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 생몰년도: 1367년(고려 공민왕 16)-1422년(조선 세종 4) 재위년도:
1401년~1418年 자:유덕(遺德) 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聖德神攻文武光孝)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01방원(李芳遠), 성덕신공(聖德神功)
생애와 업적 1398년(태조 7) 8월 26일 갚은 밤,이방원은 남은의 첩집 앞에 말을 멈춰 세웠다. 집 안에서는 정도전과
심효생?이근?남은 등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방원은 먼저 부하들을 시켜 집을 포위하게 한 뒤 그 옆집 서너 곳에 불을 지르라
시켰다. 남은의 집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놀라뛰어 나오다 영문도 모른 채 칼을 맞고 쓰러졌고,정도전과 남은은 용케 도망쳤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방원은 병석에 누워 있던 태조를 찾아가 정도전 등이 왕자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렸기에 이를 진압했노라고
보고했다. 이미 이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병석의 태조에게는 더 이상 이방원을 통제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방원은 둘째 형
방과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이복형제인 방석과 방번을 죽였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왕자들 가운데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신이나 큰 형인 방과 대신 이복동생인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면서부터 쌓였던 불만이었다. 여기에 정도전의 사병 혁파 작업으로 자신의
군사적 기반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들이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음모론 을 내세워 선수를 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자
이방원도 정도전이 했던 것처럼 사병을 혁파하려 했다. 정권을 잡은 자에게 왕자와 공선들이 거느린 사병은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적자를 두지 못한 방권의 뒤를 이방원이 잇는 것으로 것으로 조정의 중론이 흐르자 1400년에 바로 윗형인 방간이
이방원을 제거하고자 난을 일으켰는데,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재상 중심 체제를 꿈꾸던 공신들이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는 왕족의 손에
몰락한 사건이 1차 왕자의 난이라면 2차 왕자의 난은 왕자들간의 골육상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진압한 이방원은 세제(世弟)로
책봉되고 그해 11월 정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조선의 세 번째 왕태종이다.
태종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권력이
안정되어야 하며 왕조국가에서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왕의 힘이 신하들의 힘보다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조선 왕조를 통틀어 이를
가장 확실하게 실천한 왕이다.
이러한 의지는 세제 시절부터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학하기 위해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긍부(三軍府)로 집중시켰으며,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실시해 노비의 송사 다툼을 가렸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1402년 문하부(門下府)틀 폐지해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했다가 1405년 다시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六曹)에서 분장하게 했으며,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는 등 관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제거했다. 자신의 즉위에 공이 큰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제거해 왕비인 원경왕후를 눌렀으며,상왕 시절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친정아버지인 심온을 제거해 외척이 발호할 소지를 아예 없애버렸다 가혹하리 만큼 공신과 외척을 숙청했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왕권의
인정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한편 태종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해 아버지인 이성계를 기쁘게 했단 유학자 출신인 만큼
숭유억불정책을 강화했다. 많은 사찰을 폐쇄한뒤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으며,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비기(秘記)와 도참사상을
금지했다.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유학과 경학에 밝은 사람을 뽑아 성균관과 오부(五部)의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으며,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다. 또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대외정책도 안정을 추구했다.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이성계?정도전과 다른 길을 걸었던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명나라에 대해
삼국의 예를 갖추며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약재?역서 등을 수입해 실리를 취했다. 왜인에 대해서는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는 한편 왜인들의 병력을 정탐했다.
또한 호패법 (戶牌法)을 실시해 양반에서부터 농민까지 모두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관리를 정확하게 했으며,경제정책으로는 호포(戶布)를 폐지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저화를 발행해 경제 유통을 활발하게 했다.
이렇듯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은 1418년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태종은 장자인 양녕대군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으로 불러났다. 안정적인 정권 이양을 마친 뒤에도 1422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뒤에서 왕권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 울렸다.
그러는 한편 상왕이 된 뒤에는 여기저기에 별궁도 짓고
사냥과 온천을 즐기기도 했다. 사냥을 나갈 수 없는 겨울에는 격구에 몰두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세종과 함께 며칠 간 사냥을 다녀온 뒤 감기가
악화되어 갑자기 자리에 누웠다가 못 일어나고 세상을 떠났다. 정비 원경왕후를 비롯해 12명의 부인에게서 12남 17녀를 두었다.
평 가 《태종실록》은 첫 머리에 흰 용을 등장시켜 그가 왕이 될 인물이 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태종이 조선 건국의 최대
공로자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집권은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화화와 공(功) 부플 리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 태종에 관한 기록은 이러한 껍질을 한 꺼풀 벗기고 읽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태조의 아들 중 유일한 과거 급제 자였던 태종은 학식과 문장력이 보통 문관 이상이었고 뛰어난 리더십과 추진력을 가졌던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비록 아버지를 누르고 형제를 죽여 왕위를 차지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뛰어난 정치 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반을 잡는 데 공헌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용재총화》를
쓴 성현은 “왕으로서 이렇게 뛰어난 글을 짓는 분도 일찍이 없었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며 그의 문학적 소양을 칭찬했다.
10학! 열 가지 관리 임용 시험 과목으로,유학(1儒學).자학(字學).무학(武學). 이학(吏學).역학(譯學).음양
풍수학(陰陽風水學).의학(醫學).율학(律學).산학(算學).악학(樂學)을 말한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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