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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계 토기인 ‘부뚜막형토기’ ‘반형토기’가 흥해에서 발견?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관계만큼 대외관계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곳도 드물다. 초기에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적 관계’로 시작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있어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 고구려 전성시대가 열리며 양국 사이에는 ‘고구려 우위’라는 일종의 불평등 관계가 성립된다. 이 시기 신라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고구려의 힘을 빌어 백제, 왜, 가야를 물리치며 고구려에 의지하게 된다.
6세기 이후 국력이 신장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에 대한 종속관계를 거부하며 ‘나제(羅濟)동맹’ 등 외교적 변신을 통해 고구려에 저항모드로 나선다. 6세기 후반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며 당과 연합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룬다.
‘외교에는 오로지 국익과 실리만 있을 뿐 명분이나 도덕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 소개할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우위’시절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이 있다. 신라가 군신(君臣), 형제의 예로 모시던 고구려는 어느 날 포항 북부까지 군대를 파견하며 신라를 압박한다. 장수왕이 대륙진출 대신 남하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양국은 서로 칼끝을 겨누는 사이가 됐다. 냉수리고분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이다. 무덤엔 이 시기 양국 사이의 갈등, 긴장관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6세기 흥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냉수리고분 속으로 떠나보자.
◆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기장 관계 고분에 투영=냉수리고분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해 있다. 도음산(384m)의 서측 자락과 용천저수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925번 지방도로 공사 중에 A지구 7호분이 훼손되면서 긴급발굴의 수요가 발생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990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안강 방면에서 동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6~7세기로 학자들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신라에서 동해 북부로 진출하던 시기 지방 유력 세력이거나 ▶고구려 남하시 신라를 압박하던 고구려의 유력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더욱이 이 비는 지난 회에서 언급한 냉수리신라비와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아 두 유적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고분이 조성된 6세기 신라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며 한반도 남부의 강자로 부상하며 북방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여서 고구려와도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 무덤엔 아슬아슬했던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묘제, 출토유물 상당수 고구려 영향 흔적=일단 냉수리고분은 직경 25m로 상당히 큰 규모다. 경주의 수장 급은 아니지만 상당한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 급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금은제 반지, 은제 허리띠, 세고리 장식, 은제 고리 등 화려한 유물과 뚜껑굽다리접시 등 400여점에 이르는 토기들이 줄토 되었다.
우선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측실(側室)이 달린 무덤 형태. 주 석실 옆에 따로 곁방이 달려있는데 학자들은 이 구조가 고구려 ‘이실’(耳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대박물관 박천수 관장은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석실묘의 평면 구조와 경주의 적석목관묘 축조 방식이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며 ‘이는 고구려 묘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부뚜막형토기’와 ‘반형(盤形)토기’도 학자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부뚜막형토기는 고구려 대표 토기 중 하나로 의례, 부장용으로 널리 쓰이던 양식이고, 다양한 형태의 쟁반(盤) 모양 토기도 고구려 유적지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곳 출토 유물 중 주목을 끄는 또 하나 유물이 있다. 바로 ‘각배’(角杯)라고 불리는 뿔잔이다.
이 뿔잔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의 기원을 두고 있는 유적으로 신라와 페르시아 등 서역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뿔잔은 신라와 가야는 물론 고구려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돼 삼국시대 고대 문화 교류와동서양의 문명 이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순흥리고분벽화에서도 고구려계 유적 발굴=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기록은 사서에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상당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한강을 따라 세력을 펼치며 충주(중원고구려비), 정선(애산성지) 등에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역사서에만 존재하던 고구려의 남진 흔적을 제일 먼저 확인해준 건 중원고구려비였다. 1979년 이 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남진 시기 고구려의 군사주둔 범위가 충주, 청주, 단양 일대에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5년 영주 순흥리고분벽화의 발견은 고구려 영토가 중원(中原)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돼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고구려 화풍이 뚜렷한 고분이 발견되자 학계에서는 ‘세기적 발견’이라고 흥분했고, 당시 방송국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하기도 했다.
1992년 냉수리고분의 발굴은 고구려 남진 한계를 이전의 학설보다 더 남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 범위가 중원과 영주를 넘어 영일, 흥해 등 포항 북부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고장’ 냉수리에는 이름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차가운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포항 냉수리고분.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포항 냉수리고분. 국립경주박물관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박물관
#냉수리고분군 #냉수리고분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만큼 대외관계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곳도 드물다. 초기에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적 관계’로 시작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있어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 고구려 전성시대가 열리며 양국 사이에는 ‘고구려 우위’라는 일종의 불평등 관계가 성립된다. 이 시기 신라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고구려의 힘을 빌어 백제, 왜, 가야를 물리치며 고구려에 의지하게 된다.
6세기 이후 국력이 신장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에 대한 종속관계를 거부하며 ‘나제(羅濟)동맹’ 등 외교적 변신을 통해 고구려에 저항모드로 나선다.
6세기 후반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며 당과 연합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룬다.
‘외교에는 오로지 국익과 실리만 있을 뿐 명분이나 도덕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 소개할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우위’시절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다. 신라가 군신(君臣), 형제의 예로 모시던 고구려는 어느 날 포항 북부까지 군대를 파견하며 신라를 압박한다. 장수왕이 대륙진출 대신 남하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양국은 서로 칼끝을 겨누는 사이가 됐다. 냉수리고분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이다. 무덤엔 이 시기 양국 사이의 갈등, 긴장관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6세기 흥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냉수리고분 속으로 떠나보자.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
◆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기장 관계 고분에 투영=냉수리고분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해 있다. 도음산(384m)의 서측 자락과 용천저수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안강 방면에서 동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6~7세기로 학자들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신라에서 동해 북부로 진출하던 시기 지방 유력 세력이거나 ▶고구려 남하시 신라를 압박하던 고구려의 유력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더욱이 이 비는 지난 회에서 언급한 냉수리신라비와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아 두 유적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고분이 조성된 6세기 신라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며 한반도 남부의 강자로 부상하며 북방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여서 고구려와도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내부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묘제, 출토유물 상당수 고구려 영향 흔적=일단 냉수리고분은 직경 25m로 상당히 큰 규모다. 경주의 수장 급은 아니지만 상당한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 급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금은제 반지, 은제 허리띠, 세고리 장식, 은제 고리 등 화려한 유물과 뚜껑굽다리접시 등 400여점에 이르는 토기들이 줄토 되었다.
우선 이 고분이 고구려계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橫穴式石室) 형태라는 점에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측실(側室)이 달린 무덤 형태. 주 석실 옆에 따로 곁방이 달려있는데 학자들은 이 구조가 고구려 ‘이실’(耳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대박물관 박천수 관장은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석실묘의 평면 구조와 경주의 적석목관묘 축조 방식이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며 ‘이는 고구려 묘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부뚜막형토기’와 ‘반형(盤形)토기’도 학자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부뚜막형토기는 고구려 대표 토기 중 하나로 의례, 부장용으로 널리 쓰이던 양식이고, 다양한 형태의 쟁반(盤) 모양 토기도 고구려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이다.
이곳 출토 유물 중 주목을 끄는 또 하나 유물이 있다. 바로 ‘각배’(角杯)라고 불리는 뿔잔이다. 이 뿔잔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유적으로 신라와 페르시아 등 서역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뿔잔은 신라와 가야는 물론 고구려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돼 삼국시대 고대 문화 교류와 동서양의 문명 이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순흥리고분벽화에서도 고구려계 유적 발굴=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기록은 사서에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상당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한강을 따라 세력을 펼치며 충주(중원고구려비), 정선(애산성지) 등에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역사서에만 존재하던 고구려의 남진 흔적을 제일 먼저 확인해준 건 중원고구려비였다. 1979년 이 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남진 시기 고구려의 군사주둔 범위가 충주, 청주, 단양 일대에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5년 영주 순흥리고분벽화의 발견은 고구려 영토가 중원(中原)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돼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고구려 화풍이 뚜렷한 고분이 발견되자 학계에서는 ‘세기적 발견’이라며 흥분했고, 당시 방송국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하기도 했다.
1992년 냉수리고분의 발굴은 고구려 남진 한계를 이전의 학설보다 더 남하시켜 이 역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구려의 영향력 범위가 중원과 영주를 넘어 영일, 흥해 등 포항 북부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고장’ 냉수리에는 이름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차가운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만큼 대외관계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곳도 드물다. 초기에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적 관계’로 시작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있어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 고구려 전성시대가 열리며 양국 사이에는 ‘고구려 우위’라는 일종의 불평등 관계가 성립된다. 이 시기 신라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고구려의 힘을 빌어 백제, 왜, 가야를 물리치며 고구려에 의지하게 된다.
6세기 이후 국력이 신장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에 대한 종속관계를 거부하며 ‘나제(羅濟)동맹’ 등 외교적 변신을 통해 고구려에 저항모드로 나선다.
6세기 후반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며 당과 연합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룬다.
‘외교에는 오로지 국익과 실리만 있을 뿐 명분이나 도덕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 소개할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우위’시절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다. 신라가 군신(君臣), 형제의 예로 모시던 고구려는 어느 날 포항 북부까지 군대를 파견하며 신라를 압박한다. 장수왕이 대륙진출 대신 남하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양국은 서로 칼끝을 겨누는 사이가 됐다. 냉수리고분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이다. 무덤엔 이 시기 양국 사이의 갈등, 긴장관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6세기 흥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냉수리고분 속으로 떠나보자.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
◆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기장 관계 고분에 투영=냉수리고분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해 있다. 도음산(384m)의 서측 자락과 용천저수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안강 방면에서 동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6~7세기로 학자들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신라에서 동해 북부로 진출하던 시기 지방 유력 세력이거나 ▶고구려 남하시 신라를 압박하던 고구려의 유력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더욱이 이 비는 지난 회에서 언급한 냉수리신라비와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아 두 유적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고분이 조성된 6세기 신라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며 한반도 남부의 강자로 부상하며 북방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여서 고구려와도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내부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묘제, 출토유물 상당수 고구려 영향 흔적=일단 냉수리고분은 직경 25m로 상당히 큰 규모다. 경주의 수장 급은 아니지만 상당한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 급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금은제 반지, 은제 허리띠, 세고리 장식, 은제 고리 등 화려한 유물과 뚜껑굽다리접시 등 400여점에 이르는 토기들이 줄토 되었다.
우선 이 고분이 고구려계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橫穴式石室) 형태라는 점에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측실(側室)이 달린 무덤 형태. 주 석실 옆에 따로 곁방이 달려있는데 학자들은 이 구조가 고구려 ‘이실’(耳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대박물관 박천수 관장은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석실묘의 평면 구조와 경주의 적석목관묘 축조 방식이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며 ‘이는 고구려 묘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부뚜막형토기’와 ‘반형(盤形)토기’도 학자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부뚜막형토기는 고구려 대표 토기 중 하나로 의례, 부장용으로 널리 쓰이던 양식이고, 다양한 형태의 쟁반(盤) 모양 토기도 고구려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이다.
이곳 출토 유물 중 주목을 끄는 또 하나 유물이 있다. 바로 ‘각배’(角杯)라고 불리는 뿔잔이다. 이 뿔잔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유적으로 신라와 페르시아 등 서역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뿔잔은 신라와 가야는 물론 고구려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돼 삼국시대 고대 문화 교류와 동서양의 문명 이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순흥리고분벽화에서도 고구려계 유적 발굴=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기록은 사서에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상당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한강을 따라 세력을 펼치며 충주(중원고구려비), 정선(애산성지) 등에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역사서에만 존재하던 고구려의 남진 흔적을 제일 먼저 확인해준 건 중원고구려비였다. 1979년 이 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남진 시기 고구려의 군사주둔 범위가 충주, 청주, 단양 일대에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5년 영주 순흥리고분벽화의 발견은 고구려 영토가 중원(中原)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돼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고구려 화풍이 뚜렷한 고분이 발견되자 학계에서는 ‘세기적 발견’이라며 흥분했고, 당시 방송국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하기도 했다.
1992년 냉수리고분의 발굴은 고구려 남진 한계를 이전의 학설보다 더 남하시켜 이 역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구려의 영향력 범위가 중원과 영주를 넘어 영일, 흥해 등 포항 북부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고장’ 냉수리에는 이름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차가운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 만큼 대외관계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곳도 드물다. 초기에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적 관계’로 시작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있어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 고구려 전성시대가 열리며 양국 사이에는 ‘고구려 우위’라는 일종의 불평등 관계가 성립된다. 이 시기 신라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고구려의 힘을 빌어 백제, 왜, 가야를 물리치며 고구려에 의지하게 된다.
6세기 이후 국력이 신장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에 대한 종속관계를 거부하며 ‘나제(羅濟)동맹’ 등 외교적 변신을 통해 고구려에 저항모드로 나선다.
6세기 후반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며 당과 연합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룬다.
‘외교에는 오로지 국익과 실리만 있을 뿐 명분이나 도덕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 소개할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우위’시절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다. 신라가 군신(君臣), 형제의 예로 모시던 고구려는 어느 날 포항 북부까지 군대를 파견하며 신라를 압박한다. 장수왕이 대륙진출 대신 남하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양국은 서로 칼끝을 겨누는 사이가 됐다. 냉수리고분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이다. 무덤엔 이 시기 양국 사이의 갈등, 긴장관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6세기 흥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냉수리고분 속으로 떠나보자.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
◆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기장 관계 고분에 투영=냉수리고분군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해 있다. 도음산(384m)의 서측 자락과 용천저수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안강 방면에서 동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6~7세기로 학자들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신라에서 동해 북부로 진출하던 시기 지방 유력 세력이거나 ▶고구려 남하시 신라를 압박하던 고구려의 유력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더욱이 이 비는 지난 회에서 언급한 냉수리신라비와도 1km밖에 떨어지지 않아 두 유적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고분이 조성된 6세기 신라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며 한반도 남부의 강자로 부상하며 북방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여서 고구려와도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포항 냉수리고분 발굴 당시 내부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묘제, 출토유물 상당수 고구려 영향 흔적=일단 냉수리고분은 직경 25m로 상당히 큰 규모다. 경주의 수장 급은 아니지만 상당한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 급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금은제 반지, 은제 허리띠, 세고리 장식, 은제 고리 등 화려한 유물과 뚜껑굽다리접시 등 400여점에 이르는 토기들이 줄토 되었다.
우선 이 고분이 고구려계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橫穴式石室) 형태라는 점에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학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측실(側室)이 달린 무덤 형태. 주 석실 옆에 따로 곁방이 달려있는데 학자들은 이 구조가 고구려 ‘이실’(耳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북대박물관 박천수 관장은 ‘냉수리고분은 고구려 석실묘의 평면 구조와 경주의 적석목관묘 축조 방식이 결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며 ‘이는 고구려 묘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부뚜막형토기’와 ‘반형(盤形)토기’도 학자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부뚜막형토기는 고구려 대표 토기 중 하나로 의례, 부장용으로 널리 쓰이던 양식이고, 다양한 형태의 쟁반(盤) 모양 토기도 고구려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이다.
이곳 출토 유물 중 주목을 끄는 또 하나 유물이 있다. 바로 ‘각배’(角杯)라고 불리는 뿔잔이다. 이 뿔잔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유적으로 신라와 페르시아 등 서역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뿔잔은 신라와 가야는 물론 고구려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돼 삼국시대 고대 문화 교류와 동서양의 문명 이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순흥리고분벽화에서도 고구려계 유적 발굴=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기록은 사서에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상당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한강을 따라 세력을 펼치며 충주(중원고구려비), 정선(애산성지) 등에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역사서에만 존재하던 고구려의 남진 흔적을 제일 먼저 확인해준 건 중원고구려비였다. 1979년 이 비의 발견으로 고구려의 남진 시기 고구려의 군사주둔 범위가 충주, 청주, 단양 일대에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5년 영주 순흥리고분벽화의 발견은 고구려 영토가 중원(中原)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돼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고구려 화풍이 뚜렷한 고분이 발견되자 학계에서는 ‘세기적 발견’이라며 흥분했고, 당시 방송국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하기도 했다.
1992년 냉수리고분의 발굴은 고구려 남진 한계를 이전의 학설보다 더 남하시켜 이 역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구려의 영향력 범위가 중원과 영주를 넘어 영일, 흥해 등 포항 북부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고장’ 냉수리에는 이름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차가운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