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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세우(世友) 지음
진제(眞諦) 한역
송성수 번역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하신 뒤로
꼭 백여 년이 찼을 때에
성교(聖敎)에서 다른 부[異部]가 일어나
곧 이롭지 못함[不饒益]을 이끌었다.
차츰차츰 주장함[執]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여러 부(部)가 일어났으니
저마다 아급마(阿笈摩)에 의지하여
그들의 주장을 말하면서 압도하려 하였다.
세우(世友)대보살은
대지(大智)와 각혜(覺慧)를 갖춘
석종(釋種)에서도 참된 비구인데
그것을 보고 그때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평등하게 모든 세간을 관찰하건대
갖가지의 소견이 떠돌았으나
모니의 말씀을 쪼개 나눈 것이니
그 여러 종(宗)을 설명해야겠다.
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피되
성제(聖諦)의 말씀으로 의지를 삼아
마치 모래 속의 금을 캐어내듯이
그의 진실을 골라 취해야 한다.
이와 같이 전해 들었다.
부처님 박가범(薄伽梵)께서 반열반하신 뒤로 백여 년이 지나니 성인께서 가신지도 오래되어 마치 해가 오래 전에 진 것과 같았다. 마갈타국(摩竭陀國) 구소마성(俱蘇摩城)의 왕인 무(無憂)라는 이는 남섬부주를 도맡아 다스리고 하나의 흰 일산을 받으며 사람과 신들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그때에 불법의 대중(大衆)이 처음 쪼개어졌다. 이를테면 네 대중[四衆]이 함께 대천의 다섯 가지 일[大天五事]을 논의하다가 뜻이 같지 않아 두 부로 나뉘어졌으니, 첫째는 대중부(大衆部)요 둘째는 상좌부(上座部)이다.
네 대중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용상중(龍象衆)이요, 둘째는 변비중(邊鄙衆)이며, 셋째는 다문중(多聞衆)이요, 넷째는 대덕중(大德衆)이다.
그 다섯 가지 일이란 아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 다른 유혹을 받음[餘所誘]과 앎이 없음[無知]과
망설임[猶豫]과 다른 이로 하여 깨쳐 듦[他令入]과
도가 소리로 인하여 일어남[道因聲故起]이니
이것을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 뒤에 곧 이 제2백 년경에 대중부 가운데서 세 부(部)가 흘러 나왔으니, 첫째는 일설부(一說部)요, 둘째는 설출세부(說出世部)이며, 셋째는 계윤부(雞胤部)이다.
그 다음 2백 년경에 대중부 가운데서 다시 한 부가 나왔으니 이 다문부(多聞部)이다.
그 다음 2백 년경에 대중부 가운데서 다시 한 부가 나왔으니 이 설가부(說假部)이다.
제2백 년이 다 찼을 때에 어느 한 출가 외도가 사도[邪]를 버리고 정법[正]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으니 이름은 대천(大天)이었다.
대중부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견문이 많았으며 정진(精進)하면서 제다산(制多山)에 살고 있었는데 그 부(部)의 승가와 함께 거듭 다섯 가지의 일을 상고(詳考)하다가 이로 인하여 서로 틀려 다투면서 세 부로 나뉘어졌으니, 첫째는 제다산부(制多山部)요, 둘째는 서산주부(西山住部)이며, 셋째는 북산주부(北山住部)이다.
이와 같이 대중부에서는 넷으로 쪼개지고 혹은 다섯으로 쪼개졌으니, 근본과 줄기를 따로따로 설명한 것까지 합하면 아홉 부가 된다.
첫째는 대중부요, 둘째는 일설부이며, 셋째는 설출세부요, 넷째는 계윤부이며, 다섯째는 다문부요, 여섯째는 설가부이며, 일곱째는 제다산부요, 여덟째는 서산주부이며, 아홉째는 북산주부이다.
그 상좌부(上座部)가 그러할 때에 한 맛[一味]으로 화합하여 지내다가 3백 년초에 조금 틀려서 다툼이 있자 두 부로 나뉘어졌다. 첫째는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說因部라고도 한다)요, 둘째는 곧 본래의 상좌부이니 이름을 바꾸어 설산부(雪山部)라고 한다.
그 뒤 3백 년경에 설일체유부로부터 한 부가 흘러 나왔으니 이름이 독자부(犢子部)이다.
그 다음 3백 년경에 독자부로부터 네 부가 흘러 나왔다. 첫째는 법상부(法上部)요, 둘째는 현주부(賢冑部)이며, 셋째는 정량부(正量部)요, 넷째는 밀림산부(密林山部)이다.
그 다음 3백 년경에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한 부가 흘러 나왔으니 이름이 화지부(化地部)이다.
그 다음 3백 년경에 화지부로부터 한 부가 흘러 나왔으니 이름이 법장부(法藏部)이며 자칭(自稱) “우리는 채숙씨(採菽氏)를 스승으로 해서 물려 받았다”고 하였다.
3백 년 말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음광부(飮光部)이며 또한 선세부(善歲部)라고도 하였다.
4백 년 초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한 부가 나왔으니 이름이 경량부(經量部) 또는 설전부(說轉部)라고도 이름하였으며 자칭 “우리는 경희(慶喜)로써 스승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좌부에서는 일곱으로 쪼개지고 혹은 여덟로 쪼개져서 근본[本]과 줄기[末]를 따로따로 설명하였으니 11부(部)가 된다.
첫째는 설일체유부요, 둘째는 설산부이며, 셋째는 독자부요, 넷째는 법상부이며, 다섯째는 현주부요, 여섯째는 정량부이며, 일곱째는 밀림산부요, 여덟째는 화지부이며, 아홉째는 법장부요, 열째는 음광부이며, 열한째는 경량부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부(部)는 본종(本宗)과 말종(末宗)에서 뜻을 같이하기도 하고 뜻을 달리하기도 한다.
내가 이제 설명하리라.
이 가운데서 대중부와 일설부와 설출세부와 계윤부가 본종(本宗)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이 있으니, 이 네 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두가 세간에 출현하고 모든 여래께서 유루법(有漏法)이 없으며, 모든 여래의 말씀은 모두가 전법륜(轉法輪)이요, 부처님은 한 음성[一音]으로써 온갖 법을 설명하며 세존께서 하신 말씀은 여여하지 않은 뜻[不如義]이 없다.
여래의 색신(色身)은 실로 끝이 없고 여래의 위력(威力)도 또한 끝이 없고 모든 부처님의 수명도 끝이 없으며, 부처님께서는 유정(有情)을 교화할 때에 그로 하여금 깨끗한 믿음[淨信]으로 만족해함이 없는 마음[無厭足心]을 내게 한다.
부처님은 잠이나 꿈이 없고 여래는 물음에 대답할 때에 기다리면서 사유하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온갖 때에 이름[名] 등을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언제나 정(定)에 계시기 때문이요, 그러나 모든 유정들은 이름 등을 말씀한다고 여기면서 기뻐하며 뛰논다.
한 찰나(刹那)에 마음으로 온갖 법을 알고, 한 찰나에 마음과 상응하는 반야(般若)로 온갖 법을 알며, 모든 부처님 세존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항상 따라 구르면서 반열반(盤涅槃)하기까지에 이른다.
모든 보살은 어머니의 태(胎) 안에 들어갈 때에 모두가 집수(執受)하면서 갈라람(羯刺藍)ㆍ알부담(頞部曇)ㆍ폐시(閉尸)ㆍ건남(鍵南)으로 제 몸을 삼지 않는다.
모든 보살은 어머니의 태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흰 코끼리의 형상을 짓고 보살이 어머니의 태어서 나올 때에는 모두가 오른편 옆에서 나오며, 모든 보살은 욕상(欲想)ㆍ에상(恚想)ㆍ해상(害想)을 일으키지 않고, 보살은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악취(惡趣)에 나기를 원하면 뜻대로 능히 간다.
한 찰나로써 변지(邊智)를 현관(現觀)하고 사제(四諦)의 모든 모양[相]의 차별을 두루 알며 눈 등의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은 염(染)도 있고 염을 여의는 것도 있으며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여섯 가지 식신[六識身]을 모두 갖춘다.
다섯 가지 색근[五種色根]은 살덩이[肉團]로 몸이 되며 눈은 빛깔을 보지 못하고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며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맛을 보지 못하며 몸은 촉감을 느끼지 못한다.
등인위(等引位)에 있을 때도 말을 꺼냄이 있고 또한 조복하는 마음이 있으며 또한 청정한 작의[淨作意]도 있고 할 일이 다 마쳐서[所作己辦] 법을 받아들임[容受]이 없다.
모든 예류자(預流者)는 심(心)ㆍ심소(心所)의 법으로 자성(自性)을 분명히 알면 아라한에게는 다른 이의 유혹을 받는 것[餘所誘 ]이 있고 오히려 무지(無知)가 있으며 또한 망설임[猶豫]도 있고 다른 이로 하여 깨쳐 들기도[他令悟入]하며 도가 소리로 인하여 일어나기도 한다[道因聲起].
괴로움은 도(道)를 능히 이끌고 괴로움은 능히 돕는 것을 말하며 혜(慧)는 가행(加行)이 되어 뭇 괴로움을 없앨 수 있고 또한 즐거움을 이끌 수 있으며 괴로움은 또한 이것은 밥[食]이요 제팔지(第八地) 중에서는 또한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되 나아가 성지법(性地法)까지는 모두가 물러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류자에게는 물러난다는 뜻이 있고 아라한에게는 물러난다는 뜻이 없으며 세간의 정견(正見)은 없고, 세간의 신근(信根)도 무기법(無記法)도 없으며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갈 적에 온갖 결(結)을 끊는다. 모든 예류자는 온갖 악을 짓되 오직 무간업(無間業)만은 짓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한 경(經)은 모두가 요의(了義)이다.
무위법(無爲法)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택멸(擇滅)이요, 둘째는 비택멸(非擇滅)이며, 셋째는 허공(虛空)이요, 넷째는 공무변처(空無邊處)이며, 다섯째는 식무변처(識無邊處)요, 여섯째는 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일곱째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요, 여덟째는 연기지성(緣起支性)이며, 아홉째는 성도지성(聖道支性)이다.
심성(心性)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客塵)의 수번뇌(隨煩惱)에 섞여 물들게 되어 부정(不淨)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수면(隨眠)은 심(心)도 아니고 심소(心所)의 법도 아니고 또한 소연(所緣)도 없으며 수면은 전(纏)과 다르고 전은 수면과 다르며 의당 수면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고[心不相應] 전은 마음과 상응한다[心相應]고 말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는 체(體)가 아니고 온갖 법처(法處)는 알 바[所知]도 아니고 인식할 바[所識]도 아니고 통달할 바[所通達]도 아니며 도무지 중유(中有)가 없고 모든 예류자 또한 정려(靜慮)를 얻는다.
이와 같은 등의 것이 바로 본종(本宗)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 네 사부[四部]의 말종(末宗)으로 뜻을 달리하는 것[異義]은 다음과 같다.
여여(如如)한 성체(聖體)의 모든 모양[相]은 차별되고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따로따로의 현관(現觀)이 있으며 사소한 법도 이것은 스스로 짓는 바[自所作]가 있고, 사소한 법도 이것은 다른 이의 짓는 바[他所作]가 있으며, 사소한 법도 이것은 다 같이 짓는 바[俱所作]가 있고, 사소한 법도 뭇 인연으로 부터 생기는 바가 있다.
한 때에 두 가지의 마음이 함께 일어남이 있고 도(道)와 번뇌는 다 같이 앞에 나타나 있을 수 있으며, 업(業)과 이숙(異熟)은 때를 같이하나 구르는 것[俱時轉]이 있고 종자는 곧 싹이 된다.
색근(色根)의 대종(大種)은 바뀌어 변한다는 뜻이 있고, 심ㆍ심소의 법은 바뀌거나 변한다는 뜻이 없으며, 마음은 몸에 두루하고 마음은 경계에 따라 의지하나 말거나 펼 수 있다.
모든 이와 같은 등의 말종(末宗)으로서 주장하는 것은 차츰차츰 차등이 있게 구별되면서 한량없는 문이 있다.
그 다문부(多聞部)가 본종(本宗)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다섯 가지 음성은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가르침이니, 첫째는 무상(無常)이요, 둘째는 고(苦)이며, 셋째는 공(空)이요, 넷째는 무아(無我)이며, 다섯째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이 다섯 가지는 벗어나는 도[出離道]를 능히 이끌기 때문에 여래의 그 밖의 다른 음성은 바로 세간의 가르침이다.
아라한에게는 다른 이의 유혹을 받는 것[餘所誘]이 있고 오히려 무지(無知)가 있으며 또한 망설임[猶豫]이 있고 다른 이로 하여 깨쳐 들기도[他令悟入] 하며 도가 소리를 인하여 일어나기도 한다[道因聲起].
그 밖의 주장하는 것은 대개가 설일체유부와 동일하다.
그 설가부(說假部)가 본종(本宗)으로 뜻이 같고 다른 것은 다음과 같다.
고(苦)는 온(蘊)이 아니요 십이처(十二處)는 진실이 아니며, 모든 행은 상대(相對)이지만 차츰차츰 화합하여 苦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고, 사부의 자용[士夫用]이 없으며 때 아닐 때에 죽는 일[非時死]이 없고, 먼저의 업[先業]으로 얻는 바이며, 업이 더욱 자라 인(因)이 되어 이숙(異熟)이 있고, 결과가 바뀌어 복(福)이 되기 때문에 성도(聖道)를 얻으며, 도(道)는 닦을 수도 없고 도는 무너뜨릴 수도 없다.
그 밖의 다른 뜻은 대개가 대중부와 주장과 동일한다.
제다산부(制多山部)와 서산주부(西山住部)와 북산주부(北山住部)의 세 부가 본종으로서 뜻을 같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은 악취(惡趣)를 벗어나지 않고 솔도파(窣堵波)에 공양의 업[供養義]을 일으켜도 큰 과보를 얻지 못하며 아라한에게는 다른 이의 유혹을 받는다는 등의 이들 다섯 가지의 일[五事]이 있다.
그 밖의 다른 뜻의 문(門)으로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대중부에서의 학설고 같다.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가 본종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일체유부(一切有部)의 모든 유(有)는 모두 두 가지에 포섭된다. 첫째는 명(名)이요, 둘째는 색(色)이니, 과거ㆍ미래의 체(體)도 또한 실제로 존재한다.
온갖 법처(法處)의 이것은 모두가 알 바요, 또한 이것은 인식할 바[所識]요, 그리고 통달할 바며, 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의 모양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행온(行蘊)에 속한 바요, 유위(有爲)의 일에는 세 가지가 있고 무위(無爲)의 일에도 세 가지가 있으며, 세 가지 유위의 모양[三有爲相]에는 따로따로 실체(實體)가 있다.
세 가리의 진리[三諦]는 이것이 유위요, 한 가지의 진리는 이것이 무위이며, 사성제(四聖諦)는 점차로 현관(現觀)하고 공(空)과 무원(無願)의 두 가지 삼마지(三摩地)에 의하여 다 같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갈 수 있으며 욕계의 행[欲界行]을 사유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간다.
만일 이미 정성이생에 들어가게 되었으면 십오심(十五心) 동안은 향을 행한다[行向]고 하고 제십육심은 과(果)에 머무른다고 하며 세제일법(世第一法)은 일심(一心) 삼품(三品)이요 세제일법은 반드시 물러날 수 없으며 예류자(預流者)는 물러난다는 뜻[退義]이 없고 아라한은 물러난다는 뜻이 있다.
모든 아라한의 모두가 무생지(無生智)를 얻는 것이 아니고, 이생(異生)은 욕탐(欲貪)과 진에(瞋恚)를 끊을 수 있으며, 모든 외도도 다섯 가지 신통[五通]을 얻은 것이 있고, 또한 하늘 가운데서도 범행(梵行)에 머문 이가 있으며, 일곱 가지의 등지[七等至] 중에서 각지(覺支)는 얻을 수 있되 그 밖의 등지(等支)는 얻지 못한다.
온갖 정려(精慮)는 모두가 염주(念住)에 섭수되고, 정려에 의지하지 않아도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아라한의 과(果)도 얻을 수 있다. 만일 색계와 무색계의 몸에 의지하면 비록 아라한의 과를 증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 없고, 욕계의 몸에 의지해서는 비단 정성이생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한의 과도 증득할 수 있다.
북구로주(北俱盧洲)에는 염을 여의는 이[離染者]가 없고, 성인 그 곳과 무상천(無想天)에는 나지 않으며, 네 가지의 사문과[四沙門果]는 반드시 점차로 얻는 것이 아니다.
만일 먼저 이미 정성이생에 들어 있으면 세속의 도(道)에 의거하여 일래과(一來果)와 불환과(不還果)를 증(證)하는 것이 있고, 네 가지 염주[四念住]는 온갖 법을 능히 섭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온갖 수면(隨眠)은 모두 심소(心所)와 심(心)과 상응하여 소연(所緣)의 경계가 있고, 온갖 수면은 모두 전(纏)에 섭수되나 온갖 전이 모두 수면에 섭수되는 것은 아니다.
연기지의 성품[緣起支性]은 반드시 유위(有爲)요 또한 연기지는 아라한도 따라 구르는[隨轉]것이 있으며 아라한에게도 더욱 자라는 복업(福業)이 있다.
오직 욕계ㆍ색계에만이 반드시 중유(中有)가 있고, 눈 등의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에는 염(染)과 염을 여의는[離染]것이 있어 다만 자상(自相)만을 취할 뿐이나 오직 분별(分別)이 없을 뿐이다.
심ㆍ심소의 법의 체(體)는 저마다 실제로 존재하고, 심과 심소에는 결정코 소연(所緣)이 있으며, 자성(自性)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고 심은 심과 상응하지 않는다.
세간의 정견(正見)이 있고 세간의 신근(信根)이 있으며, 무기의 법[無記法]이 있고 모든 아라한에게도 또한 비학비무학의 법[非學非無學法]이 있으며, 모든 아라한은 모두가 정려(靜慮)를 얻되 모두가 정려를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에게도 오히려 옛 업을 받는 것이 있고, 모든 이생(異生)도 선한 마음[善心]에 머물러 죽는 이가 있으며, 등인위(等引位)에 있을 때는 반드시 목숨을 마치지 않고, 부처님과 이승(二乘)의 해탈에는 차이가 없으며, 삼승(三乘)의 성도(聖道)에는 각각 차별이 있다.
부처님의 자비 등은 유정을 반연하지 않고, 유정으로서 해탈을 얻지 못한 이가 있다고 고집하면, 의당 그 보살은 오히려 이생(異生)이라고 말해야 하며, 모든 결(結)이 아직 끊어지지 못하여 만일 아직 정성이생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이생지(異生地)에서 아직 초월(超越)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정은 다만 현재의 유집수(有執受)와 상속(相續)에 의하여 가정[假]으로 성립되고, 온갖 행은 찰나의 소멸이라 설명하며, 반드시 사소한 법도 전세(前世)로부터 바뀌어서 후세(後世)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없다.
다만 세속(世俗)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어 옮겨 바꿈[移轉]이 있다고 설명할 뿐이요, 살았을 때의 행의 무더기는 곧 남음이 없이 소멸하며, 바뀌거나 변하는 모든 온(蘊)이 없고, 출세간의 정려(靜慮)가 있으면 심(尋)도 또한 있으며, 무루(無漏)에도 선(善)이 있나니, 이것은 바로 인(因)이 있다.
등인위(等引位) 중에서는 말을 꺼내는 것이 없고, 팔지성도(八支聖道) 이것은 정법륜(正法輪)이며, 여래의 말씀 모두가 전법륜(轉法輪)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온갖 법을 말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도 또한 여여하지 않은 뜻[不如義]의 말씀이 있고, 부처님께서 말씀한 경(經)은 모두 요의(了義)가 아니며, 부처님께서 스스로도 불료의경(不了義經)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본종(本宗)으로 뜻이 같다. 말종(末宗)으로 뜻을 달리하는 그 종류에는 끝이 없다.
그 설산부(雪山部)가 본종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은 오히려 이생(異生)이요 보살은 태(胎)로 들어갈 때에 탐애(貪愛)를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을 얻는 이가 없고 또한 하늘 가운데서 범행에 머무르는 이도 없다.
아라한에게는 다른 이의 유혹을 받는 것[餘所諭]이 있고, 오히려 무지(無知)가 있으며, 또한 망설임[猶豫]이 있고, 다른 이로 하여 깨쳐 들기도[他令悟入]하며, 도가 소리로 인하여 일어나기도 한다[道因聲起].
그 밖의 주장하는 것은 흔히 설일체유부와 같다.
독자부(犢子部)는 온에 상즉하거나[卽蘊] 온을 여읜 것[離蘊]도 아니요, 온(蘊)ㆍ처(處)ㆍ계(界)에 의하여 임시로 시설한 이름[假施設名]이며 모든 행(行) 은 잠시 동안 머무르는 것이 있고 또한 찰나의 소멸이 있다.
모든 법이 만일 보특가라를 여의면 전세로부터 바뀌어 후세에 이르는 것이 없고, 보특가라에 의지하여 옮겨 바뀜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외도도 다섯 가지 신통을 능히 얻는 이가 있고 다섯 가지 식[五識]에는 염(染)도 없고 또한 염을 여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바[修所斷] 결(結)을 끊으면 욕심을 여의고, 견도에서 끊을 것은 그렇지 않으며 곧 인(忍)ㆍ명(名)ㆍ상(相)ㆍ세제일법(世第一法)은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능히 나아가 든다.
만일 이미 정성이생에 들게 되었으면 십이심(十二心) 동안은 향을 행한다[行向]라고 말하고 제십삼심(第十三心)에서는 과에 머무른다[住果]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여러 차별된 뜻이 있으며 한 게송을 해석함으로 인하여 주장하는 뜻이 동일하지 않다.
이 부 중에서 다시 네 부[四部]가 흘러 나왔으니 법상부(法上部)ㆍ현주부(賢冑部)ㆍ정량부(正量部)ㆍ밀림산부(密林山部)이다.
해석하는 바의 게송을 말하겠다.
이미 해탈하고서 다시 떨어지고
떨어져서 탐을 말미암아 다시 돌아오나니
편안하고 기쁜 곳을 얻게 되어 즐거워하면
즐거워함에 따라 지극히 즐거운 데로 가리라.
그 화지부(化地部)가 본종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無爲)는 있으며 사성제(四聖諦)는 한 때[一時]에 현관(現觀)하고 고제(苦諦)를 보았을 때에 모든 진리[諸諦]를 보게 되며 반드시 이미 보게 된 이라야 이와 같이 볼 수 있다.
수면(隨眠)은 심(心)도 아니고 또한 심소(心所)도 아니며, 또한 들어갈 것도 없으며 수면과 전(纏)은 다르고 수면의 자성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으며 전의자성은 마음과 상응한다.
이생(異生)은 욕탐(欲貪)과 진에(瞋恚)를 끊지 못하고, 모든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을 능히 얻는 이가 없으며 또한 천상 가운데서는 범행(梵行)에 머무른 이가 없고 결정코 중유(中有)는 없으며 아라한에게는 더욱 자라게 되는 복업(福業)이 없다.
다섯 가지 식[五識]에는 염(染)이 있기도 하고 또한 염을 여의는[離染] 것이 있기도 하며 여섯 가지의 식[六識]은 모두가 심사(尋伺)와 상응하고 또한 제수(齊首)의 보특가라가 있다.
세간의 정견(正見)이 있고 세간의 신근(信根)은 없으며 출세간의 정려(靜慮)도 없으며 또한 무루(無漏)의 심사(尋伺)도 없고 선(善)에는 인(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예류(豫流)에는 물러남[退]이 있고 모든 아라한은 결정코 물러나는 이기 없으며 도지(道支)는 모두 이것은 염주(念住)에 섭수된다.
무위(無爲)의 법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택멸(擇滅)이요, 둘째는 비택멸(非擇滅)이며, 셋째는 허공(虛空)이요, 넷째는 부동(不動)이며, 다섯째는 선법진여(善法眞如), 여섯째는 불선법진여(不善法眞如)이며, 일곱째는 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요, 여덟째는 도지진여(道支眞如)이며, 아홉째는 연기진여(緣起眞如)이다.
태(胎)에 들어가는 것이 시초가 되고 목숨을 마치게 되면 마지막이 되며 색근(色根)의 대종(大種)은 모두 바뀌고 변한[轉變] 것이 있고 심(心)ㆍ심소의 법[心所法]도 또한 바뀌고 변한 것이 있다.
승가 가운데 부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승가에서 보시하면 곧 큰 과보를 얻고 따로 부처님께 보시할 것이 아니며, 부처님과 이승(二乘)은 모두가 동일한 도(道)요 동일한 해탈이며, 온갖 행은 모두가 찰나에 소멸한다.[刹那滅]고 말하고 반드시 조그마한 법도 전세로부터 바뀌면서 후세에 이르게 되는 것은 없다.
이런 것 등이 바로 그 본종(本宗)과 뜻이 같은 것이며, 그 말종(末宗)과 뜻이 다른 것은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고 또한 중유(中有)도 있다고 설명하며 온갖 법처(法處)는 모두가 이것은 알 바[所知]요 또한 이것은 인식할 바[所識]며, 업(業)은 실로 이것은 사(思)여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이 없고 심사(尋伺)는 상응한다.
대지(大地)는 겁 동안 머무르고[劫住] 솔도파(窣堵波)에 공양의 업(業)을 일으켜도 얻게 되는 과보는 적으며 수면(隨眠)의 자성(自性)은 항상 현재에 있고 모든 온(蘊)ㆍ처(處)ㆍ계(界)도 역시 항상 현재에 있다.
이 부(部)의 말종(末宗)에서는 하나의 게송을 해석함으로 인하여 고집하는 뜻에 차이가 있다.
마치 그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섯 가지의 법은 결정코 능히 속박하여
모든 고는 그로부터 생기나니
이를테면 무명(無明)과 탐(貪)과 애(愛)와
오견(五見)과 그리고 모든 업(業)이다.
그 법장부(法藏部)가 본종(本宗)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비록 승가 가운데 포섭되어 계신다 하더라도 그러나 따로 부처님께 보시한 과보는 크고 승가에게 보시한 것은 그렇지 못하며 솔도파에 공양의 업을 일으키면 광대한 과보를 얻게 되고 부처님과 이승(二乘)의 해탈은 비록 동일하다 하더라도 성도(聖道)는 다르다며 모든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을 능히 얻는 이는 없고 아라한의 몸은 모두가 이것은 무루(無漏)이다.
그 밖의 다른 뜻은 대부분 대중부(大衆部)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 음광부(飮光部)가 본종(本宗)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만일 법으로서 이미 끊어졌고 이미 두루 안 것이면 곧 없고 아직 끊어지지 못했거나 아직 두루 알지 못한 것이면 곧 있으며 만일 업과(業果)가 이미 성숙하였으면 없고 업과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으면 있다.
모든 행(行)은 과거로써 원인[因]을 삼는 것이 있고, 모든 행은 미래로 새 원인을 삼는 것은 없으며, 온갖 행은 모두가 찰나에 소멸하고 모든 유학법(有學法)에는 이숙과(異熟果)가 있다.
그 밖의 뜻은 대부분 법장부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 경량부(經量部)가 본종(本宗)으로 뜻이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온(蘊)은 전세로부터 바뀌면서 후세에 이르는 것이 있고 세워서 말하는 것은 이름이 바뀐 것이요 성도(聖道)를 여읜 것은 아니며, 온(蘊)은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있고 근 변온[根邊蘊]도 있으면서 한 맛의 온[一味蘊]도 있으며 이생의 계위[異生位] 중에서도 역시 성자의 법[聖法]이 있다고 주장하고 승의(勝義)의 보특가라도 있다.
그 밖의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설일체유부와 같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이 논을 번역하여 마치고는 거듭 번역한 뜻을 기술하면서 이에 게송으로 말하였다.
갖추 여러 범본(梵本)을 상고(詳考)하여
재차 종륜론(宗輪論)을 번역하니
글은 뜻에 맞고 뜻에는 틀림이 없으니
지혜 있는 이는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