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원문을 옮기고 번역문을 실었습니다. 원문은 한글로 토(吐)가 달려 있으나 번거롭고 어색하다고 여겨 삭제하고 한문(漢文)만을 옮겼습니다. 비문을 찬(撰)한 분은 김용숙 옹(金容肅 翁)인데 동량면 조돈분이라고 합니다. 전주이씨 집안 외손(外孫)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4년) 》충주군編 유일(遺逸)을 보면 [李有養 字子正 全州人 孝寧大君補后 生而質美 長而眞實 事親克孝 躳(躬)自漁獵以供甘旨 仁祖朝逸掌令 大司憲姜鶴年撰墓誌, 이유양(李有養)의 자(字)는 자정(子正)이며, 전주(全州) 사람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성품이 아름답고 자라서는 진실되었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극진히 효도하여 몸소(직접)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다.인조(仁祖) 때 (벼슬에 뜻이 없어 숨어 살았으나)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다. 대사헌(大司憲) 강학년(姜鶴年)이 묘지를 지었다.] 고 씌여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인조 1년 4월 8일 정묘 3/3 기사/ 1623년 <이조가 인재 등용을 청하여 유생 조경기 등을 발탁, 6품직을 제수하다> 기사에
[직언하다가 죄를 입은 유생 조경기(趙慶起)·이안진(李安眞)·정복형(鄭復亨)·권심(權淰)·김효성(金孝誠)·홍무적(洪茂績)과 학행이 있는 유생 성문준(成文濬)·유진(柳袗)·김집(金集)·홍백순(洪百順)·박응선(朴應善)·강학년(姜鶴年) ·조경(趙絅)·김억(金嶷)·이유겸(李有謙)·이유양(李有養)·허주(許晭)·조공립(趙恭立)·심척(沈惕)·이영원(李榮元)·조형생(趙亨生)·김육(金堉)·박지양(朴知讓) 등을 이조가 계청하니, 모두 발탁하여 6품직을 제수하였다.(吏曹, 以直言被罪儒生趙慶起、李安眞、鄭復亨、權淰、金孝誠、洪茂績, 有學行儒生成文濬、柳袗、金集、洪百順、朴應善、姜鶴年、趙絅、金嶷、李有謙、李有養、許晭、趙恭立、沈惕、李榮元、趙亨生、金堉、朴知讓等啓請。 竝擢拜六品職。) ]라고 나온다.
이유양이 강학년(姜鶴年)과 함께 재야(在野)의 인재(逸士)로 있다 추천받아 관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인조 23년 9월 3일 신해 1/1 기사/ 1645년 <이조 판서 이경석을 우의정으로, 이유양을 장령으로 삼다>는 기사가 있다.
하지만, 이유양은 1583(선조 16년)에 태어나 1646(인조 24년)에 사망했고, 강학년은 1585년(선조 18)에 태어나 1647년(인조 25)에 사망했다. 강학년이 1년후에 사망했는데, 강학년(姜鶴年)의 문집인 《국역복천선생유고 (國譯 復泉先生遺稿)》를 살펴봐도 둘 사이에 교류는 없었고 이유양(李有養)의 묘지명(墓誌銘)을 찾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였고 사망했는데 특별한 교류는 없었다. 물론 문집(文集)에 수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강학년(姜鶴年)은 타협을 모르는 보통 강직(剛直)한 인물이 아닌데 이유양(李有養)의 후손들이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강학년(姜鶴年)을 의탁(依托)했다고 본다.
이유양(李有養)은 전주이씨 후예이다. 이유양이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것은 사실이나 사후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追贈)된 사실이 없다. 오히려 복천 강학년이 사후 신원(伸寃)되면서 사헌부 대사헌으로 추증되었다.
따라서 강학년이 묘지(墓誌)를 지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동량면지, 2011년》에서 옮김
《충주의 금석문, 2006년》
<원문>
頭篆 : 大司憲李公神道碑
故隱逸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李公神道碑銘竝序
忠州 開天院 菊谷 艮坐之原 有一大塚 卽故隱逸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李公所藏也 今其雲仍以欲豎大碑 公十一代孫殷宰氏 請余爲記 不文之人 安敢當此 然忝在外裔 亦難固辭故 敢據复(復의 同字)泉姜公鶴年所述之墓誌而謹敍其槩曰公諱 有養 字 子正 全州人 以我 太宗大王二男 孝寧大君諱補 爲肇祖 歷寶城君諱容 栗原君諱 倧 呂陽君 諱子謙而至龍岡縣令 贈領議政諱薱 始仕寔公高祖也 曾祖諱 楫 全州府尹 祖諱堯賓 廣興倉守 考諱浩 英陵參奉 贈左承旨 妣 贈淑夫人 全州柳氏 府使永健 女也 公以萬曆十一年 癸未 生于京第 姿質甚美 心性 正直誠實 年甫十歲 猝値壬亂 隨王父倉守公後 入洪川山中之時備經艱險 竭誠衛護 且有商僧 遺針一塊 群兒得而相爭其持 公强令推給 人皆稱之 事親克孝 貧窮漁獵以供甘旨 小弟末妹 父母最所鍾愛者因故 撫愛友篤倍他同氣之中 父母沒後待之不衰 有一伯妹 事如父母 至誠侍病 及喪哀慽 鄕里歎服 到于京師 一松沈相國 慕堂洪大憲 極加稱道 愛如子侄 特與獨靜齋洪靈 月塘姜碩期 复(復의 同字)泉姜鶴年諸公 交契甚密 逐日遊從 光海昏朝 當 以寄跡林樊 遯世不出之意 入淸風後山洞 耕雲釣月而爲安身畢命之地 讀書明理而爲立心措躬之資 仁祖癸亥 以學行 擢拜果川 居官未幾 見方伯無情之責 棄而卽歸 民有含淚願留之舉 甲子 除漢城判官 繼遷工曹正郞 乙丑 除朔寧 丙寅 以內艱 棄官 民有去思碑 戊辰 終制 是冬 拜刑曹正郞 不謝而就 己巳 當外憂 守墓啜粥 暫不脫衰絰 辛未 服闋 除刑曹正郞 以哀懷未盡 不就 是夏又拜刑正 亦謝 壬申 遷補通川 有投紱歸棲之計而吏民 男女咸聚守衙 莫可遂意 適值丙子南漢被圍之日 專心募兵聚糧之事而防守甚密 且徙民入島 俾得全濟 遠近流離至者 雲集莫論貴賤 無不哺之 救活甚多 其淸白寬大之頌 有達天聽 丁丑 秩滿還鄕 民皆號泣 立碑頌德 戊寅除漢城庶尹 就官行功 繼有拜仁川之命而到任未久 適北使往來路役煩賦重 民怨騰沸故 公 明察弊瘼 爬櫛無餘民心安堵 奸吏含殃其不能自恣 作變于家廟 公因駭歎而歸 該曹以治積之著 民心之悅 上聞 換授富平而不赴 又拜鐵原 上官十五日而歸 辛巳 拜竹州不就 壬午除淮陽 乃出供仕 乙酉 除司憲府掌令 謝之 仍歸淸風舊居 漁樵耕讀 自娛其志 丙戌 又除公山 更不進就 同年 十一月 二十八日 春秋 六十四而卒 于后山洞 正寢 是日 洗身易衣 無一言及他事 但戒子孫以敬奉祭祀一款而已 配 贈貞夫人 豊山洪氏 其考 卽慕堂之弟典籍鳳祥也 事母至孝 命旌 生戊子卒庚寅 墓雙墳 擧六男一女 男長 績以孝蒙旌 贈執義 次縝 左水運判官 次維 次綸左承旨 次緖 贈司僕寺正 與其配尹氏 並蒙孝烈之典 一門四旌 綽楔相連 次緻 天安郡守 女適任厚錫 內外孫曾繁難悉錄 豈非公積 德行仁之厚澤也耶 嗚呼 蓋公 不貪功名 不羨富貴而只有隱居求志 養德山林 辭尊居卑 難進易退之心而已 雖家貧親老而未免祿仕 內而累拜要職 外而累典郡邑則何求不得何願不成 然劬勞(원문에는 徒功인데 구로(劬勞)로 고친다.)愛民憂國 廉勤奉公 盡其職務之誠而毫無憑公營私自充已欲之意故登仕數十年其清寒之勢 無異於白衣之士則較諸世之貪官汚吏 患得患失之流 奚翅天壤哉 吁其偉矣
銘曰 後山屹屹 前水茫茫 公之遺風 與此無窮
外裔成均館典學 光山 金容肅 謹撰
韓國書畫作家協會 忠州支部長 青松后人 沈厚澤 謹書
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全州李公神道碑建立推進委員會 委員長 殷宰
委員
秀慶 秀賢 秀德 夏宰
起璇 相揆 福宰 承宰
一宰 康夏 秀弘 康仁
奎宰 康翰 秀龍 秉宰
檀紀 四千三百二十一年 陰三月五日 建立
<표점정리>
頭篆
《大司憲李公神道碑》
故隱逸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李公神道碑銘竝序
忠州 開天院 菊谷艮坐之原,有一大塚,卽故隱逸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贈大司憲李公所藏也。今其雲仍以欲豎大碑,公十一代孫殷宰氏請余爲記。不文之人,安敢當此?然忝在外裔,亦難固辭,故敢據复(復의 同字)泉姜公鶴年所述之墓誌,而謹敍其槩曰: 公諱有養,字子正,全州人。以我太宗大王二男孝寧大君諱補爲肇祖,歷寶城君諱容、栗原君諱倧、呂陽君諱子謙,而至龍岡縣令、贈領議政諱薱,始仕寔公高祖也。曾祖諱楫,全州府尹。祖諱堯賓,廣興倉守。考諱浩,英陵參奉、贈左承旨。妣贈淑夫人全州柳氏,府使永健女也。 公以萬曆十一年癸未,生于京第。姿質甚美,心性正直誠實。年甫十歲,猝値壬亂,隨王父倉守公後,入洪川山中。之時備經艱險,竭誠衛護。且有商僧遺針一塊,群兒得而相爭其持,公强令推給,人皆稱之。事親克孝,貧窮漁獵以供甘旨。小弟末妹,父母最所鍾愛者,因故撫愛友篤,倍他同氣之中。父母沒後,待之不衰。有一伯妹,事如父母,至誠侍病,及喪哀慽,鄕里歎服。 到于京師,一松沈相國、慕堂洪大憲極加稱道,愛如子侄。特與獨靜齋洪靈、月塘姜碩期、复(復의 同字)泉姜鶴年諸公,交契甚密,逐日遊從。光海昏朝,當以寄跡林樊、遯世不出之意,入淸風後山洞,耕雲釣月,而爲安身畢命之地;讀書明理,而爲立心措躬之資。 仁祖癸亥,以學行擢拜果川。居官未幾,見方伯無情之責,棄而卽歸,民有含淚願留之擧。甲子,除漢城判官,繼遷工曹正郞。乙丑,除朔寧。丙寅,以內艱棄官,民有去思碑。戊辰,終制。是冬,拜刑曹正郞,不謝而就。己巳,當外憂,守墓啜粥,暫不脫衰絰。辛未,服
闋,除刑曹正郞,以哀懷未盡不就。是夏,又拜刑正,亦謝。壬申,遷補通川,有投紱歸棲之計,而吏民男女咸聚守衙,莫可遂意。適值丙子南漢被圍之日,專心募兵聚糧之事,而防守甚密,且徙民入島,俾得全濟。遠近流離至者雲集,莫論貴賤,無不哺之,救活甚多。其淸白寬大之頌,有達天聽。 丁丑,秩滿還鄕,民皆號泣,立碑頌德。戊寅,除漢城庶尹,就官行功。繼有拜仁川之命,而到任未久,適北使往來,役煩賦重,民怨騰沸,故公明察弊瘼,爬櫛無餘,民心安堵,奸吏含殃,其不能自恣。作變于家廟,公因駭歎而歸。該曹以治積之著、民心之悅上聞,換授富平而不赴。又拜鐵原,上官十五日而歸。辛巳,拜竹州不就。壬午,除淮陽,乃出供仕。 乙酉,除司憲府掌令,謝之。仍歸淸風舊居,漁樵耕讀,自娛其志。丙戌,又除公山,更不進就。同年十一月二十八日,春秋六十四,卒于后山洞正寢。是日,洗身易衣,無一言及他事,但戒子孫以敬奉祭祀一款而已。 配贈貞夫人豊山洪氏,其考卽慕堂之弟典籍鳳祥也,事母至孝,命旌。生戊子,卒庚寅。墓雙墳。 擧六男一女: 男長績,以孝蒙旌,贈執義。 次縝,左水運判官。 次維。 次綸,左承旨。 次緖,贈司僕寺正,與其配尹氏並蒙孝烈之典,一門四旌,綽楔相連。 次緻,天安郡守。 女適任厚錫。 內外孫曾繁難悉錄,豈非公積德行仁之厚澤也耶?嗚呼!蓋公不貪功名,不羨富貴,而只有隱居求志、養德山林、辭尊居卑、難進易退之心而已。雖家貧親老,而未免祿仕,內而累拜要職,外而累典郡邑,則何求不得,何願不成?然劬勞(원문에는 徒功인데 구로(劬勞)로 고친다.)愛民憂國,廉勤奉公,盡其職務之誠,而毫無憑公營私、自充已欲之意。故登仕數十年,其清寒之勢,無異於白衣之士,則較諸世之貪官汚吏、患得患失之流,奚翅天壤哉!吁!其偉矣!
銘曰 後山屹屹,前水茫茫。 公之遺風,與此無窮。
外裔 成均館典學 光山 金容肅 謹撰
韓國書畫作家協會 忠州支部長 青松后人 沈厚澤 謹書
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 全州李公神道碑 建立推進委員會
委員長:殷宰
委員:
秀慶、秀賢、秀德、夏宰、起璇、相揆、福宰、承宰、一宰、康夏、秀弘、康仁、奎宰、康翰、秀龍、秉宰
檀紀 四千三百二十一年 陰三月五日 建立
<번역문>
頭篆
《대사헌 이공 신도비 (大司憲李公神道碑) 》
고은일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 증대사헌 이공 신도비명 병서 (故隱逸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 贈大司憲李公神道碑銘竝序)
충주 개천원(開天院, 한자로 쓰면 開天安이 맞다.) 국곡(菊谷, 국실이다.)의 간좌(艮坐,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한 자리) 언덕에 큰 무덤 하나가 있으니, 곧 돌아가신 은일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 증대사헌 이공께서 묻히신 곳이다.
이제 그 후손들이 큰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공의 11대손 은재(殷宰) 씨가 나에게 비문을 작성해 달라고 청하였다. 글재주가 없는 내가 어찌 감히 이를 당해내겠는가? 그러나 외손(外孫)의 일가(外裔)라는 부족한 신분으로 사양하기 또한 어려웠으므로, 감히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 문집으로 《復泉先生遺稿》가 있다.) 공(公)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에 의거하여 그 대략을 삼가 서술한다.
공의 휘(諱)는 유양(有養)이고, 자(字)는 자정(子正)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우리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휘 보(補)를 시조(肇祖)로 삼아, 보성군(寶城君) 휘 용(容), 율원군(栗原君) 휘 종(倧), 여양군(呂陽君) 휘 자겸(子謙)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대(薱)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의 휘는 집(楫)으로 전주부윤을 지냈고, 할아버지의 휘는 요빈(堯賓)으로 광흥창수(廣興倉守)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호(浩)로 영릉참봉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으로 추증된 전주 유씨(全州 柳氏)로, 부사(府使) 영건(永健)의 딸이다.
공은 만력 11년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한양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품성이 매우 수려하고 심성이 정직(正直)하고 성실하였다. 나이 겨우 10세 때 갑자기 임진왜란을 만나 할아버지인 창수공(倉守公)을 따라 홍천 산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온갖 간고함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정성을 다해 어른들을 위호(衛護)하였다.
또 한 장사꾼 스님(商僧)이 바늘 한 뭉치를 떨어뜨렸는데, 여러 아이들이 이를 얻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니 공이 강제로 이를 나누어 주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어로와 수렵(狩獵)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다. 어린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이 가장 아끼던 이들이라, 이런 연유로(小弟末妹 父母最所鍾愛者因故) 따뜻하게 보살피고 우애가 두터워 다른 형제들보다 배나 더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대하는 마음이 시들지 않았고, 맏누이 한 분이 계셨는데 부모처럼 섬겨 지성으로 병간호를 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지극하여 향리(鄕里)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한양에 이르러(到于京師)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상국과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대헌이 극진히 칭찬하며 자식이나 조카처럼 아꼈다. 특히 독정재(獨靜齋) 홍령(洪靈),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 여러 공들과 교유가 매우 깊어 날마다 어울렸다.
광해군의 혼란한 조정에서 시골에 자취를 의탁하여 세상을 피하고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 청풍(淸風) 후산동(後山洞)으로 들어가 구름을 개간하고 달을 낚으며(농사와 낚시를 하며) 몸을 안돈하고 목숨을 마칠 땅으로 삼았고, 글을 읽고 이치를 밝혀 마음을 세우고 몸을 가다듬는 바탕으로 삼았다. (光海昏朝,當以寄跡林樊、遯世不出之意,入淸風後山洞,耕雲釣月,而爲安身畢命之地;讀書明理,而爲立心措躬之資。)
인조 계해년(1623년, 인조 1년)에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과천현감에 배수되었다. 관직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사의 무정한 책망을 받고 직을 버리고 즉시 돌아가니,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머물러 주기를 원하였다.
갑자년(1624년)에 한성부 판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공조 정랑으로 옮겼다. 을축년(1625년)에 삭녕군수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26년)에 어머니 상(內艱)을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니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 그리워하는 비석)를 세웠다. 무진년(1628년)에 상복을 벗었다.
그해 겨울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지 않고 취임하였다. 기사년(1629년)에 아버지 상(外憂)을 당하여 무덤을 지키며 죽으로 연명하고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신미년(1631년)에 3년상을 마치고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슬픈 회포가 다하지 않았다 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다시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임신년(1632년)에 통천군수로 옮겨 제수되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아전과 백성 남녀가 모두 관아에 모여 지키니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침 병자호란(1636년)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를 맞아 오직 군사를 모으고 식량을 모으는 일에 전념하여 방비를 매우 엄밀하게 하였고, 백성들을 섬으로 옮겨 안전하게 하였다.
원근에서 유랑하여 도달한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귀천을 막론하고 먹여 살리지 않음이 없어 구활한 자가 매우 많았다. 그 청백함과 관대(寬大)함의 송축이 임금의 귀에까지 달하였다. 정축년(1637년)에 임기가 차서 고향으로 돌아가니 백성들이 모두 부르짖으며 울고 비석을 세워 덕을 송축하였다.
무인년(1638년)에 한성부 서윤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이어 인천부사로 제수하라는 명령이 있어 임지에 도착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마침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여 길 정비 업무가 번잡하고 세금이 무거워 백성의 원망이 들끓었다.
이에 공이 폐단을 명확히 살피고 샅샅이 정리하여 백성의 마음이 안돈되고 간사한 아전들은 죄를 받아 제 마음대로 조작하지 못하였다. 사당에서 가문 내의 변란이 일어나자 공이 놀라 탄식하며 돌아왔다. 해당 관청에서 정사의 실적이 현저하고 백성의 마음이 기뻐함을 상부 보고하여 부평부사로 교체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철원부사에 제수되어 관직에 오른 지 15일 만에 돌아왔다. 신사년(1641년)에 죽주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오년(1642년)에 회양부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나아가 벼슬을 살았다. 을유년(1645년)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어 청풍의 옛 거처로 돌아가 어로, 땔나무 줍기, 농사, 독서로 스스로 그 뜻을 즐겼다. 병술년(1646년)에 다시 공산(公州)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다시는 나아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8일, 향년 64세로 후산동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다.
이날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었으며,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자손들에게 "제사를 정성껏 받들라"는 한 가지 경계만을 남겼을 뿐이다.
배필인 증 정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그 아버지가 곧 모당(홍이상)의 동생인 전적(典籍) 봉상(鳳祥)이다. 시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무자년(1588년)에 태어나 경인년(1650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쌍분이다. 6남 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적(績)은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고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둘째 진(縝)은 좌수운판관이다. 셋째 유(維)이다. 넷째 륜(綸)은 좌승지이다. 다섯째 서(緖)는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배필 윤씨와 함께 모두 효열의 포상을 받아 한 가문에 네 개의 정려가 내려져 정문(綽楔)이 서로 이어졌다. 여섯째 치(緻)는 천안군수이다. 딸은 임후석(任厚錫)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손자와 증손이 번창하여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 어찌 공이 덕을 쌓고 인(仁)을 행한 두터운 복택(福澤)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대개 공은 공명을 탐하지 않고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은거하여 뜻을 구하고 산림에서 덕을 구하며,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며,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비록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셨으나 벼슬길을 면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요직을 여러 번 거쳤고 밖으로는 여러 고을을 관장하였으니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고 무슨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오직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히 공무를 받들어 직무의 정성을 다하였을 뿐, 공무를 빙자해 사리를 챙기거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뜻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수십 년간 있었으면서도 그 청빈한 태도가 벼슬이 없는 선비(白衣之士)와 다름이 없었으니, 세상의 탐관오리와 득실을 염려하는 무리들과 비교하면 어찌 하늘과 땅 차이뿐이겠는가! 아! 위대하도다!
명문 (銘曰)
뒤에 서 있는 산은 우뚝우뚝하고, 앞에 흐르는 물은 아득하도다. 공께서 남기신 풍모는 이 자연과 더불어 영원히 무궁하리라.
외손(外孫) 성균관 전학 광산
김용숙(金容肅) 삼가 지음
한국서화작가협회 충주지부장
청송 후인 심후택(沈厚澤) 삼가 씀
추진위원회: 행사헌부장령 증대사헌 전주이공 신도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은재(殷宰)
위원: 수경(秀慶), 수현(秀賢), 수덕(秀德), 하재(夏宰), 기선(起璇), 상규(相揆), 복재(福宰), 승재(承宰), 일재(一宰), 강하(康夏), 수홍(秀弘), 강인(康仁), 규재(奎宰), 강한(康翰), 수룡(秀龍), 병재(秉宰)
단기 4321년(서기 1988년) 음력 3월 5일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