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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조령 관문 중 첫 번째 관문인 '주흘관'.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
방어의 요충 鳥嶺을 지키지 않고
조정에서는 전방으로 먼저 내려간 순변사 李鎰의 뒤를 받쳐 주기 위해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소문난 申砬(신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삼아 출전시켰다. 신립은 忠州로 내려가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습했지만, 그 수는 겨우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종사관 金汝山勿(김여물)은 충주 남쪽 100리 지점인 요충지 鳥嶺(조령=새재)을 지킬 것을 신립에게 헌책했다.
그러나 신립은 達川江(달천강=달래강)을 등진 彈琴臺(탄금대) 앞에 진을 쳤다. 병사를 일단 死地에 빠뜨려 물러날 수 없도록 한 다음에 분발시켜 이긴다는 楚漢戰(초한전)의 명장 韓信의 배수진을 흉내 낸 것이다. 징비록은 지형을 잘 이용하는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면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적이 尙州에 있을 때 신립과 이일이 먼저 兎遷(토천)과 새재(조령)의 몇십 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켜 적이 아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게 했더라면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수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兎遷은 점촌에서 새재가 시작되는 聞慶(문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金正浩의 「大東輿地志(대동여지지)」에 의하면 그 구간은 말 탄 자가 견마잡이와 나란히 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 좁아 추락사고가 자주 일어났던 險路(험로)다.
이 길은 후삼국 때 公山(지금의 대구 팔공산)전투에서 패배한 고려 태조 王建(왕건)이 후백제왕 견훤 軍의 추격을 따돌리고 홀몸으로 도주한 퇴각로였다. 그때 王建은 토끼가 다니는 길을 따라 겨우 活路를 찾았다고 해서 「토천」이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3번 국도변의 문경시 마성면 진남휴게소 일대가 그곳인데, 깎아지른 절벽 위에 姑母山城(고모산성)까지 있어 이곳만 막으면 왜군은 聞慶 새재를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된다.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敵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
충주전투를 앞두고 신립도 尙州전투 때의 이일처럼 척후병을 내보내지 않았다. 다음은 충주전투 때의 신립과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 4월27일 초저녁에 신립은 군관 한 사람으로부터 『적군이 이미 새재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략) 이튿날 아침, 신립은 전날 저녁 정보를 제공한 군관을 불러 『어찌 그런 요망스런 정보를 제공해서 군사들을 동요하게 하느냐』고 꾸짖고는 목을 베어 죽였다. 이어 그는 임금에게 『적병은 아직 尙州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는 장계는 올렸다. 그런데 적은 이미 10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징비록에선 『장수라면 200리 밖으로 척후를 배치하여 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승패는 兵家의 常事이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신립이나 이일은 匹夫之勇(필부지용)은 있었지만 將帥(장수)감은 아니었다.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를 거쳐 북상한 고니시 軍과 기장-울산-영천-군위를 거쳐 북상한 가토 軍은 문경에서 합류하여 3만8000명의 軍勢를 이뤄 새재를 넘었다. 丹月驛에 진출한 왜군은 지금의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신립 軍이 진을 친 탄금대 앞 벌판을 내려다본다.
신립은 왜군이 보병인 만큼 탄금대 앞 벌판으로 끌어들여 騎兵(기병)으로 먼저 짓밟고 이어 보병으로 공격하겠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탄금대 앞 벌판은 지금도 그렇지만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잡초까지 우거진 습지대로서 騎兵戰에는 매우 불편한 지형이었다.
왜군은 두 방향으로 먼저 공세를 취했다. 일대는 산을 타고 동쪽으로, 다른 일대는 달래강을 끼고 서쪽으로 몰려왔다. 신립은 두 번이나 기병에 의한 타격을 시도했으나 말발굽이 수렁에 빠져 기동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왜군이 지닌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활보다 수배에 달해 접근전을 전개할 수 없었다.
오랜 戰國시대에서 단련된 왜군은 射擊(사격)과 機動(기동), 즉 野戰에 강했다. 조총은 단발 화승총이긴 했지만, 왜병은 교대사격에 숙달하여 연속사격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신립은 달래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곧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과 같다>
어디로 蒙塵할 것인가
신립 軍의 패보가 도성에 도달한 다음날인 4월30일 선조는 피란길에 오른다. 5월1일 개성에서 宣祖는 蒙塵(몽진)의 방향에 대해 몇몇 대신들에게 묻는다. 다음은 「선조수정실록」의 관련 기록이다.
< 도승지 李恒福(이항복)은 『義州에 가서 御駕(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궁경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八道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明나라 조정에 가셔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해원부원군 尹斗壽(윤두수)는 『북도(함경도)는 군사가 강하며, 함흥과 鏡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생긴 험준한 땅이니 鐵嶺(철령)을 넘어 북방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당시 다수 신료의 견해를 대변한 윤두수의 방안은 全局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함경도로 쳐들어간 倭將 가토가 불과 한 달 뒤에 경성·회령 등 국경지역을 함락시키고 두 왕자(臨海君·順和君)를 포로로 잡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항복의 방안에 대해 宣祖는 『明나라에 內附(내부)하는 것이 본래 내 뜻이다』라고 화답하면서 류성룡에 대해 『승지(이항복)의 말이 어떤가』라고 묻는다.
< 成龍은 아뢰기를 『지금 東北의 여러 道는 예전과 같고, 호남의 충성스런 선비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많이 일어날 것이온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다는 일을 의논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한 번 국토를 떠나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이 西厓의 지론이었다. 西厓는 이항복에게 이렇게 책망했다.
< 어찌 나라를 버린다는 의논을 경솔히 입 밖에 낸단 말인가, 그대가 비록 길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부녀와 환관의 충성이 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한 번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인심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니 누가 능히 이런 사태를 수습하겠는가>
西厓는 義州로의 파천을 찬성하면서도 明에의 망명은 불가하고, 적어도 민심수습 차원에서도 그 계획을 섣불리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때 이미 西厓는 義州에서 明의 원군을 맞아 연합군을 형성하되 全國의 의병들과 힘을 합쳐 주체적으로 국란을 극복하겠다는 大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用兵을 봄에 들놀이 하듯 해서야』
宣祖가 어디로 피란할 것이냐는 문제는 선조가 平壤을 포기하고 평북으로 향하던 무렵에도 다시 한 번 거론된다. 이때 윤두수를 비롯한 다수의 조신들은 함경도로 가기를 다시 권했고, 宣祖도 그 말을 따르려고 했다. 西厓는 즉각 반대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戊午條).
< 지금 임금께서 서쪽(평안도)으로 피란하신 이유는 본래 明나라에 힘입고자 한 것이온데, 지금 북도(함경도)에 깊이 들어가면 중간에 적병이 가로막아 明나라와의 소식이 끊어질 것이고, 적병이 북도를 침범하면 그 위태함이 또한 심하게 될 것입니다>
朝臣들 간에 이런 논란이 재론된 무렵엔 함경도로 가는 길목인 鐵嶺은 이미 가토 軍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다만 이 사실을 우리 조정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西厓는 국란을 朝·明 연합군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보고 압록강변으로 가서 明나라의 원군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2일 어가가 아직 開城에 머물 무렵, 영의정 李山海가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류성룡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그 역시 이산해와 공동책임을 지고 하루 만에 파면되었다.
한편 신립 軍을 격파한 왜군은 충주에서 다시 두 패로 나누었는데, 고니시 軍은 여주-양근을 거쳐 서울의 동쪽으로 쳐들어 왔고, 가토 軍은 죽산-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북상했다. 5월3일, 고니시 軍이 먼저 東大門을 통해 서울에 입성했다. 전쟁 발발 불과 20일 만에 都城이 함락된 것이다.
서울 함락의 소식을 들은 전라·충청·경상의 3道 순찰사의 연합부대 5만이 勤王(근왕)을 위해 경기도 龍仁까지 북상했으나 왜의 소수부대가 감행한 돌격전 한 번에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이에 대한 징비록의 평가다.
< 3道의 순찰사들은 모두 文人 출신이어서 兵務에 밝지 못했다. 비록 군사가 많았다고 하지만, 명령계통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험한 곳을 찾아 방어할 태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용병을 마치 봄에 들놀이 하듯 해서야 어찌 패하지 않으랴!>
6월1일 西厓는 豊原府院君(풍원부원군)으로 복직되었으나 軍政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對明외교만 관장하게 되었다. 7월 초 明將 祖承訓(조승훈)이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西厓는 조승훈 軍을 접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조승훈 軍은 7월19일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의 왜군에게 패배하고 요동으로 철수했다. 이때가 왜군으로선 조선 전토를 점령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倭가 兵法을 모른다』
< 왜적은 싸우면 항상 이긴다는 기세를 믿고 그 뒤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道로 흩어져 나와 저희들 마음대로 날뛰었다. 군사란 나눠지면 약해지는 법인데, 천리에 걸쳐 진영을 벌여 놓고 오랫동안 날짜를 끌었다. 아무리 굳센 화살도 멀리 날다가 보면 끝에 가서는 비단 헝겊도 뚫지 못한다.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오고서야 어떻게 살아 돌아간단 말인가>
西厓는 『倭가 병법을 모른다』고 지적했다. 군사용어로 말하면 集中의 原則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全국면을 보는 西厓의 전략적 안목이 매우 높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 당초 적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한 번 싸움(閑山島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함으로써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고니시가 평양성을 점거하고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려서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西厓는 임진왜란을 적어도 東아시아의 스케일에서 바라보았다. 다음은 이어지는 기록이다.
< 또한 遼東(요동)·遼西(요서)와 天津(천진) 등지에 적의 사나운 발자국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明의 구원병이 육지로 나와 우리를 도와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이 이순신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였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것은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 將材(장재)를 미리 알아보는 西厓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좋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천거에 의해 임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음은 앞에서도 썼다. 이순신은 武科 급제 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강직·청렴하여 하위직을 전전했던 인물이었다.
류성룡은 4세 연하의 이순신을 소시적부터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류성룡의 집은 지금의 퇴계로 대한극장 부근이고, 이순신의 집은 지금의 명보극장 자리였던 만큼 당시의 거리감각으로 이웃 간이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깊은 관계는 충무공의 「亂中日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왜란 발발 1개월여 전인 임진(1952) 3월5일자의 일기다.
< 저물녘에 서울에 갔던 鎭撫(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류성룡)이 편지와 「增損戰守方略(증손전수방략)」이란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해전·육전과 火攻 전술 등에 관한 일을 낱낱이 말했는데, 진실로 만고에 기이한 의론이다>
조정에서는 전방으로 먼저 내려간 순변사 李鎰의 뒤를 받쳐 주기 위해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소문난 申砬(신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삼아 출전시켰다. 신립은 忠州로 내려가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습했지만, 그 수는 겨우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종사관 金汝山勿(김여물)은 충주 남쪽 100리 지점인 요충지 鳥嶺(조령=새재)을 지킬 것을 신립에게 헌책했다.
그러나 신립은 達川江(달천강=달래강)을 등진 彈琴臺(탄금대) 앞에 진을 쳤다. 병사를 일단 死地에 빠뜨려 물러날 수 없도록 한 다음에 분발시켜 이긴다는 楚漢戰(초한전)의 명장 韓信의 배수진을 흉내 낸 것이다. 징비록은 지형을 잘 이용하는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면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적이 尙州에 있을 때 신립과 이일이 먼저 兎遷(토천)과 새재(조령)의 몇십 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켜 적이 아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게 했더라면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수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兎遷은 점촌에서 새재가 시작되는 聞慶(문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金正浩의 「大東輿地志(대동여지지)」에 의하면 그 구간은 말 탄 자가 견마잡이와 나란히 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 좁아 추락사고가 자주 일어났던 險路(험로)다.
이 길은 후삼국 때 公山(지금의 대구 팔공산)전투에서 패배한 고려 태조 王建(왕건)이 후백제왕 견훤 軍의 추격을 따돌리고 홀몸으로 도주한 퇴각로였다. 그때 王建은 토끼가 다니는 길을 따라 겨우 活路를 찾았다고 해서 「토천」이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3번 국도변의 문경시 마성면 진남휴게소 일대가 그곳인데, 깎아지른 절벽 위에 姑母山城(고모산성)까지 있어 이곳만 막으면 왜군은 聞慶 새재를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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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전투를 앞두고 신립도 尙州전투 때의 이일처럼 척후병을 내보내지 않았다. 다음은 충주전투 때의 신립과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 4월27일 초저녁에 신립은 군관 한 사람으로부터 『적군이 이미 새재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략) 이튿날 아침, 신립은 전날 저녁 정보를 제공한 군관을 불러 『어찌 그런 요망스런 정보를 제공해서 군사들을 동요하게 하느냐』고 꾸짖고는 목을 베어 죽였다. 이어 그는 임금에게 『적병은 아직 尙州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는 장계는 올렸다. 그런데 적은 이미 10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징비록에선 『장수라면 200리 밖으로 척후를 배치하여 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승패는 兵家의 常事이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신립이나 이일은 匹夫之勇(필부지용)은 있었지만 將帥(장수)감은 아니었다.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를 거쳐 북상한 고니시 軍과 기장-울산-영천-군위를 거쳐 북상한 가토 軍은 문경에서 합류하여 3만8000명의 軍勢를 이뤄 새재를 넘었다. 丹月驛에 진출한 왜군은 지금의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신립 軍이 진을 친 탄금대 앞 벌판을 내려다본다.
신립은 왜군이 보병인 만큼 탄금대 앞 벌판으로 끌어들여 騎兵(기병)으로 먼저 짓밟고 이어 보병으로 공격하겠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탄금대 앞 벌판은 지금도 그렇지만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잡초까지 우거진 습지대로서 騎兵戰에는 매우 불편한 지형이었다.
왜군은 두 방향으로 먼저 공세를 취했다. 일대는 산을 타고 동쪽으로, 다른 일대는 달래강을 끼고 서쪽으로 몰려왔다. 신립은 두 번이나 기병에 의한 타격을 시도했으나 말발굽이 수렁에 빠져 기동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왜군이 지닌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활보다 수배에 달해 접근전을 전개할 수 없었다.
오랜 戰國시대에서 단련된 왜군은 射擊(사격)과 機動(기동), 즉 野戰에 강했다. 조총은 단발 화승총이긴 했지만, 왜병은 교대사격에 숙달하여 연속사격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신립은 달래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곧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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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승지 李恒福(이항복)은 『義州에 가서 御駕(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궁경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八道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明나라 조정에 가셔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해원부원군 尹斗壽(윤두수)는 『북도(함경도)는 군사가 강하며, 함흥과 鏡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생긴 험준한 땅이니 鐵嶺(철령)을 넘어 북방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당시 다수 신료의 견해를 대변한 윤두수의 방안은 全局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함경도로 쳐들어간 倭將 가토가 불과 한 달 뒤에 경성·회령 등 국경지역을 함락시키고 두 왕자(臨海君·順和君)를 포로로 잡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항복의 방안에 대해 宣祖는 『明나라에 內附(내부)하는 것이 본래 내 뜻이다』라고 화답하면서 류성룡에 대해 『승지(이항복)의 말이 어떤가』라고 묻는다.
< 成龍은 아뢰기를 『지금 東北의 여러 道는 예전과 같고, 호남의 충성스런 선비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많이 일어날 것이온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다는 일을 의논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한 번 국토를 떠나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이 西厓의 지론이었다. 西厓는 이항복에게 이렇게 책망했다.
< 어찌 나라를 버린다는 의논을 경솔히 입 밖에 낸단 말인가, 그대가 비록 길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부녀와 환관의 충성이 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한 번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인심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니 누가 능히 이런 사태를 수습하겠는가>
西厓는 義州로의 파천을 찬성하면서도 明에의 망명은 불가하고, 적어도 민심수습 차원에서도 그 계획을 섣불리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때 이미 西厓는 義州에서 明의 원군을 맞아 연합군을 형성하되 全國의 의병들과 힘을 합쳐 주체적으로 국란을 극복하겠다는 大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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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임금께서 서쪽(평안도)으로 피란하신 이유는 본래 明나라에 힘입고자 한 것이온데, 지금 북도(함경도)에 깊이 들어가면 중간에 적병이 가로막아 明나라와의 소식이 끊어질 것이고, 적병이 북도를 침범하면 그 위태함이 또한 심하게 될 것입니다>
朝臣들 간에 이런 논란이 재론된 무렵엔 함경도로 가는 길목인 鐵嶺은 이미 가토 軍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다만 이 사실을 우리 조정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西厓는 국란을 朝·明 연합군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보고 압록강변으로 가서 明나라의 원군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2일 어가가 아직 開城에 머물 무렵, 영의정 李山海가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류성룡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그 역시 이산해와 공동책임을 지고 하루 만에 파면되었다.
한편 신립 軍을 격파한 왜군은 충주에서 다시 두 패로 나누었는데, 고니시 軍은 여주-양근을 거쳐 서울의 동쪽으로 쳐들어 왔고, 가토 軍은 죽산-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북상했다. 5월3일, 고니시 軍이 먼저 東大門을 통해 서울에 입성했다. 전쟁 발발 불과 20일 만에 都城이 함락된 것이다.
서울 함락의 소식을 들은 전라·충청·경상의 3道 순찰사의 연합부대 5만이 勤王(근왕)을 위해 경기도 龍仁까지 북상했으나 왜의 소수부대가 감행한 돌격전 한 번에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이에 대한 징비록의 평가다.
< 3道의 순찰사들은 모두 文人 출신이어서 兵務에 밝지 못했다. 비록 군사가 많았다고 하지만, 명령계통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험한 곳을 찾아 방어할 태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용병을 마치 봄에 들놀이 하듯 해서야 어찌 패하지 않으랴!>
6월1일 西厓는 豊原府院君(풍원부원군)으로 복직되었으나 軍政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對明외교만 관장하게 되었다. 7월 초 明將 祖承訓(조승훈)이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西厓는 조승훈 軍을 접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조승훈 軍은 7월19일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의 왜군에게 패배하고 요동으로 철수했다. 이때가 왜군으로선 조선 전토를 점령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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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厓는 『倭가 병법을 모른다』고 지적했다. 군사용어로 말하면 集中의 原則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全국면을 보는 西厓의 전략적 안목이 매우 높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 당초 적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한 번 싸움(閑山島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함으로써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고니시가 평양성을 점거하고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려서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西厓는 임진왜란을 적어도 東아시아의 스케일에서 바라보았다. 다음은 이어지는 기록이다.
< 또한 遼東(요동)·遼西(요서)와 天津(천진) 등지에 적의 사나운 발자국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明의 구원병이 육지로 나와 우리를 도와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이 이순신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였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것은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 將材(장재)를 미리 알아보는 西厓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좋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천거에 의해 임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음은 앞에서도 썼다. 이순신은 武科 급제 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강직·청렴하여 하위직을 전전했던 인물이었다.
류성룡은 4세 연하의 이순신을 소시적부터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류성룡의 집은 지금의 퇴계로 대한극장 부근이고, 이순신의 집은 지금의 명보극장 자리였던 만큼 당시의 거리감각으로 이웃 간이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깊은 관계는 충무공의 「亂中日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왜란 발발 1개월여 전인 임진(1952) 3월5일자의 일기다.
< 저물녘에 서울에 갔던 鎭撫(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류성룡)이 편지와 「增損戰守方略(증손전수방략)」이란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해전·육전과 火攻 전술 등에 관한 일을 낱낱이 말했는데, 진실로 만고에 기이한 의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