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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주일설교 성만찬에 대하여(고린도전서11:17-34)
본문: 고린도전서11:17-34
제목: 성만찬에 대하여
오늘은 고린도전서11:17-34의 말씀을 가지고
“성만찬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성만찬에 대하여”
지난 목요일에는 큰 형님 팔순모임이 있어서
군산에 다녀왔습니다.
모인 분들은 친 형제들하고 사촌 형님 한분과 조카들과
아내와 둘째 딸 새영이와 하준이가 참석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팔순이라고 모였는데
친척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참여하지 않은 자녀도 있었고 손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래도 스무 명 정도 모였으니
적게 모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잘 모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촌도 잘 모르고
육촌이나 팔촌은 더더욱 모르고 삽니다.
잘해야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한번 보는 정도입니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사촌 형제들의 애경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합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가만 보아도 사촌들이 누구인지 거의 모릅니다.
그러니 이웃들도 모르고 그저 각자 살고 있어 보입니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추도식이면
온 가족들이 모여서 잔치였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어 집에 혼자 있게 되면
그 시간이 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명절에 고향에 가려고 합니다.
이런 모임을 통해서 서먹했던 관계가 좋아지고
헤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간에 행사는 최대한으로
참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들 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즐기셨듯이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주 모여 함께 식사하고
즐겁거나 심각하거나 슬픈 이야기를 하고
같이 말씀도 나누고 기도도 하고
어떤 때는 놀이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즐기셨습니다.
그 유월절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모여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재헌신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시간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족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의식에서 신자는
가장 의미 깊고 친밀한 형태의 예배를 함께 드리며
하나의 떡을 떼고 하나의 잔으로 함께 마십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전통을 따라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함께 모여 식사의 시간을 가집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모임을 애찬이라고 합니다.
애찬의 식사는 가족이 교제하는 장입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식량을 지원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애찬과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진정한 연합을 강조합니다.
이 연함은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로
교회에 온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누리고
영적, 육체적으로 채움을 받고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자유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뒤틀리고 왜곡했습니다.
분명 성만찬이나 애찬은 연함과 조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분열과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모순입니까?
교회를 영적으로 강건하게 해 주어야 할 성만찬이
오히려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고린도 교인은 애찬과 성만찬을
교만과 이기심의 난장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애찬,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희생하는 성만찬을 통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좌절에 빠뜨렸습니다(17절)
그러니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망쳐 놓았으면 바울은 그들이
성만찬을 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돕는 다는 표시로
교회에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것 때문에
도리어 분열했고 파당이 생겼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안 바울은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러한 그런 행위는 성만찬이 아니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만찬에서 보여준 것은 겸손이었고
그렇기에 성만찬을 행하는
우리는 그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성만찬의 자리에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리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그렇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늘 먹을 것이 충분한 부자들은 집에서 배불리 먹으니
교회에 와서는 그들의 부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탐욕스럽게 자기중심적인 행동으로
자기만 먹고 다른 이들이 배가 고프건, 굶던
상관이 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교회를 경멸하고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성만찬이라 애찬을 통해서 섬기고
서로를 세워주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징징대는 두 살배기 아이처럼
그들은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자기가 음식을 가져와서 자기 배만 채우고
남을 줄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최후의 만찬때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교훈을 전혀 모르는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만찬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자기중심적이고
분열된 친목 식사를 바로잡기 원했습니다.
그는 상식, 이성, 규정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돌아가
그가 주님께 받은 관행을
교회에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받은 성만찬에 대한 지침
바울은 성만찬에 관한 지침을
주님께 직접 받았다고 말합니다(23).
바울은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선교여행 직전에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있을 때 직접 계시를 받았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전해 들은 것을 중개인과 달리 성만찬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최후의 만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있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합니다(23-25).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그 어두운 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인 유월절 만찬을 즐기기 위해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 만찬 때 하나님의 아들은 예기치 못했던 일,
즉 수세기 동안 지켜온 유월절 전통을
완전히 깨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떡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떡을 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
제자들이 아직도 이 돌발적인 변화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예수님은 식후에 포도주 잔을 드리고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
예수님은 유월절 전통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실제로 에수님은 빵과 포도주로 하는 새로운 의식을
“새 언약(25)이라고 부르시면서
분명하게 선을 그으셨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상호 합의한
두 당사자 사이의 약속이나 계약을 일컫습니다.
옛 계약은 율법에 기초했으나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
즉 죄의 형벌을 완전히 치르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신 그분의 희생에 근거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정죄당하지만,
새언약의 피로 덮인 사람들은
모든 심판에서 자유하게 됩니다(롬8:1-2).
원래 주님이 하셨던 성만찬은
제자들의 삶에서 감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만찬 식탁에 기대 누워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속죄의 희생에 대해 말씀하시자
마음이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구원자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복과 승리가 아니라
고통, 죽음, 떠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아직 그분이 받으실
치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바울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고 썼듯이 모든 신적 영광을 버리고 그 치욕을 당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기념하라“(24-25)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성만찬의 취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6)는 말로 성만찬의 의의를 설명합니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가족이 그분의 식탁에 다시 모여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신성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하신 것과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믿는다는 무언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생각뿐 아니라 오감을 다루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복음이며,
가장 눈에 보여주는 방법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누리는 친밀한 교제를 일깨워 줍니다.
성만찬을 할 때 주의할 점
성만찬을 할 때는 자만심, 이기심, 탐을 벗고
그에 걸맞는 차림새, 곧 내적인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바울은 불순종의 심각성을 역설합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을
물리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죄가 됩니다(29-20).
신자가 그리스도의 희생하신 몸과 흘리신 피로
그들의 죄를 씻지 않은 채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부정한 영혼으로
주님의 식탁에 나아오는 것은 구주를 욕되게 합니다.
바울이 언급한 징계는 단지 징벌만이 아니라
죄를 범하는 자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경건한 삶과 교제를
회복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온 훈육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있습니까?
첫째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28절).
다윗처럼 주님께 탄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둘째 몸을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떡과 포도주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지 단순한 상징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지만, 맥락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를 존중하고 엄숙한 자세로 대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큰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육과 속죄로 보이신
자기희생적인 겸손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도 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성만찬을 준수하는 자들은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의 신자는 각각 다른 사람의 이익을 살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어서 먹지만
그때는 자유롭게 먹었는데 자기 집에서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며
겸손한 태도로 연합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교제 한다면
심판을 면할 것이고, 병약해서 죽지 않고
축복의 잔을 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가족이라도 모이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한 피를 나누어 받은 친척이라도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그 예배에 성만찬이 있고
또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애찬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예배 중에 하나입니다.
단지 밥 먹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임에 우리는 꼭 참석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셋째 주에 성찬식이 있을 때
우리는 가능한 예배에 참석하려고 하고
첫째 주 식사 모임도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만찬과 애찬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떡을 떼고 잔을 들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계속 선포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만찬을 중심으로 모인
하나님의 가족과 끊어질 때 불건전한 일이 일어납니다.
가족의 소속감를 상실하면서
공동체와의 일체감이 약화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부분에서 영적 발달이 느려집니다.
왜 그럴까요?
성만찬은 그것을 행함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으로 살 것을 재헌신하는 시간입니다.
성만찬은 우리가 한 몸으로 성찬에 임할 때
서로 화해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참여하기 전에 고백하지 않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성만찬을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성만찬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따라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러한 행동으로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유익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피면서
나누어야 할 시간이 성만찬이고 애찬의 시간입니다.
성만찬과 애찬을 통해 주님을 만나며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으로서 새힘을 얻는
주님처럼 겸손과 사랑으로 행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