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비
글보라
나무에는 푸른비가 산다
졸졸 흐르기도 하고
보슬부슬 내려보기도 하고
폭포수로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흠뻑 스민 비 털어내는 우산처럼
푸른바람은 스위치 올려 잎사귀 말려준다
스산하다는 빗소리를 말리는 찬바람 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나무비가 먼지를 다 씻어낸 후의 말이다
나무에 손을 대면 넉넉해지고
나무에 기대면 순한 잠이 눈을 감기는 것도
나무몸 가득 묘목에게 주는 빗소리 때문
이제 막 움튼 어린묘목부터
수천 년 살아온 주목까지
푸른꿈 촉촉하게 적셔주는 나무비
시들고 메마른 내가 등 기대면
서늘하도록 청명한 물소리
뻑뻑해진 등선 파고들어
쏴아아 아아 물꼬를 틀어준다
----이서빈 외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덜컥, 서늘해지다}에서
유럽인들은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 살면서 ‘자연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반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남쪽지방의 사람들은 ‘자연을 선’으로 규정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가 있다. 북쪽지방의 사람들은 농경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유목민의 삶을 살았고, 남쪽지방의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 보다는 대대로 정든 고향 땅에서 농경민의 삶을 살았다. 이 ‘유목민 대 농경민의 싸움’은 ‘사나운 맹수 대 순한 양’의 싸움이었고, 그 결과, 살생을 함부로 하는 유목민들은 사나운 야수가 되어 농경민의 목을 비틀고 오늘날의 고급문화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고급문화는 정복과 살육의 역사이며, ‘사나운 야수’가 ‘천사의 탈’을 쓴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글보라 시인의 [나무비]를 읽으면서 잠시 유목민과 농경민, 또는 유럽인과 아시아인들의 역사를 생각해보고, 오늘날의 유럽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글보라 시인의 [나무비]를 읽어주고 싶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복자, 그토록 자비롭고 친절한 천사의 탈을 쓰고 살생을 밥 먹듯이 하는 이 유럽인들과 기독교인들마저도 글보라 시인의 [나무비]를 읽으면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만물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자기 자신들의 야수성과 살생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삶을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지구촌의 위기는 생태환경의 위기이고, 이 생태환경의 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연을 악으로 규정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유럽인들과 기독교인들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글보라 시인의 “나무에는 푸른 비가 산다”는 제일급의 시구이며, 우리는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나무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간다. 나무비는 졸졸 흐르기도 하고, 보슬부슬 내리기도 한다. 나무비는 폭포수로 쏟아져 내리기도 하고, “흠뻑 스민 비 털어내는 우산처럼/ 푸른 바람은 스위치를 올려 잎사귀를 말려준다.” 나무비가 모든 먼지들을 다 씻어내면 찬바람이 젖은 몸을 다 말려주고, 우리의 몸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나무에 손을 대면 넉넉해지고, 나무에 기대면 순한 잠을 잘 수가 있다. “이제 막 움튼 어린묘목부터/ 수천 년을 살아온 주목까지/ 푸른꿈 촉촉하게 적셔주는 나무비,” “시들고 메마른 내가 등 기대면/ 서늘하도록 청명한 물소리” 들려주는 나무비,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뻑뻑해진 등선 파고들어/ 쏴아아” “물꼬를 틀어”주는 나무비----. 나무비는 영원한 대자연의 숨통이자 그 젖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동물들은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뱉어 내고, 모든 나무들은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산소를 뱉어 낸다. 나무비는 대자연의 산소이고, 나무비는 대자연의 젖줄이다.
나무비, 나무비----. 이 나무비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유럽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대청소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