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바로 이 맛이야! #1 시금치 나물
중국이 아무리 요리의 천국이고 땅덩이가 넓은만큼 식재료가 풍성하다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그 무수한 식재료가 그림의 떡이다.
중국에 있으면서 자주 생각났던 식재료, 시금치. 정확히 말해서 섬초라든가 포항초라 불리는 시금치다. 하늘을 향해 주책없이 커다래지는 잎파리보다, 땅과 가깝게 잎파리를 펼치는, 바닷가 근처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시금치는 뿌리부터 그 자태가 다르다.
색깔 선명한 뿌리에 짤막한 이파리들이, 작은 고추가 매운게 당연하다는 듯, 얼마나 달달 상큼한 맛을 내는지, 중국에서 흔하게 보았던 시금치와 비할 바가 아니다.
끓는 물에 1분, 짧게 데친다. 숨만 살짝 죽여, 이파리의 개성이 살아있을 때 건져낸다. 발긋발긋 뿌리까지,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생기롭게 데쳐서 소금 약간, 참기름과 깨만 솔솔 뿌려서 대충 무쳐낸다. 대충인데 그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단맛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나는 대놓고 단 것들에겐 흥미가 없다. 어릴 때부터 특이하게도 초콜릿, 사탕, 아이스크림 등을 싫어했다. 과유불급이란 어휘를 이런 데 사용하는 게 적절할까 싶지만, 넘쳐서 좋을 것 없는 것은 음식 맛에서도 진리지 싶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은 푸성귀 같다가도 씹을수록 더욱 달달해지는 맛, 이런 단맛은 은근하면서도 생생하다. 푸성귀 본연의 맛을 가리지 않으면서 조화스럽게 내비치는 단맛은 대놓고 나 달아요, 하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밥 조금에, 시금치 나물 한 접시를 비운다. 서양식 샐러드의 드레싱 소스는 아무래도 화려하거나 자극적이다. 달다. 그러나 우리의 나물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단맛 외에 다른 단맛을 첨가하지 않는다. 그저 단맛을 강화시켜주는 소금, 그리고 고소함을 더해주는 참기름을 더할 뿐. 나물은 한국식 샐러드의 한 종류일 터. 나는 나물이 참 맛있다.
시금치 1키로를 사서 시금치 나물, 시금치 부침개, 시금치 된장국으로 한국의 맛을 만끽한다. 향기같은 단맛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CF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 이 맛이야!"
그래 바로 이 맛이야 #2 고사리나물
비빔밥 중에서도 산채 비빔밥을 좋아한다. 산에서 나는 푸성귀를 캐다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면서 말린 것을 다시 조리하여 밥 위에 올린 나물들, 그 나물들에게서 나는 진한 세월의 군내가 좋다. 고사리, 취나물, 곤드레 등의 나물들이 한데 담겨 나오는 한 그릇 비빔밥을 나는 다른 어떤 진수성찬과도 바꾸지 않겠다.
산채 나물은 특히 말린 후 조리할 때 더 맛있다. 산이라는 장소에서 고단함이 느껴지듯, 아마도 산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마지막 먹거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릿고개가 횡횡할 때, 먹을 것을 찾아 나서다 미친 곳이 산일 거고, 산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하고서야 기어코 찾아낸 먹거리가 산채일 것이다.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렸더라면 누구라서 산까지 올라와 나물을 캤겠는가? 약재를 얻을 요량이 아니라면. 산나물 서리라는 말이 있다니 내가 하는 상상이 그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지 싶다. 산나물 서리란 산나물을 어느 집 마당에 한껏 해다 주면 그 집에서 보리밥 한 술을 얻었다 해서 나온 말이란다.
생 산채도 그것이려니와 특히 말린 숙채 산나물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보면, 이 또한 우리 조상들의 허기를 위한 처방이었지 싶다. 봄이나 가을 한창 때 나물을 많이 캐두었다가 그 일부를 겨울의 먹거리를 위하여 말려 두었을 것이다. 수분을 날려서 건조시켜야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쉽게 말해 말린 나물이란 우리 조상의 자급자족 구휼식량이었을 것이다.
고사리는 대표적 산나물 중 하나다. 서구에서는 먹지 않는 식재료다. 심지어 중국도 고사리는 먹지 않는다. 독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동안 고사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네들의 안중에는 전혀 필요 없는 것, 쓸데없는 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어찌된 일인지, 임금님에게도 진상하는 식재료였다니, 역시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진실이다. 빈곤하니 방법을 생각했을 터이고, 그 방법은, 필요하지 않은 이들은 해보지 않았을 창의적 시도가 되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으레 하게 되는 삼색 나물 중 하나가 바로 고사리나물이다. 흰색으로 무나물이나 도라지나물, 푸른색으로 시금치나 취나물 등을 한다. 갈색나물로는 고사리나물을 하는데, 다른 나물로 대체 불가다. 흰색이나 푸른색을 제대로 살려줄 갈색, 이 색깔을 말린 고사리만큼 발색하는 것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말린 고사리의 진한 갈색은 색깔 그대로 햇볕에 그을린 흔적이다. 고사리는 싹이 난 지 오래지 않아 채취해야 먹거리로써 제격이다. 게다가 음지식물이라서 초록이 동색으로 모여 있는 산에서, 매의 눈이 아니고서는 찾아내기 힘들다. 하여 경험자가 초보자보다 수십 배는 더 잘 찾는다. 숨어있다는 얘기다.
끊어낼 때만 해도 초록색이던 것이 시간 속에서 햇빛을 받아들이며 갈색으로 변한다. 햇고사리를 삶은 후 햇빛에 말리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고사리의 몸이 품고 있던 수분이 다하면서 갈색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사리가 가지고 있던 독소도 사라진다고 한다. 게다가 풍미까지 더해진다. 기다림이 시간 동안 햇빛을 품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미 먹거리로 환생하기 위하여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지만 식탁의 요리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고사리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다. 말려서 쪼그라든 고사리의 몸체를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조리를 위해서 먼저 물에 담궈 두어야 한다. 그래야 쓴 맛도 빠진다. 그러나 담군 것만으로는 뻣뻣해진 몸체가 좀처럼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썩지 않은 채로 자신의 몸을 웅크리며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자면 그리 쉽게 풀어질 몸은 아니다. 인내의 시간만큼이나 유들 해질 시간이 필요한데, 한동안 뭉근한 불에 삶아내야 야들야들한 고사리의 식감이 살아난다.
조리를 위한 밑 준비의 시간이 이렇게나 번거롭고 오래다. 준비되었다. 먼저 들기름과 다진 마늘과 파를 고사리에 넣고 제대로 손맛을 보여준다. 양념이 잘 스며들게 조물조물 해야 한다. 달군 후라이팬에 다시 한 번 들기름을 두르고 고사리를 볶아준다. 기호에 따라 들깨를 넣기도 한다. 들깨를 넣을 때는 약간 물기 있게 볶아주고, 참깨를 넣을 땐 물기 없이 볶아준다. 좀 더 감칠맛이 있게 하려면 바지락이나 소고기를 넣어줘도 된다.
말린 후 식재료가 된 것들은 모두 식감으로 그 세월을 나타낸다. 식감이 남다르다. 야들야들 오독오독, 오롯이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다. 맛은 또한 어떠한가. 풋내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햇빛을 발효시키면 이런 맛일까, 도저히 무엇이라 단언할 수 없는 맛, 오미五味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곰삭은 맛이 입 안에 감돈다. 그런데도 자랑이라곤 하나 없는 자태라니. 임금님 상에 올렸다고는 하지만, 도리어 나는 고사리나물을 상에 올릴 때마다 처연한 존재감을 느끼곤 한다. 평생을 밭일에 시달린 윤기 없는 늙은 아낙네의 손가락처럼.
영화榮華라곤 어디 한 군데 찾아볼 수 없는 자태가 어찌나 소박하고 볼 성 없는 지 말이다. 고사리나물을 만들어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고사리나물 한 접시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는지. 그런데도 화려하지 않으니, 눈길이 가지 않는다. 밥상에 놓여 있으나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오직 알아보는 이들만 고사리에게 젓가락을 건넨다. 하여 나는 손님을 대접할 때면 자주 고사리나물을 조리한다. 화려하지 않는 모습이 갖고 있는 그 수수함이 좋아서 말이다. 수고가 감추어진 그 모습. 들뜨지 않은 겸손함이 마치 신앙 같아서 말이다. 나는 죽고 뜻은 살아있는 듯하여서 말이다.
고사리나물 한 웅큼을 입 안에 쓸어 넣는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탄성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그대로 내 나라의 맛이고 신앙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