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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티즌 리뷰 원문보기 글쓴이: jimmani
쓰라린 역사에는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가 처참하게 짓밟히는 현장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실제로 만들어졌음을 목격할 때, 우리는 그 현장을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도 차마 엄두를 낼 수 없다. 하물며 그 현장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이의 임의대로 손질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똑똑히 바라봐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누군가에게는 부끄럽고 누군가에게는 뼛속 깊이 사무칠 기억일지라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치욕의 현장을 다시는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영화 감독 이전에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정평이 난 스티브 맥퀸 감독이 영화 <노예 12년>의 소재가 된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도 아마 이런 기분이 들었을 듯 하다. 비록 스티브 맥퀸은 영국 사람이긴 하나 흑인이라는 같은 피부색의 뿌리로부터 나온 사람으로써 이 이야기는 몹시 아프고 분했을,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 고통스럽지만 기억해야 마땅할 역사를 최대한 가치 있게 전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의 그 두 가지 선택을 느낄 수 있었다. 아티스트인 만큼 감각적 표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가 그 모든 재능을 감추고 이야기의 날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 과거의 추악한 역사가 과거의 추억거리인 것만이 결코 아님을 밝혀 기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1841년, 미국은 노예 제도의 성행 여부에 따라 남북이 '노예주'와 '자유주'로 나뉘어져 있었다. 뉴욕에 사는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은 바이올린 연주 실력을 널리 인정받은 음악가로, 자유인인 흑인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미끼로 접근한 일행들에 의해 납치되어, 하루아침에 워싱턴에 노예로 팔려 간다. 자유인 솔로몬 노섭임을 주장하면 무자비한 매질과 채찍만이 돌아오는 곳에서, 그는 더 이상 솔로몬 노섭이 아닌 '플랫'이라는 이름을 지닌 노예로 살아가야만 한다. 가족들과의 인연은 영영 끊어진 듯, 최대한 자신을 숨긴겨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노예 제도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렇게 플랫이 된 솔로몬은 첫번째 주인으로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맞이한다. 다행히 포드는 자비심과 이해심이 많은 주인이었고 그로부터 솔로몬은 특출난 역량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정신 나간 것 같은 목수 티비츠(폴 다노)의 질시에 심각한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결국 솔로몬의 안전을 염려한 포드는 그를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팔아넘긴다. 그러나 엡스는 노예들을 참혹하게 학대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어린 여자 노예 팻시(루피타 뇽)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면서, 노예들을 어디까지나 제 맘대로 갖고 놀아도 상관없는 소유물로 여길 뿐이다. 솔로몬은 흑인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이 참혹한 현장을 겪으며 점점 절망하고 지쳐간다. 그는 언제쯤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얘기는 했지만 <노예 12년>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184년 납치되어 노예로 12년을 산 한 남자의 실제 회고록을 원작으로 했다. 12년의 노예 생활을 거친 후 솔로몬 노섭은 뒤늦게나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그렇기에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무색하고 송구스러울 만큼, 영화는 그 12년 간 솔로몬 노섭이 겪어야 했고 목도해야 했던 노예 제도의 잔악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인간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백인들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면서, 우리가 노예 제도의 참상 그 이상의 더 복잡하고 고통스런 문제에 직면한다. 단지 책에 있는 내용을 빼지도 덜지도 않고 고스란히 옮기기만 해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에서, 스티브 맥퀸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감각적 재능을 최대한 절제하고서 경건하고 침착하게 그 이야기의 본령에 다가간다. (실제로 내용 일부는 원작 책에 비해 표현 규모나 디테일에서 약간 생략되거나 축소된 부분이 있다.)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실제 경험담임을 알고 보는 이상, 따지고 보면 여기에 더 이상의 수식이나 기교를 덧붙이는 것은 무의미하고 나아가 무례한 의미일 수도 있다. 특히 수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한 국가의 거대한 제도는, 그저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영화는 당대의 그 치욕스럽고도 아픈 기록을 관객들도 시린 마음으로 체험하도록, 수시로 긴 호흡의 화면을 보여준다. 인물의 인격이 가장 처참히 망가지고, 불순한 제도가 낳은 추악한 일면이 가장 부각될 때, 영화는 오히려 컷을 잘게 끊거나 시선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진득하게 그 순간을 지켜본다. 자신이 자유인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매질과 채찍질을 당하는 순간. 노예 시장에서 흑인들이 마치 우시장에 나온 소처럼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로 '품질검사'를 받는 순간. 백인의 괴롭힘으로 인해 목을 매단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땡볕 아래 위태롭게 까치발로 서 있는 순간. 어긋난 집착에 눈이 뒤집힌 주인에 의해 노예들의 몸과 정신이 무참히 찢길 때. 영화는 이런 순간에 편집의 기교를 다른 장면에서보다 오히려 최대한 자제하고, 롱테이크로 관객이 1초의 호흡도 놓치지 말고 지켜보게 한다. 이것은 상상이 만들어낸 세계가 아니라 언젠가 실제로 존재했던(그것도 꽤 오랜 세월동안) 현장임을 강조하듯이 말이다. 그 현장을 간접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장면 곳곳에서 숨이 덜컥 막히는 느낌을 심심치 않게 느끼게 된다.
같은 인종이 긴 세월 당해야 했던 부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감독은 노예 제도의 참상을 오히려 더욱 자극적으로 묘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12년>이 감정적으로 먼저 끓어오르는 대신 이처럼 침착하면서도 끈질긴 관찰의 태도를 유지하는 건, 솔로몬 노섭이 12년의 시간을 지나오며 견지했던 태도,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노예 12년>은 단순히 미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순간 중 하나를 들춰내 이것을 고발하고, 이런 적도 있었다고 과거사를 반성하는 데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인류가 배격해야 할 가치가 한 국가 안에 양립하던 시절, 이 두 가치를 모두 경험했던 한 인간의 체험과 관찰을 통해 제도와 인간의 얽히고 ?힌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주제는 '과거엔 이랬었다'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렇다'고 얼마든지 논의를 연장할 수 있다. '지금은 이렇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가'라는 안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떳떳할 수 있는가'하고 오히려 냉철하게 도발한다. 덜 끓어오르고 더 침착한 시선을 통해서, 미국의 과거로만 취급될 줄 알았던 '노예 제도'가 인간 누구나의 본성을 묻는 현재진행형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예상외로 이 영화에서 흑인 노예와 백인 주인은 선악의 극명한 이분법적 구도에 서 있지 않다. 노예와 주인을 막론하고 각각의 인물은 추구하는 정서에 따라 다양한 위치에 서 있다. 그 중에는 에드윈 엡스와 같은 정신이상자 수준의 악덕 주인도 있고, 포드와 같이 친절하고 관대한 주인도 있다. 캐릭터에게만 주인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솔로몬 노섭을 비롯한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도 성향의 차이가 엄밀히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 제도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임을 알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박차고 나갈 수 있음을 믿고 끊임없이 돌파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캐릭터가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그가 주인이냐 노예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유로운가'이다. 그 중에서도 육체적 자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정신적 자유, 부조리한 사회 제도로부터의 자유다.
영화 속에서 솔로몬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제도를 습관적으로 접해 온 이들이다. 노예와 주인을 막론하고 그들은 이 제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필연적으로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다만 그 안에서 나름의 살 길을 찾을 뿐이다. 노예들은 자신을 버리고 주인의 마음을 얻을수록 삶이 편해질 거라는 걸 깨닫고 그런 방식으로 노력하거나, 차마 그러지 못해서 절망한다. 주인들은 노예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인간적인 주인이 되거나, 노예들이 자신의 소유물이고 자신이 그들보다 높은 존재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습관처럼 학대한다. 이들은 지옥 같은 부조리 안에서 각자의 살 길을 찾아 분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도 안에서의 얘기다. <설국열차>에 비유하자면 대개 이들은 '엔진칸'에 당도하길 원할 뿐 열차를 탈출할 생각은 하지 않는 셈이다. 자식들과 뿔뿔이 흩어져 날마다 통곡으로 지새던 여자 노예 일라이저가 솔로몬에게 "아무리 그가 잘해준다고 해도 그는 노예 주인"이라며 포드에 대해 일갈하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선이 곧 옳음, 악이 곧 그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착하고 나쁨을 떠나서 중요한 건, 부조리한 제도 속에서도 하나의 인격체로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는가다.
이 부분에 있어서 역시 가장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들은 역시 솔로몬 노섭과 악덕 주인 에드윈 엡스다. 둘의 대비는 단지 학대하는 백인 주인과 학대 받는 흑인 노예로서의 대비로 끝날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육체는 속박되어 있되 정신적으로는 끝없는 자유를 꿈꾸는 인물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육체는 몹시 자유롭되 정신적으로는 제도의 노예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인물이다. 이미 인종을 초월해 누구라도 공평하게 대접받는 사회를 경험한 적 있는 솔로몬은 생존을 위해 노예 제도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가운데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도가 정해놓은 잔악한 룰이 아닌 인간 존엄의 편에 선다.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고, 막다른 상황에 몰리더라도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거부한다. 그 어떤 시스템에서도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임을 알기에, 그것이 완전히 무시되는 부조리한 제도라면 언제라도 깨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목숨을 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다"는 말처럼, 그는 인간임을 잊지 않고자 생존이 아닌 생활을 꿈꾼다.
반면 에드윈 엡스는 가혹한 제도에 노예들은 물론 자신의 존엄성까지도 내맡겨 버린 인물이다. 자신의 재산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노예들을 마음껏 갖고 놀고 학대하는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주관보다 제도를 먼저 들먹거리며 거기에 의지한다. 그의 판단과 행동에 대한 근거는 모두 비윤리적인 노예 제도 아니면 성경, 둘 중 하나로부터 비롯되는 듯 하다. (성경에 대한 해석마저도 노예 제도에 근거한 아전인수식 해석일 뿐이다.) 주인을 자처하지만 실은 제도로부터 가차없이 휘둘리는 그에게서 어느덧 자의식은 사라지고, 짐승같은 욕망만 남는다. 이 대비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하나의 장면이 있는데, 에드윈이 괜한 트집으로 솔로몬을 공격하려 뒤쫓는 장면이 그렇다. 긴박한 이 추격 속에서도 솔로몬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놓은 돼지 우리 밖 길을 따라 달리지만, 에드윈은 돼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나자빠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품은 노예와 인간적 가치는 애저녁에 버린 듯한 주인의 대비가 통렬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지옥 안에서 제 발로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함에도 그게 무슨 대단한 특권인양 좋아 죽는 인간과, 비록 지푸라기처럼 되었다 해도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놓지 않고 온전한 자신으로서 떳떳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싸움. <노예 12년>이 말하는 '노예 제도'의 가장 큰 비극이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자신을 잃는 것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임을 세뇌시키려는 것 말이다. 주인과 노예의 지위 차이에 상관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속박의 늪으로 몰아넣는 제도의 잔혹성은, 영화 중간중간 심심찮게 비치는 자연의 절경과 대비되며 더욱 그 추한 모습을 실감케 한다. 솔로몬이 노예 생활을 한 남부 지방은 노예들이 부단히 학대당하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 주변을 감싼 습지와 숲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노예들이 '실적주의'에 의해 한없이 고통받는 목화 밭의 화사한 풍경은 또 어떤가. 안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풍기는 피냄새에 개의치 않고 절경을 뽐내는 자연의 모습은, 마치 인간에게 "신이 이렇게 아름답게 가꿔놓은 뜰에서 어찌 인간은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 쓰는가"하고 묻는 듯 하다.
섣부른 흥분이나 감각적 직조보다 사실 그대로의 관찰을 추구하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캐릭터에 걸맞게 각기 다른 개성의 연기 조화로 이 끔찍하지만 반드시 목격해야 할 현장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 중 선두권으로 눈에 띄는 배우들은 솔로몬 노섭 역의 치웨텔 에지오포, 에드윈 엡스 역의 마이클 패스벤더, 그리고 팻시 역의 루피타 뇽이다. 치웨텔 에지오포가 보여주는 깔끔한 절제와 침착한 이성, 그 속에서 들끓는 슬픔과 분노의 조합은 놀랍다. 존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꿋꿋한 지조가 영화 내내 느껴지면서도, 그 와중에 터뜨리는 감정들은 그만큼 진정성 있게 가슴을 울린다. 이성을 지키려는 태도와 그와 반대로 자꾸만 무너져내리는 감정의 대비를 세련되게 소화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답 안나오는 싸이코 주인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악역의 스테레오타입에서도 한 발짝 벗어난 듯한, 그저 동물적 욕망만 남긴 채 자신의 모든 이성을 내다 버린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의 에너지가 대단하다. 시한폭탄 같은 혈기로 등장할 때마다 긴장감을 불어넣으면서도, 그 끝을 모를 중독적 광기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을 당시의 헛헛한 시대상을 몸으로 보여준다. 그 역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부문에서 유력한 후보로 꼽힐 자격이 충분하다. 예상 외의 수확은 생짜 신인에 가까운 루피타 뇽의 명연이다. 너무나 순수하고 선량하지만 이미 마음 한 구석은 무참히 찢어발겨진 어린 여인의 공허한 심리를 훌륭하게 표현한다. 조연임을 고려해도 적은 편인 비중이지만 매 장면에서 파워풀하게 보여지는, 빠져나올 수 없는 악습의 늪에서 스스로를 놓아버린 여인의 초상은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기 힘들 존재감을 자아낸다. 그녀가 이번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순 없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 폴 다노, 브래드 피트 등이 적은 비중 속에서도 준수한 연기를 보태며 이 영화의 수준급 연기 앙상블을 완성한다. (개인적으로는 남부 사투리를 차지게 구사하는 브래드 피트를 보면서 할리우드 남부 사투리 연기의 대명사인 매튜 매커너히가 떠오르기도 했다.)
<노예 12년>은 '15세 관람가'이긴 하나, 사실 웬만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못지 않게 표현 수위가 높은 편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R등급(17세 이상 관람가)을 받았다.) 남녀의 중요 부위 노출이 서슴없이 나타나고, 노예를 향한 폭력적, 성적 학대의 양상 또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더러 '청소년은 봐선 안된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의 가장 큰 가치를 위협했던 가장 참혹한 사건을 목격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 분노와 아픔을 지나면 경이로운 감동에 이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기 마련인 자유를 향한 열망을 끝까지 놓지 않은 자가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목격하는 감동 말이다. 또한 이 경이의 순간을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진정성 가득한 카메라로 따라가는 감독의 진심도 능히 헤아려지기에, 나는 <노예 12년>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다면 대단히 환영할 것이다. 인간과 자유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냉정한 관찰, 진실한 예찬이 모두 담겨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