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 종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비롯 수많은 문화재와 천년 세월이 지난 문화재가 아니라도 신라 이래 수많은 문인재사 작가들이 주옥같은 유려한 문장으로 답사기, 시, 그림을 남겼고 주석하신 희랑선사로 부터 최근 성철스님 까지 수 많은 선사들의 가르침이 골골에 남아 있는 가람이다. 때문에 범부에도 못 미치는 나의 글은 어떤 글을 올리든 사족에 불과할 것이니. 님들의 답사에 도움울 주기 위해 참고자료를 활용하였다.
가야산 국립공원은 1966년 6월 24일 사적 및 명승지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1972년 10월 13일 국립공원 제9호로 지정되었다. 가야산국립공원은 전체면적 77.063㎢로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서로 잇대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뚝솟은 상왕봉은 일명 우두산으로도 불리며, 해발 1,430M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옛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팔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해인사 앞자락을 굽이쳐도는 홍류동 계곡은 우리나라 팔경가운데 으뜸이라 했으며 신라말 난세를 비관하여 그 한을 달래기 위하여 산문에 들어가 선화(仙化)한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농산정, 학사대 등의 유적과 1995년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국 불교의 상징인 팔만대장경과 경판전을 보유하고 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산형은 천하에 절승 중 제일이다'라고 극찬하였으며,오대산(1,563M),소백산(1,439M),과 더불어 왜적의 전화를 입지않아,삼재(화재,수재,풍재)가 들지않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사명대사께서도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신 곳으로 지금도 옛 선현들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
성철스님 부도(경남 합천) - 현대적 조형미 담은 부도...유홍준
길상탑
해인사 들머리 길가에 서 있는 작은 돌탑이라 큰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1966년 여름 석탑 전문 절도단으로부터 회수된 4매의 지석(誌石)으로 인해 비로소 주목을 끌게 되었던 곳이다. 묘길상석탑(妙吉祥石塔)은 건녕(乾寧) 2년에 건립하였으니 신라 진성여왕 9년(895)이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지은 탑기(塔記)에 의하면 이 탑은 북쪽에서 발흥한 궁예와 서남쪽 견훤의 싸움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다쳐 죽은 병사와 백성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당시 해인사의 훈혁(訓衋)대덕이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벼 한 다발 씩 희사를 받아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로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석탑건립의 가장 큰 목적은 ‘호국을 으뜸으로(大較以護國爲先)’ 삼았다. 이는 전몰장병과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 석탑의 효시로서 우리나라의 호국불교 사상이 이미 신라 때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라 할 것이다.
또한 함께 출토된 「오대산사 길상탑사(五臺山寺吉祥塔詞)」지석에는 치군(緇軍: 僧軍)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도 적혀있는데, 탁한 운세 즉, 곧 견훤세력이 서쪽에서 미쳐 승가 괴롭히기를 10년인데 황량한 들판에는 흐트러진 해골만 가득했다 하였다.그리고「해인사호국삼보전망치소옥자(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지석에는 56명의 승려와 속인의 명단이 열기되어 있는데 이는 해인사를 장악하려는 자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명단인 것이다. 두 지석 내용 만으로는 이 대결의 피아를 정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탁한 운세가 서쪽에서 미쳤다’라던가, 또는 ‘어제는 반딧불로 길 밝히는 것을 기뻐하더니’ 라는 구절에서 외부의 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받게 되는데 즉, 견훤을 등에 업은 남악파(南岳派)와의 이념 싸움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희랑대사상
화엄종 법손 균여대사(均如大師)의 『균여전(均如傳)』은 희랑대사의 탄생을 다룬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을 비롯한 열 부분으로 나뉘어 대사 행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네 번째 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에는 다음과 같이 해인사 내 남ㆍ북악파 간의 갈등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옛날 신라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사종이 있었다. 한분은 관혜공(觀惠公)으로 백제의 우두머리가 된 견훤의 복전(福田)이었고, 다른 한분은 희랑공(希朗公)이니 우리 태조대왕의 복전이었다. 공이 신심 받아서 향화(香花) 원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원이 하마 다른지라 마음이 어찌 같으랴. 그 문도에게는 점점 물과 불처럼 번지었으니 하물며 법미(法味)이겠느냐. 시고 짠 맛을 각기 받았으니 이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은 이미 오래 되었다. 더욱 시체의 무리들이 혜공(惠公)의 법문을 일러 남악(南岳)이라 하고 랑공(朗公)의 법문을 일러서는 북악(北岳)이라 하였다…(昔新羅之季伽倻山海印寺 有二華嚴司宗 一曰觀惠公 百濟渠魁甄萱之福 田 二曰希朗公 我太祖大王之福田也 二公受信心請結香火願 願旣別矣 心何一焉 降及門徒 浸成水火 況於法味 各稟酸鹹 此弊難除 由來己久 時世之莗 号惠公法門焉南岳 号朗公法門焉北岳…) ” - 赫連挺ㆍ李丙疇譯著 「均如傳譯注」 ※복전: 귀의할 만한 덕 높은 승려 합천 해인사는 신라 말기부터 이미 희랑(希朗), 관혜(觀惠) 두 화엄사종을 중심으로 이념적 대립에 빠져 서로 상쟁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해인사를 장악하려는 전남 구례 화엄사를 근거로 한 관혜공(觀惠公)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공을 중심으로 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대결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립은 「묘길상석탑 지석에 드러난 바와 같이 희랑대사가 해인사에 입산하기 이전 진성여왕 대부터 그 근원이 시작되었는데 신라말기 희랑대사 때에 이르러 더욱 극명하게 대립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왕국의 종말기 세력재편의 소용돌이가 이곳 산곡의 수도승들에게도 불어 닥친 것이었다...거창인터넷신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전에는 아주 넓은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근간에 만들어진 작은 못이 있을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해인사 전경이 이 연못에 비치었다고 전하며 그래서 못의 이름을 영지(影池)라고 했다고 한다.
대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후와 혼례하여 많은 자손을 두었다. 그중에 일곱 오아자가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 입산 수도하게 된 곳이 이곳 가야산 칠불봉이었다. 왕비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곳을 수차례 찾아와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출가하여 세상을 잊은지 오래인 일곱 왕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
왕비는 왕자들이 수도하고 있는 봉오리의 그림자가 비치는 이 연못에서 그림자만을 보고 애달픈 마음을 달래며 돌아갔다고 전해온다. 이후 가야산 정상 우측의 이 봉오리들을 칠불봉, 이 연못을 영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일곱왕자들은 지리사으로 수도처를 옮겨 그 곳에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에도 이와 같은 영지 전설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거의 완전한 형태의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당간지주이다. 자세히 보면 두 지주의 재질이 서로 달라 보인다. 그래서 지정문화재가 아닌가? 성보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부러진 당간지주는 어디서 왔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다만 사진 좌측 당간지주는 조성시기가 오래되지 않아 보인다.
사각형지대석 위에 사각형기단이 놓였는데 전후면 에 3개씩의 안상이 양측면에 1개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내외부가 비교적 화려하게 치석되었고 기단부는 정연하게 결구 되어 있다. 통일신라 하대 또는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온다. 지주 안쪽으로 나모아미타불이라는 한자와 한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후대에 새겨 넣었다.
해인사 원표. 높이가 3미터 정도 되고 폭이 20센티 정도 되는 사방 돌기둥에 지역을 동, 서, 남, 북으로 나누어 거리를 음각으로 세밀히 새겨 넣은 이정표이다. 내용을 살펴보자.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伽倻山 海印寺」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인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 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ㆍ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하였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1874년(조선 고종 11)에 판각한 것이다.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으로 943년(고려 태조 26)에 쓴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매우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의 잘되고 못 됨은 곳에 달려 있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 가야산(일명 牛頭山) 해인사는 해동의 명찰이다. 옛날 양나라 때, 보지공이 임종할 때 『답산기』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고려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때 그들에게 이 『답산기』를 전해 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의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보지공의 제자가 『답산기』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때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밤낮 이레 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 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공이 나와서 법을 말씀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 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 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마침 신라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효력이 없으므로 임금이 신하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고승 석덕의 구호를 찾고 있었다.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여겨,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십 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짝이 좁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실 한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 사신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쭈었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으니, 때는 애장왕 3년(802) 임오(壬午), 당(唐)의 정원(貞元) 18년이다. 임금이 친히 이 절에 와서 전답 2천 5백결을 시납하고 경찬하였다.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음으로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나오는 창건담은 다음과 같다.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神琳)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大曆)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 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
이때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이 천하에 국모(國母)로 군림하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육성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 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였다.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았다. 그리하여 가야산의 좋은 경치는 도를 성취하여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의 귀한 보물은 지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는데 766년,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왕태후가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는데 갑자기 순응이 입적하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이정이 이 절을 크게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다. 그런데 신림은 의상의 제자였으므로 결국 순응은 의상의 손제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이른 바 화엄십찰의 하나로 해인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보지공의 제자로부터 『답산기』를 전해 받고 또 이미 250여 년 전에 죽은 보지공으로부터 우두산에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창건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의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것은 해인사의 창건을 신비화시키고자 한 후세인들 심리적 표현의 결과라고 하겠다.
넷째, 해인사의 창건에는 신라 왕실의 각별한 도움과 후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는 성목왕 태후의 귀의와 대시주를 말하고 있고, 『해인사고적』에서는 애장왕비의 난치병 치유가 인연이 되어 애장왕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여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실의 도움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인 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왕 3년에 아찬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6월 정월에 비 박씨를 왕후로 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으므로 왕 3년에 왕후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해인사고적』의 기록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심이 강했던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왕 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다는 최치원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으로 생각된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가야산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 대사는 신라 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뒤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 대사, 대각(大覺) 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 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 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 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 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 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중수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ㆍ응진전ㆍ퇴설당ㆍ구광루ㆍ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두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동방지국. 남방 증장
서방광목.북방다문
국사단.가야산에는 산신이 있고 해인사 가람 터에는 이 터의 형국을 주관하는 토지신이 있다. 국사단이란 이 토지신을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가람을 수호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국사신앙은 불교의 정통적인 신앙이 아니라 한국 전래의 토속신앙의 대상이다. 그래서 건물의 명칭도 전이나 각이 아니라 단이다. 국사단은 통도사. 표충사. 제천 신륵사에서도 볼 수 있다.
국사단에 봉안된 가야산신 정견모주 벽화.
정견모주(正見母主) 는 가야연맹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여자 신이였다. 대가야 및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라고 한다. 원래 가야산(伽倻山)의 산신이었는데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 (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선도 성모는 혁거세의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령한 아들을 낳아 동쪽 나라의 첫 임금이 되었다. 나라에서 민간으로 내려온 산신 신앙을 인용하여 높고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하늘신 이비가지를 마음에 품고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 정견모주의 사당이 원인이 되어 모주의 울음을 재촉하는 기우 방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견모주는 가야국의 비로서 짧은 일생을 살았으므로 원한에 맺혀있다. 가야사람들은 가야산 여신을 높여 `정견모주`라 우러르게 되었다 한다.
정견모주의 첫째 아들 붉은해는 왕위를 계승하니, 보일(宝日)은 비지태자(比只太子)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는 가야산 여신인 정견모주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이뇌왕이고 이뇌왕은 신라에 청혼,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월광태자를 낳았다. 522~52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광루와 화엄일승법계도(해인도)
국사단에서 해탈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불사중이어서 바로 구광루 중정으로 진입 동선이 마련되어 있다.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 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 또한 남천당 한규(翰圭, 1868~1936)대사가 쓴 편액이 걸려있다.
구광루 앞 해인도를 돌고 돌면 내마음의 잡념도 사라질 것인데, 한바퀴도 돌아 보르 여유를 갖지 못하고 대적광전으로 향하였으니 해인은 고사하고 사념만 더 깊어갈 듯 하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광대무변한 화엄사상의 요지를 2백10자의 게송으로 압축한 도인圖印이다.
<법계도>의 근본 정신은 바로 <화엄경>의 근본 정신이기도 하다.
대적광전 중정의 석탑.석등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 개의 보주(寶珠, 작은 공 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팔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본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할 때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ㆍ보륜ㆍ보주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한 다음에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추측된다.
배례석
청수대(?). 홍천 수타사에도 있다.
노주석. 본래는 한 쌍이었을 것이다.
불전은 해인사를 창건하던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순응 (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는 2층으로 된 건물로 비로전(毘盧殿)이라 하였다. 그 후 성종 19년(1488)에 인수(仁粹), 인혜(仁惠) 두 대비(大妃)의 시주 후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중건 할 때 대적광전으로 개명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 의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중건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5량구조로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 건물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약하고 우주(隅柱)의 귀솟음과 안쏠림이 거의 없다. 어간(御間)과 협간(夾間), 퇴간(退間)의 폭은 거의 같고 각 칸마다 공 간포가 3구 배치되어 공포의 간격은 일정하다.
대적광전 측후면의 현판. 해강 김규진 글씨이다.
역시 해강의 글씨로 대방광전도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대적광전 소맷돌
비로자나불상은 1769년에 조성되었다.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金塘寺:경북 성주 법수사/우리님들이 익히 아는 삼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유존하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의 사찰))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龍起寺:)를 거쳐, 1897년 지금처럼 그 밖의 불상들은 정확한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고향 성주에서는 이와관련 재미난 전설이 전해온다. "용기사에서 고개를 넘어 해인사로 비로자나불상 등을 옮겨 모시던 중 갑자기 불상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 범운 스님이 직접 달려나와 예불을 올리자 불상이 다시 움직였다." 해인사로 불상을 옮겨 모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성주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든 전설이리라.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이마 위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넓게 파인 가슴에는 옷자락을 집어넣고 있고 양 다리에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또 한 기 비로자나불은 법보전에 모셨던 비로자나불과 쌍둥이 불상으로 밝혀져 대비로전에 모셨다.
우물천장 빗반자의 주악상 빗반자 주악상
법보전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근자에 조성했다.
장경각 법보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이마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고, 주름은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그러면 두 불상이 대비로전에 모셔진 까닭이 무엇인지 법보전 비로자나불 복장유물에 대해서 2005년 신문기사(신문명과 기자이름이 불분명하다)를 인용한다.
유명한 팔만대장경의 보금자리인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서 지난 4일 국민적 관심을 모은 발표가 있었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건물의 일부인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경남 유형문화재 41호)이 국내에서 가장 오랜 9세기 통일신라 목조 불상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대적광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 이 불상과 관련해서도 위의 신문기사를 인용한다. 한국불교연구원이 75년 낸 책자 <해인사>에는 흥미로운 사적이 나온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 해인사 중창 당시 현 대적광전인 비로전 처마의 부재 사이에서 발견된 전권(땅을 하사받거나 사들인 경위를 기록한 문서)을 설명한 문인 조위의 <서해인사전권후>란 기록이다. 문집 <매계집>에 실린 이 기록은 이렇게 적고있다. ‘헌강왕 11년(885년) 을사년까지 해인사는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불리우다가 진성왕 4년인 경술년(890년)부터 혜성대왕 원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장사 지낸 황산에 대해 <삼국유사>는 경주 모량 서쪽의 산이라고 했는데, 이 지명은 해인사 들머리인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서해인사전권후>는 ‘해인사를 위홍의 원당 삼았고, 왕위도 버리고 해인사로 가서 지내다 죽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란 해석까지 붙여 놓았다. 게다가 <삼국유사>는 위홍을 진성왕의 배필(남편)이며 직위를 대각간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법보전 불상의 대각간과 비 명문을 놓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법한 상황이 설정된 셈이다. 법보전 불상(좌)과 대적광전 불상(우)...출처/다음
두 불상을 비교한 기사가 이어진다. 법보전 불상은 대적광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불상과 크기와 모양이 닮아 두 구의 등신대 불상을 조성했다는 명문 내용과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금칠을 벗긴 법보전 불상 사진을 보면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형 용모다. 대적광전의 불상 또한 주름, 옷 윤곽, 얼굴 등이 그런 식이어서 학계에서도 두 불상의 닮은 꼴은 오랜 화제거리였다. 발표 이후엔 대적광전 불상도 법보전 불상과 같은 시기 것이란 추론이 일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두 불상은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이 깃든 커플 불상일까. 미술사학계의 시각은 대체로 싸늘하다. 교리상 비로자나불 상을 동시에 봉안하는 것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에도 전례가 없는 발상인데다, 대적광전 불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 표현이 평면적이어서 시대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견해다. 상당수 연구자들은 대적광전 불상이 고려 또는 조선시대 법보전 불상을 본떠 만든 복제상이 명백하다는 주장을 편다. 법보전 불상이 통일신라 것이라는 데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불상을 검토한 강우방 이대 교수는 자연미 돋보이는 표정이나 주름 양식상 통일신라 양식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문명대 동대 교수 등은 나무판 명문의 형식이 어색하다는 점 외에도 동시대 복장유물이 없다는 게 이상하며, 양식상 조선시대 것으로 보인다는 이견을 제시했다.
종단 안에서도 학계 의견을 모으지 않고 서둘러 단정적 발표를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적광전의 불상 안 복장에 명문이 있는지 검토하고, 개봉되지 않은 법보전의 복장물과 나무 재질을 심층조사하자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두 불상이 1000여 년전 왕실 연인들의 애정 불심이 깃든 커플 불상이었는지를 밝히는 데는 더욱 난감한 검증절차가 필요한 셈이다. 어쩌면 그 비밀은 영원히 부처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경북대 박상진 교수는 동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주장도 편다. 박상진 경북대 교수에 의해 또 한번 강력하게 지지됐다. 박 교수는 법보전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에서 채취한 표본을 서울대에 AMS(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 분석을 의뢰, 그 결과를 발표했다. 분석 결과에 의거 박 교수는 법보전 비로자나불이 AD740년 전후부터 950년 전후,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이 AD950년부터 109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신뢰한계 95.34%). 박원규 충북대 교수(산림과학부)도 “탄소연대의 측정오차와 변동오차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두 불상은 9~10세기 것임이 분명하다”며 “연륜연대 측정방법을 사용해서 좀 더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칠월칠석 비로자나데이. 해인사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로 판명된 비로자나 부처님. 즉 1200년 전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과 당시 정치가이며 문장가였던 각간 위홍의 사랑과 서원으로 조성된 두 분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우리 고유 사랑의 날인 칠월칠석을 비로자나데이로 정하고 온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해인사의 대장경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인 1398년에 해인사로 다시 옮겨 모신 것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 지방에서 벌목해 온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3년 동안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조금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대적광전 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한 장경각(藏經閣)이 자리하고 있다. 국보 제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 무렵인 1488년쯤에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각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모두 네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 북쪽의 건물을 수다라전(修多羅殿)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 동의 건물에는 사간판(寺刊板) 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을 윗창보다 세 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법보전 석조여래 수미정상탑
장경각 뒤쪽에 있는 이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 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또한 해인사에서는 화기에 약한 지세를 비보하기 위해 5월 단오에 대적광전 앞을 비롯 경내 요소요소에 소금을 담고 물로 녹이는 행사를 게속하고 있으며, 매화산 정상에서도 5방위에 소금단지를 묻는다.
<가야산 해인사지>에는 ‘1695년부터 1871년 사이 무려 7차례나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해인사 율원장 무관 스님은 “이때 장경판전까지 모두 잃을 뻔했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던 중 해인사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있는 매화산 남산제일봉의 불타오르는 산세 때문에 화기가 절로 날아들어 화재가 잦다는 풍수설에 따라 대적광전의 방향을 바꾸고, 매화산 남산제일봉에 소금단지를 묻게 됐다”고 설명했다.
해인사를 들러보고 원당암.홍제암을 참배하고 돌아 올 때까지 마누라는 대적광전에서 좌선에 몰입해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 이제 집으로 가자는 한 마디에 희미하게 웃음지으며 "당신이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 오랫만에 보았다.문화재가 그렇게 좋으냐?"며 묻는다. 아~~ 그랬구나. 마누라가 기다린다는 사실도 망각한 체 혼자서 희희낙락, 두 서너 시간 절집을 헤매였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앞선다. 하긴 절집에서는 나도 나를 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도 잠시 일주문을 벗어나자마자 사하촌 어묵 냄새 보다 우울한 일상과 작은 고민들이 먼저 파노라마가 되어 스쳐간다. 이놈의 속물 근성을 우짤꼬?
2011.06.05 글 출처: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해인사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