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5
11월20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세계 젊은이의 날, 성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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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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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35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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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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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hWuQHXGw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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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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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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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전례의 주기를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모아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에 ‘온 천하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시며 결국은 당신의 왕권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다.(2사무 5,1-2) 그러나 다윗 왕권과 그리스도의 왕권은 차원이 서로 다르다. 다윗의 왕권은 구원적 차원에 관여되어있긴 하나, 지상의 왕권이며, 그리스도의 왕권은 신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마음에서 죄악을 멀리할 때 실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3,35-43: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며 서로 대립적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인들에게 조롱과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35.37절)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는, 예수가 정말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35절),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으로 달린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38절)이라는 명패도 사형에 처하게 된 이유보다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즉, 사랑하고,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은총으로 구원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 절대 자유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강도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40-42절)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도이다. 구약의 많은 기도가 이러한 형태이다.(시편 104,8; 120,5 참조) 그러기에 그 강도 편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이미 신적인 분이시며, 그분이 맞이하는 죽음은 오직 참되고 유일한 ‘왕국’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종말론적 왕국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즉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구원이 바로 그 순간 보장되었다. 바로 그분의 죽음의 ‘오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었다. 첫 번째로 회개한 한 살인자가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하늘나라가 오늘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로 그 ‘선물’이다.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게”(콜로 1,13-14) 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아드님의 나라’는 ‘어둠의 권세’(콜로 1,13) 즉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다. ‘아드님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음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찬가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 만물이 그분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듯이 세상 만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형상’이다. 콜로 1,15-17절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실 뿐만 아니라, 끝이시기도 하다. 즉 그분은 만물을 존속게 하시며 모든 창조물의 마지막 목적지이신 당신께로 향하게 하신다. 즉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 16)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또한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맡겨져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도정에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절대 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며 교회라는 공간을 통해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력을 뜻한다. 즉 그분의 풍부한 생명력이 교회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절대 통치권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생명의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모두 임금이신 그분의 ‘통치’에 조건 없이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 모든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끔 하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생활로써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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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김한수 토마스 신부님(화요일아침 예술학교 교장)]
<멀어지면 다가오는>
연중 마지막 주일. 보편 교회는 매년 세 개의 다른 복음사화를 통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가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최후의 심판 날 사람의 아들이 인류의 목자로 나타날 것임을 예고합니다.(마태 25,31ㄴ-48) 나해. 빌라도와의 대화를 봉해 당신은 영원한 왕이심을 암시합니다.(요한 18,33-37)
다해인 오늘 복음에서는 십자가 위에 계신 메시아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루카 23,36 ㄴ -43) 다양한 일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속 정치권력을 넘어 세상의 방식, 이해, 바람과는 전혀 다름을 일깨웁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그렇게 색다른 주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감을 압니다. 그 색다른 다스림 아래의 삶을 오늘은 더욱 색다르게 살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다운 면모는 권력과 다스림이 아닌 사랑과 봉사에서 비롯됩니다."라고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Pope Emeritus)은 표현합니다.
주님의 다스림은 권력의 절대화와 사유화, 권한의 오용과 남용. 정쟁과 이어지는 정치보복 등 세속 정치권력에서 엿볼 수 있는 그런 통치행위와는 사뭇 다름을 그리스도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박하게는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나를 못되게 대하는 상대를 사랑하고, 나보다 못나고 모자란 사람을 존중하는 가운데 주님의 왕다운 면모가, 주님의 다스림이 드러남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르며 배워야 합니다. 그 다스림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주님의 다스림에서 멀어질 때. 사랑과 봉사가 아닌 권력과 지배가 다스림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이해하기보다는 강요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되값아 주고, 존중하기보다 존중받고자 하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죄의 결과로 이어진 것처럼. 온갖 죄를 짓기 위해 하느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멀어졌기에 온갖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것치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났기에 자기 욕심만을 채우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에서 멀어지면 세상의 다스림 아래 살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다스림을 하느님의 다스림처럼 여기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게 됩니다.
정치철학에서는 이 허위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을 마치 ~처럼 대하는 의식이 피어납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허위의식이 뿌리를 내립니다. 허위의식이 자리할 때.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대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대할 때, 허위의식이 자라납니다. 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물러야 함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림 대하며 살았던 시간은 없었는지. 하느님이 아닌 것율 하느님처럼 대하려는 허위의식의 씩이 피어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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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고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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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정규현 시몬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임금다움>
성경에서 ‘임금’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인식과 결을 달리합니다. 신의 아들 신의 현현이라 여겨지며 절대 권력을 누렸던 여타의 ‘임금’과 달리 하느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으로서의 임금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독한 삶의 끝에서 ‘나’를 위한 죽음을 선택하셨던 예수님을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런 모독과 조롱, 비난은 세상적인 인식이 바탕에 있습니다. 세상적인 결과로만 한정하는 구원에 대한 해석, 또 내 생각으로만 가름하는 성공과 실패, 명예와 치욕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하십니다.
복음의 전개를 통해 세상적인 눈에 나쁜 결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이는 하느님의 것이며, 또한 진정한 구원을 향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 생각과 눈으로 가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의 일들을 평가하고, 그것이 모욕과 조롱을 가져오더라도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욕심, 세상적 이익 등 하느님의 것이 아닌 많은 것 때문에 나를 투신하고 내던지고자 하는 생각을 쉽게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자리한 세상적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과 하느님의 뜻을 향한 선택으로 복음은 초대합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왕직’을 부여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셨던 ‘임금다움’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봉사하고, 나를 내어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복음을 묵상하며 어떤 편견과 모욕이 있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면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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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한준 롯젤로 신부님]
<스스로 자신도 못 지키는 왕>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가 불안감에 휩싸였을 때, 여러 종류의 투자로 짧은 시간에 막대한 부를 창출한 젊은 사람들을 ‘영 앤 리치’라고 부릅니다. 단기간에 수백억의 자산가가 된 이들은 자신의 투자 방식과 마음가짐에 대한 자서전을 출간하며 제2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가 또 다른 영 앤 리치를 꿈꾸며 그들의 출판기념회에 참가하고, 강의를 들으려 몰려들고 있습니다. 어느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단기간에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왜 이렇게 투자에 열광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빨리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요.”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으니까요. 저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싶어요.” 이제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자유롭다고 여깁니다.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 임금이 되어달라고 청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수 아브네르가 죽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침상에서 피살된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보호해 줄 힘세고 강한 왕이 필요했기에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했던’ 다윗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와 신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많은 돈을 모으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센 왕을 필요로 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사람들의 빈정거림, 조롱, 모독의 중심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왕이라고?”라는 비난이 가득합니다. 모름지기 왕이고 메시아라면 스스로 자신을 구할 힘이 있어야 남들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구하고 남들을 구하는 힘 있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서 남들을 구하는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그 무능함 속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전능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돈과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십자가라는 왕좌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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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명현 미카엘 신부님]
<나의 절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림절을 한 주 앞둔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democracy) 또는 ‘민주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즉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 선거는 다수결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가장 진보된 정치제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민주주의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도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거나 무슨 큰 사업을 할 때 교우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민주적으로 추진한다는 면에서는 민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격상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명과, 신약시대에 주어진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 민주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계시종교입니다.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님께서 전해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운영과 사업은 민주적이어야 하지만, 교회의 신앙과 교리체계는 민주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과 교리까지도 민주적이라면, 다수결로 교리를 바꾸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더이상 계시종교일 수 없습니다.
신자들과 대화를 해 보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배워온 잣대로 교회를 평가하는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의 중심이 되어 세상의 그릇된 이념과 죄상을 비판하고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존재가 신앙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유일한 절대자로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연중 시기를 마치는 이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골고타산 위 십자가에 처참한 모습으로 외로이 달려 계신 예수님.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해보라지.”라며 빈정거리는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한 겸손한 죄수가 고백합니다.
“예수님, 선생님, 선생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라는 백부장의 고백도 들려옵니다.
2천여 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회개한 죄수의 마음으로, 그 백부장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왕’이시라 고백합니다.
긴 연중 시기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도, 우리를 미혹시키는 세속의 어떤 사상과 물질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임금, 절대자로 고백하는 대축일이 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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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강찬석 바오로 신부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을 계기로 세상이 크게 바뀐 것이 하나 있다면,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그동안 왕이 다스리던 왕정 체제들이 붕괴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고 교회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제정합니다. 세상은 왕권이 붕괴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들이 세워지고 있는데, 교회는 왕을 운운하며 거꾸로 가는 것인가?
그렇기 보다는, 그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황제와 왕들이, 신이 준 권한으로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면서, 힘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수많은 목숨을 죽게 만들었기에,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권력은 결국 잘못되었고,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유일하고 영원한 왕으로 모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라는 믿음을 교회가 온 세상에 다시금 선언한 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은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그 핵심이 표현되고 있는데: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5-26. 28.)
- 그리스도의 권력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서 군림하고 누리는 권력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돌보고 지탱해주는 봉사의 권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이 기준을 가지고 세상의 권력을 바라보고,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곤 했던 것이고, 종교 스스로에 대해서도, 자신이 또 다른 권력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해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바라는 지도자며 영도자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합니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몰려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다윗)이셨습니다.”
- 위에서 명령만 하거나, 뒤에서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은 책임지지 않는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앞장서고 모범을 보이는 진실한 영도자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채워주는 인도자를 만날 때 ‘우리’라는 친근하고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부님’, ‘우리 회장님’, ‘우리 주교님’... 그리고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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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게 있습니다>
루카 23,35ㄴ-43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있습니다>
당신께서 계셔도
당신께서 계시지 않음은
당신의 품 안에
당신은 없고
당신의 벗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도
당신께서 계심은
당신의 벗들의 품 안에
당신의 벗들은 없고
당신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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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 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 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 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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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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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에페소 기도의 집)]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 오른 편에 매달린 오른편의 죄수가 뉘우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당신과 함께 낙원에 들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 죄수처럼 우리 인간의 궁극적 바람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엉적인 한해를 마치는 시기에 즈음해서 낙원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가 합니다.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는 정원을 의미합니다. 중동지방의 종교는 현세의 권력자들의 생활에서 상징을 빌려 신들의 생활을 묘사합니다. 즉 신들은 생명의 물이 흐르고 여러 가지 기묘한 나무들 가운데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축제를 지내며 사는데, 이 생명의 나무 열매는 불사신들에게 음식이 됩니다. 주위에 신성한 정원들로 둘러싸인 지상의 신전들은 바로 이 원형의 모방입니다. 이런 상징들은 일단 다신론적인 요소가 정화되자 성서 안에 당신의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주저없이 묘사하며, 정원과 나무도 잠언 형식으로 인용합니다(창세 13,10; 에제 31,8-9.16-18).
이 새 낙원에서는 하느님이 거처하는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솟아 나오고, 그 물가에는 신기한 나무들이 다 하느님 백성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치유를 줍니다. 구세사의 끝에 회복될 낙원생활은 태초에 에덴의 생활과 같은 특징으로 묘사됩니다. 즉 자연의 기막힌 풍요로움이 있고 태평성대, 곧 사람들 사이에 평화뿐만 아니라 자연 및 동물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며 순수한 기쁨이 있고 모든 고통과 죽음이 극복되며 태고의 뱀은 정복되고 영생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표상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죄가 초래한 현재의 처지와는 달리, 온갖 시련과 타락의 가능성이 베제되어 있는 인간 본래의 상태입니다.
신약은 하느님의 계획의 마지막 비밀을 알려줍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혜의 원천이시고 바로 지혜 자체이시며 새 아담이시고 그분을 통해 인류는 종말론적 상태에로 가까이 갑니다. 유혹을 받으실 때 악마이며 사탄인 옛 뱀을 쳐 이기신 그분은 낙원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들짐승들과 같은 죄수와 함께 사십니다. 그분은 기적을 통해 죽음과 병고가 이제 극복 되었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서 이제 열린 종말론적 낙원의 선물을 얻게 됩니다.
낙원은 하느님의 거소인 만큼 이 세상 밖에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로는 하느님의 거소는 하늘에 있습니다. 가끔 낙원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가장 높은 하늘과 동일시 되는 곳이며 바오로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관상하고 영적으로 황홀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수든 그 누구든지 간에 그분과 함께하는 그 곳과 그 시간 자체가 참된 낙원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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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
<도둑의 기술, 왕의 자질>
“아버지, 제게도 도둑질 기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느 날 아들이 대도大盜로 이름난 아버지에게 청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직접 도둑질에 나섰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큰 저택의 담장을 몰래 넘고 온갖 경비 시스템을 피해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커다란 옷장이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습니다. “이 옷장 안에 들어가서 명품 옷가지들을 골라 오너라.” 아들이 옷장에 들어간 순간 아버지는 냉큼 옷장 문을 닫고 밖에서 빗장까지 걸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집 밖으로 나와 집 대문을 쾅쾅 두드려 가족들을 다 깨운 다음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 아들이 진이 다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버럭 소리 질렀습니다. “아버지! 도대체 왜 나를 그 옷장에 가두신 거예요? 잡힐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도망치려고 머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고요!”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게 바로 도둑질에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점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왕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름 없는 시골 처녀의 아들로, 출생부터 시련의 연속인 그런 삶으로 내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또 다른 이름, 바로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죄와 죽음의 손에서 ‘훔쳐내기 위해’ 예수님은 직접 죄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셨고,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하여 불의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이 되셨습니다. 자기 죄 없이 다른 이의 죄를 짊어지는 일,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왕의 자질’이었습니다. (생활성서 2022년 11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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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
-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 -
오늘은 연중 제34주일, 마지막 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또 제37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자 제38차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라는 제하에 “어려운 이들 향해 성모님처럼 나아가자”라며 담화문을 발표했고,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호철 주교는 ‘말씀의 시편’이라는 시편119장중 “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 119,147)라는 제하에 “직접접 만남과 소통으로 말씀을 선포해야한다.”는 시의적절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풍부하게 느껴집니다. 예나 이제나 힘들고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대축일의 유래가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온 세상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대히 기리는 축일을 제정하였고, 이어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으로 새로 명명하면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대림 제1주일 전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합니다.
까닭인즉 그리스도는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구분없이 모두를 다스리는 왕이며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한 것이며, 축일도 최고 등급인 대축일로 지정합니다. 아침 성무일도의 하느님 찬미는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웠는지요!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반영입니다. 성가연습 시 흥겹게 불렀던 아름다운 찬미들이 새삼 감동이었습니다.
1.“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2.“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할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수 있는님이여”-찬미가 1절
3.“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아침기도 후렴1.
4.“그분은 땅 극변까지 찬양을 받으시고 평화를 이룩하시리라.”-아침기도 후렴2.
5.“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있으소서.”-아침기도 후렴3.
우리 믿는 이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왕을 모시고 그리스도 왕국에서 내적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방향을, 중심을, 의미를, 길을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혼란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다릅니다. 궁극의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이신,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신, 삶의 길이신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늘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합시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합니다.
얼마 전 2013년 교황님으로 등극한 후 10년째, 다음과 같이 당신의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놓으시고 보내주신 곳에서 나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성 이냐시오의 날마다의 양심 성찰이 나에겐 참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고 나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사람들의 말을, 특히 작은 이들: 어린이들, 노인들, 가난한 이들의 말을 경청하게 합니다. 12월중 86회 생일이 가까워지는 지금 나는 고요함과 큰평화, 진정한 기쁨, 온전한 신심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중에, 미사거행중에,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교황인지요! 어떻게 살아야 우리도 교황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날로 잘 닮아갈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한결같이 다음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한결같이 찬미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찬미를 통해, 아버지를, 아드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숨쉬듯이 아버지를 찬미하고 아드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의 그리스도의 찬가는 얼마나 우주적이고 웅대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행복하게도 평생 매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 때마다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미가(콜로 1,12-20)를 통째로 부릅니다. 어디서 이런 끝없는 신비와 깊이를 지닌 찬미가를 만날 수 있겠는지요!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왕께 대한 찬미에서 가슴 떨리는 감동을 선사하며 찬미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왕의 정체가 환히 계시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왕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왕께 속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왕이기에 교회를 통해 서서히 확장되는 그리스도왕국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아드님을 찬미하는 삶에 늘 한결같은 열정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화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제1독서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영도자가 된 다윗은 평화의 왕,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스도왕을 통한 화해, 평화, 충만함임을 깨닫습니다.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미가 후반 내용이 참 반갑고 고무적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평화의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평화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찬미와 더불어 평화의 삶입니다. 미사은총이 바로 우리를 주님을 닮은 평화의 사람, 화해의 사람이 되게 하고 또 충만한 삶으로 이끕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주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안으로 수렴됨을 봅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이런 그리스도왕께서 선사하시는 평화가 우리 모두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참으로 평화가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인터뷰에서 전쟁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한 세기에 무려 3개의 세계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배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개탄했습니다. 주님이 간절히 바라는 바, 평화의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왕은 섬김의 왕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은 섬김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섬김의 왕으로서 주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지도자들도, 군사들도, 죄수 하나도 무지에 눈이 가려 그리스도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합니다만, 예수님은 의연하고 담담하고 침착합니다.
다만 눈밝은 죄수 하나만이 예수님을 알아 보며, 자신을 기억해 주십사 청하며 섬김의 왕, 그리스도께서 흔쾌히 이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늘 우리를 섬길 태세가 되어 있는 섬김의 왕, 그리스도왕입니다. 마침 금주 가톨릭평화신문 1면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섬김의 삶 모범 ‘영등포의 슈바이처’기리다. 서울대교구, ‘기억하다. 빛과 소금이 된 이들’ 두 번째 선우경식 원장 기림 미사 봉헌”이란 제목입니다. 그리스도왕을 닮는 길은 오직 하나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고 싶습니까?
1,늘 찬미의 삶을 사십시오.
2.늘 평화의 삶을 사십시오.
3.늘 섬김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상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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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23,37)
<나는 어떤 모습의 예수님을 원하는가?>
오늘은 전례력으로 '올 한 해(다해)의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새로운 한 해(가해)의 첫 주일'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우리의 왕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 우리를 살리시는 왕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왕은 첫째자리에 계신 분, 첫째자리에 계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루카23,35-43)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유다인들, 그들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던 메시아(임금.왕)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구세주)로 이 세상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원하던 모습으로 오시질 않고, 그와 정반대의 모습인 '초라한 모습으로', '낮은 자의 모습으로', '너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바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 그런 예수님을 믿겠다고, 사랑하겠다고, 따라가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지난 한 해 동안 그런 약속을 잘 지키고 실행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신 예수님을 늘 나의 삶의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왔는지...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인 '성서 주간'에 '말씀 안에서' 잘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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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L_j3KmPHH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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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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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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