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울산목양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48강. 속죄일과 신부 정결 (레 23:26-32)
레 23:26-3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 16:30-31절.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예수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야기를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 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이야기를 그 아들의 이야기로 채우고자 하시고자 하십니다.
여기에 선택을 입은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만물을 의인화 하면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를 써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시기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 예수그리스도를 담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이라고 하고 또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으로 일 때 그 안에 창세전 언약을 담고 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죄 아래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죄 아래서 어떻게 건져 지느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구원의 히스토리(History)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은 죄 아래서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를 7대 절기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성도의 일생이 유월절로 시작을 해서 초막절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천년왕국에서 어린 양의 신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의 역사는 유월절에서 속죄일로 마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속죄일입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영원한 속죄를 받는 날입니다.
알다시피 유월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속죄일의 제사도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허물을 영원히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유월절도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제사이고,
속죄일도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제사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시작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유월절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의 제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는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한 영화로움을 위한 정결케 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의 제사는 정결케 하는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결은 결혼을 위하여 신부가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키 위하여 정결하게 신부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애굽에서 나올 때도 유월절의 피로 정결케 하여서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장차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두 가지 떠남이 있습니다.
먼저는 죄와 사망에서 떠나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은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떠남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떠나오는 제사는 유월절 제사이고,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는 제사는 속죄일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기존의 세상에서 떠나기 전에 피로서 정결케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게 되는 가을 절기 속에도 피로 정결케 하는 제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살펴볼 속죄일의 제사인 것입니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시작이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마감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도의 구원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 이야기도 성도의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면 안식의 나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롬 8: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7대 절기 속에다가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7대 절기는 역사 전체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지만, 성도의 역사 속에서의 구원의 전 과정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창세기 1장에서는 7일 창조로 보여주었습니다.
7일 창조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7일은 첫 번째 갈라내고, 두 번째 채우고, 세 번째 안식하는 세 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과거 구원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현재 구원과,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미래 구원으로 일어납니다.
7대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7대 절기도 창조 7일과 같은 3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 절기로 되어 있습니다.
봄 절기는, 씨를 뿌리는 시기로서 이는 창조 7일 중에서 첫 번째 텀인 갈라냄을 입는 것이고,
여름 절기는, 농사를 짓는 시기로서 이는 창조 7일 중 두 번째 텀으로 채움을 입는 것이고,
가을 절기는, 추수하여서 곡간에 들이는 것으로서 이는 창조 7일 중에서 세 번째 텀인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팔절은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이 됩니다.
안식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면 주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절기로 말하면 넉 달 농사가 다 지어지고 나면 곡식을 추수하여서 곡간에 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절기는 1월에 시작하여서 7월에 끝이 납니다.
7달 만에 모든 절기는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역사는 7로 마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창세기 1장에서 창조 7일로 보여 주었습니다.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입니다.
그럼 실제로 창조하는 일은 6일 동안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7대 절기도 6달 동안 모든 농사는 끝이 나고 7월 1일 나팔절이 되면 추수한 곡식을 곡간에 들이고 7월의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절 이후의 절기는 수고와 슬픔을 그치고 잔치하는 절기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성도들을 이 세상 밖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가서 천년동안 왕 노릇 하게 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월에서 6월까지는 이 세상에서 구원 농사가 지어지고,
7월 달은 구원이 다 이루어진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 양과 혼인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7일 속에서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의 창조가 일어나지만 일곱째 날은 저녁에서 아침이라는 시간이 없는 곳에서 누리게 되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저녁은 타락을 상징하고 아침은 회복을 상징합니다.
저녁은 죄를 상징하고 아침은 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타락에서 회복으로 죄에서 의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녁에서 아침이 있는 곳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저녁과 아침이 없는 곳은 이 세상 바깥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진행이 됩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저녁에서 아침이 없는 항상 오늘 날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가 없다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 7일 중에서 저녁에서 아침이 없는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를 7대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부터 넉 달 농사까지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저녁과 아침이 없는 일곱째 날은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은 이 세상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팔절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공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 곳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곱째 날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은 천년왕국을 상징합니다.
천년왕국은 피조 바깥의 세계로서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입니다.
역사에 속하였으면서도 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세계입니다.
천년왕국은 시간이 정지가 된 곳입니다.
그래서 창조 7일의 일곱째 날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감이 없이 시간이 정지가 된 상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천년왕국은 시간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예표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구원과 같습니다.
성도는 시간의 흐름이 있는 역사 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있는 역사 속에서 성도는 묵시적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일컬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은 영생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시간의 흐름이 있는 역사에 살면서도 역사 바깥 시간의 흐름이 없는 영생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영생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일곱째 날과 같이 안식하는 곳입니다.
안식하는 일곱째 날을 오늘 날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오늘 날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는 예수 안에서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갔다고 하였습니다.
벧후 3: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의 말을 직역하면 이러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아! 너희들은 천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오늘 날이라는 묵시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쉬운 말로 성도는 역사 속에서 역사 바깥에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는 나팔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영적으로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에 구속까지입니다.
몸에 구속으로 실제로 천국을 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몸으로 살아가는 천년왕국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재림하면 땅에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하늘의 몸으로 변화를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는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천년이라는 말은 묵시적 시간을 말합니다.
창조의 하루는 역사 속에서는 천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7일은 역사 속에서 7000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적 역사의 나이는 지금이 6000년입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대략 1000년이고,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대략 1000년이고,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대략 1000년이고,
다윗에서 예수님 초림까지 대략 1000년입니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대략 2000년입니다.
이러면 역사는 6000년이 됩니다.
이는 창조의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가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1000년 동안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럼 창조 7일이 역사 속에서 7000년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엿새가 차 가고 있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일곱째 날이 됩니다.
일곱째 날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안식의 세계이니까 천년왕국이 이 세상 바깥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 세상 밖이라는 의미에서 공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중도 역사에 속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다른 세계입니다.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과 같은 곳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구약과 신약과 천년왕국 세 텀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세 구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전생과 이생과 내생이 있습니다.
전생은 창세전이고 이생은 이 세상이고 내생은 천국입니다.
전생은 엄마 뱃속에 잉태하는 시기이고,
이생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기이고
내생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 이후 천국에서 살아가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를 언약적으로 말하면,
엄마 뱃속은 흑암인 율법 아래 구약을 상징하고,
엄마 뱃속에서 나와 빛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살아가는 신약을 말하고,
육신의 죽음 이후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창세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팔절 이후의 가을 절기는 예수님이 재림 하신 후 이 세상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팔절이 되면 탈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탈 역사란 지금의 죄악된 이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려면 그곳에서 살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팔절이 되면 우리 몸이 하늘의 몸으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부활의 몸이라고 합니다.
고전 15;51-54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마지막 나팔이 불면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가 됩니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흙에서 난 몸이 하늘의 몸으로 변화가 됩니다.
이를 육신의 장막에 무너지면 하늘의 장막을 덧입는다고 합니다.
죽을 몸은 죄인의 몸이고, 죽지 아니할 몸은 의인의 몸입니다.
썩을 몸은 죄의 몸이고, 썩지 아니할 몸은 의에 몸입니다.
흙에서 난 몸은 버려질 몸이고, 하늘의 몸은 영생하는 몸입니다.
옛 것은 버려지고 새 것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추수라고 합니다.
추수는 기존의 밭에서 뽑혀져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 때 밭에서의 삶은 끝이 나고 곡간에서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천국 곡간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성도가 추수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추수한 곡식들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이건 마치 업무 차 출장을 다녀오고 난 후에 보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아버지가 시킨 대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아버지의 아들들을 다 구원을 해서 데리고 왔다고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출장을 보낸 것입니다.
출장의 내용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절 다음에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속죄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출장을 오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창조와 동의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다 찾아내서 죄사함을 주어서 구원하여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나팔절에 재림 하시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다 새 하늘과 새 땅인 천년 왕국에 다 집결을 하게 됩니다.
이 때는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성도들이 다 모이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이를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아버지가 며느리 감을 먼저 점지를 해 두십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신부들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때가 되어서 아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어서 며느리를 값을 주고 사게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어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아들은 값을 주고 산 자기 신부에게 빙폐물을 주고는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에 떠나옵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하늘에 신령한 은사들을 주어서 세상을 살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정한 때가 되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성도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신랑이 신부가 있는 곳에 두 번 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신부를 값을 주고 사기 위하여 오고,
두 번째는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 오는 것입니다.
약혼 단계와 결혼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약혼이고 예수님의 재림은 결혼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그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신랑이 데리러 올 때까지 조신하게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신랑이 다시 와서 신부를 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결혼 준비를 위하여 신부 단장을 합니다.
신부 단장이 끝나면 7일간 성대하게 결혼식을 합니다.
7일 결혼 잔치가 끝나면 이제부터는 신랑의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팔절이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7일간의 초막절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초막절 후 8일 대성회는 신랑의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나팔절과 초막절 중간에 있는 속죄일은 7일 동안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위한 신부 단장하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신부의 정결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을 정결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 16:30-31절.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신부의 정결의식이 속죄일 제사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일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날입니다.
속죄일은 의미상으로는 이스라엘 온 민족이 속죄를 받는 날입니다.
하지만 속죄일은 제사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서 세상에서 신부들을 구원하여서 데리고 온 것을 보고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의 가장 큰 의미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 년에 단 한번 만납니다.
그 날이 속죄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은 영원한 속죄를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제사 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는 날에 더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면 성막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형인 성막을 주셨습니다.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하였습니다.
히 8:5절.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 9:1-12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성막의 구조는 뜰과 성소와 지성소 세 구역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성막의 세 구역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성막의 세 구역은 창조 7일의 갈라내고 채우고 안식하는 세 텀과 같은 것입니다.
성막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뜰입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여기선 제물이 불에 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곳입니다.
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여서 대속 제물로 드린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의 성소로 나타납니다.
성소는 뜰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여서 제사장으로 자기 백성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소 안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입니다.
성소 안에서는 등대와 떡상과 향단이 있습니다.
등대는 어둠에 다니지 말라고 불을 밝히는 것이고,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은 양식을 공급해 주는 것이고,
향단에 향을 사르는 것은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역사 속에서 행하는 일들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성령을 성도 안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성막의 세 구조는 창조의 세 텀과도 같고 세 절기와도 같습니다.
뜰은,
창조로 말하면 갈라내는 일을 하는 곳이고,
절기로 말하면 봄 절기로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소는,
창조로 말하면 채우심을 입는 곳이고,
절기로 말하면 여름 절기로 농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지성소는,
창조로 말하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곳이고,
절기로 말하면 가을 절기로 곡식이 추수가 되어서 곡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막의 세 구조는 성도들의 구원의 세 가지 서정과도 같습니다.
구원의 세 가지 서정은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미리 아심은 창세전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역사 속에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서 죄사함을 주어서 의롭다 하십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천국에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부르심은 과거이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미래입니다.
이를 성막으로 비유하면
부르심은, 성막의 뜰에 들어오는 것과 같고,
의롭다 하심은,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영화롭게 하심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세 구역에 들어가는 사람이 다 다른 것입니다.
뜰은, 백성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성소는, 일반 제사장이 들어가는 곳이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가 있는 곳입니다.
뜰은, 죄사함을 받는 곳이고,
성소는, 죄사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성도의 신분도 세 가지로 바뀝니다.
율법 아래서는 종이었고,
은혜 아래서는 아들이고,
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뜰은, 종의 공간이고,
성소는, 아들의 공간이고,
지성소는, 신부의 공간인 것입니다.
뜰은, 종들이 일하는 마당과 같고,
성소는, 온 가족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거실과 같고,
지성소는,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침실과 같은 곳입니다.
속죄일에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침실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에봇 위에다 12가지 보석이 달린 흉패를 입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12가지 보석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상징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12 지파를 안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자기 신부들을 안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12가지 보석이 달린 옷을 입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아버지께 며느리감을 보여주고 결혼 승낙을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백성들은 성막 주변에 둘러 진을 치고 지성소만 바라봅니다.
대제사장의 제사가 열납이 되면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들은 하루 종일 지성소에서 영광의 구름기둥이 일어나기를 숨죽이면서 바라보게 됩니다.
지성소에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아버지에게 보고를 하면 아버지께서 흡족해 하면 서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OK 싸인이 떨어지면 지성소에 구름기둥이 임합니다.
그럼 백성들은 환호성을 치면서 축제를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7대 절기 중 어떤 절기는 흥겹고 즐거운 절기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나팔절과 같은 절기는 엄청난 기쁨을 주는 축제일입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지은 농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절기입니다.
반면에 속죄일과 같은 절기는 엄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고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르기까지는 극도로 긴장하면서 손에 땀을 쥐면서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모든 제사들은 죄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상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번제란? 아침저녁으로 고정하여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죄와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죄란? 죄인에게 있어 어디에서 어디까지란 없습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아침저녁으로 “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적 차원에서 상번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죄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전 민족이 죄사함을 받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죄일에 드려지는 대제사장의 제사입니다.
그럼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살펴봅시다.
평상시에는 일반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냅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뜰과 성소를 오가면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속죄일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딱 한 차례 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이 속죄일의 제사입니다.
속죄일의 제사는 대제사장 홀로 지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 하면 살지만 거부하면 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면 대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은 조금의 흠이 있어도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을 속죄일의 제사를 위하여 준비하고 살았습니다.
보편적으로 드려지는 속죄 제사와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의 차이는 속죄 제사는 개인적인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인 반면에 속죄일 제사는 온 국가와 민족의 죄가 사함 받는 민족적 제사인 것입니다.
속죄일의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죄 없는 국가라고 선포 받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의 제사를 통하여서 용서 받게 되면 비로소 세상 속에서 죄 없는 나라로서 거룩한 민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지었던 죄든 알지 못하고 지었던 죄든 개인이 지었던 죄든 민족이 지었던 죄든 그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속죄일이 끝나면 죄 없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으로 긴 겨울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죄 용서하심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은 죄 없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으로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인과 차별성을 두고 살았던 이유도 다 이 속죄일 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거룩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개 같은 자라고 하면서 상종하지 않았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는 속죄일은 중요한 절기인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유월절로 시작하여서 나팔절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땅에 옛 사람이 죽는 날이고,
나팔절은 하늘에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날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하는 날이지만,
나팔절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올라가는 날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라고 한다면,
나팔절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날인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영적인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장차 이 세상을 벗어나는 사람은 실제적인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봄 절기인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영적인 것이지만,
가을 절기인 속죄일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늘에 몸으로 구속을 받게 되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봄 절기에는 개인이 죄사함을 받는 유월절이 있지만,
가을 절기에는 온 민족이 죄사함을 받는 속죄일이 있는 것입니다.
봄 절기인 유월절에는 육적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지만,
가을 절기인 나팔절에는 영적 이스라엘이 탈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봄 절기에는 육적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가을 절기에는 영적 이스라엘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봄 절기인 유월절에는 육적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홍해에서 죄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고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가을 절기인 속죄일에는 영적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죄사함을 받고 천년왕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일이 가을 절기에 포함 되어 있는 연유도 다 이 때문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개인적인 죄사함의 구원이지만,
속죄일은 민족적인 죄사함의 구원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되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과 연합하여서 한 몸을 이루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계 21:1-23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예수님이 재림으로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 모습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장막이란 집이란 뜻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하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 성안으로 어린 양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라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한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과 성도가 신랑과 신부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어서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부부(夫婦)로 만들어 준 것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거룩한 자녀를 생산하고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로 인하여 실패한 것을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로 하여금 회복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실낙원이지만 요한계시록은 복낙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 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죄와 사망의 땅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아담은 저주의 땅에서 눈물 흘리며 살았습니다.
애통하고 곡하고 아파하다가 죽었습니다.
죄가 모든 저주를 몰고 온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는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로부터 오는 저주를 없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서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다른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저주가 있는 곳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년왕국은 역사에 속한 곳이지만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몸으로 살지만 죄 아래서의 몸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몸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를 몸의 구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는 사망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에서는 천국을 상징하는 천년왕국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죽음이 없고 생명나무의 수한처럼 영원히 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 65:20-23절.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이사야 65장은 천년왕국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은 어린아이도 죽지 않고 노인도 죽지 않습니다.
이를 나무의 수한같이 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무는 생명수 강가에 있는 생명나무를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영생하는 나무입니다.
계 22:1-5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생명나무에는 12가지 실과가 맺힙니다.
그런데 그 실과가 달마다 맺힌다고 합니다.
달(月)마다 맺힌다는 것은 천년왕국이 피조에 속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피조 세계에 속한 날과 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불과 햇빛이 쓸데가 없다는 말은 피조물의 빛이 있기는 한데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낮에 하늘에 태양이 비치면 인간이 만든 땅의 가로등 빛이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천년왕국은 피조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그 세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외친 의에 거하는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벧후 3:10-14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불로 심판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죄일의 대제사장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을 예수님이 재림 하신 후에 지키는 절기로 주신 것입니다.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드려지는 제사가 있고,
일 년에 단 한 차례 드려지는 제사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드리는 제사는 일반 제사장들이 드리고,
일 년에 단 한번 드려지는 대 속죄일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드립니다.
일반 제사장들이 드리는 매일 매일의 제사는 뜰과 성소에서 드려지는데,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드리는 대 속죄일의 제사는 지성소에서 드려집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장의 제사는 매일 짓는 죄를 위한 것이고,
일 년에 단 한 번 드리는 속죄일 제사는 일 년 동안의 모든 죄를 일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드려지는 속죄일의 제사는 원죄를 사함 받는 의미가 있고,
매일 매일 드려지는 제사는 삶 속에서 짓는 자범죄를 사함 받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일 년 동안 성소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났지만,
속죄일에는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 하신 후에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 중에서 7월 10일 대 속죄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성도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도들은 일반 제사장들처럼 이 땅의 교회라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지성소인 하나님 나라에 가셔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일의 제사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과거적인 의미입니다.
과거적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제물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원죄를 위한 단번의 속죄제사입니다.
율법 아래서 매년 7월 10일에 드려지는 속죄일의 제사는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드려지는 속죄 제사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으로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립니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은 것입니다.
사진은 실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므로 참 형상이 아닙니다.
사진은 참형상이 올 때까지 유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는 매년 드린 것입니다.
그 제사는 예수님이 오시면 단번에 끝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를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그림자로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몸으로 드려지기까지는 반복적으로 드려진 것입니다.
짐승의 제사는 예표적인 것이므로 반복하여서 드렸지만,
예수님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살상이므로 단 번에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사는 단번에 끝이 나는 제사로서 우리의 원죄를 속량해 주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적 의미입니다.
현재적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여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보좌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는 성도들이 삶 속에서 짓는 자범죄들을 자신의 피로서 용서 받게 하는 대언의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히 7:24-25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2: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롬 8: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원죄를 단번에 속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를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단은 하나님에게 참소를 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근거로 죄사함을 위한 변호를 하십니다.
죄사함의 변호는 재림하실 때까지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미래적 의미입니다.
미래적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전 민족이 깨끗함을 입는 속죄일의 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한 성도들을 하나님께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으로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정결함을 입은 자들이 거룩한 자가 되어서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나라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동안 살아가는 천년왕국을 말합니다.
속죄일은 절기상으로는 나팔절 다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한 전 단계로 모든 성도들이 일괄적으로 거룩함을 입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죄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습니다.
요 6:38-39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다시 살린다는 말은 잠시 죽어 있던 자들을 다시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즉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이 땅에서 정한 기한을 살다가 죽습니다.
영혼은 아버지에게로 가고 육신은 무덤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육신은 예수님이 재림 하셔야 하늘의 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고전 15: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살전 4:13-18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 몸은 홀연히 변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은 하늘의 몸으로 변화를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항상 주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그리 할 때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고 하신 말씀이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그 나라를 맡기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는 천년왕국이 이라고 합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준비합니다.
대제사장은 두 마리 염소를 두고 제비를 뽑습니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것이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죽임을 당하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산 채로 광야로 보내어 집니다.
두 마리 염소는 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임 당한 예수님이 있고,
살아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부활 하여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임 당한 염소(십자가 지신 예수님)는 우리의 원죄를 위한 제물이고,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염소(부활 하신 후 승천하신 예수님)는 우리의 자범죄를 위한 제물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죽임당한 염소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진 염소는 살아가면서 짓는 죄를 사함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속죄 제물로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은 그 피를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 시은좌에 뿌립니다.
레 16:15절.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막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속에는 세 가지 증거물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이 적힌 두 돌 판이 있습니다.
법궤 속에 담긴 세 가지 증거물들은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대표적인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증거물을 담은 궤라고 하여서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법궤 속에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라면 마땅히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살고 있음이 은혜입니다.
출 19:3-8절.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만약 이 율법을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흠 없는 제물을 잡아서 그 피를 이스라엘에게 뿌리고는 약속을 체결합니다.
이는 누구든지 이 약속을 어기면 제물처럼 죽임 당할 것이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출 24:6-8절.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의 다짐을 하나님께 보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십계명이 적힌 두 돌 판을 주십니다.
모세가 40일 만에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산 아래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경은 본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려버립니다.
이는 언약 파기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3천명이 죽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가 급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 백성들을 죽이려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듣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곤 모세를 시내산 위로 다시 부릅니다.
처음 것과 똑 같은 돌 판을 만들어 주십니다.
모세는 내려와서 성막을 만들고 두 번째 돌 판을 법궤 속에 보관을 합니다.
두 번째 돌 판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또한 너희가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 속에 담긴 두 돌 판을 볼 때마다 지키려는데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되고 자신들은 불순종한 자로서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럼에도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약속을 어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범죄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 년에 일차씩 속죄일이 되면 그 법궤 위에 염소의 피를 뿌리라고 합니다.
이는 곧 염소의 희생이 이스라엘을 지켜 준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희생의 제물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시키기 위해서 속죄일만 되면 대제사장이 염소의 피를 앞세우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 뚜껑에 그 피를 뿌린 것입니다.
법궤 뚜껑에 피를 뿌린다는 것은 곧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뿌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흠향하시곤 영광의 구름으로 용서 하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법궤의 뚜껑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곳이란 뜻에서 시은좌라고 합니다.
레 16: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궤 위 속죄소 앞에서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은좌에 내려오면 지성소에는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럼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나와서 살아 있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광야로 내보낼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잘못을 범하고 배반함으로 당신 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간절히 비노니 이제 주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기록된바 속죄의 날에 너희가 내 앞에 지은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하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이제 주의 백성이 당신께 지은 모든 허물과 죄악을 이 시간 용서하소서!”.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백성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염소에게 안수하는 것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전가 시키는 것입니다.
안수란? 안수를 하는 사람의 것이 안수를 받는 사람에게 전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아사셀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 광야로 보내어집니다.
무인 광야로 보내어진 것은 우리의 눈에서 사라지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간 영소라는 뜻입니다.
아사셀은 히브리어 '아자젤'의 음역인데 이것은 '염소'란 뜻의 '에즈'와 '가버리다', '사라지다'란 뜻의 '아잘'의 합성어로서 곧 '속죄의 염소' 또는 '내보냄을 받은 염소'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나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멀리 제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보이지 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아사셀 염소는 광야 무인지경으로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눈으로부터 사라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시편 기자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고 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죄를 우리 등 뒤로 던져서 보이지 않게 하셨다고 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사 38:17절.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시 103:8-14절.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렘 31:34절.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죄를 등 뒤에 던졌다고 하고,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고 하고,
죄를 다시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치워버린 것입니다.
죄가 그들 눈에서 안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분을 우리 눈에서 사라지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눈에서 사라지신 분이 누구신가요?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백성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무인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 염소의 본질적 의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에서 버림을 당하시고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여서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것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단번에 받은 죄사함이 있고,
날마다 받는 죄사함이 있습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에 드려지는 두 마리 염소의 제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와 부활 하신 후에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음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무얼 하시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언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는 자기 피로 죄사함을 주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일 2: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시니라”
성도는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권세가 성도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성도가 죄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죄와 상관이 없이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값에 대한 채무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죄에서 자유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죄가 없는 것으로 간과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 4:7-8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3: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간과하심이란? 비록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구약에서 다윗이 받았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밧세바를 빼앗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용서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인정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법을 사해 주시고 그 죄를 가리워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다윗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가 죽은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꺾은 뼈를 보시고 자기를 용서 해 달라고 기도 한 것입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몸에 하나님의 은혜를 새겨 넣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죄는 용서 받았지만 그 죄를 용서 받은 사랑의 빚은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충신 우리야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살아가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야의 죽음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 때문에 죽은 우리야는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진정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죄로부터 용서 받은 기쁨도 있지만,
동시적으로 나 때문에 흠 없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에 대한 아픔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속죄일에 담아 놓았습니다.
속죄일은 기쁨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쁨과 함께 슬픔도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속죄일은 큰 안식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 중에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왜 안식일 중에서도 특별한 안식일로 지키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속죄일이 담고 있는 의미를 백성들 몸에 새기고자 함입니다.
안식일은 기쁨의 날입니다.
즐거움으로 예배하고 쉬는 날입니다.
그러나 속죄일의 안식일은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합니다.
속죄일은 참 좋은 날입니다.
안식일 중에서도 큰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괴롭게 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은 상한 심령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죄일에는 온 민족이 금식을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일은 금식하면서 지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은 기쁨의 날이면서도 슬픔의 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천국을 상징하는 교회로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모임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 받았다고 나대지 말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속죄일로 또한 큰 안식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고 그 죄로 인하여 예수그리스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몸에 새기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여전히 죄사함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죄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아버지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은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다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아픕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죄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백번이고 용서 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근심을 하십니다.
이는 못난 자식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타 들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 용서 받았느냐?
그럼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책은 성경책이고,
성경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책은 레위기이고,
레위기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사이고,
제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일 제사이고,
장소 중에 제일 중요한 장소는 지성소이고,
사람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은 대제사장이고,
날 중에 제일 중요한 날은 7월 10일 대속죄일이고,
일 중에 제일 중요한 일은 죄사함 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속죄일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왜 속죄일을 가강 귀하게 여길까요?
이는 속죄일이 되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일은 신부가 단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기로 보면 속죄일이 끝나면 초막절을 지킵니다.
초막절은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절기입니다.
속죄일은 영원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목욕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거 우리가 어렸을 때 설날을 맞이하기 전에 온 가족이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밀고 새 날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속죄일을 가장 큰 절기로 지켰습니다.
온 민족이 죄로부터 자유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신랑과 혼인을 하려면 신부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은 신랑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야 합니다.
이는 신랑이 신부를 값을 주고 사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속죄로 인하여 신부가 정결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레 16:30절.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속죄란 말은 “카파르” 라고 하는데,
이는 “덮어주다”, “닦아 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실제로는 죄가 있지만, 없는 것으로 가려준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겨울에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천지는 하얗게 됩니다.
눈이 모든 더러움들을 다 덮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눈 속에는 각종 더러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흰 눈이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덮어버린 것입니다.
속죄일이 바로 온 천지를 하얀 눈으로 뒤덮는 것과 같은 날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각종 더럽고 추한 죄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다 덮어주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사람과 사람 간에 쌓였던 죄와 허물도 다 사함을 받습니다.
또한 나라 안에서 일어난 갖가지 죄악된 사건과 사고들도 다 사함 받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온 천지에 죄 용서하심이라는 흰 눈이 덮이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즐거운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생각만 해도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가요.
그만큼 속죄일에 주어지는 거룩은 중요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의미에선 속죄일은 아직 기다려야 할 절기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이미 성취가 된 것입니다.
신앙이란? 미래를 현재로 살고 현재를 미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를 현재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장차 도래할 것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날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속죄일의 축복을 현재 속에서 누리고 살아갑니다.
속죄 받았기에 속죄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절기들을 맛보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거룩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지금 속죄일의 거룩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를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이 있습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항상 주인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주인이 있을 땐 충성하는 척 하였지만 막상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자 게으름을 피우게 됩니다.
충성된 종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로서 아들로서 살았지만,
게으른 종은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충성된 종은 미래의 천국을 현재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충성된 종들처럼 늘 주인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맞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속에서 내일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