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다시 만난 건 산사의 작은 음악회에서였다. 탄력은 잃었지만 유난히 뽀얀 피부는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구름결같이 눈에 띄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듣는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뒷모습은 수십 년 전의 그때처럼 아름답다.
초가을 작달비에 갇힌 선방엔 찻물 따르는 소리만 가득하다. 그녀 역시 나처럼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싶은 후회의 마음이 막 들 때 그녀가 먼저 차 맛이 어떠냐고 말문을 열었다. 형광등 아래서 그녀는 더 수척해 보였고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품위가 느껴졌다. 어떤 삶의 고달픔이 별조차 외로울 이 골짜기로 그녀를 들어오게 했을까. 찻잔을 싸고 있는 검지의 묵주가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반짝거린다.
그녀는 기실 그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며, 늘 빨갛게 칠해진 입술 때문에 어쩌면 식상한 동화속의 계모처럼 친구를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독약을 넣은 밥과 베게 밑에 들어 있을지도 모를 부적을 상상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의 집을 들락거렸다. 우리는 그녀를 훔쳐보는 수만큼 어른이 되어갔고 대학 졸업 후 친구의 서울입성을 끝으로 서서히 추억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삼남매를 미운생각보다는 가여운 생각에 한 번도 미워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괜찮을 거란 생각은 그녀만의 오산이었다. 아이들은 결혼을 해서도 엄마라 부르기를 거부했고 못마땅해 하던 남편의 역정에 발길조차 뜸해져갔다. 그들에게 있어 그녀는 밥하고, 늙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는 식모에 불과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지만 힘든 시간은 더뎌갔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그녀를 엄습해왔다. 남편의 임종을 맞으면서 그녀는 유산분배에서 제외 되었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대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남편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아이들에게 사정했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는 서울로 제사를 지내로 두어 번 갔어나 열어주지 않는 문 앞에서 터지려는 가슴을 누르며 돌아와야 했다. 혼자서 밥을 먹다보면 살아온 날들이 허무하고 서러워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뜯었다. 남에게 몹쓸 짓거리를 해본 적이 없다. 늘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이해받지 못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의 아이들에게 말이다. 그것은 참기 어려운 억울함이 되어 그녀를 병들어 가게 했다. 남은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이곳으로 들어 온지 다섯 해가 되었단다. 그녀의 두서없는 말끝이 서러운 눈물처럼 흐려진다.
달포 만에 그녀를 아는 다른 친구와 그곳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은행잎 색깔 나는 툇마루에 밀랍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옅은 미소로 반기며 우리 둘의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손은 힘이 없었지만 따뜻했다. “그 고우시던 분이..... 그때는 저희들이 철이 없었습니다.” 친구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햇볕을 털어냈다. 한나절 동안을 우린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간간히 말을 건네는 그녀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자주 오겠다며 돌아오는 길 우린 철없던 어린 시절을 후회했다. 그리고 불혹의 중턱을 넘느라 바쁜 우린 그 약속을 해가 바뀌도록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음해 봄날 그녀를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우리가 다녀간 일주일 만에 잠들듯이 돌아 가셨단다. 사람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한이 그나마 마음을 놓아서인가보다. 그녀가 살아온 만큼 받았을 일들을 우린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린 그녀의 유품 같은 말린 부지깽이나물 꾸러미를 안고 내려 왔다. 그녀의 그런 삶은 얼마만큼 행복했을까. 산다는 것의 마지막 의미는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이태전의 일이다.
오늘 우박 같은 가을볕이 쏟아진다. 텅 비어 있던 옥상바닥에 호박을 말리기 위해 자리를 깔다 내가 먼저 누워 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구름이 부초처럼 떠돌아다닌다. 유리조각 같은 햇살이 목덜미에 착 감기고 금방이라도 하늘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눈을 감자 긴 터널 같은 어둠이 생기고 에리다누스 강을 따라 흐르는 별들이 보인다.
첫댓글 이런 아픈 인연은 ᆢ
아픔일까요 서러움 일까요?
그냥 삶의 하나일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