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혈당조절을 위해 걷는 일이 나의 일상 중 빼놓을 수 없는 일과이다.
나의 마을 산책길은 여러 갈래다. 가장 자주 걷는 길은 백마산을 향하는 잘 조성된 빌라단지를 통과해서 산밑까지 가는 깠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주차장에 줄지어 서 있는 차량의 번호를 읽으며 끝 세 수를 모아 '매화역수'로 운세 풀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 이 차는 오늘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구나.'혹은 '어허,이 차는 오늘 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등', 맞거나 말거나 숫자의 조합으로 운세를 점치다가 조그만 교회를 지나면서 문이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 눈여겨 본다.혹 열려 있으면 문 앞까지 가서 내부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교회를 지나서 한 오분쯤 걷다보면 철 지난 유명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헐값으로 파는 창고가 나온다. 혹 새로운 물건이 있나 기웃거려 보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놓고 돌아올 때 가져오는 일도 재미있다. 그리고 개울을 따라 산밑까지 걷는다. 가는 길은 규모가 큰 농장과 무슨 '파라다이스'라고 쓰인 펫말이 박힌 울타리를 따라 걷는데 나름 정취가 있다.
물론 철 따라 주변 환경의 변화를 느끼는 것 또한 이 길의 매력이다. 울타리가 끝날 때쯤 '도담마을'이란 글자가 새겨진 돌표지가 나온다.이 곳엔 몇 달만에 산속으로 집 한 채씩이 서는 모양새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걷는 동안 몇 무리의 등산복 차림을 보기도 하지만 주로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겹게 걷는 노옹이나 보행기를 밀며 겨우 몇 발작 띄어 놓는 노파를 만난다. 아는 이는 없지만 만나는 쪽쪽 공손히 인사드린다. 지금의 이 나라를 건설한 선배들이기도 하지만 머잖은 훗날의 내 모습이기에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거다.
그렇게 30분쯤 걸으면 산밑 폭포가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폭우가 쏟아지거나 장마철에는 제법 모양이 괜찮기도 할 때가 있지만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건천이다. 여름철에는 폭포 밑 널찍한 바위가 있어 자리를 깔아놓고 물보라를 맞으며 더위를 쫒는 이들이 트롯트를 크게 틀어놓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 되돌아오는 길은 늘 바쁘다.내리막 길이기도 하지만 1시간이 나름대로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길은 연립과 단독 주택이 즐비한 곳을 지나는 길인데 연립이 끝나는 곳부터 시작되는 텃밭길이다. 그곳에는 각종 푸성귀를 제배하는데 들깨밭이 제법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어서 고향 냄새를 풍겨서 좋아하는 길이다. 그 끝에 감나무 한 그루에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감이 조롱조롱 모습을 보인다. 그 감이 이번주초에 사라졌다. 섭섭한 마음으로 어제 그 길을 걷는데 마침 그동안 베어서 말리던 들깨를 털고 있는 멋쟁이 농부를 보았다.머리에 쓴 모자는 제법 값나가는 것이었고 작업복이 몸에 잘 맞아서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괜찮아 보였다. '들깨가 잘 영글었나 봅니다.'라고 다정히 말을 건넸더니'그러게요. 보시다시피 한 번 내려칠 때마다 한 되는 족히 나오는 듯한 걸요.'라고 말하며 한 줌 쥔 들깨무더기를 깔아놓은 돌덩이에 내리쳐 보였다.
스물쯤 나이에 2학기 중간고사를 끝내고 다니러 갔을 때 마당 한가득 빙 둘러쌓인 들깻단을 마당 가운데 돌판을 필두로 수북히 쌓인 들깨 복대기 위로 톡톡 막대기로 떨어내시는 노할머니를 돕는답시고 탁탁 떨 때 '아이고 녀석아!' 노할머니가 멈추게 했다.'그렇게 있는 힘대로 치면 알갱이가 산지사방으로 다 흩어지지' 그때 힘으로 모든 게 되는 게 아니란 생활철학을 배웠다.
그 텃밭을 지나 시작되는 연립단지를 지나면 자그마한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을 지나면 아파트 단지로 쓰일 예정인 넓은 농지가 나온다. 봄부터 가을까지 향수를 느끼기에 딱 좋은 곳이라 천천히 걷는다. 각종 푸성귀며 농작물이 자라는 모양을 보며 계절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진다. 지금은 김장할 배추가 알이 차도록 묶는 일로 바쁘다. 옆길섶 너머로 잘 가뀌진 산소가 이백 평쯤 있다.묘지 위에서 뒹굴며 놀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미소 지어본다. 그렇게 30분쯤 걷다 보면 교회 뒤로 길이 끝난다. 오늘은 들깨 터는 농부를 사진으로 남기려고 되돌아 가서 멀찍이 떨어져 엉성하게 서서 겨우 한 컷을 찍었다. 어쩐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대놓고 찍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길로는 00아울렛을 지나 곤지암천변으로 나가서 천변길을 걷는 것이다. 초월역사가 보이는 곳까지 걷다가 돌아오거나 곤지암 역사가 보이는 곳까지 걷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거리는 곤지암 역사 가까이까지 걷는 게 조금 더 멀다. 주변이 사시사철 변화가 있어서 좋긴하나 늘 똑 같은 길이라 단조롭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여름철부터 가을 초입까지 폭우가 기습적으로 내릴 땐 일시적으로 통제되는 단점도 있다. 이 길은 집에서 천변까지 가는 길에 각종 음식점이 늘어서 있기에 평소에 지인들이 찾아오면 안내하기에 좋다. 또 규모가 큰 생활용품점이 있어서 잡다한 용품을 사기에 거저그만이다.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아기자기하게 서 있는 각종 병원이다. 한방병원이 몇. 의원급이 네다섯이라 몸이 뻐근할 땐 한방에 골라 들어가서 한 시간쯤 치료 받으면 깨운하다.
특히 코로나19가 기성을 부릴 때 멀리 가지 않아도 예방주사를 접종하기에 용이해서 좋았다. 지금은 독감주사를 맞는대도 굳이 차량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니 내가 살기에 안성맞춤인 마을임에 틀림이 없다. 더구나 당뇨 고혈압네 심장 관상동맥우회수술가지 받다보니 신장마저 위험경계 수준인 내겐 이보다 살기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각종 시중은행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은 수입이지만 들고나기 좋고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을 요리조리 이체하는 재미도 괜찮은 편이다. 또 대형마트가 5분 거리에 있어서 좋다. 이길은 이렇게 걷기보다 편의시설에 들락거리는 재미가 있는 길이다.
첫댓글 걷는 일,
산책 혹은 어르신들께선 일제 잔재인지 '산보'라고도 하신다.
아무려면 어떠랴. 물론 짬 내어 걷는다면 보약 중의 보약이겠지만 내겐 좀 다르다.살기 위해서 걸어야한다.그건 고역이다.
그걸 이겨보려고 걸으면서 이것저것 詩想도 떠올려보고 군시절의 부르던 군가로 행진도 해보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면 싫증나기 마련이다.그렇다고 훌쩍 멀리 가서 새로운 길 걷기에도 사정상 어렵다.
어쩌나, 얼마 더 살 날이 남았을지 예단할 수는 없는 나이다. 한 걸음을 걷더라도 걸어야 살 수 있다면 걸어여지. 꼭 걸어야 살 수 있다면 당연히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