었다.
조미조약은
비록 체결과정에서
당사자인 조선 정부가
일부 배제되는 문제점.
그러나,
조미조약은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필수상조한다는 규정(제1조),
치외법권이
잠정적이라는
규정(제4조),
거류지는 조선의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라는 규정(제6조),
양국 간
문화학술교류에
대한 규정(제11조) 등
.
당시 중국이나 일본이
서유럽 제국과 맺은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어느 정도 배제된 주권국 간의
쌍무적 협약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섬.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거문도등대는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들러가는 필수 코스이다.
거문리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1시간 도보거리.
삼호교를 거쳐 유림해수욕장을 벗어나면 '무넘이'.
여기서부터 해안가 기암절벽을 낀 1.2km거리 산책로.
길 양쪽으로 들어선 동백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세상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만한 곳이다.
거문도 등대 절벽 끝에는 '다도해 전망대'.,관백정.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한 때
방문하고 싶어했던 섬으로도.,유명.
영국 여왕은 왜 거문도로 가려한걸까?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군의 철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거문도에 내려온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보고.
영국군 사망자의 묘지는 모두 9기,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타도 주장이 높아
일본인들 묘비보다.,더 큰 서구식 묘비는 파손.
그후 '영국군 묘' 6기는 본국으로 이전 안장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영국군 3인 서구식 비석도
방치된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해방 이듬해에
거문도 유지들이 보수해 관리해온.,영국군 묘역.
'영국군 묘지' 비문에 적혀있는.,글귀.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호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Charles Dale)”
“1903년 10월 3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
십자가에 새겨져 있는.,글귀.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문도사건 과정에서
순직한 영국군 3인 묘지에 참배하려 한 것.
2004.12.1(수)~ 12.2(목) 방한 일정 때였다.
2005년부터 주한 영국대사관은 거문도 주민들이
백년간 영국군묘지를 관리해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거문중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5년 9일 여수시와 여수시교육청 등에 따르면
주한 영국대사관은 지난 2005년부터 거문도를 방문,
영국군 묘지를 참배하고 거문중학교에 첫 장학금 지급.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150만∼550만원을 전달한 것.
장학금은 한영협회에서
기부금 형식으로 마련하여
영국대사관을 통해 지급한 것.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묻혀지고 지워졌던 사건.
영국에서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거문도 사건.
장차, 한영(韓英)외교를 위해 어떤 조치를 해야할까?
'대한해협 해금강' 관광자원 활성화가
'금강산 개발'보다 안보 면에서 효율적.
외화획득원 관광자원 잠정가치도 높은 곳.
'거문도 ~백도'.,뱃길.
'거문도 ~ 백도' 한려수도 해역은
'천혜의 국제적인 관광자원' 해금강.
관광산업은.,'황금알을 낳는 거위.'
굴뚝 공해 없는 공장 같은.,외화 수입원.
수입 원자재도 필요없는.,100% 외화 소득원.
외국인 관광객 숫자에 비해
내국인들이 주로 찾는 현실이
늘 안타깝게 여겨지는.,관광자원.
영국군 불법 무단 점령으로 기록된.,거문도 사건.
UN군 6.25 참전부터 현재까지 '혈맹 우방국' 영국(英國).
거문도 사건에 관한 역사 기록은 수정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혈맹 우방국들과 외교를 돈독히 하려면
'역사의 현장' 관리가 최우선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거문도 관광 해역'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거문도.,영국군 묘지
조선시대 거문도
(巨文島) 문장가들.
............................................
조선시대 국제무역을 했던 거문도.
청나라 일본 조선.,3국간 중계무역.
거문도 장재학당 출신 문장가들이다.
.................................................
장재서숙(長齋書塾)
즉, 장재학당(長齋學堂)
거문도 사람들은.,장재(長齋)
이를 "짱째"라고 한다.
재(齋)는 학교를 말한다.
따라서 장재란 한자의 뜻은
장촌에 있는 학교라는 뜻이다.
.
거문도 주민들은 장자로 이어진
이 집안의 훈장들을 '장재훈장' 즉
훈장 집안을 "짱째훈장"이라고 불렀다.
짱째,
짱째훈장,
짱째네,
짱째문장네,
짱쩨네손자
등으로 불렀다.
물론 지금도 거문도 사람들은 이 훈장들의
직계자손들을 가르켜 "짱째손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거문도 촌장으로 섬의 어른이었고
거문도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들이었으며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며, 문장에 밝은 대문장가.
제1대 훈장 김윤해부터
제6대 김준현까지 200년 동안
장손자로 이어진., 문장가 가문.
1902년 제5대 훈장 金相演이 46세로 죽자,
그 장자 김준현이 제6대 훈장을 이었으나
3년만인 1905년에 청춘요절해 대가 끊겼다.
이렇게 해서, 김씨집안 장손으로 만 이어지던
훈장 자리는 일본 동경 최고 명문사립고등학교와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한 친척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조선의 국운이 위태로운 시점.
제1대 훈장 김윤해(金胤海 : 1720-1741)
제2대 훈장 김득택(金得澤 : 1763-1822)
제3대 훈장 김석재(金錫載 : 1786-1847)
제4대 훈장 김순태(金舜泰 : 1828-1886)
제5대 훈장 김상연(金相演 : 1856-1902)
제6대 훈장 김준현(金俊鉉 : ?-1905)
제7대 훈장 김상순(金相淳 : 1871-?)
제8대 훈장 김용현(金鎔鉉 : 1891-1933)
..............제1대 훈장 김윤해....................
제1대 훈장 김윤해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공신
이괄에 난을 평정했던 학성군 김완의 현손이다.
영조시대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통훈대부 흥양현감(고흥군수) 중
나라에 죄를 짓고 자신이 다스렸던
거문도 서도리로 귀양을 와서 서도리
북쪽해안 산짓골 옹달샘 옆 움막에 거주.
김윤해는 거문도 귀양 당시
재산은 모두 나라에 몰수되고
빈몸으로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가 서도리 북쪽해안으로 정해진 것은
조선의 모든 신하는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에
북쪽 임금을 바라보며 절(望倍)해야 하기 때문.
김윤해가 거문도로 귀양을 갈 때
아내와 여동생 독자아들 흥형(興亨).
그 내외와 흥형의 어린아들 득택(得澤) 등
모두 5명이 김윤해 따라 유배지 거문도에 거주.
거문도에 들어간
김윤해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이때 서도리마을 승근네 할멈이
보리 한바가지를 건네 주었던 것.
김윤해 가족들은 양반이라 일이 서툴러
농사, 고기잡이, 해초 채취 등을 할줄 몰랐다.
김윤해 며느리는 주민에게 해녀 물질을 배웠다.
이 때 거문도 주민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하며
조선. 일본. 중국 간 해상무역.
제1대 훈장 김윤해의 아들 독자 흥형은
장차 선단을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할
목적으로 뱃사람들과 함께 울릉도.독도로 향했다.
그러나, 포항 앞바다에서 난파
거문도 뱃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훈장의 아들 흥현의 시체는
경북 영덕 죽산해변에 밀려와
흥형 허리춤 호패 주소지 거문도로
이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전해왔던 것.
거문도에서 해녀생활을 하던 며느리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죽었다.
이 며느리 무덤은 몰랑 서당터 위 선산의
맨 안쪽에 홀로 묻횐 분이 그 주인공이다.
남편이 묻힌
경상도 영해의
죽산을 바라보며
거문도에 묻혀 있다.
앞서 조선문과 급제 김윤해.
이포(이기미)에 서당을 짓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
서당이 있던 이포를. 서당이포
일본말로는 '서당이기미'라 한다.
서당이 있던
포구라는 뜻
'서당이기미'
김윤해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자신의 손자에 글을 가르쳤다.
김윤해는 귀양이 풀리지 못하고
거문도에서 죽어 산짓골 산 정상에
현재, 그 무덤이 있는데 멀리 북동쪽의
영해죽산에 묻힌 아들을 바라보며 묻혔다.
이 서당터는 아직도 할아버지 이름으로 등기
옛날에 서당이 있던 곳이라 '서당밭'이라 부른다.
이 밭 언덕에서 옹달샘이 솟는데 이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지을 때는 밭 이름을 '서당논'이라 한다.
경상도 영해 죽산에는
지금도 울릉도로 가다가
죽은 흥형의 무덤이 있다.
.................................
.......제2대 훈장 김득택.........
제1대 훈장 김윤해의 손자이자,
울릉도를 개척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과 함께 울릉도를 가다가
태풍으로 배가 파선되어 죽었던
김흥형(金興亨)의 독자아들이다.
거문도 장재서숙의
제2대 훈장인 문장가.
석재(錫載),
석권(錫權),
석옥錫玉(일명 祉玉)
등 아들 3명을 두었다.
서산사 돌비석이 3남 김석옥 송덕비.
석옥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다.
거문도 서도리 주민들은 김석옥의 아버지가
문장가 만회 김양록이라며 매년 서산사에 만회
김양록 배향하는데 김양록은 김석옥의 양아버지.
...........................................................
......제3대 훈장 김석재(1786-1847)......
김석재는 제2대 훈장 김득택의 장남으로
서산사에 있는 돌비석 김석옥의 큰형이며,
김석옥의 네째아들로 서산사의 쇠비석인
인동도호부사 김정태의 백부이다.
가업을 계승해
제3대 장재서숙
훈장직에 올랐다.
문장가 겸 학자였다.
종갓집 장손으로 아들을 두지 못하고
아들을 보기 위해 계속 자식을 두다보니
딸만 9명이라 거문도 주민들이 김석재 외손.
막내동생 김석옥의 둘째아들
김순태가 선생의 양자로 입적했다.
1885년 영국군 거문도 불법점령사건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선생을 기려
삼도를 거문도(거문도)라 고치도록 했다.
이때 조선사신 청 제독 정여창 등이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거문도에 와서
선생의 손자 김상연과 필담을 나누며
선생의 문집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었다.
무덤은 몰랑 서당텃밭 위
선영에 첫머리 합장묘이다.
거문도 서도리 술비야회관이 지어진 660평
땅이 김석재 선생의 시제밭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1970년대애 거문도 간첩단 사건으로
그 자손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히 흩어졌다.
.......제4대 훈장 김순태(1828-1886)
서산사 돌비석 김석옥의 둘째아들이자
서산사 쇠비석 인동도호부사 김정태 둘째형
제3대 훈장 김석재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양자로
입적해 학자로서 거문도 장재 훈장직을 이었다.
조선 말 일본을 오가는
청나라 조선사신들과 교류
조선, 청나라 일본 정치인과 교류
학문과 정치사를 조언하고 예견했다.
.......제5대 훈장 김상연(1856-1902)
제4대 훈장 김순태 장남으로 가업을 계승.
1885년 거문도사건 때 청 제독 정여창 등이
영군동양함대 거문도 불법점령사건 조사 차
조선사신들과 함께 거문도 선생의 집에 들려
선대 훈장들의 문집을 보며 그 학문 선견에 탄식
그리고,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이 섬을 거문도라 칭하도록 조선에 명.
바로 이 집안의 선대 훈장 때문 임을 인정.
김상연 선생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유
조선의 모든 사신들이 일본에 오고 갈 때
거문도에 들려 선생에게 자문을 들었단다.
1883년 8월, 박영효 김옥균 등이
조선이 일으킨 임오군란 사죄단으로
일본에 가기 위해 일본의 우편운반선
명치호를 타고 유학생 60명과 함께
이 섬에 들렀을 때 선생이 조선최초
태극기 2점을 만들어 박영효 등에게 주었다.
박영효, 김옥균은 서도리에 사는
선생의 제자 오씨를 울릉도 초대 군수인
울릉도감으로 추천, 그를 한양 임금에게 보내고
한개의 태극기를 그에게 주어 국왕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태극기는
일본으로 가지고 갔는데
이 태극기가 최초 태극기.
정사각형의 흰 천 위에 붉은천과
푸른천을 오려 붙인 태극기였다.
선생의 무덤은 유림해수욕장에 있다.
박영효 김옥균을 따라
조선 개화파 일본유학을 가서
일본 명치대 법학과를 졸업한
김상순, 김상윤 형제가
선생의 4촌 동생이다.
이 형제들의 친아버지
인동도호부사 김정태가
선생의 작은아버지이다.
무덤은 유림의 해수욕장에서
거문등대로 넘어가는 길에
동생의 무덤과 함께 있다.
...........제6대훈장 김준현(?-1905)..............
제6대 훈장 김준현은 제5대 훈장 김상연의 장남
훈장으로 있던 중 1905년, 20대 초반 나이로 요절.
가법에 의해 다음 훈장은 김준현 동생 김화진이었으나
집안의 어른이었던 인동도호부사 김정태가 금지하고
자신의 둘째아들을 김상순을 훈장에 앉혔다.
이 분의 조카로 아직 살아 있는
김재심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이 어릴 때 불에 타죽었단다.
육지출신 미망인 부인이 있었으나
친정에 돌려보내 개가하도록 했다.
무덤은 응달산에 있다.
......제7대 훈장 김상순(1871-?)
김상순은 1871년생으로 만12세이던
1883년 8월 일본특명사신으로 가던 박영효,
김옥균을 따라 조선개화파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육군소년학교를 수료한 뒤
동경 최고 사립 명문고등학교인 게이지의숙
즉 경응의숙 보통과(고등학교 과정)를 졸업하고
일본 명치대학 법률과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졸업후 고종황제가 불러
황실의 벼슬을 세차례나
내렸으나 취임 않고 사직.
1904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유군유년학교 창설.
다시 그를 교관으로 불렀는데 네번째 임명이었다.
김상순은 마지못해 취임. 고종황제는 그가 취임하자
그를 황해도경찰청장으로 임명을 내고 다시 몇 달 뒤에
그를 전라남북도 경찰청장인 전라도 경무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관제개편에 따라
그는 전라북도 경찰청장
등을 지냈다가 1910년 9월
나라가 망한 뒤 6개월 뒤인
1911년 4월에 사직됐다.
앞서 김상순은
거문도 장재서숙 제7대 훈장
김준현이 요절하자 서울에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1905년 장재서숙(장재학당)을
영락학교로 등록하고 자신이
서류상 학교설립자이자
비상근 교장으로 있었다.
이 학교는 일본명치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조카 김용현에 의해 운영됐다.
대한제국 신식학교로 근대교육과
조선 민족교육을 교육목적으로 했다.
1912년 거문사립보통학교로 개명했다.
1911년 4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직된 김상순은
전라도 광주로 거주지를 옮겨 도의원 등을 지냈고
그의 일본 성명은 김택상순金澤相淳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한민국 국회는
그가 대한제국 멸망시점에 전라도의
경찰청장을 지낸 점을 들어 친일인사로
인명사전에 올렸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선정한 반민족행위 친일인사 708명에 등재.
...제8대 훈장 김용현(1891-1933)..
김상순이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부
경찰서장으로 나아가자 거문사립보통학교
제2대 교장에 오른 사람은 김상순의 4촌 형의
아들 김용현(일본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한 청년)
김용현은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거문도와 거문도
연안에서 이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인 소요가 일기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빼앗고 졸업생 명단을 불태웠다.
이런 이유로 이 학교가 개교한
1905년부터 1919년까지의 졸업생
명단은 사라져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이 학교를 빼앗은 조선 총독부는
이 학교를 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제1회부터 학생들을 배출하기 시작.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자였으며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조선공학 박사
제1호를 받고 서울대 교수을 지내다 월북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서울시 부위원장에
올랐던 김재을씨가 선생의 장남이다.
조선총독부에 학교를 빼앗긴 김용현
선생은 거문도 삼산면 면장을 지냈다.
..................................................
..................
거문도 사건이
남겨놓은.,과제.
........................
'거문도 ~ 백도' 다도해국립공원은
'여수~제주도' 항로 상.,가운데 위치.
거문도에서 부산보다는 규슈가 가깝다.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위치한 거문도
'동해 ~서해' 항로 상에서.,중간 기착지.
동해 상에서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전략적요충지.
서해 상에서는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미국과 유럽의 입장에서는
중국. 러시아의 팽창 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전략적 요충지.
........................
우리나라는 어떻게
사용을 해야 좋을까?'
............................
..................백도.............................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있다.
크게 상백도군과 하백도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적도에 31, 물에 잠기는 섬까지 합해 99개 섬.
100개가 안되어
일백 백(百) 아닌
흰(白)자를 붙였다.
최고 높이는 상백도 110m 지점이며,
대부분 섬들이 암석으로 된.,바위섬.
신비함 간직한 기암절벽 곳곳에 괴목.
....상백도...
나루섬·노적섬·
매바위·병풍바위·
형제바위·오리섬·탕근대
.....하백도...
각시바위·궁성바위·서방바위
바다직박구리·
흑비둘기·휘파람새
등 희귀한 조류 서식.
까마귀쪽나무·
당채송화· 동백나무·
보리똥나무· 풍란·쇠뜨기
등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연근해에서
조기·갈치·고등어·
농어·복어·참치·도미·
민어 등이 많이 잡혀
거문도 어장에서 중심.
1979년 섬 일대가 명승 제7호로 지정
지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남국적인 정서가 짙어 관광지로서 인기.
거문도와 백도 간에
정기 유람선이 운항.
1978년 종합 학술조사 실시
상백도에 태양열 무인등대.
여수시 무인도의 대부분의 지대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1억∼9천만년전)
화산활동으로 그 지반이 만들어 졌으며
화강암과 화산쇄설성응회암으로 이뤄졌다.
상백도는 본래 하나의 섬.
파랑의 침식에 의해 여러개
섬으로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정.
........................................
백도는 거문도 어장의 중심지역으로
조기·갈치·돔·민어 등의 어장으로 유명.
1979년 상백도하백도일원 섬을 중심으로
200m 해역을 명승 제7호로 지정하여 보호.
........................................................
.....거문도 무늬오징어.....
십완목 오징어과 연체동물로
우리나라 다도해 이남과 일본
등지에 분포하는 대형 오징어다.
5월 하순에 산란하며 이때가 성수기.
수컷 등쪽에 암회갈색 가로 줄무늬가
여러 개 있고 타원형의 반문이 있다.
................................................
거문팔 갈치 낚시
덧 말.
2017.01.06 팔영대교 개통.
2017.11.28 장보고대교 개통
2020년 완공계획
2020년 완공계획
다도해를 잇는.,
'일레븐 브릿지'
고흥 ~ 여수
40분 소요거리.
.
남해안 483km 드라이브
남해안 '해양낙원' 개발.,청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