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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비평 :: 예수신화, 디오니소스-오시리스신화의 비교평
/예수는 있다 - 디오니소스 신화 비교평 1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의 미스터리라는 책에서 기독교와 헬라 밀의 종교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티모시 갠디 왈(이하 동일 씀)
「.............우리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의 다양한 변형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의 이야기 역시 그 변형들이 지닌 온갖 특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신화의 골자를 추려내면 예수의 전기를 사사건건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tm는 육체를 가진 신이며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며 어머니는 인간 처녀(동정녀)이다. 그는 세 명의 양치기가 찾아오기 전인 12월 25일에 동굴이나 누추한 외양간에서 태어난다. 그는 신도들에게 세례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 그가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찬송하며 그를 맞이한다. 그는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부활절 무렵에 죽는다.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간다. 신도들은 최후의 날 심판자로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기념된다. 이것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야기와 예수의 전기에 똑같이 나타나는 것들 가운데 핵심만 추린 것이다. 이처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전혀 몰랐던 것일까?(#119).............」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기독교의 핵심이 모두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빌려온 것으로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시리스 신화와 디오니소스 신화를 백번이고 천번이고 읽어보라.
기독교의 핵심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단 한 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모시 갠디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함을 주장함은 모든 신화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다. 그들에게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그리스의 다마의 바쿠스신화, 페르시아의 미트라스 신화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화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의 내용 중에서 A라는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A`라는 신화에서 나오고,
B라는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B`신화에서 나오고,
C라는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 C`라는 신화에서 나올 경우 기독교의 모든 내용이 다른 신화에서 모두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티모시 갠디는 조지프 캠벨이 동일한 해부 구조라고 부른 것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이 신체적으로 유일무이한 존재이지만 인체의 일반 해부 구조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여러 신화도 유일무이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부유한 이탈리아의 가문에 대해 쓴 16세기 영국의 비극 작품이고, 후자는 거리의 갱들을 다룬 20세기 미국의 뮤지컬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작품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인들 신화는 형태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다.
이처럼 티모시 갠디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모든 신화는 똑같은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호를 종합해 놓고 기독교의 핵심 내용과 똑같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법은 옳치 않다.
예를 들어 티모시 갠디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표절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티모시와 갠디가 음악의 세계에 들어와 분석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음악이 다 표절이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베토벤이 음악 속에 사용했던 음도를 그보다 약 200년 앞서 살았던 시골의 한 꼬마가 노래를 부르며 사용했다면 베토벤은 그 아이의 음을 표절한 셈이 된다.
티모시 갠디가 미술의 세계에 들어와 분석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그림이 똑같다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티모시 갠디의 이론대로라면 피카소의 그림에 빨간색이 사용되었다면 피카소보다 300년 앞서 살았던 한국의 어느 시골 꼬마 아이도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을 사용했으므로 피카소는 그 꼬마 아이를 표절한 것이 된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의 방법론이 잘못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나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이야기와 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자세히 비교해보면 차이점들이 많이 있다. 디오니소스의 탄생과 예수의 탄생을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게 기록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신화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디오니소스 신화를 살펴보자.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제우스가 세멜레와의 연애를 통해 낳은 아들 디오니소스였다. 제우스는 신(神)이었으므로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신의 아들(son of God)이었다. 티모시 갠디는 이러한 점 때문에 예수의 이야기와 헬라 밀의 종교의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디오니소스도 예수처럼 똑같이 신의 아들이며 신을 아버지로 가졌고 인간 처녀 세멜레에게서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야기는 디오니소스 이야기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서는 제우스가 세멜레와 육체 관계를 가진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마리아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세멜레는 제우스를 사랑하면서 제우스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뿐이다.
디오니소스의 탄생 이야기의 신화적 요소는 탄생 과정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우스와 세멜레가 연애를 하는 것에 질투한 헤라는 유모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세멜레에게 다가간다. 헤라는 세멜레로 하여금 제우스의 사랑이 참이라면 제우스의 본래 모습을 자신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진짜 제우스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한다. 하지만 제우스는 연약한 처녀에게 불과한 세멜레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세멜레를 달랜다. 그러나 세멜레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제우스는 번개와 천둥으로 둘러싸인 전차를 타고 세멜레의 방에 들어서면서 번개를 던진다. 무서운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놀라 번개의 화염을 미처 피하지 못한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세멜레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불에 타지 않도록 궁전 기둥에 넝쿨을 자라게 했고 제우스는 세멜레의 뱃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는다. 산달이 되자 아이는 아버지의 넓적다리를 뚫고 세상에 나온다.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이고 이 이야기가 바로 디오니소스 탄생 신화이다.
헬라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이다. 거기에는 사실적 요소가 없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신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단순하다. 만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좀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좀더 신격화시키기 원했다면 디오니소스 신화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이 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비교해블 때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너무나 단순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티모시 갠디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디오니소스의 탄생 이야기가 똑같은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고 싶다. 과연 예수의 이야기기가 디오니소스 신화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인지 이성을 갖고 판단하시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디오니소스 신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제우스는 헤라가 갓 태어난 디오니소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해 디오니소스를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와 그의 남편 아타마스에게 맡긴다. 그리고 헤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여자 아이로 키우라고 부탁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안 헤라는 이노와 아타마스를 미치게 만든다. 아타마스는 실성해 자신의 아들 레아르코스를 사슴으로 착각해 활로 쏘아 죽인다. 또 미친 이노는 아들 멜리케르테스를 끓는 물에 넣어 죽인다. 이노는 제정신이 들자 절망해 죽은 아이를 안고 바다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헤라의 무서운 복수심에 놀란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새끼 염소로 둔갑시켜 헤르메스에게 맡기면서 아이를 멀리 아시아의 뉘사 산에 사는 요정들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한다. 디오니소스는 그 곳에서 잘 성장한다. 하지만 헤라는 복수할 기회를 엿보다가 디오니소스를 미치게 만든다. 정신이 나간 디오니소스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방을 방황하며 다닌다. 디오니소스가 소아시아의 프뤼기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 레아가 디오니소스를 제정신으로 돌아오도록 만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 의식도 전수해준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인도를 두루 다니면서 포도를 재배하는 법과 포도주를 양조하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신앙을 전파한다. 삿갓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덩굴 장식이 하려한 튀르소스라는 막대기를 든 디오니소스는는 표범을 타고 다닌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추종하는 한 떼의 무리들이 따라 다닌다. 디오니소스를 길러준 뉘사의 요정들과 판 신, 사티로스, 살레노스, 그리고 디오니소스를 광신적으로 믿는 마이나데스들이 디오니소스의 뒤를 따른다. 디오니소스는 인도를 정복한 후 트라케 지방으로 간다. 그러나 그곳의 뤼크르고스 왕은 여자들이 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는 새로운 종교를 배척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와 여자 신도들을 막대기로 마구 때리고 감옥에 가둔다. 이에 디오니소스도 바다로 뛰어들어 테티스에게로 도망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왕 자신은 미쳐서 도끼로 포도 묘목을 자른다며 자신의 아이들의 손발을 자른다. 왕은 제정신이 들자 왕국이 황폐하게 된 것을 알게 된다. 백성들은 신탁을 묻는다. 신탁을 통해 디오니소스의 노여움은 죄지은 자의 죽음으로만 풀어진다고 나온다. 그래서 백성들은 뤼쿠르고스 왕을 말에 매어 여덟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죽인다.
티모시 갠디가 디오니소스 신화와 복음서의 내용 중에서 공통점이라고 찾아낸 것은 특이하게도 포도주였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를 즐기는 신이었던 것처럼 예수도 포도주를 즐기는 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통점보다도 차이점이 더 많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는 결코 디오니소스처럼 술에 취해 돌아다니거나 제자들에게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도록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주지하는 대로 예수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포도주가 기본적인 음료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포도주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예수는 포도 재배법이나 포도주 양조법을 전수하러 다니거나 포도주에 취한 자가 아니었다.
티모시 갠디의 논법은 마치 유신 정권 때 반체제 인사들을 빨갱이로 몰던 수법과 비슷하다. 한때 유신 정권은 노동자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와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을 단순히 동일시할 수 없는 것처럼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예수 이야기가 디오니소스 신화의 변형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인도에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어머니 세멜레의 고향인 테베로 간다. 여기에는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있었다. 세멜레가 자신의 부정을 미화하기 위해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디오니소스를 낳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거짓말에 화가 난 제우스가 세멜레를 번개로 때려죽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멜레의 아들 디오니소스를 환영하지 않는다. 더구나 테베 사람들은 그가 괴상한 차림을 하고 광기에 찬 무리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달갑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
이런 디오니소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는 괴상한 옷차림으로 다니지도 않았고, 당시 유대사회에서 인정받는 복식을 했다. 예수가 유대 사회에서 인정받는 복식을 입었기에 옷에 경문이 달려 있었고, 그로 인해 성경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가(경문)를 만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터베의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스를 옥에 가둔다. 하지만 그는 키다이론 산에서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종교 제전을 구경하러 갔다가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인 마이나데스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는다. 오르메노스의 미뉘아스 왕의 딸들 역시 디오니소스를 무시했다가 실성하게 된다. 그녀들은 미친 상태에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찢어죽이고 나중에 제정신이 들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새가 된다. 티린스의 프로이토스 왕의 딸들도 디오니소스의 종교 제전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가 종교적 광란이 시작되자 미쳐서 숲 속을 헤매고 다니다. 포로이토스 왕이 딸들을 찾아 궁전으로 데리고 오면 딸들은 미쳐 또다시 뛰쳐나가곤 했다. 이런 일이 13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프로이토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빌어 겨우 디오니소스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한편 디오니소는 아르고스에 도착한다. 그 도시는 메두사르 죽인 영웅 페르세우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페르세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의 왕국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다. 디오니소스는 마이나데스와 아내 아리아드네와 함께 힘을 합쳐 페르세우스에 맞선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쳐들어 아리 아드네를 돌로 변하게 만든다. 이에 이성을 잃은 디오니소스는 온 아르고스 지방을 황폐케 만들려고 한다. 그러자 헤라가 헤르메스에게 중재를 부탁한다. 결국 돌이 된 아리아드네는 별자리가 되게 하고 디오니소스와 페르세우스가 아르고스 지방에서 공동으로 숭배 받는 것으로 타협이 성사된다.
아티카에서는 이키라오스가 디오니소스를 환영한다. 디오니소스는 아카리오스에세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이카리오스는 술을 먹고 취해 황홀한 상태로 들어간다. 이카리오스는 술맛을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포도주를 다른 목동들에게도 나누어준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신 목동들은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에 놀라 이카리오스가 자신들에게 독을 먹인 것으로 착각한다. 목동들은 곧바로 이카리오스에게 덤벼들어 그를 찢어죽여 버린다. 목동들은 술이 깬 후에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서둘러 이카리오스의 시신을 몰래 묻는다. 그러나 이카리오스의 충견인 마이라는 이카리오스의 딸 에리고네에게 주인의 무덤의 위치를 가르쳐준다. 착한 마음씨 때문에 비명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애통해하던 에리고네는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는다.
소아시아에서 시작된 디오니소스 신앙은 트라케 지방을 거쳐 보이오티아와 펠로폰네소스로 들어와 마침내 모든 그리스 본토에까지 전수된다. 디오니소스가 바닷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튀레노이 족 해적이 그를 발견하고 납치한다. 해적들은 디오니소스의 손을 묶으려 했지만 밧줄은 번번이 스스로 풀려나간다. 이를 본 조타수가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다른 선원들을 만류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해적들은 돛을 올리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돛대에 포도 넝쿨이 감기고 밧줄에는 포도송이가 무성하게 매달린다. 배에는 온통 향긋한 냄새가 풍기고 포도주가 배 안에 철철 넘쳐흐른다. 그리고 노에는 꽃이 핀다. 그런가하면 어디에선가 신비로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해적들은 혼비백산한다. 배를 다시 육지로 대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순간 디오니소스가 사자로 변해 뱃머리에서부터 해적들을 위협하며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곰 한 마리가 배 한가운데서 두 발을 든 채 선원들을 고물 쪽으로 몰았다. 모두가 조타수 쪽으로 도망친다. 사자가 된 디오니소스는 선장에게 덤벼들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그를 찢어 죽인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선원들은 바다로 뛰어든다. 바다로 뛰어든 해적들은 모두 돌고래가 되고 만다. 조타수만이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임을 밝힌다.
지금까지 디오니소스 신화를 살펴보았다. 과연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주장한대로
예수의 이야기가 디오니소스 신화의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강남 교수의 주장대로 기독교가 유대교 사상에다가 희랍의 밀의 종교나 철학 사상을 결합시켜 생겨난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중국제 도자기와 고려청자 사이의 유사점이 기독교와 밀의 종교와의 유사점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이국진 저, 예수는 있다. pp. 37~46. 기독신문사. 2004.9.15.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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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a 그리이스 사람들(선진이나 후손들)이 티모시와 갠디의 글을 보았을 적에 배꼽빠졌을 기야요... 비밀의식 = 미스테리아 = 신화 용어도 구별 못한다고들....ㅋㅋㅋ
/예수는 있다 - 오시리스 신화 비평면 2
그러면 오시리스 신화는 어떠한가? 오시리스는 이집트에서 부활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신으로서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되었다. 오시리스의 모습은 종종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을 쓴 파라오와 관련된 도구인 갈고리와 도리깨를 든 미라 형태로 묘사된다.
오시리스는 태양신인 라의 손자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의 첫 번째 파라오 왕이었고 이시스는 그의 아내였다. 그들은 수년 동안 이 세상을 잘 다스린다. 모든 백성은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칭송했다. 그가 다스린 시기는 황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질투심이 많은 오시리스의 동생 세트가 권력을 탐낸다. 그는 오시리스를 죽일 모략을 세운다. 세트는 상자를 만들어 마법을 건다. 누구든지 그 상자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이 사슬에 묶이도록 만든 것이다. 세트는 신들의 축제가 열릴 때 오시리스가 술에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힘 자랑을 하도록 만든다. 오시리스는 술에 취한 채 그 상자 안으로 들어갔고, 세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납을 부어 상자 뚜껑을 닫아버린 뒤 나일 강에 버린다. 세트는 왕좌를 차지하고 이시스를 자기 아내라고 선포한다. 다른 신들은 감히 세트에게 대항할 수도 없었고 태양신 라 역시 슬퍼만 할 뿐 세트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세트가 다스리는 세상은 암흑기였다. 전쟁이 일어나고 불법이 성행했다 백성들은 태양신에게 호소했지만 슬픔에 찬 태양신은 그 울부짖음을 외면한다.
그런데 이시스만은 세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일 강을 뒤져 마침내 상자를 찾아낸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보니 오시리스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시스는 상자를 가지고 돌아가 신들의 궁전에 놓는다. 이시스는 새의 모습으로 변해 슬픈 애가를 부르며 그 시체 주위를 날아다닌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시체 위에 앉아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죽은 오시리스의 혼이 이시스에게 들어가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고 이시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게 될 아이를 낳는다.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를 세트가 보지 못하는 외딴 섬에 숨긴다. 이시스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현자 토트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오시리스를 다시 살릴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한다. 토트는 오시리스를 살리려면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두 찾아 봉합하고 그의 영이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시스와 토트는 생명의 의식을 만들어낸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다시 여러 조각으로 쪼갠 후 이집트 전역에 흩어버린다. 하지만 이시스는 실망하지 않고 자매인 네프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시스는 결국 시체 조각을 모두 찾아 마술을 행한다. 시체 조각이 다 모였을 때 토트는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에게 찾아간다. 아누비스는 시체를 하나로 묶고 생명의 의식을 행한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입을 열자, 그의 영이 들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하지만 죽었던 자가 산 자의 땅에서 살 수는 없었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인 듀아트로 간다. 아누비스는 자신의 왕관을 벗어 오시리스에게 주고 죽은 자의 신이 되도록 한다. 거기서 오시리스는 죽은 자들의 혼을 심판하는 일을 한다. 의로운 자는 축복된 땅에 들어가도록 하고 악한 자는 아미트에게 삼켜지도록 판결했다.
오시리스가 살아났다는 것을 안 세트는 화가 났으나 곧 화가 풀린다. 오시리스가 결코 산 자의 땅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리스만 없다면 언제든지 신들의 세계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가 장성해서 이미 강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세트는 그를 죽이려고 뱀과 악마를 푼다. 하지만 호루스는 그들을 물리친다. 이시스는 호루스에게 세트를 대항할 수 있는 마술을 알려준다. 또 토트는 마술 검을 준다.
드디어 호루스는 세트를 찾아 나선다. 호루스는 세트와 며칠 간 싸우다가 결국 세트를 거세한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삼촌의 피를 흘리는 것이 별로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따르는 신들끼리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네이스의 판결에 따라 호루스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고 세트는 어둠에 처해진다. 결국 호루스는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고 아버지 오시리스는 내생을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세트는 항상 복수를 하려고 들었다. 호루스가 싸움에서 이길 때면 세상이 평화로웠고 세트가 이길 때면 세상에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호루스가 이길 것이며 오시리스가 이 세상에 돌아올 때에는 무덤들이 열리고 의로운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며 슬픔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상이 오시리스 신화의 내용이다.
티모시와 갠디는 오시리스 신화에서 오시리스가 부활한 다는 것에 착안해서 예수의 부활이 곧 오시리스 신화의 변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와 오시리스의 부활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공통점이라고는 다시 살아났다는 것밖에 없다.
오시리스와는 달리 예수는 질투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오시리스와는 달리 예수는 열네 조각으로 절단되지도 않았으며 예수는 아내에 의해 신비한 방법이 동원되어 부활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차이점이 너무나도 분명한데도 다시 살아난다는 내용 하나만을 가지고서 두 이야기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의 인권 개선 운동을 빨갱이로 몰아붙인 유신 정권의 독재 수법과 비슷하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너무나도 무미건조하게 기록되었다. 오시리스 신화처럼 여러 가지 신화적 요소를 넣어 이야기를 창작할 수도 있었지만 복음서 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집트 신화의 배경은 다신교이다. 신들 사이에 알력이 있고 서로 싸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유일신을 전제하고 있다.
오시리스가 다시 세상에 돌아올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재림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그야말로 유사에 근거한 동일 논증의 오류에 빠져 있다.
/ 이국진 저, 예수는 있다. pp. 46~49. 기독신문사. 2004.9.15.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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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a 이번엔 이집트인들의 배꼽이 빠질 차례이구만.....ㅋㅋㅋㅋㅋㅎ 05-17
bada 안티님들아 빠져버린 그리스배꼽 이집트배꼽 좀 찾아내어 붙여주라. 너들이 책임져야혀 알았쮜이이~~~~헐헐헐^^*
bada : 신화 -미스터리, 역사도 구분 못하는 마조히즘인가? [6]
97546 | 200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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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도시와 갠디의 曰인즉슨
스스로의 인자가 어느 날,
진화론의 대부 아메바로 출발혀더니만.....
그게 오시리스신화, 디오니시스신화를 생산해 내고,
종국에 와서는 적그리스도로 등장한다라?
바로 이것이냐?
오시리스 신화의 개념적 시작에로 들어가면
물에서 신이 탄생했다는 이집트의 초기신화에 접하해지는데...
그야말로 신화 속에 태어나 신화 속으로 저물다 이거군
허나 이집트의 초기 물에서 시작에도 일리가 있음임은 태초 창조가 물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 창조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의 꼬랑지 참 길다....
즉 신화란 비역사가 역사로 둔갑술을 부림인가? 초역사가 자연의 역사로 드리움인가?
무에서 유는 신만이 생산하는 영역인데.....
자연은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정도이고.. 인간이라야 유에서 유를 생산? 조절 정도이며.
진화가 스스로의 신이란 논리는 모호하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착상이다.
우리는 각기 구분된 역사로서 인격적 신의 알파와 오메가 포인트가 기독교의 진정성이다.
흠야
그렇다면 이걸까?
형사의 미해결 사건도 신화이고..
실종 개구리 소년도 신화이고
집 나간 잃은 자식, 아내 못찾음도 신화이고
그러니까 어제 잃어버려 아직 못 찾은 강아지도 신화이다?
그러니까 티모시와 갠디의 책이 예수의 미스터리 제목에서 예수의 신화로 쓰면 안된다.
이는 신화와 미스터리의 구별도 못하는 혼합의 어리석음 치부이다.
헌데 진화가 신화로 역사냐???
신화란?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가공적 이야기란 말이며,
미스터리란 실재하지만 알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미해결이란 뜻으로 쓰이는 거다.
티모시와 갠디의 말이 정당성을 갖출려면은,
성경과 같은 OT. NT의 경전을 내놔봐야 할 것이다.
고저 소소한 편집광쯩에다가 각주나 몇개 짜깁기로 근거를 제시한다 함에는 문제가 많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신화는 신화로서 족한 모티브적 잔재뿐이지 않는가말여,,
그러니까 구약적 경전같은 것도 없는 오시리스신화의 잔재에다가 + 복음서적 디오니소스신화를 채용함이라 함인데 이것에 히브리즘 예수상을 각색화로 차용하였다라??? + 그리고 서신성은 그 사라져버린 영지주의 추종자들의 잔재였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거와 무엇이 다를까?
인용성의 각주 외는 없다는 것은,
바로 강증산이가 나는 갑자기 상제입네하는 모조성과 무엇이 다를까보냐?
그렇게 오시리스 디오니시스 상이 분명한 거라면야,
이에 걸맞는 경전을 내놓아서 위작이다 참작이다의 논쟁적 시비를 벗어나서 경전의 진정성을 갖추게 되면 될 것이다
.
하다못해 일리아드 오딧세이도 사본이 있으며,
성경의 사본이야 너무 많아 진본 가본의 사본비평이 치열해 온 터이지만.....
로마가 무너진 게 한갓 신화적 굴레로서, 기독교인에 의해 점령돼 명운이 끝난 것이기에 역사란 승자의 논리란 패자적 억지논리이다. 머 이런 말이더냐?
그러니까 이렇게 아무런 경전도 없는 허접한 신화에나 의하여 대 로마가 붕되됐다는 것,
하물며 역사라는 거대한 스펙트럼과 대로마가 허접한 신화 따위에나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너무나도
허접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본래 그림자의 성격이란 부여 받은바의 약간의 유형적 비스므리 사명을 일시 감당하다가 실제가 오면 자연히 그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게 이게 정석 논리이다.
모름지기 부수성이라한들 진짜가 등장하기 전에 잠깐 엑스트라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음에 영광스러워하다 진품명품이 왔을 적에 모조품으로서의 그 자리와 영광을 내어줌이 당연함이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나야 하는 것처럼....
첫댓글 그전 안티방에서 활약하셨던 바다님이시지요? 잘 지내셨는지요.
평안하신지요 맞습니다 이렇게 구면이신 분을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상업술에로나 놀아난 꼬라지 하고는, 역사를 비밀의식으로 둔갑시켜 미스테리아라고 하며 이걸 신화라 혼잡질을 하는 무지랭이라니,,, 원~
바다님 좋은 글 좀 많이 부탁 합니다. 님의 탁월한 지적인 글은 참 많은 도움을 주고 생각을 바르면서도 넓게 만들어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