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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8
#능동적순종 #수동적순종
그리스도께서 수동적으로 순종하시건,능동적으로 순종하시건,모두 당신자신의 인성의 의지에 따라 순종하신 것이다.왜냐하면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전에 하나님의 세 위격과 더불어 당신의 인성안에서 택하신 성도들의 구원방법을 의논하시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따라서 크게보면 수동적순종이라는 것도 결국 능동적순종에 포함된다.순종의 능수동여부는 단지 이땅에 계실때의 인성의 상태에 따른 표면적 구분에 불과하다.
#지옥강하
칼빈선생은 사도신경 해석에서 중복적이거나 순서에 맞지 않는 해석은 배제하였다.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를 십자가 고난이나 죽으시고 무덤에 계신 상태로 보는것은 칼빈선생의 해석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주님의 지옥강하의 진정한 의미는,주님께서는 사람으로서 영원전부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시고 한시도 이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으며,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도 그러하셨는데,죽으심으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아무런 사역도 하실수 없으신 한없는 답답함과 고뇌와 기다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주님의 령혼은 락원에 계셨는데 무슨 괴로움이냐고 할수 있겠으나,그건 우리의 관점이고 주님께는 락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시는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것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옥의 령들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은,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락원의 옥에 있는 성도들의 령혼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확증을 주신것이고,음부의 옥에 있는 불신자들의 령혼에게는 더이상 그들에게는 일말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벨기에신앙고백서 9.삼위일체의 성경적근거(6)
創世記 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形象을 따라 우리의 模樣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家畜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이 自己 形象 곧 하나님의 形象대로 사람을 創造하시되 男子와 女子를 創造하시고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over the livestock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on the earth.”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et ait : Faciamus hominem ad imaginem et similitudinem nostram : et præsit piscibus maris, et volatilibus cæli, et bestiis, universæque terræ, omnique reptili, quod movetur in terra. Et creavit Deus hominem ad imaginem suam : ad imaginem Dei creavit illum, masculum et feminam creavit eos.
καὶ εἶπεν ὁ Θεός Ποιήσωμεν ἄνθρωπον κατ᾽ εἰκόνα ἡμετέραν καὶ καθ᾽ ὁμοίωσιν· καὶ ἀρχέτωσαν τῶν ἰχθύων τῆς θαλάσσης καὶ τῶν πετεινῶν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ὶ τῶν κτηνῶν καὶ πάσης τῆς γῆς καὶ πάντων τῶν ἑρπετῶν τῶν ἑρπόντων ἐπὶ τῆς γῆς. καὶ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τ᾽ εἰκόνα Θεοῦ ἐποίησεν αὐτόν· ἄρσεν καὶ θῆλυ ἐποίησεν αὐτούς.
형상이란 말은 보이지 않거나 감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이거나 감각할 수 있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 위격의 형상을 따라 세 위격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신다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세 위격에 대한 보이거나 감각할 수 있게 표현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 세 위격은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도 감각할 수도 없지만, 그 영이신 하나님, 영이신 세 위격을 보이고 감각할 수 있게 드러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밖에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이시는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라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創世記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善惡을 아는 일에 우리 中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生命 나무 열매도 따먹고 永生할까 하노라 하시고
Then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in knowing good and evil. Now, lest he rea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et ait : Ecce Adam quasi unus ex nobis factus est, sciens bonum et malum : nunc ergo ne forte mittat manum suam, et sumat etiam de ligno vitæ, et comedat, et vivat in æternum.
Καὶ εἶπεν ΙΕΗΩΟΥΑ ὁ Θεός Ἰδοὺ Ἀδὰμ γέγονεν ὡς εἷς ἐξ ἡμῶν, τοῦ γινώσκειν καλὸν καὶ πονηρόν· καὶ νῦν μή ποτε ἐκτείνῃ τὴν χεῖρα καὶ λάβῃ τοῦ ξύλου τῆς ζωῆς καὶ φάγῃ, καὶ ζήσετα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마태福音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者라 하시니라
and behol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Et ecce vox de cælis dicens : Hic est Filius meus dilectus, in quo mihi complacui.
καὶ ἰδοὺ φωνὴ ἐκ τῶν οὐρανῶν λέγουσα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ἐν ᾧ εὐδόκησα.
성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자 기뻐하시는 이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만을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성자와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인성도 아우르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때 비로소 성자와 연합하셨기 때문에 성자의 효력으로 성부의 아들이라 불리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자와 연합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들이시라 불리시는 것이다.
마태福音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民族을 弟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聖靈의 이름으로 洗禮를 베풀고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euntes ergo docete omnes gentes : baptizantes eos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
πορευθέντες οὖν μαθητεύσατε πάντα τὰ ἔθνη, βαπτίζοντες αὐτοὺς εἰς τὸ ὄνομα τοῦ Πατρὸς καὶ τοῦ Υἱοῦ καὶ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중에서 아들은 성자 하나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베풀라 명령하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기보다는,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이 더 정확하고 진보된 것이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삼는다는 증표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아버지와 주인과 왕이 되신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직접 피흘려 죽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되게 하셨다는 것이며,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답게 살아갈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福音 1:35, 天使가 對答하여 이르되 聖靈이 네게 臨하시고 至極히 높으신 이의 能力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And the angel answered her,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therefore the child to be born will be called holy—the Son of God.
Et respondens angelus dixit ei : Spiritus Sanctus superveniet in te, et virtus Altissimi obumbrabit tibi. Ideoque et quod nascetur ex te sanctum, vocabitur Filius Dei.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ἄγγελος εἶπεν αὐτῇ Πνεῦμα Ἅγιον ἐπελεύσεται ἐπὶ σέ, καὶ δύναμις Ὑψίστου ἐπισκιάσει σοι· διὸ καὶ τὸ γεννώμενον ἅγιον κληθήσεται Υἱὸς Θεοῦ.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을 취한 인성에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라, 영원 전에 사람으로서 성자와 연합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그 자체이시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인성을 잉태하고 출산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까지 잉태하고 출산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을 성령께 의탁하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출산되게 하신 것이다.
고린도後書 13:13. 主 예수 그리스도의 恩惠와 하나님의 사랑과 聖靈의 交通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Gratia Domini nostri Jesu Christi, et caritas Dei, et communicatio Sancti Spiritus sit cum omnibus vobis. Amen.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ἡ ἀγάπη τοῦ Θεοῦ καὶ ἡ κοινωνία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사도 바울이 축복인사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한 것은 그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도 포함된 것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에서 조성된 피조물이라면 아무리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셨다고 하더라도 인성을 향해 우리의 주님이시라 하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우상숭배가 아니라 합당하고 정당한 것으로 가르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성자와 연합하시며 성령을 당신의 영으로 삼으신 인성이신 것이다.
요한一書 5:7-8. 證言하는 이가 셋이니 聖靈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合하여 하나이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Quoniam tres sunt, qui testimonium dant in cælo : Pater, Verbum, et Spiritus Sanctus : et hi tres unum sunt.
ὅτι τρεῖς εἰσιν οἱ μαρτυροῦντες, τὸ Πνεῦμα καὶ τὸ ὕδωρ καὶ τὸ αἷμα, καὶ οἱ τρεῖς εἰς τὸ ἕν εἰσιν.
세 증인인 성령과 물과 피가 합하여 하나라 하였으므로, 물과 피는 각각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부를 물로 비유한 이유는 피조 세계의 생물들의 생명의 기원과 원천이 물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성부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피로 비유한 이유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란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20191228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4장. #아브라함 #멜기세덱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하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이주하여 거주하다가 주변국들과 전쟁이 일어나 전 재산과 가솔들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은 어쩌면 그 악한 지역에서 더이상 머무르지 말고 하루빨리 나오라는 하나님의 1차 경고일수도 있었다. 당시 롯은 아직 소유물과 가솔들이 픙부하였으므로 삼촌 아브라함 덕분에 그 재앙을 피한 후에 각성하고 거기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면 적어도 패가망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그곳의 자원과 문명이 살기 좋아서 계속 머무르다가 결국에는 모든 재산과 아내도 잃고 두 딸과는 부지불식간에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되어 두고두고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굽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요셉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 분별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미움과 저주를 받아 자든지 깨든지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언제나 재앙을 당하게 된다. 바베론의 학문이 아무리 심오하고 왕의 만찬이 아무리 풍성하더라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지 않으면 이방 학문에 심취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사 음식에 탐닉하여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게 된다. 멸망 당할 가증한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교회에 똬리를 틀고 앉았을 때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 발람과 이세벨과 니골라의 가르침에 젖어들어 미혹을 당하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의롭고 출중한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근묵자흑을 거스를 수는 없으므로 가증하고 음란한 곳에 계속 머무르려다가는 설령 구원에서 떨어지지는 않을지라도 롯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자기 영혼의 몸뚱아리 하나만 겨우 건지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친아들처럼 아낀 롯이 포로로 잠혔다는 소식을 듣고 318명의 훈련된 용사들을 이끌고 그를 구출하러 간다. 아브라함이 데려간 용사 318명은 주변 연합군의 수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수인가. 규모로만 본다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것보다 더 어이가 없는 대결이다. 또한 그가 출격할 때는 오로지 롯을 구출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차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가망없어 보이는 절망스러운 열세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롯을 구출하러 출동하였고 수많은 적군을 대파하였으며 결국 롯과 그의 모든 소유를 되찾아 오게 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손으로 이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소돔 왕이 준다 하는 노략물을 받기를 거절하였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노략물의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의 규례가 되었으며 오늘날 복음의 시대에는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십일조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구약의 율법이 폐기됨과 동시에 십일조 규례도 폐기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십일조 규례는 아브라함을 근거로 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이 양극단의 견해를 모두 왜곡하고 오용하게 마련인데, 전자를 추종하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것처럼 그저 자기 마음에 어떠한 신령한 감동이 있거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곳에 기부하면서 복음대로 십일조를 대신하는 예물을 드렸다고 안도한다. 물론 자기 마음의 감동대로 드린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감동이 얼마나 지속적이고 꾸준한가를 생각해 본다면 자기가 드렸다는 것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후자를 추종하는 자들은 마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거짓 교사들과 같이 소속된 교회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참된 성도로나 교회 소속의 교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까지 정죄한다. 그러나 그러한 왜곡된 사상은 행위 구원론과 같이 참된 연보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율법주의 또는 공로주의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참된 연보는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십일조를 포함한 교회의 연보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되 어느 정도의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꾸준히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십일조가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어리고 연약한 신자들은 장성할 때까지 십일조를 기준으로 조금씩 연보 훈련을 해야 하고 장성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자기 믿음의 분량을 따라 더욱 자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힘에 부치도록 연보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울러 연보는 두가지로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교회 사역과 유지를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개인적인 구제이다. 자기 소득의 십일조를 기준으로 해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침 없이 이 둘의 적절한 균형을 맞추어 연보하는 것이 지혜롭고 유익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소득의 10%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너무나 절묘한 비율이다. 즉 신자의 입장에서 자기 소득의 10%는 사실 없어도 별 무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포기하기에는 아쉽고 아까운 금액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연약함과 탐욕을 아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요구하심으로써 신자들이 자기 생활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도록 신앙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여기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오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이어받은 참 대제사장이라 예언했으며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멜기세덱을 알 수 밖에 없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멜기세덱은 구약 시대에 이 땅에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본인이시라고 할 수 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의 이름의 뜻은 의와 평강의 왕인데 이 호칭은 그저 애굽의 바로나 가나안의 아비멜렉이나 살렘의 아도니세덱처럼 이 땅의 왕의 호칭만은 아니고 좀 더 신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신령한 뜻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란 뜻을 가지고 계시다. 구약의 인물 중에 왕으로 불리는 이름을 가진 자는 오직 멜기세덱 뿐이다.
멜기세덱에게는 육신의 부모도 족보도 태어난 날도 죽은 날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는 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영원 전부터 인자로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창세 때부터 인간들의 참 제사장으로 계셨으며 아브라함 시대에 잠시 살렘 왕으로 이 땅에 신령하게 오셔서 추후에 다시 오셔서 행하실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미리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자기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분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당대에나 그 후손들에게나 모든 자들보다 높은 인간이었다. 그런 아브라함이 기꺼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멜기세덱이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분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장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즉 아브라함은 사람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신데, 만약 멜기세덱의 제사 직분이 영원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 또한 영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은 영원하므로 멜기세덱의 제사 직분 또한 영원하다고 볼 수 있다. 영원한 제사 직분은 영원한 분만이 감당할 수 있으므로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제사 규례를 주셨으나 그 율법적인 제사는 너무나 미흡하고 불완전하여 사실은 죄사함을 받는데는 아무런 소용과 효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제사 율법을 그들에게 주신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방만하지 않고 순종하는지를 보시기 위함이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는 진정한 제사는 사실 멜기세덱이 닦아놓은 제사로 말미암아서다. 멜기세덱은 이 땅에 잠시 있었을 때 참 제사 기반을 마련하고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해 간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인물로 보았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하신 제사 직분과 효력이 매끄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순간에야 인성을 가지셨던 것이 아니라 성육신 이전에도, 더 나아가 창세 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신 인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교회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멜기세덱의 신비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20201228
#민수기 #Numbers 20:22-29
아론의 죽음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24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더라
광야 생활 40년째에 모세는 큰누이 미리암을 떠나보내야 했고, 가데스에서 물 때문에 백성들의 독한 원망을 들어야 했으며, 거기서 실책을 범해 여호와께로부터 징계를 받아야 했는데 급기야 이제는 친형 아론까지 떠나보내야 하는 연속적인 고난을 당해야 했다. 더군다나 아론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 자신이 저지른 실책으로 안한 것이어서 모세로서는 더욱 인간적인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세와 아론은 40년 전에 백성들이 정탐꾼들의 악평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죄로 20세 이상으로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여호와의 심판을 들었을 때 자기들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당사자 아론은 자괴감에 빠져 홀로 남아야 하는 모세를 위로하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했을 것이다.
40년 동안 완악하고 패역한 백성을 인도한 모세도 대단하지만, 대제사장으로서 40년 동안 섬겨온 아론도 모세만큼 온유하고 겸손하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애굽의 바로 앞에서는 언변이 어눌한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와의 말씀과 재앙을 선포하기도 했고, 첫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범죄로 죽게 되는 슬픔을 당했어도 잠잠히 이겨내었다. 이후로는 모든 일에 대제사장으로서 충실히 섬겼으며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에 모세와 함께 하였다. 초반에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모세가 구스 여인과 재혼한 것으로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40년 동안 여호와께서 맡기신 대제사장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따라서 자기의 직무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어쩌면 광야 생활 40년 째에 여호와께서 호르 산에서 생을 마감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죽음은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거나 노환이나 질병으로 큰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론의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미리 언제 죽을지 일러두셨고 죽는 당일에도 호르산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하였다. 아마도 아론도 모세처럼 죽을 때까지 그 시력과 기력이 전혀 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론은 남들이 다 두려워하는 죽음을 도리어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아론의 죽음에는 오직 모세와 아들인 엘르아살만이 대동할 수 있었다. 이는 40년 동안 대제샤장으로 섬겨 온 아론에게 있어서는 어찌보면 초라하고 쓸쓸한 임종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자기가 오랫동안 맡은 자리에서 떠나야 할 때에는 함께 했던 구성원들로부터 위로와 격려와 환송을 받기를 원하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그 어떤 환송도 차단하는 이러한 아론의 임종식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사람에게 기대하거나 바라지 말라는 여호와의 뜻이 내포된 것일 수도 있다. 오직 모세와 아들인 엘르아살만이 대동한 것은 그들이 단지 혈육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론의 죽음과 그 방식이 여호와께로부터 지시된 것인만큼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주관하고, 아들 엘르아살은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으로서 임명되기 위한 공적인 의식을 위한 목적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아론의 임종식은 소소하고 단촐했다. 아무런 허례허식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대제사장의 옷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물려 입힌 후에 그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물론 그 사이에 아론과 모세와 엘르아살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얼마나 오고 갔을지는 모른다. 단지 보통의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감회를 나누지 않았을까 추측해보는 정도이다. 이러한 아론의 임종식은 오늘날 걸핏하면 중세시대 로마카톨릭 못지 않은 휘황찬란한 허례허식을 일삼는 한국 기독교에 경종을 울린다.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은 자기 위의 형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려다가 죽게 되자 별다른 임명식도 없이 엉겁결에 형들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받았었다. 그 후로 대제사장인 아버지 아론을 도와 40년 동안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며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다. 엘르아살의 대제사장 임명식이 특별한 이유는, 여호와의 명에 의해 자기 아버지의 임종식과 더불어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르아살로서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매우 각별한 임명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리암이 죽었을 때와는 달리, 아론이 죽었을 때에 백성들은 무려 30일 동안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들로서는 큰 어르신인 아론의 부재와 공백이 매우 걱정되고 두려울만 했지만, 여호와의 섭리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온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마음을 쇄신할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211228
#여호수아 #Joshua 24:5-13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를 죽음의 위험에서 건지시고 모세가 한창 잘나갈 때인 40세에 불러서 쓰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죽이고 애굽에서 도망한 후 40년이 지나 부귀영화로나 기력으로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때인 80세에 호렙 산의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시고 당신의 대언자로 바로에게 보내셨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대언자인 모세의 대언자로 세움받고 모세와 함께 보냄을 받았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애굽을 열가지 재앙으로 초토화 시키시고, 그럼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진멸시키려고 군대를 끌고오자 홍해에서 전부 수장시켜버리셨다. 애굽 군대가 쫓아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은 것은 여호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가 아니라 단지 모세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절규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의 믿음없는 절규조차도 당신 자신을 향한 간구와 탄원으로 여기시고 밤새 동풍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그동안에는 불과 흑암으로 애굽 군대를 막으셨다. 광야에서의 40년은 사실 대부분 여호와 그리스도의 언약과 명령을 거역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징벌의 기간이었기 때문에 간략하게 많은 날을 거주하였다는 설명으로 끝난다. 여호수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애굽에서의 일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부모세대에서 비롯된 여호와의 인도하심 덕분이었다는 것을 다시 각인할 필요가 있었다.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해서 아모리 족속과 모압과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겪은 것이므로 그 모든 것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술사 발람은 자기 의지대로 여호와의 축복이나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자였어도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그리스도의 사랑만큼은 끊어내게 할 수가 없었고 도리어 그것이 여호와 그리스도 보시기에 망령된 짓이어서 결국 자멸하게 되었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벌하는 이야기에서는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말벌을 보내셨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는 않지만 여호수아에게는 그 사건이 매우 특별하게 기억되었을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붙잡은 것이 자신들의 능력 덕분이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그리스도의 섭리로 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게 된다. 하늘에서 돌덩이 같은 우박이 가나안 족속들만 타겟으로 해서 퍼붓는 것은 누가봐도 여호와 그리스도의 기적이라 인정하겠지만, 전투 중에 우연히 말벌 둥지가 있었고 아모리 두 왕이 그 말벌 둥지를 건드려 말벌의 공격을 당하게 되어 이스라엘에게 붙잡히게 된 것은 그저 하나의 운좋은 사건으로 치부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하필 말벌 둥지가 적진쪽에 있었다는 것과 그 말벌들이 이스라엘은 공격하지 않고 가나안 왕들과 군대를 공격했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은밀한 섭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자기들이 그 땅의 주인인줄 알고 열심히 터전을 가꾸며 풍요롭게 살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은 본래 주인인 이스라엘이 별다른 노력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미리 일궈놓게 한 여호와 그리스도의 은밀한 섭리의 결과였던 것이다.
#20161228
#기드온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군사들 중에서 미디안을 칠 3백 명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물가에서 손으로 물을 움켜 마치 개가 핥아 먹는 것처럼 손에 움킨 물을 핥아 먹는 자들 3백 명이었다. 나머지 군인들은 물가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물을 먹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손으로 물을 움켜 핥아 먹은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그 3백 명은 언제나 비상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자들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편하게 엎드려 물을 마시는 준비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 3백 명이 물을 먹는 방식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어보인다. 대다수의 군인들이 엎드려 물을 먹었으므로 그 방식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라고 본다면, 도리어 그 3백 명에게는 그 순간에 성령께서 동시에 감동을 주셔서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물을 먹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택하심은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과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 방법이라고 본다.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3백 명의 물을 먹는 방식을 '개가 핥아 먹는 것'과 같다고 기록된 것이다. 어떤 상황을 묘사할 때 '개' 같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매우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볼 때, 이 3백 명 또한 그렇게 비하하는 표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나로서는 성령께서 그 3백 명을 택하실 때,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개'처럼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들어쓰셔서 큰 역사를 해나가시기 때문에, 어쩌면 그 택하신 3백 명은 비록 전쟁하러 나오기는 했으나, 그 무리들 중에서도 딱히 내세울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취급을 받는 자들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