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거워진 고역
출 5: 10-14
마 24:48-51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사막에는 방울뱀이 많이 있습니다. 서부 개척 시에 개척자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방울뱀이었습니다. 방울뱀은 꼬리를 떨면서 방울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방울뱀은 이름은 예쁘지만 치명적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방울뱀은 상대를 공격하는 치명적인 송곳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울뱀이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자나 늑대도 영토 내의 주도권쟁탈을 위해서 싸우지만 서로가 상대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무차별 학살, 인종 청소, 자살 폭탄 테러, 너 죽고 나 죽자 이런 얘기는 다 인간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질서가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이런 용어도 없고 일도 없습니다. '
평화'라는 단어의 '평'(平)은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것을 뜻합니다. '화'는 입(口) 속에 밥(禾)이 있다는 '경제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평등하고 함께 잘 먹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평화하지 못한 장면이 인간 세계에는 많이 연출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달라고 하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학대를 심하게 하고, 고역을 시키고, 독촉하였습니다. 자기 종을 고생시키면 누가 손해입니까? 우리 집 농사 잘되려면 머슴을 잘 먹여야 합니다. 우리 집 공사 잘 되게 하려면 우리 일꾼 잘 먹어야 합니다. 종들을 고생시키고, 짚을 주지 않고, 고역을 당하게 하면 결국 일을 더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내가 손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특히 현대 세상은 함께 잘 살든지, 함께 못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세계화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내 일이 잘 되려면 내 종이 잘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삽니다. 마태복음 10:21에는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합니다. 서로 불화하고 죽고 죽이는데 앞장서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만난 다음 더욱 강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짚을 주지도 않으면서 벽돌을 이전 수대로 구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도 함께 죽는 길입니다. 세계화시대는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고, 절로 힘이 솟게 해서 내게도 유익이 오게 합니다. 상대방을 억울하게 하고, 억압해서 내 소유를 늘리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첫째, 독촉하는 간역자들
아론과 모세가 바로에게 다녀간 후 애굽의 간역자들은 이스라엘을 독촉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도를 만드는데 짚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가서 짚을 주어오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벽돌 만드는 일의 양은 감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 날에 해야 할 일은 그 날에 다 해치우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던 고역을 중하게 하여 서로 분열이 일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리는 바로 그들에게 고역을 중하게 하게 한 모세와 아론을 더 미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가장 혜택을 적게 주고 가장 많은 효과를 얻어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런 것이 세상 임금의 꽤입니다. 에베소서 6:9에는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4:1에는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고 합니다. 종을 부리는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하나님의 나라를 포도원 품꾼에 비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 똑같은 품삯을 받습니다. 일에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일의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일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왔다는 자체가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과를 따집니다. 결과의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도 그 차이를 가지고 능력을 평가합니다. 일한 사람들의 결과인 수를 가지고 대가를 정합니다. 예수님께 시험한 마귀의 시험을 보세요.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돌을 가지고 어떻게 만듭니까? 돌이 어떻게 떡이 됩니까? 예수님은 돌이 떡이 되게 하시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게 하라고 꼬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만의 일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하나님 같이 되라"고 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입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있게 하시지만 인간에게 없는 데서 있게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불합리하게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정당한 양을 요구해야지 왜 정당치 못한 양을 요구합니까? 한 섬 나는 땅에서 두 섬을 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되면 무리하게 되고, 부정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생산성이 오히려 저하됩니다. 북한 동포들은 집단 농장에서 쉴새없이 일합니다. 우리 보다 일을 적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훨씬 더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수확이 없어요? 왜 굶어죽어요? 쉴새 없이 다그친다고 생산성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두 배의 일을 하는 이스라엘인들
애굽의 간역자들은 "짚을 주지 아니하고,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고 합니다. 애굽인들은 곡식을 수확할 때에 곡식 이삭만 자르거나 이삭에서 약간의 줄기만 자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에 나가면 짚 이삭을 구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특히 나일강 하류는 연중 수확이 계속 되었기 때문에 짚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짚을 구해와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일이 배로 늘어나 벽돌의 수량을 맞추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종들에게 일이 배로 늘어났다는 것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의 양을 배로 늘리는 것은 그만큼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다 경험한 일입니다. 저도 군대 있을 때에 주일에 교회에 못 가게는 하지 않지만 갈 수 없게 만든 경험은 있습니다. 요즘에는 군대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간다고 하니 가지 못하게는 하지 않지만 주일에 해야 할 일을 잔뜩 주는 것입니다. 밀린 빨래도 해야 하고, 관물 정리도 해야 하고, 저에게 지급된 총을 닦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오면 검사에 걸립니다. 총구수입이 불량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게는 하지만 갔다오면 일이 배로 늘어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 주어진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강요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은 하지 못할 일을 골라서 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하지 못할 일은 결코 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것은 사람입니다. 사랑에 근거하면 하지 못하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을 골라서 시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일의 양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일의 질을 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 같이 칭찬을 듣습니다. 양이 다르다고 다르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양에 따라서 칭찬도 받고 야단도 받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벽돌의 양은 줄이지 말고 일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아름답게 보지만 이 세상에서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셋째, 대표로 맞는 패장들
바로의 신하들인 간역자들은 부당한 요구에 양을 채우지 못했다고 이스라엘 패장들을 때립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에 종을 때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철저하게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맞습니다. 종이 게을러 먹고 마시고 놀다가 주인의 일을 못하였을 경우입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51). 자기 잘못으로 맞으면 덜 억울하지만 남의 잘못이나 잘못이 없음에도 맞으면 억울합니다. 대신 맞는 매가 얼마나 아픕니까? 억울하게 맞는 매가 얼마나 아픕니까? 사도행전과 서신에는 사도들이 맞았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대신해서 맞은 경우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맞을 일이 아닌데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맞았으니 우리가 예수님 대신 맞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신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간역자들이 패장을 때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과 백성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만드는 수법입니다. 이런 이간질은 역사적으로도 많이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 세리를 세워서 유대인의 것을 빼앗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유대인을 수탈하는 일에서 빠졌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우리 나라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을 앞잡이로 세워 서로 반목하고 이간질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자신의 전도의 고통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여행 중에 여러 번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그 외의 온갖 위험에 처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가 당한 위험 가운데는 동족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족의 위험은 이방인의 위험보다 앞섰습니다. 동족간의 싸움은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마귀는 이런 동족간의 싸움, 집안의 싸움, 교회 안의 싸움을 좋아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이전에 선교사이셨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하시는데 선교사이실 때에 여러 번 미국에 오셔서 제가 섬기던 교회에 오셔서 설교도 하시고 선교보도도 하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의 말씀이 가장 힘든 것이 동족의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동족간의 갈등, 동료 선교사 사이의 반목, 이런 어려움이 가장 가슴 아프게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동족이 반복하고 집안이 분쟁하게 만드는 틈새 전문가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민족적 분쟁 속에 휘말릴 때마다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나라가 징기스칸의 원나라였습니다. 몽고군이 유럽을 짓밟았을 때는 그들을 유태인이 유인했다는 이유로, 또 페스트가 유행할 때는 유태인이 그 독균을 샘 속에 뿌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그리고 유태인이 기독교도의 피를 마시는 의례살인을 한다는 이유로 그때마다 이들을 종교재판에 걸어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고 학살하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그들을 희생하고 죽일 때마다 동족의 갈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족끼리 서로 반목하고 이간질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한 민족의 아픔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옛날 시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은 며느리는 부엌에 들어가 부뚜막에 누워 있는 무고한 강아지의 배를 참으로써 울화를 풀었습니다. 며느리들의 스트레스 전위를 발산시킬 강아지를 한 마리씩을 잘 먹여가며 부엌에 길렀습니다. 내가 억울할 대 화풀이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사람들은 유대인을 골라 패장을 세우고 이 패장들을 때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협박하고 이간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애굽을 떠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반목과 이간질은 마귀의 전공입니다. 세상은 마귀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귀는 항상 틈새를 만듭니다. 틈새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작은 뚝의 틈새가 뚝이 무너지게 만듭니다. 큰 바위의 틈새가 바위를 갈라지게 만듭니다. 옛날 피라밋을 만들 돌을 운반할 때도 큰 바위에 틈새를 만들어 작은 나무를 끼워놓고 물을 부었습니다. 작은 나무가 불어 바위를 깨트렸습니다. 틈새는 큰 나라도, 튼 사람도 다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하신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를 이간질하여 불화하게 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이간질하여 불하하게 하고, 남편과 아내를 이간질하여 불화하게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태복음 10:35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처럼 천국 때문에 서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마음이 갈라지고 서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갈라디아서 5:15에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뱀이 화가 나면 자기의 꼬리를 문다지요? 자기 꼬리를 물고 스스로 죽는다고 합니다. 내 얼굴에 침 뱉고, 내 눈 내가 찌르고, 내 꼬리 내가 무는 격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망할 때 보면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자중지란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들끼리 물고 뜯다가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5에는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스스로 분쟁하여 스스로 넘어지게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든든히 서서 넘어지지 않고 출애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