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가 멍멍하고 등과 옆구리와 어깨가 결려서 5층에 올라가 찜질을 하며 밤을 보냈다.
10:30부터 꽤 긴 시간 자며깨며 하다가 동이 트자 여섯 시도 못되어 잠이 달아났나부다
싶었지만 기력이 모아지지 않아 내 방으로 내려와 리크라이너에서 혼수상태 속에 한동안
꿈 속을 헤매면서 잡다한 몽상의 세계를 다시 체험하였는데, 어쩌자고 지난 날의 실패했던
기억과 이미 고백성사로 용서받았을 잘못까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사념들이 파노라마처럼
영상을 비추이며 들락거리던지 내가 '이것으로 끊임없이 보속을 하는구나'싶은 느낌이 절로
들면서 문득 강길웅신부님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라는 강론을 다시 읽고싶어졌다.
다시 읽으니 수수께끼같은 사건의 원인이 약간이나마 짚어지는 감이 들기에 강신부님의 다른
강론을 검색하며 읽어보았는데 읽기 전보다는 훨씬 내면의 상황이 안정됐음을 느꼈다.
십여년 전 양아치세입자에게 고난을 겪던 무렵,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역경에서 탈피해 보고자
성지를 순레하며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기린성당 최신부님의 강론을 다시 들으며
최신부님의 영성과 가르침에 힘입어 해묵은 난관을 헤쳐나가야하지 않을가 싶기도 하고, 최봉도신부님의 <내적 치유>절차를 신중하게 이행해 가야할 필요성도 절감하게 되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 역경을 벗어나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가 다시 게을러지면서 때로 오만한 가운데 절로 스며든 악습에 빠져서 방황의 길로 접어든 건 아니었을까? 역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를 해주셨던 은인들을 잊거나 그분들과 이웃을 위한 기도에 태만했던 건 아니었을까? 회의와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어제의 돌발사태 또한 내가 게을러질 때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신호 - 깨우침과 격려의 일환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릇 사람이 겸손을 잃게되면 일상에 잠재해 있던 우환이 지진이 일듯 나를 급습하곤했는데,
살아 오는 동안 여러 차례 역경을 겪으면서 파멸의 문턱에서 용케도 나는 다시 소생의 길로
이끄시곤 했던 주님의 은총을 잠시라도 잊거나 교만으로 인해 은총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번번이 회초리를 드시곤 했었다. 지금은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살피면서 그에 따르려는 자세를 확고하게 세워야할 때이다.
지난 밤 내 안에서 회오리치던 사념들을 차분하게 점검하면서 내가 간과한 게 어떤 것인지,
비겁하고 약삭빠르게 눙쳐둔 건 없는지, 야금야금 나의 생명을 갉아먹어오는 역경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주님께 의탁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로 들어서야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지금 당장> 내가 해야하고 착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시편 51.5)
http://cafe.daum.net/4346go/BEs1/550
몇 년 전입니다. 소록도에 은인 자녀들을 초청하여 3박 4일 동안 현장 체험시킬 때 서울에서 네 명의 자매가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일이 끝난 뒤에 사제관에 불러 삼겹살 파티를 열어 주었는데, 자매들은 모두 40대의 주부였으나 제 눈에는 10대 소녀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맥주를 한 잔씩 따라 주면서 물어보았습니다.
"자매들 생애에 가장 기뻤던 사건이 언제였느냐?" 뻔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해 보라니까, 첫 번째 자매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나중엔 저를 흘켜 보면서 말을 못하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이 자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남편이 착한 사람이긴 한데 술을 많이 마셔서 아내를 늘 피곤하게 한답니다. 얼마 전에는 보증을 잘못 서서 빚도 많이 지고, 그 후로는 음주 습관이 더 심해져서 가정불화도 많게 되었답니다.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일을 안 하니까 살림이 어렵고 요즘에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랍니다. 저는 그런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본래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기에 부인에게 위로를 해 주고, 어려운 때 일수록 자매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며 기도를 해 줬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자매를 시켰는데, 이 자매도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딸 죽은 얘기를 꺼냈습니다.
딸이 예쁘고 똑똑했답니다. 그런데 몸이 워낙 약해서 초등학생이던 어느날 손쓸 틈도 없이 죽었다면서 딸이 죽은 지 3년이 넘었는데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 자매는 본래 명랑하고 재미있는 여자였습니다.
그가 울 때 다른 자매들도 다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에 슬픔의 주머니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슬픈 얘기에 자기들의 슬픔 주머니가 터져서 눈물을 함께 흘립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때 위로도 받으며 치유도 받습니다. 제가 그 자매를 위해 기도를 하고 다음 차례의 자매에게 눈짓을 하자, 그 자매도 제 얼굴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때는 I.M.F 직후였는데, 하던 공장이 잘 안돼서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니 평생 수고한 것이 다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날 깜짝 놀랐습니다. 왜 기쁜 일을 얘기하라니까 기쁜 일은 얘기 못하고 아프고 슬픈 일만 얘기할까요? 왜 그렇죠? 아프고 슬픈 일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참된 기쁨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얘기가 이상한 데로 흘렀지만, 겨울에 목욕을 하고 나면 가끔 등에서 따끔거리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목욕을 했는데 왜 따끔거리나요? 등 쪽에는 손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때를 제대로 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때가 다 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바로 그 부분이 따끔거리며 온몸을 불편하게 합니다.
때가 남아 있는 부분은 몸 전체의 수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아니, 수천 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작은 부분이 몸 전체를 온통 불편하게 만들 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가슴에 새겨진 상처나 아픔은 인생에 있어서 수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부분이 우리 인생 전체를 아주 피곤하게 만듭니다.
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올바르게 참회하면 죄가 오히려 복이 되어 그 인생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데, 회개를 하지 않으면 죄가 나뿐만 아니라 내 자녀, 내 후손에게도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시편 51의 5절 말씀인데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때는 기원전 991년경입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을 강화하고 정복 사업을 거의 마치게 되자 나라에는 태평성대가 찾아오게 되며, 다윗 개인적으로도 한가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긴장을 푸는 이 한가한 시간이 아주 위험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때 사탄이 그 틈새를 노리고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느 날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았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우리야라는 부하의 아내 밧 세바였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시켜 밧 세바를 불러다가 정을 통했는데 얼마가 지나자 밧 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 전장에 나가있는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부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에게 술을 잔뜩 먹여 집에 가서 마누라와 함께 자라고 시켰는데 이 친구가 집에 가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이튿날에도 똑같이 술을 먹여 보냈으나 우리야가 집에 가지 않습니다. 다른 전우들은 전장에서 고생하는데 자기만 마누라하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자기 죄를 감출 수 없게 되자 우리야를 최전방에 보내어 살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다윗을 늘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이런 일이 있었죠?
조선왕조에서,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나자 꿈에 단종 어머니 혼백이 계속 나타나서 세조를 괴롭힙니다. "내 아들 죽인 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 라고 겁을 주는데, 세조는 밤마다 두려웠으며, 나중엔 정말 세조의 아들 의경 세자가 단종 어머니의 혼백에 시달리다가 죽습니다.
세조는 그래서 단종 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조 역시 꿈에 단종 어머니가 뱉은 침을 맞고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조가 걸린 피부병이 문둥병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죄를 짓고는 제정신으로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경우가 이렇습니다. 죽은 우리야의 혼백이 밤마다 나타나서 "내 마누라 뺏은 놈, 이 천벌받을 놈." 이라고 하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너는 온전하게 살 줄 아느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원수를 갚겠다. 아니, 네 아들부터 죽이겠다." 라며 날마다 겁을 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밤마다 미칠 지경입니다. 결국 밧 세바가 낳은 첫아들은 죽습니다.
이 시는 바로 그와 같은 엄청난 죄, 하느님을 떠났을 때 잠시도 편안할 수 없는 자신의 죄를 크게 뉘우치고 참회하는 내용입니다.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는 정말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삶의 곳곳에서 죄의 상처와 흔적을 남겨 놓습니다.
아니, 죄는 나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 내 손자들에게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힙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자기 죄를 알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것이 해결 안 되면 삶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형제가 있는데 무역 회사에 다니면서 제법 잘 나가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운에 의해 결코 원하지 않는 길로 계속 끌려가게 됩니다.
술도,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마시다 보면 소주를 하루에 여섯 병, 일곱 병씩 마셨으며, 30대 중반부터는 아예 알코올 의존자가 됩니다.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조카인 자기에게도 무당의 신이 내렸다 하여 억지로 내림굿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당만은 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거절하자, 내림굿을 받은 상태에서 거절하면 결국 죽는다고 고모가 협박까지 했지만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무당 촌이 있는 산을 여러 군데 따라다니면서 이상한 체험들을 많이 합니다. 한마디로 마귀들의 장난에 의해 헛것을 보게 되고, 또 헛것이 자주 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기절하여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는데, 무당들은 이와 같은 경험들을 모두 겪는답니다.
어느 땐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마귀가 용케 알고, "죽어서 끝이 아니다." "죽는다고 끝이 아니다." 라는 협박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죽었던 많은 분들이 나타나서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것을 보여 주는데, 그 친구 안에는 자기 말고 다른 누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술도 그 친구가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친구 안에 있는 누군가가 마시는 것이며, 석 달에 열흘 정도는, 누군가가 자기를 반은 죽이다시피 괴롭힙니다. "죽여라. 죽여!"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목을 조여 오거나 또는 목을 뒤로 꺾기도 하며, "묶어라, 묶어!" 하면서 입과 코와 눈을 누군가가 가는 철사로 묶고 꿰는데 그 고통이 참 심했습니다.
고모가 계속 굿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종용했지만 끝가지 굿은 안했으며, 그때마다 고모가 자기에게 저주를 내렸는데, 이 친구는 무당만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텼습니다.
나중에 그 고모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고모의 자녀들이 그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구더기가 잔뜩 슬어서 시체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답니다. 그러나 고모가 죽었다고 마귀의 장난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힙니다.
하루는 마귀의 장난을 견디지 못해서 명동성당에 있는 성모상을 찾아 갔는데, 성모상 앞에 서 있으니까 이상하게 목이 조이거나 꺽기는 고통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머리 전체를 철사로 꿰매는 듯한 아픔도 없어집니다. 이때, 그 친구에게 이젠 술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술을 끊겠다는 생각은 수백 번도 더 했지만 다 허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왠지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길로 집에 가서 목욕을 한 뒤에 일체 술을 끊습니다. 그리고 예비신자 교리 반에 들어가 6개월 동안 교리를 받은 뒤에 세례를 받았는데, 오랫동안 술을 끊었어도, 머릿속에는 술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에게 고통을 줍니다.
촛불을 켜 놓고 묵주기도를 바치면 "예수는 가짜다." "성모는 진짜 가짜다."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다시 목을 조였다가 뒤로 꺾기도 하고 온몸을 치고 때리기도 하는데, 세례를 받았어도 마귀 장난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은 성령 운동을 하는 신부님한테 안수를 받을 때 정수리에서 찬물이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것을 느꼈답니다. 아주 찬 기운을 소름이 끼치도록 느꼈는데, 그때 신부님이, 이젠 살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뒤부터 성체조배나 기도를 할 때면 철사 줄로 얽혀 있던 얼굴에서 이젠 거꾸로 가닥이 하나씩 풀려 나가는데 철사가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기가 곤란한데, 철사가 입에서부터 코를 뚫고 눈을 지나 머리로 빠져나갈 때, 철사가 살 속을 파고들어 빠져나가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다른 한편 그 철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다른 힘도 있어서 이중으로 이 형제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가위로 얼굴을 절단하는데, 이런 끔찍한 일을 자기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굴이 사방으로 잘려 나가는 모습이 보이지만 옆에 있는 부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한번은 부인에게 지금 성령께서 내 얼굴을 수술하신다고 말하자 부인이 이상한 소리한다며 비웃었는데, 종이컵에 직접 피를 받아 보여 주자 부인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머리에서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듯이 악령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도 하며, 또 그 반대로 악령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강하게 붙들고 있는 다른 힘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때 그는 조상들이 자기에게 물려준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를 직접 깨닫게 됩니다.
전에 마귀들이 덤비면서 "묶어, 묶어!" "죽여, 죽여!" 하며 사방에서 압박했던 것들이, 이제는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그 끄나풀을 하나씩 풀고 그리고 잘못된 것을 절단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 형제는 조상들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연도도 바치고 미사도 봉헌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도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할 때는 남아 있는 미세한 악의 세력들이 벗겨지고 풀려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형제가 친가와 외가 쪽의 가계를 위로 4대까지 조사해 보니 양가에 모두 알코올 의존자가 있었고, 무당이나 무당에 심취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술 마귀, 무당 마귀들이 이 형제 안에 가득 있으면서 오랫동안 형제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지금은 건강이 99퍼센트 회복되었으며 술 끊은 지도 여러 해가 되었고 참된 신앙으로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령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기 몸 안에 흐르는 조상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 7장에서 고백했듯이,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육체는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왜 이런 모순되고 비참한 결과가 생기느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조상들이 물려준 선악의 지시에 따라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사람이 하느님께 잘했을 때 그 축복을 몇 대에 걸쳐 주시기도 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그 벌과 저주를 또 몇 대에 걸쳐 내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조상 덕분에 복 받는 후손도 있고 조상 때문에 벌 받는 후손도 있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 찬미 예수님
부활 대축일 미사 화답송에 보면 시편 118편에 나옵니다. 부활 성야 미사 때도 나옵니다. 그리고 부활 8일 축제 내내 복음 환호송으로 시편 118, 24절이 나옵니다. 계속 나옵니다.
“이날”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들의 하루, 하루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모든 날들이 그렇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며, 존귀가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날들이 다 장엄한 날입니다.
오늘은 그래서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편 118편 24절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18편은 제가 좋아하는 감사시인데 이건 유대인들 축제 때마다 낭송이 됩니다. 3대 축제가 과월절(파스카), 오순절, 초막절인데 그때마다 이 시편 118편이 읽혀지고 또 많은 집회에서 118편을 낭송합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모든 날은 다 특별한 날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다시 없는 날입니다.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 23세 성인이 돌아가시던 날입니다. 이제 언제 돌아가신다는 것을 본인이 아시는데, 그래야 마지막 준비를 하시죠. 그래서 비서 신부가 교황님께 “오늘 주님을 뵙게 되실 것입니다.”하고 말씀드리면서 엎드려 울자 교황님이 그러십니다. “나에게 주님을 뵙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면서 왜 슬퍼하느냐? 기뻐해야지.”하시면서 비서 신부의 등을 토닥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인데 그분이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모든 날들이 다 태어나기 참 좋은 날이다. 모든 날들이 죽기 참 좋은 날이다.”(성 요한 23세)
이 말씀을 하셨어요. 언제 죽어도 그 날이 참 좋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날이 죽는 날이고 그날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죽음과 부활의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죽는 얘기가 나왔으니 좀 방송을 통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람이 돌아가실 때에는 남아있는 분들, 옆에 계신 분들이 좀 잘 도와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시간이잖아요.
아주 장엄한 시간입니다. 지금 돌아가시지만 지금 부활하시는 시간이예요. 이를테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다면 “아이고, 아버지” 하면서 붙들고 울고 소리를 지를 것이 아닙니다. 미리 준비를 좀 해야 돼요. 자녀들이. 우리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자라는 걸.
이제 감각이 있는데, 눈은 떠 있어도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기력을 잃으셨어요. 입이 열려 있어도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임종 순간인데 무슨 말이. 물론 말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 닫혀져 있어요. 다만 귀는 오래까지 열려 있답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시간이다 하면, 아버지가 정말 하느님 품에 멋지게 안길 수 있도록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우리가 우애 있게 잘 살겠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대로.”
그리고 꼭 그걸 확인시켜야 돼요. 아버지는 천당에 가신다는 것. 좀 부모님이 험하게 사셨다 하더라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기도해 드립니다. 미사도 봉헌해 드리고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아버지 천당에서 복을 누리시라고 기도할테니 안심하시고 그분 자비에 맡기십시오.”하고 좋은 말씀을 들려드려야 돼요.
그분도 이제 기력이 없으세요. 겨우 귀로만 들으시는데 불안하죠. 사실. 우리 다 불안한 마음이있습니다. 남아있는 자녀들이 따뜻한 말, 위로의 말 그러면서 아버지가 지금 숨이 넘어가셨다해도 제 생각이지만 영혼이 바로 가시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부모님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봉헌성가, 아름다운 게 많이 있잖아요. 하느님께 부모님을 맡겨드리는 성가. 그럼 그 성가 소리를 들으시면서 아버지가 하느님의 품에 이렇게 안기시잖아요.
우리 모두는 탕자들이죠. 하느님 편에서 보면 우리는 다 탕자들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탕자를 뭐 여러 말 들을 것도 없어요. 껴안아 주시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시고 극진한 대우를 해주시잖아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에 우리 아버지가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실 수 있도록 자녀들이 그렇게 해드려야 돼요.
그리고 물론 눈물이 쏟아지죠. 그러나 소리는 내지 말고 지금 운명하셨다 하더라도 묵주기도 함께 하면서 성모님한테 또 부탁을 해야죠. “우리 아버지 잘 좀 받아주시고 또 천당에 가실 수 있도록 어머니 좀 도와주십시오.”하고 묵주기도 바치면 아버지 영혼이 다 들으시죠. 들으시면서 가시잖아요. 얼마나 멋있어요. 눈물은 흘려도 소리는 내지 말고 성가 소리, 기도 소리를 이렇게 들으실 때 마지막 가시는 분 또 부활하시는 그분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가.
그냥 부산하게 소리 지르고, 떠들고 이럴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건 나중에 몇 십분 지난 뒤에 하셔도 되고. 너무 장엄한 시간이예요. 우리 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 죽는 시간.
그래서 남아 계신 분들이 잘 보내드릴 수 있도록 신앙인들이 신경을 좀 쓰셔야 합니다.
또 전에 돌아가시는 분들 보고 예수 마리아를 자꾸 부르라고 해요. 그런데 이거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 말 시키면은 안 돼요. 왜냐하면 부르시는 분도 있어요. 그럼 남아 있는 분들이 좋아합니다. 열심하게 사시더니 역시 끝까지 저렇게 믿음을 갖고 가신다 하는데. 어떤 분은 부르고 싶은데 입이 안 열려지죠. 안 열려집니다. 지금 죽는데 무슨 말이 나오겠어요. 기능을 다 잃어버렸는데.
그러니까 이 분 표현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안 된다고 해요. 예수 마리아 부르라고 자꾸 옆에서 붙들고 재촉을 합니다. 그럼 돌아가시는 분이 안 나오니까 안 된다고 하거든요. 그럼 남아있는 분들이 뭐라고 하는 고 하니, “아니, 살아서는 열심히 하더니만 부르라니까 안 부르고 고개만 이렇게 하고, 예수 마리아를 배척하는 것처럼 그렇게 쓸데 없는 말들을 또 해요.
그거 다 지금 돌아가시는 분이 듣고 있는데. 좋은 말씀을 드려야 되고 말 시키면 안 돼요. 말씀하실 때는 이 말씀 저 말씀 들을 거 있으면 듣고, 해 드릴 거 있으면 해드리고 해야 되는데 입이 안 열려지는데 자꾸 막 말하라고 이러면 안 되지요. 이건 폭력입니다.
옛날 분들이 자꾸 그랬어요. 돌아가실 때 예수 마리아 부르고 돌아가시면 듣기가 좋죠. 듣기는 좋은데 본인은 그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안 나오니까 말을 시켜서는 안 되고, 아이고, 안 나온다고 고개를 흔들 때 이게 신앙을 거부하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 사는 날 하루 하루가 중요하지만 특히 죽는 그날 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태어나고 죽는 날이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둘이 아니다. 하나다라는 거 말씀드립니다.
중국 당나라 때 운문이라는 선사가 있었습니다. 원래 문헌인데 유명한 선사들은 고장이나 산 이름을 따서 부릅니다. 조주 지방에서 활동하셨다 해서 조주스님. 백장은 조주 백장산에서 살았다해서 백장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운문은 괴팍하셨던 분인데 어느날 보름날 집회 때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보름 이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보름 이후에 대해 한 마디 해 봐라.”
다시 말해 오늘이 보름날이니까 “오늘 이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오늘 이후에 대해 한 마디 해 봐라.”하자 아무도 대답을 못 합니다. 이때 운문 자신이 대답을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한문 글자로는 일일시호일이라고 합니다. 호일은 본래 좋다는 호자로 본래 생일을 말하는데 모든 날들이 생일처럼 좋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 “날마다 좋은 날이다.” 운문 선사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 모든 날들이 생일처럼 좋은 날
그런데 우리 생애에 좋은 날만 있는 게 아니고 궂은 날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날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좋은 날은 어떻게 하시라고 했죠? 좋은 날은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좋다고 받아들이면 좋은 날입니다. 똑같은 날이라도 싫다고 받아들이면 싫은 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당과 지옥이 둘이 아니예요. 지금 여기가 천당일 수도 있고, 마음 상태에 따라서는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또 행복은 이런 말이 있어요.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미래는 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하다 하면 한없이 행복한 것이고, 지금 내가 불행하다 하면 그럼 또 한없이 불행한 것입니다. 꽃은 봄에만 피는 게 아닙니다. 마음만 좋게 먹으면 날마다 가슴에서 꽃이 피어납니다. 열매도 가을에만 영그는 것이 아닙니다. 좋게만 행동하면 날마다 가슴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발레리나 강수진 씨, 지금은 우리나라 국립 발레단 예술 감독이죠. 제가 존경합니다. 그분이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2년 만에 귀국하여 공연을 준비할 때 기자들이 달려가 은퇴는 언제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발레니라에게 40살은 환갑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강수진이 1967년생이니까 그때 우리 나이로 44살이었습니다.
또 환갑이 넘었으니 은퇴는 언제 하시느냐라고 묻자 강수신 씨 대답이 “저는 아직 팔팔합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강수진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물론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충실하게 삽니다. 오늘 뿐이예요. 왜냐하면 오늘이, 우리로 치면은 하느님의 날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예요.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2008년 경기도 성남시에서 특강을 했을 때도 강수진 씨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겐 오늘 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 목표였습니다.” 그녀가 그랬어요. 발레를 하면 거의 매일 아프기 때문에 통증을 친구로 여긴답니다. 그러나 힘들게 살아야 나중에 참 기쁨을 알게 된다며 아파도 늘 다시 시작한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분들도 이 하루 하루가 녹녹하지 않구나. 그때 생각을 해요. 연예인들 보세요. 돈도 있고 인기도 많은데 힘이 드니까 마약도 복용하고 자살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생애에 오늘보다 소중한 날은 없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언제 사랑해야 되요?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사랑할 수 없어요.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모릅니다. 불확실해요.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시간은 오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콜 환자들은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병이라 안 돼요. 감기 걸린 사람보고 “그 기침 좀 그만 하라”고 말할 수 없죠. 병인데. 저절로 나오듯이 알콜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으라는 말은 안 돼요. 그런데 “오늘만 참아보자”합니다 그래서 함께 사우나도 가고, 등산도 가고, 사이다도 먹이면서 하루만 잊어버리게 해요. 그래서 오늘 하루 참았으면 이제 가능한 거에요. 내일이 되면 또 뭐라고 하겠어요? “오늘도 참아보자.” 이 오늘 안에, 말을 만들면 영원이 있어요. 오늘 되면 되는거예요. 좀 심하게 말하면 오늘 안 되면 안 되는 거예요.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모여서 평생이 되고 영원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둥그런 원이죠. 돌고 돌아요. 윤회사상이 있지요. 우리의 세계관은 일직선으로 되어 있어요. 끊임없이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원이나 직선을 이렇게 보세요. 지금 내가 그 선 위에 점으로 있잖아요. 영원이라는 끈이 있다면 내가 그 선에 점으로 있잖아요. 여기에 있는데 과거도 통하고 미래도 통합니다. 여기서 지금 전기 밧데리를 넣으면, 말을 만들면 과거에도 통하고미래에도 통하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잘 살면 과거도 미래도 다 밝아지게 되는 거예요. 이따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보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하는데 어제 양식이 아니예요. 내일 양식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또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그럽니다. (루카 23,42-43)인데 그 놈이 강도잖아요. 날 강도.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셔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옥도 안 거치고 논스톱으로 아주 천당에 들어가는 거 같은데, 왜 강도가 낙원에 들어가는 날이 오늘일까요? 시편에는 그럽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 특히 다윗을 말하는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데 하느님이 그들을 언제 낳으셔요? “오늘 낳으십니다.” 하느님의 날은 오늘입니다.
제가 책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다 지금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데 중요한 것 중에서 하나는 시간은 상황마다 다르게 흐릅니다. 빛의 속도로 이렇게 달려가는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잘 안 흘러요. 엉뚱한 얘기가 나오는데 못 알아들으시니까 그래요. 이게 다^^*
* 상대성 이론 : 상대성 이론은 자연법칙이 관계성에 대해 불변하고 시간과 공간이 관측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이론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거예요. 우주선을 탔다 하면 금방 그런 가속도가 안나옵니다. 그러니까 대마젤란 자리다 하면은 여기서 16만 년이 걸려요. 우주선을 타고 가면 12년 조금 더 걸립니다. 왜냐하면 우주선에서는 시간이 안 가요. 또 안드로메다은하 자리는 230만 년이 걸려요. 빛의 속도로 가는데 230만 년이 걸려요. 그러나 우주선을 타고 가면 15년이 안 걸려요. 지구에서는 230만 년이예요. 우주선 타면은 시간이 안 갑니다.
우주 끝까지 가는 데는 지금 현대 과학에서는 140억 년이라고 해요. 앞으로 더 멀어질지 모릅니다. 현재까지는. 그런데 24년이면 갑니다. 그 엄청나게 먼 거리. 그러니까 보면은 우주선 안에서 똑딱 시간이 1초 지났는데 지구에서는 시간이 지금 얼마나 지났는고 하니, 1600년이 지나가 버려요. 거의 2천 년이. 우주선 안에서는 똑딱입니다.
그런데 보면 백제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 대한민국 그냥 한 번에 딱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이. 그럼 쭉 가 보세요. 하느님 눈에는 우주 시작이나 끝이나 오늘인 것이예요. 이건 뭐 말씀드려도 못 알아들으니까^^*~ 이제 과학으로도 현실로도 그날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을 최고의 날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최고의 날로 살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죄가 뭘까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고 또 묻는 자의 의도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제 판단에는 건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뭘 봐도 본 것을 모르고, 뭘 들어도 들은 것을 모른다면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치매 걸리신 분들 보세요.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과 마음은 어디 가 있어요? 딴 데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성으로 사는 분들은 일종의 정신질환 자들이예요.^^*~ 실제로 그렇죠.
부부 간에도 대화를 하는데 건성으로 듣고 있다면 부부가 아니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면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건성으로 하고 있다면, 묵주기도 백단 바쳤어. 천단 바쳤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를테면 천단 바치고, 만단 바쳤는데 머리로는 뭐 미장원에도 갔다, 백화점에도 갔다^^*~ 자기 볼 일 다 보고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백장 선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왜 백장이라고 한다고 그랬죠? 백장산에서 살았으니까 백장이라고 하는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백장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기특한 것입니까?” 이 질문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사는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백장 선사가 그래요.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백장산에 대웅봉이 있었는데 그 대웅봉에 백장이 사는 절이 있었습니다.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라는 것은 다른 사람 다 게으름 펴도 홀로 부지런히 도 닦고 있으면 이 사람이 가장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성당 일을 하는데 그런 분들 없지만 말을 만들면, 꾀를 부리고, 말이 많고, 수녀님은 어떻고, 뭐는 어떻고 그냥 말들이 무성해요. 그러나 누군가는 일체 그런 말없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그분이 우리 등촌 1동 성당에서 홀로 우뚝 앉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죠? 세상 사람 다 거짓말 해도 나만 혼자 거짓말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홀로 우뚝 앉아 있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경기가 좋아서 장사가 잘 되고 있다면 그건 경기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지 장사 수완이 탁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경기가 아주 안 좋은데도 장사를 잘 하고 있다면 뭔가 탁월한 것이예요. 홀로 우뚝 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잘해서 아내가 잘하고 있다면 좋은 일이긴 한데, 아내가 뭐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잘하고는 있지만 조건이 좋으니까. 그러나 남편이 힘들게 하는데도 좋은 아내가 되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면 그거는 홀로 우뚝 앉는 것입니다. 탁월한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홀로 우뚝 앉을 수 있을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조금 힘들고 어렵다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내고 있다면 지금 그 자리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둘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도 정말 멋있게 해야 돼요. 그 영화보면 치사한 인간들 많이 나오는데 불륜도 있고, 마음은 좀 이쁜 여자보면 쳐다보게 돼죠. 저도 쳐다보게 돼요.^^*~ 그러나 그건 마음 뿐이지 또 그렇게 빠져서는 안 되죠.
‘잉그리쉬 페이션트’라는 영화가 있는데 어떤 총각 교수가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가 동료 교수 부인이 혼자 시장에 나온 것을 보고는 몰래 미행을 합니다. 딴 생각이 잇어서가 아니라 시장에 젊은 여자가 혼자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도둑도 있고, 강도도 있고, 물건 사는데도 손해 보게 되고. 그래서 여차하면 도아주려는 마음 뿐이지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남편이 해외로 출장을 가는데 부인을 남겨놓고 갑니다. 그때 이 젊은 교수가 그래요. “아니, 여기는 험한 곳인데 왜 출장을 혼자 가냐? 부부 동반해서 가야지.” 그러자 그 남편이 “아, 내 와이프는 이런 데 적응이 잘 돼서 혼자 잘 지낸다”하면서 비행기를 타려고 돌아설 때 그 남편이 그래요. “여자 하나 가지고 왜들 난리인가.” 뭐라고 했다고요?
이걸 총각 교수만 들은 게 아니라 저 뒤에 있는 부인도 듣습니다. 내 아내라면 여자 중에 하나가 아니예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나훈아가 그러잖아요.^^*~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여자 중에 하나가 아니예요. 전 노래방에 가면 꼭 그 노래 부르네요.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깝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할 때가 많이 있어요. 들어보면은. 그런 것이 씨앗이 됩니다. 아무리 마지막이라 해도 마지막 말 해서는 안 돼요. 정말 여러분들 속상하고 힘들고 저 인간이 나를 배신했다 해도 마지막 말은 하면 안 돼. 그래야 내가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프고 슬픈 일은 다 비슷해요. 다 비슷한데 특히 여자들 말 함부로. 아까도 말했잖아요. 예수 마리아 부르라고 해놓고 못 부르면 “아, 저 인간 구원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다. 그거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죠.
성경에 보면은 야곱의 형 에사오는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죠. 겨우 그 팥죽 한 그릇 얻어 먹으려고 자기 장자의 권리를 동생에게 팝니다. 동생이 놀래가지고 맹세를 해보라니까, 거짓말 같잖아요. 그걸 어떻게 팥죽 한 그릇에, 돈으로다 살 수 없는데. 그런데 에사우가 그래요.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창세 25,32) 이래서 하느님의 은총의 물길이 야곱을 통해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매사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옛말에 빌어먹을 놈은 빌어먹을 짓을 하니까 빌어먹는 거예요. 일꾼들도 보면 300원짜리 실장갑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놈은 한 번 쓰고 버립니다. 그까짓 거 300원 짜리. 그러나 부자가 될 사람은 300원짜리 장갑을 빨고 또 빨고 다 떨어질 때까지 빨고 닦아서 끝까지 사용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날이지만 이 날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과거와 미래가 다 양쪽으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 참 그 은혜 못 받는 거 보면은, 얼굴에 쓰여 있잖아요. ^^*~ 은혜를 못받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아주 사소한, 십자성호 같은 것을 자신 있게 긋지를 못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거의 안 해요. 왜 안 하느냐 하면 창피하대요. 내가 하느님의 딸이라는 것이 창피해요? 그러니까 은혜 못 받죠.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창피한가? 내가 성당에 나가는 것이 자랑스럽지. 이건 천주교 신자들의 아름다운 제복과도 같은 것이예요.
딱 보면은 아, 저 분 성당 나가시는구나. 딱 알아요. 또 그 십자가 긋는 거 보기만 해도, “나도 언제고 성당에 나가야지.” 그 자체로 십자가는 사람을 끈다니까요. “성당에 나오세요. 나오세요.”안 해도 식당에서 내가 십자성호 긋는 것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걸 창피하다고 안 하는 거예요. 아 그런 사람이 집에서 매일 묵주기도 백단씩 바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 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또 우주선이나 KTX 이런 거 고장나는 것도 보면 큰 부품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나사나 볼트 하나 요런 것 때문에 사고가 나는 거예요.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수도자들이 영성체 할 때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내게 심한 고통이다. 차라리 나를 영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수도자들이 미사 때 영성체 안 했으면 좋겠대요. 이게 누구 말씀이라고요? 예수님 말씀. 왜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해요? 습관적으로 한다 이거예요.
성체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죠. 사랑하는 님이예요. 그럼 그분이 오시면은 벅찬 감격, 두근거리는 기쁨, 뜨거운 감동이 있어야 되는데 전혀 없는 거예요. 뭐 붕어빵 하나 먹는 것만도 못해. 어떻게.
죄송하지만 예를 들어 “수녀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하면은 눈에서 빛이 번쩍 납니다. 입이 쩍 벌어지고 ^^*~
커피 한 잔 가지고도 그렇게 기쁨이 오는데 왜 미사 때 영성체 할 때는 그 기쁨이 없는가? 그냥 오로지 얼른 미사 끝내고 일하러 갈 생각만 한다 이거예요. 그 일이야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님이 지금 여기 계신데 왜 다른 데 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는 안 했으면 좋겠다. 참 이거 우리가 새겨 들어야 되고.
또 베트남 출신 팃 낫한 스님이 정념이라는 말을 해서 서구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 말은 “온전히 깨어있으면서 삶의 매 순간을 깊이있게 사는 것이다.” 정념에 이르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것인지를 알게 되고, 마음에 치유가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온전히 깨어있으면서 꽃 하나 나무 하나라도 깊이 바라보게 되면은 다음 주에 나오지마는 부처 아닌 것이 없어요. 돌맹이 하나, 풀잎 하나에도 이게 관세음 보살이고 부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통해서 치유가 일어나는 거예요.
소화 데레사 성녀가 그러잖아요. 그분이 큰 기적을 통해 성녀가 된 것이 아니예요. 아주 사소한 것. 미사 때 누가 좀 분심들게 한다든지, 불 땔 때 연기를 마신다든지, 빨래 할 때 물이 튄다든지 하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귀찮다 하더라도 냉담자들을 위해서,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들을 위해서 희생으로 바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작은 것이 아주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성녀가 돼요. 별 볼일 없는 성녀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그렇게 아주 작은 것이 아주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 관계로 다음 주에 다시 또 계속해서 말씀드리는데 우리 생애에 중요한 날은 언제라고요? “오늘이다.” 오늘 가만히 보면 우리가 태어나는 날이고 오늘 우리가 죽는 날입니다. 살고 죽는 것도 둘이 아니다. 오늘 충실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1주간 수요일(18.1.10) :병마를 쫓아 내시는 예수님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귀와 건강은 하느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병에 걸린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의 고통보다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허망한 현실에 대해 인생을 슬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고는 알거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욥에게 있어 인생은 실로 고역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도 병은 무섭습니다.
암이나 에이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감기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하는 분야는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렸다 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도 뒤따르게 되며
또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시간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옛말에 '우환이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환이 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병이 낫고 마귀가 쫓겨난다는 것은 메시아가 보여 주는 하나의 징표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을 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병이 들었다 하는 것은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훼방을 놓고
장난을 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마귀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단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면 마귀의 모든 세력이 꺾여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의 새 지평선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질병, 혹은 자기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갇혔던
인생들에 이르기까지도 예수님은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간질병을 남모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병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우울증으로 비관하면서 고통을 겪다가
나중엔 과격한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주위의 사람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병에 마음이 묶여진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새 인생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자신만이 몹쓸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고
세상이 저주스러웠으나 예수님의 고난과 성모님의 통고를 알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실로 축복받는 인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현대에도 치유의 기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인생은 절대로 고역이 아닙니다.
불행의 대명사였던 고통은 이제 더이상 불행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그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셨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도 새 세상을 여는 관문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의 부활로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병 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고 생활이 부패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악습에서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고
헛되게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치유받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들을 애정으로 항상 찾아 나서십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이 그분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병자나 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도 당신을 찾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으며 또한 치유되지 못할 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은 그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나가도록 합시다.
슬프고 괴로울 때 그분 앞에 나아가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놀라운 은총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여러가지 의미.'
우리가 묶여진 것을 모르면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자주는 아니었지만
술에 대한 버릇이 잘못들어 한번 마시게 되면 토할 때까지 먹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고백성사를 똑같은 제목으로 계속 보게 되는게 부끄러워 일정기간이 지나면 신부님을 바꾸어가며 성사를 보았다. 그래도 술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었다 ...
어느 지역에 갔다가 우연히 외국 신부님께 성사를 보게 되었는데 여느 때와 다르게 깊이 있게 성사를 보게 되었다.
신부님을 따로 만나 성사보고
은혜받고 감동받았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 신부님은 당신도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신부님과 성사를 보고난 후에야 처음으로 내가
알코올 중독기가 있는걸 알았고, 술에 묶여져있는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 문제에서 벗어났고 몇년간 끊고 지금은 일년에 한 두번 마신다.
살면서 자녀들이,남편이,가족이 평소에 내게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무엇에 묶여져 있는지 알 수 있고,그것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특히 사순시기는 깊숙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시라면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요한8,5 )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옭아매려 한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고 말씀하시자 나이든 이부터 모두 떠나갔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고, 이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고 하셨다.
돌에 맞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여자인데, 떳떳한 시민으로 새로나게 해 주신다.
우리도 사순시기에 내가 들고있는 돌멩이가 무엇인지, 나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바라보자.
사순시기는 일종의 성전이다.
이시기에 각자의 돌멩이를 버리도록 초대하신다. 아까워도 버리면 해방감을 느낀다.
어떤 본당에 두 동서가 함께 다니고 있었다.
큰동서는 활동적이었고 직책을 맡고 성당 일에 열심이었던 반면에
작은 동서는 아이가 어려서 주일에만 미사를 다녔다.
장애가 약간 있는 어머니를 큰 동서가 모시고 살았는데, 가족이 모이면 시어머니랑 사는게 싫어서 큰소리가 나곤 했었다.
작은 동서가 조용히 말을 넣어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애들도 봐주시고 집도 봐주시며 서로가 관계가 좋아졌다.
어느날 큰 동서가 와서 엎드려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작은 동서가 잘못 모신다고 동네방네 헐뜯었다.
이에 작은 동서는 시어머니를 처음 모셔서 서투르다고 형님 말씀이 맞다고 ....
복받는 사람 은 말을 복받게 한다.
우리는 설혹 어떤 상황이
확실하다해도 남에게 불리한 얘기는 침묵 해야 한다.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걸보고 메시아가 아닌 저주받은 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 속으로 걸어들어 가셔서 저주를 깨부수셨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해답이었고 그렇기에 내 십자가를 저주라, 팔자 사납다 하지말고 십자가와 내가 하나가 되면 그 십자가가 보물이 된다.
천상의 기쁨은 십자가를 져본 사람만이 만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용납을 못하고 비난을 받는다면 그 영혼이 더 순수하게 되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그분을 깊이있게 만나게 된다면 오해를 받아도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슬프지 않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때로 박해와 비난과 아픔을 겪게 되는데
그런 분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으면 십자가가 해답이 된다.
십자가는 원하지않는 것으로 오기에 괴롭지만 거기에 하느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짊어질 때, 자존심을 버릴 때 장엄한 새벽을 맞을 수 있다.
여복(女福)많은 신부
지난 6월(1999) 충남 합덕에 있는 솔뫼성지에서
광주교구 사제피정을 할 때의 일이었다.
방을 함께 쓰던 동기 신부가 휴대폰 전화기를 켜 놓고는
수시로 뭔가를 점검하는데 침묵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보기도 아주 민망스러웠다.
“아니, 이 사람아! 피정하면서 뭔 전화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보다 못해
한마디를 퉁명스럽게 던졌더니 그 신부가 코 먹은 소리를 했다.
“아따, 성님은 좀 가만 계쇼!”
“자네 하는 꼴을 보니 정신 사나워 무슨 피정이 되겠는가?”
볼멘소리를 한 번 더 했더니
그 신부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면서 설명을 했다.
우리가 피정을 하는 바로 그 시간에 광주에 있는 자기 본당에서는
아침에 자매들이 버스를 다섯 대나 대절해 남해 금산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본당신부가 함께 동행을 못하니까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서
미리 반장을 시켜 각 버스에 나눠주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테이프에는 본당신부 자신이 직접 부른 대중가요 두곡과
그리고 정중한(?)훈화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들은 부인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는 것 이었다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신경 끄게!” 괜한 것을 가지고 수선을 떤다고 잘라서 한마디 던지고는
말문을 닫았는데 드디어 점심 때의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데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고 사람을 웃기시느냐 하면서
아마 반응들이 제법 굉장한 모양이었다.
전화 받는 꼴을 보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가 킬킬 깔깔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아니, 이게 뭔 불상산가?”
희희낙락하며 요란 법석을 떠는 것이 내심 밸이 꼴려서 심통을 부렸더니
이 친구가 드디어 ‘불안한 남자들의 세태’를 세대별로 털어놨다.
다음은 그 신부가 녹음해서 부인들에게 들려줬다는 내용이다.
30대의 주부가 아침 화장을 짙게 하면 남편이 불안해한다고 한다.
자기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는가 싶어서!
40대의 주부가 저녁에 집에서 샤워를 세게(?)하면 남편이 아주 불안해한다고 한다.
오늘 밤엔 죽어났구나 하면서.
50대의 주부가 아침에 국을 잔뜩 끓이면 남편이 불안해한다고 한다.
저 여자가 도대체 밤 몇 시에 들어오려나 하고.
60대의 주부가 서랍을 만지작 거리면서 남편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면
남편이 덜덜 떨면서 계속 잘못했다고 마누라에게 빈다고 한다.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까봐.
70대의 할멈이 영감보고 제주도에 놀러 가자고 하면
남편이 절대로 안 간다고 엉엉 운다고 한다.
혹시라도 할멈이 당신을 거기에다 내버리고 올까봐.
누가 만들어 낸 유먼지.
신부들이 듣기에는 좀 얼굴 뜨거운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피정을 하다 말고 그야말로 실컷 웃었다.
그런데 불쌍한 건 남편만도 아니다.
어떤 본당의 주방언니는 본당신부보다 권한이 더 막강해서
신자들이 “주교님”이라고 부른다는데,
참으로 별 해괴망측한 주교(?)도 다 있는 모양이지만,
신부도 그런 의미에서는 여복(女福)이 있어야 한다.
상식이 없고 교양이 없는 여자는 대책이 없게 된다.
반면에 여복이 있는 신부는 사제관이 조용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신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지만,
여복이 없는 신부는 사제관의 시끄러움 때문에 자기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전체가 아주 몸살을 앓게 된다.
여자는 좌우간 바탕이 좋아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여복이 참 많은 신부다.
내가 만난 주방의 자매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분들이었다
배움이 부족한 분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만큼 더 순수했으며,
욕심들이 없으니 심성들이 참 고왔다.
아마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이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를 몸에 익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심성 좋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에서는 팔자가 기구한지
때로는 하느님이 야속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나 다른한편,
그들이 받은 아픈 상처가 아니라면 도대체
신부가 어떻게 혼자서 밥먹고 살 건지 하느님의 섭리는 기묘하기만 하다.
남편이고 신부고 여자 잘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집회서에 나온다.(25,18).
“고약한 여자의 남편은 잔칫집에 가서도 한숨만 나온다.”
신부도 마찬가지다!
두 물통
플라스틱 물통과 함석 물통이 우물가에서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먼저 플라스틱이 입을 열었다.
“얘, 함석아! 우리가 날마다 우물에 와서 물을 담아 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우리가 다시 돌아가면 도로 빈 통이 되잖아!” 그래서 플라스틱은 이 하나마나한 짓거리에 신물이 난다면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다음에 함석이 말했다.
“플라스틱아, 네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만 생각 하니! 내경우는 늘 빈 통으로 우물에 오지만 그러나 돌아갈 때는 가득 채워져서 돌아가니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단다” 하면서 함석은 자신에 넘치는 행복을 기쁨으로 대답하였다.
신자들의 이야기가 가끔 두 물통의 경우와 같을 때가 있다. 먼저 플라스틱 신자가 투덜거렸다.
“얘, 함석아! 우리가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례하고 강론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니? 다시 한 주일을 살게 되면 강론이고 하느님이고 다 잊어버리게 되잖니!” 그래서 플라스틱은 주일 돌아오는 것이 성가시고 귀찮다는 듯이 불평하였다.
다음엔 함석 신자가 말했다.
“얘, 플라스틱아! 너는 왜 신앙을 그렇게만 생각하니? 내 경우는 한 주일 동안 내내 빈 깡통으로 지내다가 이렇게 성당에만 오면 위로받고 용서받으며, 그리고 말씀과 영성체로써 가득 채워져 돌아가게 되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른단다” 하면서 함석은 자신의 축복을 기쁨으로 자랑하였다.
똑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바라보는 눈의 각도와 열려진 신앙의 크기에 따라서 은혜가 될 수도 있고 불편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신앙은 진실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밝고 예쁜 안경을 제공해 주건만, 눈을 떴다고 하는 자들은 안경을 오히려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으니 하느님 앞에 송구스러울 때가 있다.
“유다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다인을 지켜 준다”는 말이 있다. 우리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켜주며,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이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저 어둡고 불안한 그늘 밑에 갇혀 있는 것이 된다.
기도를 자주 외면하고 건수만 있다면 주일을 빼먹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는 신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에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게 다 누구의 탓도 아니요 오로지 본당 신부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에 더 큰 고통슬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지금 플라스틱이냐, 아니면 함석이냐?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조차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오늘 성경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이라는 전례의 시기 안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분이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특별한 시기를 정해 놓고 어떤 의식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과 가슴 안에 그분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최상의 준비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회개입니다. 세상 천지를 다 둘러봐도 주님을 찾아서 만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회개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개선할 때 주님은 비로소 그 인생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이 말씀은 유대백성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며 고생할 때 이제 하느님께서 찾아 주시어 해방의 날을 맞게 되리니 그분이 오실 길을 닦아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쁨과 희망에 찬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길을 닦으라는 말씀은 다시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담겨서 오늘 복음에서도 울리고 있습니다.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술로 인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했습니다. 고해성사도 수없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술로 인해 짓는 죄, 술을 끊지 않고는 다른 죄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술을 끊기까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필요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속이면서 허풍을 떨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자가 그랬습니다. 아주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탄 면접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교무금 책정을 하는데 그 여자가 미리 죽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의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적게 내 보자는 심사였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왜 늘 거짓말 속에서만 살려고 하느냐, 교무금은 다 안 내도 좋으니 수입의 십분의 일이 도대체 얼마인지 정직하게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얼굴이 파래지더니 자기가 고집하던 금액을 열 배로 늘려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필요없는 거짓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에 너무도 인색합니다. 벌벌 떱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십분의 일을 안내면 죽는 줄 아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거꾸로 십분의 일 을 내면 죽는 줄 압니다. 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불평은 도맡아서 하며 그러면서도 점잖게 영성체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성서를 많이 알고 있고 교리에 상식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가 진정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선자요 죄인입니다. 그래서 열심하다는 자들과 성직자 또는 수도자들이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는 것은 똑똑합니다. 그러면서도 듣지를 못하고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인권주일입니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라는 오랜 표어는 진정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람 밑에 사람이 있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밟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떳떳하고 양심 바른 체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없는지 각별히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길을 닦는 최고의 길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새벽 찬송은 분명히 회개한 영혼 안에 메아리칠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탄생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피아골에서 온 편지)
소록도에서 10년 넘게, 최근엔 지리산 피아골 피정의 집에서 사목하셨던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께서 8월 29일자로 은퇴하셨습니다. 평소에 "불청객" 에 대한 강론을 많이 하셨지요.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고별 강론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맛있는 것만을 선호해서 그렇지, 두 끼만 굶어보면 모든 음식이 독특한 맛으로 우리를 매료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해서 그렇지 하느님 때문에 고통을 받아본 이들은 삶의 모든 일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를 매료시킨다는 것을 압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를 알기 전에는 밤에 달이 뜨는지, 아니면 꽃이 언제 피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 나서는 갑순이 때문에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소월의 시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알기 전에는 몰랐는데 알고 나자 세상이 다시 태어납니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말씀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정말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길로 오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길로 오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며 불평을 합니다.
진정한 은혜는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울면서도 기쁘고 고생하면서도 행복합니다. 본회퍼(1906-1945 개신교 목사)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원수다. 떨이로 팔아버린 싸구려 상품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값비싼 은혜를 누려야 한다.” 아멘.
* 저는 2012년 8월 29일 은퇴합니다. 제 집에 아직 전화를 놓지 못했으며 손전화도 없습니다. 저는 은둔자처럼 살고 싶지만 마음이 힘든 분들이 찾아오시면 기꺼이 환영할 것입니다. 주소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남산길 116(구 내서리 659)입니다. 은인들에게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8월 28일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피아골 피정의 집 강길웅 신부 올림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2 】- 강길웅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다가 시간 관계로 중간에서 끝났습니다. 모든 날이 다 중요한 날이지만 오늘이 그냥 중요한 날입니다. 모든 날이 다 중요한 날이지만 언제가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요?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이라는 것을 알면, 다시 말해 눈을 뜨면 오늘이 그날이다라는 걸 알면 오늘이 천당이고 오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면 죄송하지만 오늘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당과 지옥은 장소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지금 여기가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됩니다.
그리고 팃낫한 스님의 정념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념(正念) : 온전히 깨어 있으면서 삶의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살아야 한다. - 팃낫한 스님.
제가 이 방송을 통해서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취임하실 때 그 법어를 말씀드렸는데 오늘도 반복해 보겠습니다. 이건 중요하기 때문에 좀 여러분들이 거듭 들으셔도 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하신 말씀 있죠. 그 법어인데 처음에 이렇게 나갑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 하니 (깨달음을 얻고 보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살고 죽는 게 둘이 아니구나)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보이는 나무나 풀이 다 관세음보살)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물소리, 새소리 등은 천상의 음악이로다)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우주의 모든 것이 진리 그 자체이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여기 모인 청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여기가 극락이니 깨어 있어야 한다)
- 성철 스님 / 종정 취임사 (1981) 中
원각(圓覺)은 원만한 깨달음인데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보조(普照)는 넓게 두루비춘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보니 이 뜻입니다.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적(寂)이나 멸(滅)이나 열반을 말합니다. ‘니르바나’라고 하는데 ‘니르’는 끄다, ‘바나’는 불이예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입적하시면 열반에 드셨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번뇌나 어떤 탐욕의 불이 꺼진 상태예요. 이젠 그런데 살아서도 그 열반을 체함하는, 해탈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다라는 것은 살고 죽는 게 둘이 아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관음은 관세음보살인데 이를테면 보이는 것마다 부처님이고 이 뜻입니다. 또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들리는 모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모든 것들이 천상의 음악이다 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그러니까 우주의 모든 것, 모래나, 흙이나, 바람이나, 하늘이나 풀이나, 나무나 다 진리를 드러낸다. 이것입니다.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여기 모인 청중은 알아듣겠느냐? 이 뜻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여기가 바로 극락이니 깨어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건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김소월 시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것이 설명하기가 참 좋아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늘 달이 뜨는데 왜 몰랐나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 왜 그리울 줄을 몰랐죠? 에이구, 어떻게 결혼했나 모르겠네 ^^*~~~
김소월이가 갑돌이라면 갑순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달이 떠도 뜬 것이 아니예요. 관심도 없고. 갑순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리움도 없었어요. 갑순이가 나타나니까 달이 보이잖아요. 달 속에 갑순이가 또 있네요. 또 이 그리움에 사무치게 돼요. 다가갈 수도 없고.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사랑하는 님이 없으니까 달이 밝아도 밝은 줄을 모르고 쳐다볼 줄을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갑순이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가갈 수가 없으니까 설음도 돼, 이것이. 나는 뭐 잘생긴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돈도 없는데 이제 이게 설움이 생기는 거예요. 조금 알아들으시겠나? ^^*~ 그럼 이제 이것을 우리 식으로 해 보면은, 이 모든 말씀은 서로 통하는 거예요.
(원각이 보조하니) 이것은 (하느님 사랑에 눈을 뜨고 보니까) 이것입니다.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이것은 (천당과 지옥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이것은 (보이는 것은 다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이것은 (들리는 것도 다 하느님의 목소리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것이 하느님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이밖의 진리가 따로 없으니) 이것은 (보고 듣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느냐?) 이것은 (여러분은 이제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것은 (오늘이 바로 천국이다)
갑돌이에게 봐요. 천당인지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갑순이가 딱 나타나자 그 순간부터 세상이 천당이 되는 거예요. 알아들으시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돌이와 결혼했나 모르겠네. 여러분들은^^*~ 그 두근거리는 어떤 기쁨, 감동 이런 게 있잖아요. 저 사람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저 사람 때문에. 이 여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세상이 천당인 줄을 몰랐는데 이 여자가 나타나니까 다 산도 산이 돼요. 비로소. 놀라가고 싶어요. 산만 보면 또 갑순이가 생각나고. 모든 것이 다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 눈을 뜨면 오늘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이고 여기가 천당입니다.
모든 영성가들이 말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이외의 시간과 공간은 필요 없습니다.”
내일도 필요 없어요. 내일 물론 성지순례 가서 뭐 교황님을 만난다 해도 아니예요. 과거는, 어제는 지나갔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여기고, 최고의 시간은 지금이다라는 것입니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천 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만세를 뻗쳐도 언제나 지금이네
제가 사는 피아골에 연곡사라는 절이 있는데 일주문에 주련이 있어요. 한문 글자로 기둥이나 벽에 붙여지거나 걸려진 글귀가 있죠. 이걸 주련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것이 내장사에도 있고 여러 절에 있는데, 한쪽에 보면 역천겁이불고, 지나가다는 역자, 한 겁은 굉장히 몇억 년 돼요.
아주 긴 세월입니다. 그런데 한 겁도 아니고 천 겁이에요. 수십 억 년을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도. 불고, 옛날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만세를 뻗쳐도 언제나 지금이네. 만세를 앞으로 길게 뻗어나가도 미래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장금은 늘 지금이다라는 것입니다. 백년 전만 해도 옛날이죠. 백년 후는 까마득한 미래예요.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지금 과학의 발전을 보면은.
그런데 나만 가면 지금입니다. 백년 전에 가거나 백년 후에 가거나 나만 가면 지금이예요. 지금은 뭡니까? 내가 살고 잇는 시간이 지금입니다. 우리는 어제 사는 게 아니예요. 내일 사는 게 아니고. 언제 살아요? 지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면 벌써 지금은 지나갔잖아요. 일억분의 1초 분의 1보다 더 짧은 순간입니다. 요것은. 그럼 영원은 뭡니까?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 뭐예요? 이건 우리 신앙인의 말로 만들자면,
* 지금 이 순간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 영원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 안에 하느님만 계신 게 아니라 누가 또 있어요?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러니까 이 하느님을 통해서 보세요. 지금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이 영원인데 지금 잘 살면 어떻게 잘 사는 거예요? 영원히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과거에는 내가 이제 이를테면 아주 질이 나쁜 불량배였어요. 그러나 내가 지금 잘 살면 그것도 빛을 얻게되는 거예요. 그것마저도.
그리고 오늘 내가 잘 삶으로 인해서 미래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잘 사는 것이예요. 어제 못 산 것은 괜찮아요. 언제 잘 살면 돼? 지금 잘 살어야 돼. 나중에 잘 살겠다라는 것은 필요 없어요. 지금 잘 살아야 됩니다. 세상에는 금이 세 가지 있습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이 있고, 음식의 간을 맞추는 소금이 있고, 그리고 지금이 있는데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황금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 구엔 반 투안 추기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928-2002년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된 후 공산 정부의 회유를 거부하다 13년간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석방 후 추방되었다.
베트남에 구엔 반 투안이라는 후엔이라고도 합니다. 대주교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공산 정부에 체포되어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는데 그 감옥 바닥에서 손바닥에다 포도주 3방울, 물 1방울을 놓고 날마나 미사를 하셨던 분입니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분이 감옥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면서 깨달은 것은,
* “성덕에 이르는, 완덕에 이르는 가장 완전하고 단순한 길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안하지마는 지금 이 순간을 못 살고 있어요. 맨날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기도 시간에도,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데 하느님께 완전하게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갈 수 있는 최고의 길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나중에 책이 모아져서 ‘희망의 길’이라고 나오는데, 이분이 이제 나중에 형기를 마친 다음에 정부에서 추방되어 교황청에 가서 일하십니다.
2101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셨고, 2002년에 선종하셨는데 언제고 시성되십니다. 성인품에 오르셔요. 이분이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황청 성직자들에게, 이제 교황님도 마찬가지죠. 피정지도를 하셨는데 책 제목이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입니다. 22개의 강론이 나오는데 하나하나가 참 주옥 같은 아주 좋은 강론입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위대한 분들은 삶의 순간 순간을 깊이 있게 사셨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어요? 지금 여기에 있는것입니다. 눈만 뜨면 축복 아닌 것이 없고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법정 스님의 제자들이 법정이 하셨던 43개의 법문을 모아서 책을 냈는데 책 제목이 ‘일기일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의 단 한 번 뿐이다. 이건예요. 지금 이 순간은 안 돌아오죠. 그래서 책이 두꺼운데 이걸 짜고 짜서 엑기스로 요렇게 한 줄로 만들면,
* 일기일회(一期一會) :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 법정 스님
그 법정이 평생 강조했던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법정은 말하기를 “기적은 다른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자체가 기적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돼. 다른 사람은 못해도 괜찮아요. 죄송하지만 누구만 잘 하면 돼? 나만 잘하면 돼. 절대로 억울하지 않아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저 친구가 잘해야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니고 상대방은 좀 못한다 해도 나는 잘 해야 돼. 저 사람은 못한다 하면, 그사람은 지금 지옥을 살고 있고, 나만 잘 하면은 나는 천당에 있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야 돼. 언제 살아도. 초대 교회에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장소에서 성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 오리게네스 / 성서학자
참된 성지는 이스라엘이나 로마에 있지 않다. 이거예요. 어디에 있어? 지금 내 앞에 있다 이거예요. 지금 내 삶 속에 있어. 이것을 눈 떠서 발견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여기가 천국이고 여기가 낙원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를 30여 명과 함께 갔는데 시간만 있으면 그 순례자들과 생활 나누기를 했어요. 오늘 보고 느낀 거 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시간이 많으니까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저 개인적으로는 성지에서 보고 느낀 것보다도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감동이 훨씬 컷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온 발자취가 바로 성지였고, 살아온 시간이 성시간이었습니다. 그 영감님들 그 술 때문에 고생한 자매들이 몇 분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은 참 부인을 못 살게 했어요. 나중에는 또 치매까지 걸려 가지고 끝까지 괴롭힙니다. 이 부인을. 그래도 그 자매는 너무 기쁘게 영감을 예수님처럼 섬기고 모셨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미웠었답니다. 얼른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불쌍한 생각이 들더래요. 내가 영감한테 하는 것을 다 자녀들이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 자식들 보기도 창피하고, 내가 좀 억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성당에 나가는 사람인데 외인들 보기에도 아주 부끄러웠대요.
그래서 억지라도 이제 잘해드려야겠다. 자식을 위해서도, 우리 주님을 위해서도 보여드려야 되니까 잘해야 되겠다 하니까 정말 정이 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기뻤다는 거예요. 그래서 10년이나 20년을 더 살았어도 자기가 극진히 모셨을 것이라고 했을 때 저희들이 정말 다 감동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데 계신 게 아니라 자매님 안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들을 보면은 세상의 어디에 던져놔도, 후미진 곳, 진흙탕에 던져놔도 거기가 어딘줄 알고 살겠어요? 천당인 줄 알고 사시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조건도 좋고, 참 분위도 좋은데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내고 그래요. 그런 그분은 그 자리가 뭐가 되는거죠? 지옥이 되는 거예요. 똑같은 자리인데.
그러니까 말을 만들면, 누구는 지옥에 던져 놔도 천당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기쁘게 살아요. 그런데 벌받은 놈은 천당에 데려다 놔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화를 내며 지옥인 줄 알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못된 말로 남에게 이렇게 해도 천당에 있는 분들은 그게 또 귀엽다고 그래요. 천당이니까. 여러분은 어디서 살아야 되죠? 천당. 그런데 그 천당이 어디라고요? 지금 여기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극이 없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누가 찔러야 돼요. 그건 이따 좀 뒤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고. 참을 수 없어요. 그런데 지금 참고 있다면 그 자리가 성지예요. 알아들으시겠죠? 참을 수 없는데 지금 참고 있다면 그 시간이 성시간이 되는 거예요. 아니 성체조배 몇 시간 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보면은. 그걸 몇 분이라도 참으면서, 참을 수 없는데 지비의 희년이니까 냉담자 회개를 위해서 제가 참겠습니다 하면은 너무도 아름다운 성시간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성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던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보세요. 아주 작은 일에서 큰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큰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본인도 이제 작은 꽃이라고 했지만 아주 작은 거, 이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니까 소화 데레사가 지나간 길을 보면 꽃길입니다. 꽃으로 장식된 성지가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인데, 빨래하는 시간, 불 때는 시간, 이런 모든 것도 보면은 사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시간이 되는 거예요. 성시간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놀라운 기적이나 놀라운 언변으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우리도 거룩하게 될 수 있고 우리도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신 아주 놀라운 분입니다
소크라테스 부인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죠. 무식한 데다 천박했으며 당대의 최고 스승이었던 남편을 사정없이 무시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박해해도 소크라테스는 항상 태연했습니다. 보다 못해 민망한 제자들이 부인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해드리자 소크라테스가 그럽니다. “자네들 보기에는 아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보일테지만 실제로는 아내가 내 수행을 돕고 있는 거라네.”^^*~
뭘 돕고 있다고요? 수행.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아까도 그랬지마는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기도 가지고는 턱도 없어요. 봉사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놈이 찔러야 돼. 어떤 놈이 욕도 하고, 상처도 내고, 다리도 걸고, 뒤에서 밀기도 해댜 돼. 넘어지라고 미는 거예요. 잘 가라고 미는 게 아니라. 그럴 때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그 부인도 보세요. 지금 소크라테스는 그 자리가 천당이예요. 부인은 지옥이잖아요.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하나인데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불화가 있을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곤란이 있을 수 있고, 또 참을 수 없는 아픔이나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잘 받아들이게 돼요.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분들이 말하기를,
* “수행의 제일 좋은 스승은 불청객 십자가입니다.”
이놈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도 닦아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뭐고 이런 것이 아니라 저놈이 찔러야 내 마음이 이렇게 정화가 되는 거예요.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고.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하원 의장이었죠. 민주당 지금 원내 대표인 낸시 펠로시 여사는 자녀를 다섯이나 둔 전업 주부로서 47세에 국회의원이 되고, 하원의원이 되고 65세에 하원 의장이 됩니다. 그녀의 자서전에 보면 아이들 다섯 명을 키워야 되잖아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한 유일한 시간은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였다.” - 낸시 펠로시 / 미국 정치인. 이해하시죠? 너무 바빠요. 세수할 시간도 없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는 그때 이제 짬이 나는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읽으면서 제가 동생을 볼 때 생각이 났습니다. 애기 많이 봤네요. 제가. 특히 그 병든 여동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굉장히 참 뭐라고 할까? 가만히 있는 동생이 아니었어요. 이제 어머니 지론은 애기 보면서 다른 일하면 안 돼요. 애기만 봐야 돼. 그건 옳으신 말씀이죠. 무슨 일이 날지 몰라요. 얘기를 업고 있어도 업는 데만 치중해야 돼. 숙제 하면 안 돼요.
그럼 내가 숙제 할려면 어떻하면 돼요? 애기를 재워야죠. 그럼 어떻게 재웁니까? 애기를 업고 거울 앞으로 갑니다. 그리고 내가 자는 것을 보여줘요.^^*~ 그럼 동생이 뭐 깍꿍하자는 줄 알고 등 뒤에서 요쪽으로 내다 보고, 저쪽으로 내다 보고 그래요. 절대로 안 움직이고 잠자는 것만 보여 줘요.^^*~ 그럼 나중에 투정을 합니다. 재미가 없으니까. 그래도 잠자는 것만 보여줍니다. 이때 실눈이라도 뜨면은 안 돼.^^*~ 눈 감고 계속 자야 돼. 내가 그러면은 이제 애가 지쳐서 잠자게 돼요. 그러면 이제 애기를 요 위에다 뉘어서 재워놓고 숙제를 하는데 이렇게 몇 번 하니까 업자고 하면 도망갑니다.^^*~
펠로시 여사는 굉장히 바쁜 분이었는데 애기들 키우고, 공부하고, 남편 섬기고. 그래도 이렇게 하원 의장까지 되고, 전에도 영국의 대처 총리도 그랬고, 지금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일한다고 가정일 등한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다, 바쁘다 할 것 없어요. 우리. 핑계가 바쁘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길은 우리로서는 어디로 통해요? 하느님의 나라로 통합니다.
모든 길은 웃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다 통해요. 친하게 지금 있거나 싸우고 있거나 다 통합니다. 또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모든 길에는 웅덩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로 가는 모든 길에는 웅덩이 같은 난관이 있습니다. 함정도 잇고,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걸 알면은 이거는 하느님 나라도 통하기 때문에 울어도 크게 슬프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난관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얼마나 많이 봉사하느냐? 이거보다는 난관, 우리에게 부딪치는 어려움, 불청객 십자가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불청객을 맞이하는 태도와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모든 인격과 신앙이 드러납니다. 이건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기 어려워도 참는 연습을 해야 돼. 언제? 지금 해야 됩니다. 수행이 안 되면 다 헛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내 자식 예쁘다고 편하게 쉽게 키우면 안 됩니다. 참는 법을 가르쳐줘야 돼. 그리고 옆의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가르쳐 줘야 됩니다. 이거를 안 가르쳐 주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갖는 것도 좋은데 세상을 사는 지혜를 모르면 행복할 수 없어요. 요즘 자주 나오는데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주행할 때 왜 그 양보 운전이 안 되는가? 왜 굳이 보복 운전을 하는가? 이게 가정에서부터 익힌 것입니다.
부모님이 좀 억울해도 참는 것을 가르쳐 줘야 돼. 살다보면 손해날 때도 있다라는 것을 가르쳐 줘야 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좀 참아야 된다, 희생해야 된다. 그래야 행복하죠. 그러면 고속도로에서 누가 끼어들고 어쩌고 해도, 순간 당황하고 기분은 안 좋지만 우리는 화살기도 있잖아요. “하느님, 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면은 어떻게 돼? 지금 거기가 천당이 되지요. 아주 큰 공로를 쌓는 것입니다. 좀 기분 나쁘다 하더라도 “하느님, 미운 생각 가졌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면은 얼마나 예쁜 시간입니까? 굳이 그런 사람들하고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랜 기도와 극기를 행하는 것보다 한번의 순명이 나에게 큰 영광을 준다.” - 성녀 파우스티나 일기 (896) 주님을 위해서 한 번 참는 것. 이게 굉장히 큰 영광을 드린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비의 희년이니까 특히 냉담자들을 위해서 아니면 연옥 영혼을 위해서 참겠습니다. 하면은 하나의 영혼을 그 순간에 구할 수가 있는거예요. 굉장히 큰 것입니다. 여러분들. 뭐 기도 많이 한다고 이거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도 중요하지마는 한 번 순간의 그 희생, 이런 인내 이런 것은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
장자에 무용지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지마는 어느 때는 쓸모가 있다. - 장자 무용은 쓸모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용用, 쓸모없는 것이지마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쓸모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 시편 118편에 보면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 모통이 돌은 이런 거 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받침돌인 것이지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렸다면은 쓸모 없는 돌인데 그 쓸모없는 돌이 나라는 인생을 떠받쳐주는 받침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불청객 십자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아주 소중한 것이 되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그 오리게네스라는 초대 교회의 가장 뛰어난 천재 학자입니다. 이분은 아주 거룩하게 사셨고, 성인이 되셔도 열 번도 더 되셨을텐데, 가톨릭에서는 성인 칭호를 주시 않았습니다. 시성되지 않았어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독신자들은 이성에 대한 갈등이 있어요. 기도할 때도. 저도 젊었을 때 누가 오라고도 안 했는데 여자가 머리 속에 와 있어요.^^*~ 꼭 누구 그리움을 가질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와 있어요.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갑니다.^^*~ 머리를 쳐도 안 나가고, 가슴을 쳐도 안 나가요. 그래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이런 분심, 잡념 없이 기도를 좀 해봤으면, 그래서 항상 우리가 깨어 있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저도 어떤 때는 성무일도를 두 번씩 다시 바쳐요. 하다 보면은 분심에 빠져 가지고 너무 송구스러워서 다시 바칩니다. 그래도 또 빠져요. 그래서 이런 거 없이, 좀 분심 없이 바쳐봤으면 하는데 마태오복음에 보면은 이 말씀이 나와요. 19장 12절인데.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느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이거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해서 스스로 거세를 합니다. 거세를 하니까 그런 성욕이 괴롭히지 않죠. 이를테면 독신자들인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는 성욕이 필요없는 거잖아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거세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성인이 안 돼. 그것은 육상 선수가 마약을 복용한 것보다 더 나쁜 거예요. 우리가 어떤 성적인 욕구 때문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 분심에 빠질 수도 있고, 잘못에 떨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투쟁을 하면서 공로를 쌓는 것이지 그냥 이렇게 거세를 해서 기계적으로 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성인이 못 되는 거예요. 그래서 쓸모 없는 것이 필요한 것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사순시기도 겪고 그랬잖아요. 그거 필요 없는 불청객 십자가를 왜 짊어져야 되느냐?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거예요.
나를 기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성가시고 귀찮은 일, 불청객 이것이 나를 하느님 앞에서 보물처럼, 꽃처럼 아름다운 소중한 인생으로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지금 이 날이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는데 어느날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마르 12,28-30) 그럼 어떻게 우리가 첫째 가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있다면, 지금 마음과 정신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기 싫어, 그런데 해야 돼. 내가 하느님 때문에 그 일을 행하고, 하느님 때문에 참고 있다면, 마음과 정신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데 그래도 이걸 아셔야 돼. 하느님은 여러분을 믿으신다는 것, 신뢰하십니다. 또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무슨 날이라고 그랬어요?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1928년 베트남 푸칸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열세 살 되던 해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53년 사제품을 받았고, 우르바노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은뒤 1959년 조국으로 돌아와 나트랑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1967년 나트랑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베트남 주교외의 커뮤니케이션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75년 사이공의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공산주의 정부에 체포되어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지은 책으로는 「희망의 길」「희망의 기도」「지금 이 순간을 살며」가 있다. 1988년 석방되었으나 추방당하여 조국을 떠나 로마로 갔다. 요한 바오르 2세는 1994년 그를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부의장으로, 1998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2001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02년 9월 16일 향년 74세로 로마에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