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산운마을은 볼거리로나 마을이 품고 있는 정신적인 유산으로나 알고 보면 더욱 아름다운 고장이다.
찾아가는 날은 비가 왔다.
마을 뒤편 금성산 위로 신비한 구름이 아름답게 감돈다는 뜻에서 산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마을의 풍광을 제대로 느껴보라는 조상님들의 배려인지 금성산은 비를 따라 구름을 둘렀다가 풀었다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했다.
이곳은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안동하면 하회마을이 떠오르지만 의성하면 마늘이 먼저이고 요즘 들어 산수유 축제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산운마을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 위치한 금성산 아래 있는 450년 전통을 간직한 영천 이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인물은 학동 이광준이다.
금성산 자락에 터를 잡으면 당대에 급제를 하고 자식들이 번성한다는 소리를 듣고 식솔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1562년(명종 17년)에 문과 대과에 급제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들도 학문에 빼어나 둘째 아들 경정 이민성과 셋째 아들 자암 이민환이 문과 대과에 급제하여 삼부자 급제의 영광을 누렸다.
아버지가 고시에 합격하고 아들들이 연이어 고시에 합격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들은 산운마을에 터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의 힘으로 명문가를 이루어냈다.
◆ 더불어 삶을 사는 마을
삼부자는 아버지 이광준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다함께 휴가를 내어 금강산 유람 길에 올랐다.
학문과 덕망으로 빛나는 이들의 여행에 당대 최고의 명필가 석봉 한호와 대문장가 간이 최립이 동행하여 금강산 기행(‘유금강산권’)을 기록하였다.
나중에 묵죽화의 거장 탄은 이정이 이 책에 대나무 그림을 더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 글씨,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해동삼절첩’을 이루어 마을에 전한다.
이후 영조 연간에 실학자 성호 이익이 발문을 추가하였으니 삼부자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대가의 솜씨를 한꺼번에 감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서술연대와 전래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어 기록물로도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제 직접 다니며 산운마을을 만나보자. 마을 이장이자 문중지기를 자처하는 분의 안내를 받았다.
먼저 학록정사로 안내한다.
이곳은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1750년(영조 26년)경에 건립한 서원이며 경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학록정사의 현판은 표암 강세황의 글씨라고 한다.
학록정사 강당의 대청 위에 왼쪽으로는 ‘거인(居仁)’ ,오른쪽으로는 ‘유의(由義)’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두 단어는 삼부자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산운마을 영천 이씨들의 좌우명과 같은 말이지 싶다.
‘인에 거처하고’, ‘의를 따르는 것’ 속에 인간으로서의 자기존재 증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장님은 마을을 안내하는 동안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바른길을 생각하며 정의로운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고 줄곧 말했다.
이는 밥상머리에서 어른들에게 전해 받은 가문의 전통이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잘 드러내는 말인 듯하다.
강학구역 뒤쪽에는 삼부자 불천위를 모시는 광덕사란 사당이 있다.
여기서 공동으로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에 세분의 제사를 지낸다.
여타의 종가와 다른 점이라면 종손 한사람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종친회를 중심으로 협동하여 제사를 치른다는 점이다.
종가의 유지와 발전이 종손의 경제적인 부담과 실제생활과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걸림돌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산운마을 사람들은 그 해결책으로 책임을 나누어지는 방향에서 찾고 있었다.
자암 이민환도 ‘자암종택제품정식’에서 ‘만약 옛날에 하던 대로 따르기만 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고쳐서 바로잡을 날이 영원히 없게 될 것이다.
’라고 했으니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드러냈음이며 자손들 또한 유지를 받들고 있는 셈이다.
학록정사를 나와 찾은 곳은 자암의 6대손 소우 이가발의 고택 소우당이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여성이라면 소우당에서 감탄사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산운마을 건축물 중 단연 으뜸이다.
안채와 사랑채와는 별도로 담을 두르고 만든 별당지역이 특별하다.
이곳은 연못까지 갖춘 별장형식의 공간이다.
소나무 향나무 측백나무가 어우러져 원림을 이루었다.
한반도 모양을 한 연못은 사방 어느 곳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주 안압지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형태상의 특징보다도 별채 문을 들어서는 순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먼저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져 아늑하다, 코끝에 전해지는 자연의 향기가 깊은 숲속으로 폴짝 뛰어들어 온 것 같다.
별당 너머의 풍경을 다 잊을 만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내 집에 이런 공간이 있다면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누구라도 여기가 영남 제일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절로 느끼게 될 일이다.
◆ 마을곳곳에 배려의 손길 느껴져
원림의 정취를 뒤로하고 운곡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소우당의 주인 이가발의 형님 되시는 운곡 이희발의 고택이다.
대문을 넘어서자 녹색 잔디가 시원하게 맞이한다.
사랑채는 중문칸 좌측에 배치되었고 중문칸 앞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시선을 막기 위해 ‘ㄴ’자형의 차면담을 설치하였다.
안채 건물전체를 돌아 들어가면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소우당에서도 참았던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다.
안채 뒤로 확 트인 공간이 후련했다.
바깥출입이 어려웠을 아녀자들이 여기에 서서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여기서라도 못 나가는 심정을 달래라고 만들어 주었겠지요” 이장님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천 이씨 남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이리 깊었으리라 믿어보았다.
건물을 어떻게 올리고 배치를 어떻게 하고 하는 것보다 거주하는 이의 눈 맛을 배려한 공간운영이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나는 안채의 한쪽 방을 차지하고 앉아 문을 열어 바람을 맞이하고 풍광을 담아보고 싶어졌다.
쓰지 못하는 시라도 술술 나올 것 같다.
어찌 이리 사랑스러운 공간을 만들었을까. 누구라도 산운마을을 찾아오면 운곡당 안채의 뒷마당을 잊지 말라고 당부해 둔다.
학록정사를 거처 소우당을 지나고 운곡당으로 걸어오는 길은 행복하다.
산운마을의 내력을 들으며 돌담을 거니는 일은 아늑하다.
돌담은 내 집과 남의 집을, 골목 길과 집을 분리하는 장치가 아니라 걷는 이에게 정겨움을 더해주는 도구 같다.
거만하게 솟은 담이 아니라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담장위의 낡은 기와는 어디서 날아온 새 생명을 키우는 중이다.
오직 나와 타인을 경계 짓는 도시의 담장과는 다른 쓰임새다.
느릿느릿 걸어야 제 맛을 느끼리라.
산운마을의 대표자들인 삼부자의 고택은 어디로 갔나. 경정 이민성과 자암 이민환의 종택은 한국전쟁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경정종택은 사당만 피해를 면하였고 자암종택도 사당을 제외한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자암종택은 현재 안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근래에 신축한 기와집이 있고 우측에는 초가로 복원한 사랑채가 있다.
간결한 구조가 집은 내세우는 자리가 아니요 단지 주거공간일 뿐이라는 자암의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다.
아직은 문화재 탐방의 고급코스에 산운마을 두려는 까닭을 찾지 못했을 일이다.
아버지 이광준은 강릉 부사를 지내던 시절에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이때 삼부자가 힘을 모아 왜적을 물리쳤고 오직 강릉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백성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는 관리들 틈에서 진정 의를 행한 분이다.
그의 둘째 아들 이민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를 읽어보는 것 만한 일이 없다.
그는 현실과 유리된 학문을 하지 않고 항상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세상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지식인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실생활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사회 시로서의 뛰어난 가치와 예술적 매력을 지닌다.
‘한국문학통사’를 지은 조동일 등의 학자가 이민성은 한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의 단초가 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한다.
그의 대표적인 시 중의 하나인 ‘봉산 동촌에서’를 읽어 본다면 리얼리즘 시를 읽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민환은 또 어떠한가. 그가 살았던 시기는 명ㆍ청 교체기로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대였다.
그는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이자 명의 원군으로 파병된 강홍립 장군의 문종사관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민환은 후금의 수도로 끌려가서 겪은 생활풍습과 문화, 청나라 태종이 된 누루하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물은 당시 역사적인 기록이 전혀 없는 동아시아 지성사에 독보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민환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치적인 좌절기에 지식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였다.
그가 경험한 것을 자신의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조선이 처한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안목과 이해의 시각을 결부시켜 자료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은 백여 년 후에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학문으로 계승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전통의 성리학이 현실과 유리되어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반성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산운마을의 삼부자는 당대 관리들이 가지지 못했던 애민정신, 새로운 시작(詩作)의 태도, 다음 시대를 선도하는 사상을 가졌다.
단순한 문화재 관람이 초급이고 체험이 중급이라면 조상들의 사상을 알고 현장에서 느껴보고 각자의 생활을 돌아본다면 충분히 고급의 자리에 올려도 좋을 것이다.
여행하기 적당한 계절이다.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의성 산운마을을 추가하기를 권한다.
이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