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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 남성 | 여성 | |
지배층 | 양반(여성 제외) | 한문 사용, 특별한 경우 이두 사용 | 문자 모름, 문자생활 안 됨 *배울 수도 없고 실제 사용도 안 됨 |
중인(여성 제외) | 이두 사용, 특별한 경우 한문 사용 가능 | ||
피지배층 | 평민 | 문자 모름, 문자생활 안 됨 * 배울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 | |
천민 | 문자 모름, 문자생활 안 됨 * 배울 수도 없고 실제 사용도 안 됨 |
그렇다면 하층민의 문맹 문제가 핵심 창제 동기라면 왜 훈민정음 반포 후에 이들을 위한 책을 안 펴냈느냐는 반론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반포 전후의 사건의 흐름을 보면 그 진실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1443)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최만리 등 7인의 갑자상소에 나온다.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_최만리 등 7인 갑자상소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들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10여 명의 서리들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옛날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한자 발음 사전)를 경솔하게 고치고, 언문을 억지로 갖다 붙이고 기능공 수십 명을 모다 판각을 새겨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이 세상 후대 사람들의 공정한 의논으로 보아 어떻겠습니까?]
바로 하급 관리 교육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것 자체가 이미 일반백성들을 위한 언문(후에 ‘훈민정음’) 교육의 일환이다. 대민 업무를 맡고 있는 서리들을 가르쳐 훈민정음을 실용화시키고 하층민들에게 보급하려는 정책이었다. 반포 후에 하급 관리 과거 시험에 도입하는 맥락과 같다.
3.2. 한자음 발음기호설의 문제점
훈민정음 창제 핵심 동기가 한자음 발음 적기라는 이른바 ‘한자음 발음기호설’은 관련 핵심 문헌(훈민정음 해례본, 실록)과 창제 전후 맥락으로 보아 성립할 수 없는 견해다.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짚어보자.
첫째, 한자음 발음 기호설은 말과 글의 불일치 또는 한자 빌려쓰기 언어 모순에 대한 오랜 역사와 인식을 무시하고 있다. 해례본의 정인지서는 한자를 변용해서 말과 글의 불일치를 줄이고자 했던 노력조차 얼마나 심각한 모순인지를 “이두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속되고 근거가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 언어사용에서는 그 만분의 일도 소통하지 못한다.(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정음해례27ㄴ:2-4_정인지서]])”라고 극명하게 그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세종이 어느 날 느닷없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니라 이런 오랜 세월 동안의 말과 글의 불일치에 대한 오랜 인식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 서문에서 우리말과 중국말이 다르다는 것도 바로 이런 언어모순을 전제로 하거나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자음을 적기 위해 만들었다는 얘기는 아예 없다. 물론 『동국정운』 등 다른 문헌을 통해서 한자음 적기도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종 서문이 그런 문헌 증거보다 더 강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글을 창제한 사람이 창제 동기와 목표, 목적을 이렇게 명백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다른 부차적인 자료 등을 근거로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을 바꿔 놓은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 서문 내용을 분석적으로 정리한 [표 2]를 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갈래 | 동기 | 목표 | 목적 |
언어문화 | 입말과 글말이 다름, 조선말에 맞는 글자가 필요하다. | 28자 창제 | 누구나 쉽게 배워 편하게 쓰게 하기 위해서다. |
한자는 하층민의 의사소통 도구 구실 못하고 있다. | |||
정치사회 | 문자마저 대국을 그대로 좇을 필요는 없다. |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치고(교화) 그들의 사회적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서다. | |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불편함과 억울함이 매우 크다. |
핵심 창제 동기는 입말(한국어)과 글말(한문, 한자)의 다름에서 오는 모순이었으며, 그 모순의 정점에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있었다.
둘째는 세종 서문에 나오는 핵심 동기와 목표에 대한 역사적 진정성이 창제 17년 전인 1426년 기록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세종은 무려 17년 전부터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세종실록에 실려 있으므로 세종서문의 진정성은 그런 기록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그 기록을 보기 좋게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표 5] 훈민정음 창제하기까지의 문자에 대한 세종의 생각 모음
때 | 기록 |
1426년 (세종 8) |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법은 함께 써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가까운 법률문을 준용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문이란 것이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 있어서 비록 문신이라 하더라도 모두 알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법률을 배우는 생도이겠는가. 이제부터는 문신 중에 정통한 자를 가려서 따로 훈도관을 두어 당률소의(唐律疏義)․지정조격(至正條格)․대명률(大明律) 등의 글을 강습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니, 이조로 하여금 정부에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上曰: “人法竝用, 今不如古, 故不得已以律文比附施行, 而律文雜以漢吏之文, 雖文臣, 難以悉知, 況律學生徒乎? 自今擇文臣之精通者, 別置訓導官, 如唐律疏義, 至正條格, 大明律等書, 講習可也. 其令吏曹議諸政府.”_≪세종실록≫ 1426.10.27 |
1428년 (세종 10) | 임금이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몹시 나빠져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지만,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고려 시대 및 삼국 시대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한 자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에서 이를 주관하라.” (至是,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宜因舊撰二十四孝, 又增二十餘孝. 前朝及三國時 孝行特異者, 亦皆(褏)〔裒〕集, 撰成一書, 集賢殿其主之._≪세종실록≫ 1428.10.3) |
1432년 (세종 14) | 비록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저지른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법률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上謂左右曰: “雖識理之人, 必待按律, 然後知罪之輕重, 況愚民何知所犯之大小, 而自改乎? 雖不能使民盡知律文, 別抄大罪條科, 譯以吏文, 頒示民間, 使愚夫愚婦知避何如?”_≪세종실록≫ 1432.11.7 |
1434년 (세종 16) | 오히려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이름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하고, 인쇄하여 널리 펴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골목 안 여염집 부녀들까지도 모두 쉽게 알기를 바라노니, 펴 보고 읽는 가운데에 느껴 깨달음이 있게 되면, 인도하여 도와주고 열어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도움됨이 조금이나마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내가 주례(周禮)를 보니, ‘외사(外史, 벼슬이름) 는 책 이름을 사방에 펴 알리는 일을 주관하여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글자를 알게 하고 책을 능히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 이것을 만들어 서울과 외방에 힘써 회유(誨諭)의 방술[術]을 다하노라 (尙慮愚夫愚婦未易通曉, 付以圖形, 名曰三綱行實, 鋟榟廣布. 庶幾街童巷婦, 皆得易知, 披閱諷誦之間, 有所感發, 則其於誘掖開導之方, 不無小補. 第以民庶不識文字, 書雖頒降, 人不訓示, 則又安能知其義而興起乎? 予觀周禮, 外史掌達書名于四方, 使四方知書之文字, 得能讀之. 今可(做)〔倣〕此, 令中外務盡誨諭之術.,_≪세종실록≫ 1434.4.27 |
1442년 (세종 24) |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홍무(洪武) 13년 9월에 왜구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였을 때에, 우리 태조께서 군대를 정비하여 이끌고서 바로 운봉(雲峯)에 이르러 한 번에 소탕하였으니, 그 훌륭한 공과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까지 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군마의 수효와 적을 제어한 방책과 접전한 수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니, 경은 도내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늙은이들에게 널리 다니며 방문)하여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자 하여 이러한 전지를 내린 것이었다. (傳旨慶尙、全羅道觀察使: 洪武十三年庚申九月, 倭寇成群下陸, 侵掠其界. 我太祖整率部伍, 直到雲峯, 一擧掃除, 神功偉烈, 不可不傳於後世也. 其軍馬之數、制敵之策、接戰次數、陷敵施爲, 必有及見之人, 卿於道內諸郡散居故老之人, 廣行訪問, 詳書以啓.時上方欲撰龍飛御天歌, 故乃下此傳旨._≪세종실록≫ 1442.3.1 |
1443년 (세종 25) |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로되, 초성자․중성자․종성자로 나누어지며,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말이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점을 잘 드러내고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으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컬었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_세종실록 1443.12.30 |
1444년 (세종 26) | 내(세종)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_세종실록 1444.2.20 |
첫 번째 1426년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의 기록이고 두 번째 1432년 기록은 창제 11년 전 기록이다. 이미 17년 전부터 세종은 하층민과의 소통 문제에서 한문과 한자를 변형한 이두문의 효율성 문제를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종이 처음에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보다 한자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한 이두를 통해 백성 교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두 또한 한자라는 문자 자체의 한계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므로 쉽게 포기하고 아예 새로운 문자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종은 한자가 서당에 갈 수조차 없는 많은 하층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글 창제 대략 두 달 쯤 뒤에 최만리 등 7인이 올린 갑자상소문을 보면 창제 핵심 동기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최만리와의 논쟁과정에서 세종이 정창손에게 한 말인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도 세종의 하층민과의 소통, 교화 문제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죄인을 심문하거나 심의를 해주는 사이에 억울하게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아는 자가 직접 공술문을 읽고서 그것이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말로 자복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경우는 공술문의 뜻을 알지 못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범죄사건을 공평히 처결하고 못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리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며 말과 글이 같고 같지 않은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언문을 사용해야 처결 문건을 공평하게 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신 등은 그것이 옳다고 보지 않사옵니다.(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_세종 26년(1444) 2월 20일자
갑자상소의 이 기록은 ≪세종실록≫ 다른 기록에는 없는 기록이라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바로 세종은 문자생활의 극명한 모순인 한자 문제를 재판 문제로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만리 등은 중국의 말과 글의 일치를 근거로 문자의 문제가 아닌 관리의 문제로 반박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한자가 모국어이지만 한자가 어려워 문맹이 많다는 측면에서는 우리나라와 차이가 없는데도 이를 반박 근거로 삼고 있다. 결국 세종은 하층민과의 소통 문제가 매우 중요한 창제 동기임을 밝히고 이 내용은 세종 서문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 언어생활에서 한자와 한문을 모름으로써 생기는 인권 문제가 새 문자 창제의 핵심 동기가 되는 맥락은 필자가 김슬옹(2017: 66-75)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음으로 표 인용으로 대신한다.
[표 6] 하층민의 문자 소통 문제에 대한 기록 모음(김슬옹, 2017: 67)
기록 | 출처 |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 최만리 외 6인 갑자 상소(1444)에서 인용한 세종 말 |
한문을 배우는 이는 그 뜻을 깨닫기가 어려움을 걱정하고, 범죄 사건을 다루는 관리는 자세한 사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했다 | 훈민정음(1446) 해례본 정인지서 |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 훈민정음(1446) 세종 서문 |
세종이 한자음 표기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것이 주된 목표라서가 아니었다. 당대의 모든 말소리를 정확히 적고 한자음을 아예 비슷하게라도 적을 수 없는 중화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식 표준음을 적기 위한 전략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한자음을 적기 위한 목적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소리를 적기 위한 다양한 목적 중의 하나였고 부차적인 것이었으니, 그것을 마치 주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자음 발음기호설의 핵심 근거 문헌인 ≪동국정운≫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구나 글자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때는 성인의 도가 천지에 의탁했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에는 성인의 도가 서책에 실리었으니, 성인의 도를 연구하려면 마땅히 글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고, 글의 뜻을 알기 위한 요령은 마땅히 성운(聲韻)부터 알아야 하니, 성운은 곧 도를 배우는 시작인지라, 또한 어찌 쉽게 능통할 수 있으랴. 이것이 우리 성상께서 성운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을 참작하시어 지침을 만드셔서 억만대의 모든 후생들을 길 열어 주신 까닭이다.성운은 곧 도를 배우는 시작인지라, 또한 어찌 쉽게 능통할 수 있으랴. 이것이 우리 성상께서 성운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을 참작하시어 지침을 만드셔서 억만대의 모든 후생들을 길 열어 주신 까닭이다. (況乎書契未作, 聖人之道, 寓於天地; 書契旣作, 聖人之道, 載諸方策! 欲究聖人之道, 當先文義; 欲知文義之要, 當自聲韻. 聲韻, 乃學道之權輿也, 而亦豈易能哉! 我聖上所以留心聲韻, 斟酌古今, 作爲指南, 以開億載之群蒙者也.)
여기서 책을 통한 교화가 먼저이고 그 책의 뜻을 알기 위해 발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이영훈(2018)이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정광(2015) 주장의 문제다. 정광(2015: 17)은 “개정된 한자음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한자음, 즉 훈민정음이었으며 이것의 발음기호로 한글을 제정한 것으로 본다.”라고 보았다. 이는 해례본 세종 서문의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를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_정광(2015: 16)”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서문을 자기의 주장을 위해 왜곡시킨 대표적 사례이다.
어제서문 첫 문장은 정인지 서문과 최만리 외 갑자상소에도 나오지만 중국말과 우리말이 다른데, 중국말 적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다 보니 제대로 적을 수 없고, 거기다가 아예 한자 모르는 백성들은 기본 소통조자 되지 않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 문장으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 훈민정음은 한자음보다 토박이말 발음을 적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용자례에서 예로 든 낱말 123개(조사 포함 125개)는 모두 토박이말이다.
[표 2] 해례본의 분야별 낱말 수
갈래 | 낱말 | 토박이말 | 조사 | ||
종성해 | 5 | (배꽃), (여우), (가죽), (옷), (실) * | 1 |
| |
합자해 | 24 | (땅), (외짝), (틈), (입속의 혀), (당김), (내가 남을 사랑한다), (남에게서 내가 사랑받는다), (무엇을 뒤집어 쏟아), (무엇을 쏘다), (거문고 줄을 받치는 기둥), (횃불), (흙), (낚시), (닭때, 유시), (사람), (활), (돌), (칼), (기둥), (옆구리), (곡식), (비단), (못), (입) | 1 |
| |
용자례 | 초성자 | 34 | (감), (갈대), (찧지 않은 벼), (콩), (너구리), (성에), (띠), (담), (고치), (두꺼비), (노루), (원숭이), (팔), (벌), (파), (파리), (산), (마), (새우), (뒤웅박), (자), (종이), (체), (채찍), (손), (섬), (부엉이), (힘줄), (병아리), (뱀), (우박), (얼음), (아우), (너새) | 94 | |
중성자 | 44 | (턱), (팥), (다리), (가래), (물), (발꿈치, 발의 뒤축), (기러기), (두레박), (둥지), (밀랍), (피), (키), (논), (톱), (호미), (벼루), (밥), (낫), (잉아), (사슴), (숯), (울타리), (누에), (구리), (부엌), (널판), (서리), (버들), (종, 노비), (고욤), (소), (삽주), (남생이), (거북의 일종), (손대야), (메밀껍질), (율무), (밥주걱), (우산), (수건), (엿), (절), (벼), (제비) | |||
종성자 | 16 | (닥나무), (독), (굼벵이), (올챙이), (갓), (신나무), (신), (반디), (섶나무), (발굽), (범), (샘), (잣), (못), (달), (별) | |||
합계 | 123(조사 제외) * 조사 포함: 125 * 123: 용자례: 94, 종성해 5, 합자해 24 | 2 |
정광 교수도 ‘한글의 발명(김영사)’을 펴내기 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해례본에서 고유어 사용의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訓民正音이 한자 학습이나 중국어 교육만을 위한 發音記號로 제정된 것은 아니다. 解例本 훈민정음의 用字例에서는 모든 신문자의 使用例를 고유어에서 가져왔다. 따라서 原本으로 알려진 해례본 훈민정음에서는 적어도 신문자가 고유어, 東國正韻의 한자음, 중국어음을 모두 표시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임을 말해준다.
_정광(2005), 「成三問의 학문과 조선전기의 譯學」, 논문집 5호,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주석 11번.
여기서 정광(2005)은 아예 훈민정음 발음 기호설을 부정하고 해례본 고유어 중심 설명방식과 동국정운을 통해 고유어든 한자음이든 모두 표기할 수 있는 훈민정음 제정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소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뀐 것이다. 공식 출판물로는 “정광(2006). 훈민정음의 사람들, (주)제이엔씨.”에서부터 발음기호설을 적극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곧 정광(2006: 34)에서 “세종은 중국과 우리의 한자음이 다른 것에 착안하여 중국어의 표준발음에 의거하여 우리 한자음의 規範音을 정하기 위하여 發音記號로서 훈민정음을 考案하였다.”라고 했고 정광(2012: 215)에서 이 점을 거듭 강조했다. 정광(2006)은 개정판인 정광(2019: 52)에서 같은 주장을 거듭 반복 강조하고 있다.
세종은 한자음이나 토박이말이나 다 천지자연의 소리이므로 차별할 필요가 없고, 한자음이든 토박이말이든 정확히 적기 위해 정음 문자를 만든 것이다. 이점은 다음과 같이 해례본 설명에서도 구체적인 예와 함께 여러 번 나온다.
(1) 且半舌之 , 當用於諺, 而不可用於文. [정음해례19ㄱ:1-2_종성해] 또 반혓소리인 은 마땅히 토박이말에나 쓸 것이며 한자말에는 쓸 수 없다.
(2) 六聲通乎文與諺 戌閭用於諺衣絲 [정음해례20ㄱ:2-3_종성해_결시] 여섯 소리( )는 한자말과 토박이말에 함께 쓰이되 와 는 토박이말의 ‘ ’과 ‘ ’ 종성으로만 쓰이네.
(3) 라. 閭宜於諺不宜文 斗輕爲閭是俗習 [정음해례20ㄱ:8-20ㄴ:1_종성해_결시] 는 토박이말 종성 표기에는 마땅하나 한자말 표기에는 마땅치 않으니 소리가 가벼워져서 소리가 된 것은 곧 일반 관습이네.
(4) 語入無定亦加點 文之入則似去聲 [정음해례24ㄱ:3-4_합자해_결시] 토박이말 입성은 정함이 없으나 평·상·거성처럼 점찍고 한자음의 입성은 거성과 비슷하네.
그리고 당대 지식인들은 한자음을 몰라도 한자 필담으로 중국 지식인들과 맘껏 소통했다. 한자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교 문서나 독해에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復’를 ‘복’으로 읽으면 ‘되돌린다’는 뜻이고 ‘부’로 읽으면 ‘다시’라는 뜻이다. 그리고 발음은 몰라도 문맥을 통해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한글이 없었던 삼국, 고려 시대에도 늘 그렇게 한문을 소통해왔다.
또한 한자와 토박이말, 또는 우리말과 한자음을 직접 결부시켜 그 관계를 밝힌 결정적인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 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歧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만약 언문을 시행한다면 관리될 자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배우고 학문하는 한자를 살피지 않아 하급관리는 둘로 나누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된 자가 언문을 배워 출세한다면, 후진들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출세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성리학을 파고들겠느냐고 하겠사옵니까. 이렇게 되면 수십 년 후에는 한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사무를 본다 할지라도 성현의 글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 무식쟁이 되어 세상 이치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_갑자상소
(2) 大低 本國之音 輕而淺 中國之音 重而深 今訓民正音 出於本國之音 若用於漢音 則必變而通之_ 신숙주 외, ≪사성통고≫ 범례(최세진(1517)의 “사성통해” 하권 수록본
무릇 우리말 소리는 가볍고 얕으며, 중국 말소리는 무겁고 깊은데, 지금 만든 훈민정음은 우리말소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것이라, 만일에 한자음을 나타내는데 쓰려면 반드시 변화시켜서 써야만 곧 제대로 쓰일 수 있다.
(1)은 최만리 등 7인 상소문으로 언문이 반포되면 하급 관리들은 언문 쓰는 자와 한문 쓰는 자로 나뉠 것임을 걱정하고 있다.
사실 1444년 2월 16일 중국 운서 한자의 한자음을 정음으로 발음을 적으라고 지시를 내린 뒤 4일 뒤 올라 온 갑자상소야말로 한자음 발음기호설의 가장 강력한 반증 문헌이다. 한자음 발음기호설은 결국 훈민정음이 양반을 위한 것인데 핵심 사대부들이 반대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2)는 신숙주가 대표 집필했다고 하는 《사성통고》범례이다. 책 자체는 전하지 않고 최세진이 1517년(중종 12)에 편찬한 상·하 2권 2책(또는 1책)의 ≪사성통해≫에 전한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 공저자이며 ≪동국정운≫ 등 한자음 운서 관련 책 등을 대표집필한 당시의 훈민정음 관련 최고의 학자였다. 이런 신숙주가 훈민정음은 애초에 한자음 발음기호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바탕으로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15세기 우리말은 한자어 외의 소수 외래어를 제외하면 한자어와 순우리말로 구성된다. 곧 어원 중심의 분류다. 그런데 이것이 말로 할 때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양반이나 평민이나 한자어든 토박이말이든 구별 안 하고 써 왔다. 이를테면 양반이든 천민이든 “우리 나랏말이 중국말과 달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자로 온전히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양반들은 중국식 문장인 한문 번역문으로 “國之語音 異乎中國之語音”라고 썼다. “우리 나랏말이 중국말과 달라.”에서 유일하게 한자어인 ‘중국’만이 한자로 살아남았다. 나머지 순우리말은 아예 적을 수 없으니 사라져 버리고 관념 속에만 남았다.
핵심 엘리트 사대부들이었던 사관은 1443년 12월 30일자에 세종이 왜 28자를 만들었는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3)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_세종실록, 세종 25(1443)/12/30 _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로되, 초성자․중성자․종성자로 나누어지며,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말이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점을 잘 드러내고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으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무릇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라고 하여 한자어 발음이든 토박이말 발음이든 모두 쓸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의 ‘本國俚語’는 우리말 또는 토박이말을 가리킨다. 이영훈이 핵심 근거 문헌으로 인용하고 있는 정다함(2013: 267)에서는 이를 한자음으로 오독하여 훈민정음 한자음 발음기호설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
(4) 명과 조선의 교화가 동시에 모두 관철되려면 결국 같은 한자이지만 그 발음은 두 가지가 필요했고, 中華의 표준한자음을 잘 익히고 동시에 朝鮮의 표준한자음 도 역시 잘 정립해서 익히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결국 보이지 않는 漢字의 두 소리를 눈에 보이도록 해 주는 표음문자라는 장치가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訓民正音의 만들어졌음을 처음으로 알리는 세종 25년(1443 년) 실록의 사료가, 애시당초 이 새로운 표음문자가 “文字(漢字: 필자)와 “本國里語”를 모두 얻어 쓸 수 있다고, 즉 “文字‘’와 “本國里語”의 보이지 않는 발음을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표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_정다함(2013: 267)
이처럼 ‘文字’를 중화의 표준한자음 ‘本國里語’를 조선의 표준한자음으로 보고 있다. ‘표준-’의 잣대를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중국과 조선의 ‘표준한자음’을 대비시킨 것도 이상하지만 ‘本國里語’를 조선의 한자음으로 한정한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이것이 오독임을 보여주는 핵심 근서는 바로 ≪훈민정음≫(1446) 해례본에 있다. 바로 훈민정음 창제 핵심 동기와 취지를 자세하게 풀어놓은 정인지서에서 한자를 중국에서 빌어온 문자로 규정하고 우리말을 한자를 빌어 적으려는 이두의 극한의 언어 모순을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 假中國之字以通其用, 是猶枘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정음해례27ㄱ:1-3_정인지서] 중국의 글자를 빌려 소통하도록 쓰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끼우는 것과 같으니, 어찌 제대로 소통하는 데 막힘이 없겠는가?
(6) 昔新羅薛聰, 始作吏讀, 官府民間,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정음해례27ㄱ:8-27ㄴ:2-4_정인지서] 옛날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처음 만들어서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려 쓰는 것이어서 매끄럽지도 못하고 막혀서 답답하다.이두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속되고 근거가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 언어사용에서는 그 만분의 일도 소통하지 못한다.
(5)와 같이 한자는 중국에서 빌려온 문자임을 분명히 하면서 한자를 변형하여 우리말을 적으려고 만든 이두의 모순을 “매끄럽지도 못하고 막혀서 답답하다”, “이두 사용은 속되고 근거가 일정하지 못하다.”, “만분의 일도 소통하지 못한다.”라고 무려 세 가지 중요 모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전면 표기, 문장 단위의 입말 표기를 전제로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다함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에 대한 오인과 역사 사실에 대한 오독의 밑바닥에는 강만길(1977)의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 창작과 비평 44. 창작과비평사.”논지에 대한 긍정 평가에서 드러난다.
강만길(1977)의 기본 논지는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민중사관이라는 명목 아래 훈민정음 세종 친제설과 애민주의 등을 잘못된 영웅 사관 또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평가한 것이다. 이런 강만길(1977)의 논지에 대해 정다함(2009)에서 “보기 드물게 통치권력과 관련된 언어의 본질에 주목한 것은 강만길이었다. _정다함(2009: 271쪽 주석 2번)"라고 평가했는데 해례본에서의 세종 서문과 정인지서에서 지적한 언어모순에 대한 인식과 해결 전략이 한자음 문제해결보다 앞서는 언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해례본의 논거들은 훈민정음이 한자음 발음기호 수준에서 만들지 않았다는 핵심 근거가 된다. 그렇다고 한자음 적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다목적 가운데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표는 김슬옹(2011: 47)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표 3]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 목적(김슬옹:2011:47 보완 재구성)
구분 | 동기 | 목표 | 목적 | |
언어 문화 | 주요 | 한문과 이두를 통한 소통 한계와 한자 모르는 백성 문제 | 기본 28자 쉬운 문자 창제 | 하층민에게 정책 알리기와 소통 문제 해결 |
부차 | 한자음 문제 | 표준 한자음 정리 | ||
정치 사회 | 주요 | 교화 정책의 효율성 문제 대두 | 교화 도구 창제 | 교화 |
부차 | 왕조 초기의 안정화 문제 | 왕조의 정당성 홍보 |
곧 한글 창제의 주된 동기와 목적은 한자 모르는 하층민의 교화에 있었고 한자음 적기는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근거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이 직접 저술한 세종(어제) 서문에 나와 있다.
넷째, 1446 훈민정음 반포 후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 편찬을 근거로 한자음 발음기호로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의 잘못이다. 사실 훈민정음 반포 후 최초 문헌은 동국정운이 아니고 용비어천가이다. 용비어천가는 2장, 30장, 67장, 68장은 한글전용이고 나머지 장들은 국한문 혼용문이다. 국한문 혼용문은 한자를 한자음으로 적지 않고 그대로 한자로 적은 것이며 순우리말은 당연히 훈민정음으로 적었으니 한자음 표기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제2장] 불휘 기픈 남 매 아니뮐 곶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제30장] 뒤헤는 모딘 도 알 어드 길헤 업던 번게를 하히 기시니 뒤헤는 모딘 쥬ᇰᄉᆡᇰ 알 기픈 모새 열 어르믈 하히 구티시니
[제67장] 가 자거늘 밀므리 사리로 나거 니다 셤 안해 자싫제 한비 사리로 뷔어 자니다
[제68장] 가 아니 말이샤 밀므를 마시니 하히 부러 뵈시니 한비아니그치샤 날므를 외오시니 하히 부러 우릴 뵈시니
[제1장] 海東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4. 맺음말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로서의 한자음 발음기호설의 핵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훈민정음 발음기호설은 1차적인 훈민정음 창제 대상을 양반으로 보는 모순이 있다. 이는 창제자인 세종이 직접 1차 대상이 한자 모르는 백성임을 밝혔으므로 모순이다.
둘째, 세종은 한자음이든 순우리말이든 우리말을 제대로 적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있다. 15세기 말이든 지금의 말이든 우리말은 토박이말과 한자말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본 상식인데, 이를 무시하고 마치 한자음만을 적기 위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우리 겨레는 한자로 제대로 적는 것이 불가능한 조사와 어미가 발달되어 우리말을 적기 위해 한자를 변형한 이두, 향찰 표기법을 만들었지만 실패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이런 맥락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실록에 구체적으로 나오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있다.
셋째, 한글 창제에 관해 논하려면 마땅히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할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본 문헌으로 삼아야 한다. 해례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와 목적이 세종과 8인의 사대부들의 입을 통해 자세하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넷째, 훈민정음의 창제 핵심 동기는 한자 모르는 백성의 문해력이었으므로 한자음 적기는 부차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임을 말해주는 논저들이 무수히 많은데도 일체 무시하고 참고하지 않았다.
Abstract
The criticism that Hunminjeongeum was created with the pronunciation of Chinese characters
This study criticized Lee, Young-hun(2018), who was a best-seller, as saying that "Is Sejong the Great really a holy king?" and that Sejong is not a holy king. Lee Young-hun claims that King Sejong is the holy king for all the people, not for the rulling class, because Hunminjeoneum was created the pronunci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s for the rulling class(Yangban).
This argument ignores the core motive and purpose of King Sejong's creation of Hunminjeongeum. King Sejong first made Hunminjeongeum to overcome the contradiction of using Chinese characters and Chinese texts that could not be properly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or in Korean. It also ignores the fact that people who do not know how to speak are the primary target, but they have made it for the comfort of all the people. This ignores the most important books about Hunminjeongeum motivation, ≪Hunminjeongeum≫ haeryebon(1446) and ≪Sejongsilok≫. The Hunminjeongeum was created for multipurpose use, and the Chinese character bandit is one of the secondary purposes.
Key words: Hunminjeongeum, kanji pronunciation symbol, King Sejong, living in the language, ≪Hunminjeongeum≫ Haerye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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