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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세 가지 메시지/ 사도행전 24:2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CDW68o_aMe0
바울이 지상에서 가졌던 마지막 두 가지 비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성경에서는 서바나라고 했는데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비전은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은 성취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로마에 가면 ‘뜨레폰타네’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하면 세 분수 교회입니다. 거기서 바울이 순교했습니다. 서기 60년,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고, 이에 다급해진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잉 볼 때 이방인인 베드로는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때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가 ‘쿼바디스’입니다. 로마시민이었던 바울은 베드로보다 상대적으로 고통이 적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목이 떨어져서 통통통 세 번 튀었는데 그곳마다 샘물이 터졌답니다. 그래서 바울의 순교를 기념해서 세워진 교회가 ‘뜨레폰타네’ 교회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로마의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계략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지 않았다가는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으니 바울을 그 당시 로마의 관정이 있던 가이샤라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벨릭스는 약 2년간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자주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문은 그때 바울이 벨릭스에게 무엇을 전했는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 세 가지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지만 회개하지 않았고 2년 후에 바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세 가지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했을까요?
1. 장차 오는 심판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메시지의 순서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의 이해와 제가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편의를 위해서 순서를 좀 바꾸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순서는 장차 올 심판과 의와 절제입니다.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종말은 세상 종말이 있고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의 종말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임종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죽을 때도 평안히 눈을 감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9:27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늙고, 늙으면 죽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늙지 않고 일찍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삶의 길이보다는 삶의 질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의 죽음보다 좀 길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종말은 언제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세상 종말이 우리 시대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언적으로 세상 종말을 보여준 사건이 성경 다니엘서 2장에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주었습니다. 왕의 꿈은 이런 내용입니다.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이 왕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또 왕이 보니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신상이 다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왕 중의 왕입니다. 신상 중에서 금머리 부분에 해당합니다. 느부갓네살을 뒤이어 느부갓네살보다 못한 은 같은 나라, 놋 같은 나라, 쇠 같은 나라 그리고 얼마는 진흙 같고 얼마는 쇠 같은 나라가 일어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우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세워질 제국들입니다. 그리고 신상을 부순 손대지 아니한 돌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하고 영원할 것을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손대지 아니한 돌이 우상을 치는 부분은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입니다. 세상 종말은 이렇게 시작 됩니다. 손대지 않은 돌이 나타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에수님의 초림부터 세상 종말이 시작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종말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일이 거의 마무리 단계이기 때문에 종말의 마지막 때입니다. 종말 중에서도 마지막 때를 우리는 흔히 말세지말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말세지말의 입구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마태복음 24:14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천국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면 그때가 말세지말인 것입니다. 이제 곧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말세지말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재앙이 부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순서에 의하면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나팔 재앙 그리고 일곱 우레 재앙과 진노의 일곱 대접 재앙입니다.
이렇게 재앙이 진행 되다가 재앙의 클라이맥스에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죽은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휴거될 것입니다. 그 후에 공중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립니다(계 19:9). 그 후에는 주님이 백마를 타고 지상에 재림하시는데, 하늘의 군대가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주님의 군대와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주님의 군대가 승리할 것입니다. 그 전쟁이 우리가 흔히 인류 최후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전쟁이 인류의 마지막 전쟁은 아닙니다.
그 후에 지상에서 천년 왕국이 진행 될 것이고, 그때 마귀는 천년 동안 결박 되어 무저갱에 갇히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지상은 낙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우리가 꿈꾸는 나라]라는 찬양을 보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 양이 뛰노는 그 곳, 어린이 독사굴에 손 넣어도 되는, 그 곳엔 하나님의 나라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사야 65장에 나오는 천년 왕국에 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천년이 차면 무저갱에 결박 되었던 마귀가 잠시 풀려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미혹해서 성도들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을 포위할 것입니다. 그 전쟁이 바로 인류 최후의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계 20장). 성도들은 그 전쟁에서 적과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마귀과 마귀에게 속한 군대를 태워버리고 그들을 불과 유황 못에 던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전쟁은 주님의 군대의 일방적인 승리가 될 것입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긴 시간 동안 말씀드린 것은 이 백보좌 심판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말했던 장차 올 심판이 바로 이 심판, 백보좌 심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백보좌 심판을 반드시 잘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을 잘 통과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이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소인지 그리고 지옥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장소인지를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백보좌 심판에서 결정된 판결은 영원한 판결입니다. 백보좌 심판에서의 결정이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을 결정합니다. 이 심판은 항소가 없고 번복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백보좌 심판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계 20:12과 15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백보좌 심판이 있을 때 크게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심판을 받는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느냐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심판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또 하나는 심판 받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상급이 결정 될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형벌의 강도가 결정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라고 표현했습니다.
2. 의
바울이 전한 메시지 중에 첫 번째가 의였습니다. 이 의를 가진 사람은 장차 오는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롬 3:23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의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없는 것일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롬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보니 의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영적인 진리는 로마서 3장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롬 3:20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적으로는 의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롬 3:21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구약 성경의 율법과 선지서들이 그 의를 예언했습니다. 그 의는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롬 3:22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누구를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롬 3: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마암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얻는 의입니다. 여기서 속량이라는 단어는 몸값, 속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예제도가 있을 때 누군가가 노예를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면 그 노예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값을 주고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목숨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불의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의인이 되고 장차 오는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임금님은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임금님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그들을 다시 혼인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청함 받은 사람들은 종들을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후에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는데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임금님은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임금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사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러분! 이 비유에 보면 임금님은 많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그 초대에 응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 예복은 손님들이 준비한 예복이 아니라 임금님이 준비한 예복이었습니다. 많은 손님 중에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임금님의 사환들에게 손발이 결박을 당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졌으며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갈 3:27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의 부활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3장의 표현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의로워진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표현을 빌리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이번에 김민집사의 아버지이시고 저의 큰 동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80평생을 주님을 믿지 않다가 임종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족들은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만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직전에 주님을 영접했으나 주님의 의가 그분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후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었던 그분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보좌 심판을 받을 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실버 예배를 하면서 어르신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르신들이 교회를 못 나오시고, 주님을 위하여 큰일은 못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꼭 붙들라는 것입니다. 혹시 죽음의 순간이 오거든 반드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 때문에 장차 오는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놓지 말고 모두가 장차 오는 심판을 통과하고 영생복락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3. 절제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두 번째 메시지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그때의 말씀과 중첩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서신서들을 종합해서 보면 바울이 말한 절제는 육신의 욕망 즉 육신적인 욕구에 대한 절제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절제입니다. 다른 표현을 하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고 또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절제의 메시지는 전체 문맥을 볼 때 장차 오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는 심판은 첫 번째 대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 후에 받을 심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제해야 할 이유가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절제해야 할 이유는 이 땅에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①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절제해야 합니다. 마 16:2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육신이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주님의 뜻과 상치 된다면 절제해야 합니다.
②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절제해야 합니다. 약 4:4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은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③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절제해야 합니다. 고전 9:27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육신이 원하는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을 따르려고 하는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④심은 것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절제해야 합니다. 갈 6:8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과일을 한 상자 샀는데 몽땅 썩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의 결과가 하나님 보시기에 썩은 과일과 같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히 12:17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그는 에서입니다. 에서는 육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필요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구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허락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 버린 바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미국의 한 기독교 라디오 생방송 중에 한 농부가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농부는 자신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솔직히 기독교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 같은 사람이 당신들이 말하는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도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농장 바로 옆에는 신앙이 정말 좋은 농부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밭에서 자란 곡식이 예수를 믿는 농부의 곡식보다 거의 절반이나 많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 머리론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진행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농사를 열심히 짓는 분이시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네요. 하나님은 가을마다 결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연말에 결산하시는 분도 아니고요. 하나님의 결산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에 찾아온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하실 때 곡식을 많이 가진 것으로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혹은 얼마나 세상적으로 성공했느냐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오는 심판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의로우신 분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의를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절제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서처럼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늘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시고,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 마시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