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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도시 1. 볼로냐
볼로냐 피아자 마지오레와 스트라다 마지오레-비아 리졸리
서울공대지 2017 Winter No.103
한광야 동국대학교 건축공학부 도시설계전공 교수
대학과 도시 연재를 시작하며
대학은 도시설계가인 저자에게 무엇보다 흥미로운 공부와 답사의 대상입니다. 대학은 그 자체로 작은 도시이며, 또한 좋은 대학은 좋은 도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자는 살고 싶은 도시의 미래가 좋은 대학의 설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대학의 도시’란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해왔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 20년 동안 ‘창의적인 테크놀로지 클러스터’를 만들고자 노력해오고, ‘대학은 앞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우리 사회에 구체적인 실마리를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먼저 유럽 대학의 도시들은 간단한 입지특성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륙을 관통하는 두개의 도로들을 따라 성장해왔습니다. 하나는 유럽을 북서-남동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로마-파리-산티아고를 연결하는 성지순례길(Via Francigena)이며, 또 하나는 동-서 방향으로 파리-크라카우를 연결하는 십자형의 상업루트(Via Imperii와 Via Regia)입니다.
또한 ‘대학은 소멸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대학 커뮤니티는 역사적으로 사회에서 가장 창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지난 2500년 동안 대학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찾고 변화를 주도하며, 지배자와 시민, 그리고 마켓의 옆에서 모습과 행태를 바꾸면서 기능해왔습니다.
대학은 올리브 숲의 제사장과 하천 변의 군대로부터 시작되었고, 왕조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번역원, 넓은 제국의 영토로부터 확보한 보물을 연구하는 뮤지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성당, 신분과 배고품을 해결해주었던 수도원, 상거래의 분쟁과 도시의 행정체계를 만들었던 법학교, 버려진 고아와 여행객 위한 호스피탈, 질병으로 삶을 평가했던 마법학교와 약초와 해부로 이를 치유해온 의학교와 수술원, 아름다움을 소유의 가치로 만들었던 길드와 미술학교, 더 큰 동력과 더 강한 물건을 만들었던 기술학교, 그리고 더 멀고 더 깊은 세상의 존재방식을 찾으려는 최근의 중력가속기까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습니다. 물론 지금의 대학은 이상의 기능들을 모아놓은 집합체입니다.
이제 대학은 앞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다시 어떠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일까요? 본 연재는 일련의 대학의 도시들을 소개하면서, 이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특히 대학의 성장을 그 도시와 함께 이해하는 작업은, 무형의 지식과 기술을 생산하는 커뮤니티의 활동 궤적을 실체가 있는 물리적인 도시환경으로 투영하고 일체화하면서 대학의 존재이유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과 도시 1. 볼로냐
1000년의 대학도시인 볼로냐(Bologna)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가치를 보장한 인류의 첫번째 노예해방법인 ‘파라다이스 법’을 공포했으며, 소수집단의 권력 독점을 금지하려는 ‘반권력법’을 입법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로냐는 로마제국의 도시블록 위에 르네상스-로마네스크 건물들로 채워진 ‘빨간 도시(la Rossa)’이며, 육즙, 발사믹, 파마손 치즈와 납작 파스타면의 탈리아텔레의 ‘맛의 도시(la Grassa)’이며,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교(Università di Bologna, 1088)를 가진 ‘지성의 도시(la Dotta)’로 불려왔다.
볼로냐는 서북쪽의 밀라노에서 동쪽의 아드리안 해안의 항구인 리미니와 라베나까지 가로지르는 육상로(Via Emilia, 187 BC)의 중간에 입지한다. 볼로냐는 잠시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밀라노의 지배를 받았으며, 또한 동로마제국의 유럽 거점(540-751)이었던 라베나와 베네치아를 통해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과 교역했다. 이것이 볼로냐가 어느 도시보다 일찍 비잔틴 문화와 아시아 상품을 흡수했던 이유이다.
볼로냐는 고대도시의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도시블록과 도성에 담고 있는 매우 보기 드문 도시이다. 볼로냐가 현재의 도시체계를 갖게 된 시점은 189 BC년부터 로마제국의 타운인 ‘보노니아(Bononia)’로 형성되면서이다. 당시 보노니아는 격자형의 가로체계를 따라 블록으로 조성되어 인구 약 30,000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놀랍게도 당시 보노니아의 중심부인 포럼과 동-서 중심가로가 현재 피아자 마지오레와 스트라다 마지오레-비아 리졸리에 그 기능을 유지하며 도시중심부를 완성하고 있다.
볼로냐가 자치행정권을 획득하며 부를 축적하고 성장한 시점은 12세기이다. 이 시기에 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도시들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권력에 대항하여, 도시행정의 수장인 주교와 수도원의 원장의 인사권을 획득하려는 교황의 투쟁(1075-1122)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볼로냐는 1116년 교황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볼로냐 코뮤네(Commune di Bologna)’로 기능하기 시작했고, 1125년 볼로냐의 자치행정권(charter)을 획득했다.
피아자 마지오레, 바실리카 디 산 페트로니오
볼로냐는 이 시기에 세개의 중심부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교황권의 중심부로 볼로냐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Cathedrale Bologna di San Pietro, 5세기)으로, 침례소, 호스피스, 성직자와 전도사를 위한 기숙성당학교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 동쪽으로 과거 원형극장과 이시스 여신전의 부지에는 산토 스테파노 성당 수도원(Basilica di Santo Stefano, 5세기)이 건축되어, 이후 7개의 성당 콤플렉스로 거대하게 증축되었다. 한편 시민행정의 중심부로 과거 포럼의 부지였던 피아자 마지오레(Piazza Maggiore)에는 시청인 팔라조 델 포데스타(Palazzo del Podestà, 1200)가 입지했다.
또한 볼로냐의 독특한 도시경관을 정의해온 아케이드와 타워가 이 시기에 조성되었으나 흥미롭게도 그 기능과 목적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도시중심부를 따라 형성된 보도를 유도하는 상점들을 연결해주는 아케이드의 총길이는 38km이며 강렬한 햇빛과 비를 막아준다. 특히 볼로냐의 도시중심부 동쪽 끝에 자리잡은 아시넬리 타워(91m)와 가리센다 타워(46m)는 이 시기에 세워진 180개 타워들의 흔적을 담아낸다.
볼로냐의 본격적인 지식생산활동은 볼로냐 대학교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마터 스투디오룸(Mater Studiorum)’이 11세기 초에 설립되어 문법과 작문을 교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즈음 볼로냐 법학교(Scuola Giuridica Bolognese)가 설립되어 당시까지 ‘법학’의 중심부였던 라베나를 누르고, 당시 시급했던 도시의 자치행정과 상업활동에 관한 법률을 생산했다. 특히 볼로냐 법학교는 오랫동안 분실되었던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 코드(Corpus Juris Civilis, 529-534)가 1070년 발견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이에 볼로냐는 12세기 초반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편에서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갖고 기존 교황국 행정체계의 기본이 되어온 캐논법(Corpus Juris Canonici)과 시민법(Corpus Juris Civilis)을 연구하는 중심부로 자리잡았다. 이후 볼로냐는 중세로마 법의 핵심을 이루는 캐논법과 시민법을 연구하며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문화권의 대표적인 법학자 그룹인 ‘글로사토르’의 활동거점이 되었다. 이 즈음 유럽에서는 살레르노(Salerno)와 몽펠리에르(Montpellier)의 학교들이 의학에 집중했으며, 파리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는 신학에 집중했다.
볼로냐 법학교의 법학연구의 방향은 흥미롭게도 100년이 지난 후 인권을 보호하는 법학연구로 변화했다. 이에 볼로냐는 ‘파라다이스 법(Liber Paradisus, 1256)’을 공포하며 농업노예제를 폐지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역사에서 첫 번째 도시가 되었다. 또한 볼로냐는 ‘반-독점법(Anti-magnate Ordinamenta, 1271)’을 입법하고, 귀족, 부유층, 원로, 예술장인길드에 도시행정의 참여와 활동을 제한했다.
볼로냐는 13-1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261-1453)으로 비진틴과 아랍 문화권의 의학과 과학의 지식과 학자들이 수용되어, 의학과 함께 철학, 수학, 천문학 등이 발전했으며, 이후 17세기에 과학연구는 다시 절정기를 갖게 되었다. 볼로냐 대학교는 13세기 초에 그 규모가 이미 10,000명으로 성장하며 도시경제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유럽과 이태리 전역에서 귀족 학생들의 선망의 유학장소로 성장했다.
볼로냐 아키지나시오의 해부극장, 2013 출처: 한광야
이 시기에 볼로냐 대학교에는 피렌체 출신의 화학자인 타데우스 피렌체(1210–1295)가 의학전공(Universitas Medicorum)을 설립했고, 문디누스(1275-1326)가 근대해부학의 기초를 만들면서 해부와 수술이 독립된 의학전공으로 발전했다. 볼로냐의 천문천체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 유입되고, 아비체나와 아베로에즈의 영향을 받았던 체코 다스코리(1257-1327)가 1322년을 전후로 활동하면서 성장했으며, 이후 페라라 출신의 천문학자로서 ‘달의 알데바란 성식’을 관찰한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1454–1504)가 학생인 코페루니쿠스(1473-1543)와 함께 활동했다.
한편 볼로냐에는 문법, 작문, 표현을 교육했던 ‘인문학전공(Universitas Artistarum, 1320)’이 설립되어, 16세기까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캐톨릭 세계가 아닌 일상의 삶을 담아낸 이탈리안 휴머니즘의 문학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볼로냐는 피렌체 태생으로 토스카니어로 사후의 세계에 관한 상상의 기행문인 ‘디바인 코메디(1320)’가 교수였던 단테(1265–1321)에 의해 완성되었고, 역시 피렌체 태생으로 토스카니어로 100개의 이야기를 담은 ‘데카메론’과 106명의 성공한 여성들의 일생을 묶은 ‘유명한 여성들에 관하여(1374)을 저술한 복카치오(1313–1375)가 활동했다.
볼로냐는 이후 1506년부터 프랑스 지배를 받기 시작한 1797년까지 교황국의 도시로서 다시 성장했다. 당시 볼로냐의 지속적인 성장은 흥미롭게도 볼로냐가 배출한 인재들의 활동 결과였다. 무엇보다 볼로냐 대학교를 졸업한 교황 그레고리 13세를 전후로 세명의 교황들을 배출했다. 볼로냐는 17세기를 전후로 96개의 수도원과 성당 및 부속시설들을 가진 대표적인 캐톨릭의 지식생산 도시로 진화했다.
볼로냐가 유럽의 지도 위에 우뚝 나타난 계기는 무엇보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가 새인트 페트로니오 성당에서 교황 클리멘트 7세로부터 황제로의 입관이었다. 볼로냐는 이를 계기로 현재 달력체계(Gregorian Calendar)를 도입했던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교황기인 1582년 대주교의 도시로 그 위상이 승격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볼로냐 태생으로 이후 교황으로서 과학, 예술, 지도 등의 발전을 주도했던 후원자였다.
볼로냐는 교황 피우스 4세의 후원으로 1564년부터 도시중심부를 재개발하며 대주교 도시로서의 위상을 준비했다. 당시 볼로냐는 피아자 마지오레의 서쪽으로 현재 피아자 델 네투노의 중심부와 넵툰 분수(1567)를 조성했으며, 그 서쪽으로 팔라조 데이 반치의 포티코인 파바그리오네(Pavaglione, 1565-1568)를 완성했다.
특히 볼로냐는 교황으로부터 추가 예산을 확보하여 당시 볼로냐에 흩어져 기능했던 볼로냐 대학교의 교육시설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팔라조 데이 반치 남쪽으로 팔라조 아키지나시오(Palazzo dell’archiginnasio, 1564)를 건축했다. 팔라조 아키지나시오의 상부층에는 법학교실과 함께 안토니오 레반티(Antonio Levanti)가 설계한 해부극장(Teatro Anatomico, 1637)을 수용하며 볼로냐의 지식활동의 중심부로 기능했다. 아키지나시오의 일부는 1838년부터 현재까지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볼로냐 아키지나시오, 2013 출처: 한광야
한편 볼로냐 의학교는 치료용 약재재배를 목적으로 보타닉 가든(Orto Botanico dell’Università di Bologna, 1568)을 팔라조 푸브리코의 코트야드에 조성했다. 당시 볼로냐의 보타닉 가든은 볼로냐 태생으로 볼로냐와 파도바에서 수학한 유릴세 알드로반디(1522-1605) 교수에 의해 주도되었고, 경쟁 도시였던 피사, 파도바, 피렌체의 그것보다 늦게 조성되었다. 또한 아키지나시오로부터 북동쪽으로 현재 볼로냐 대학교 캠퍼스의 중심건물인 팔라조 포기(Palazzo Poggi, 1560)에 볼로냐 과학아카데미(Accademia delle Scienze dell’Istituto di Bologna, 1690)와 천문관측소(Museo della Specola, 1725)가 조성되었다.
볼로냐 대학교는 이후 나폴레옹의 지배기인 1803년 대학본부를 현재 캠퍼스 구역으로 이전해왔다. 볼로냐의 현재 인구는 약388,000명(광역권: 1,009,000명)이며, 볼로냐 대학교의 대학인구는 약85,000명(학부생 52,790, 대학원생 29,580, 교직원 2,850)이다.
볼로냐 아키지나시오, 2013 출처: 한광야
※ 원고는 ‘대학과 도시(한울, 2017)의 일부 내용을 편집하여 완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