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남’이라는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 가사에는 우리의 만남이 어쩌다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러니까 운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만남이 소중하게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독서인 아가가 전해주는 것도 연인의 만남입니다. 이 아가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나 결혼식에서 불리던 노래였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이 서로 느끼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이 아가는 부부의 만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 노래를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사랑 고백으로 해석하여 과월절 축제에서 낭송하였습니다.
연인이나 부부의 만남에 못지않게 애틋하고 인류 역사에 큰 울림을 준 만남이 마리아와 엘리사벳, 이 두 여인의 만남이었습니다. 약혼 직후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뜻밖의 전갈을 받은 마리아는 그 즉시 길을 떠나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구세주를 잉태시킬 것이라고 전해주던 천사는, 하느님 개입의 증거로서 늘그막까지 자식이 없던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아이를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36). 사실 천사의 전갈은 단지 구세주 잉태를 알려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부터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의 방문으로 마리아는 혼전임신을 한 미혼모가 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율법을 위반한 사형감으로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같이 내밀한 일을 그 누구에게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벳도 주님의 섭리로 임신했다면 똑같이 주님의 섭리를 경험한 여자들끼리 영적이고 내밀한 대화를 터놓고 나누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여기기도 했을 것이며, 또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면 석달 후에 아기가 태어날 때 시중을 들어주어야 할 일도 있으리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났겠지요. 그 운명적인 만남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맞이했습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오늘날 성모송에 들어와 있는 그 유명한 인사말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한테 이런 최상급의 인사를 건네게 된 데에는 천사가 전해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마리아가 믿었던 덕분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 짊어지게 될 어마어마한 십자가를 오직 믿음 하나로 받아들인 마리아가 위대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듯 마리아와 엘리사벳, 이 두 여인의 만남이 범상치 않았던 까닭은 이 만남이 마리아의 태중에 이미 아기 예수를 모시고 가서 이루어진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의 순간에 엘리사벳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 만큼 단박에 마리아가 태중에 모시고 갔던 예수님을 성령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간 마리아와 성령으로 이를 알아본 엘리사벳의 만남이었기에 이 만남은 특별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샤를르 드 푸꼬는 이 방문의 신비를 한평생 묵상하며, 자신의 삶으로도 예수님을 모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갔습니다. 그 어떠한 말로나 표식으로 예수님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삶으로 드러내면서 사람들이 심지어 이슬람교도들도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보기를 바랐던 철두철미한 삶을 살았기에 “모든 이의 형제”(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 12항)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 사회 안에서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을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최근 들어 종교와 종교인들의 사회적 일탈행위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들 중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 주일미사 참례로 신앙을 드러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인해 백년의 박해를 겪어야 했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이처럼 신앙의 가치가 곤두박질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도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각별히 커다란 무게를 지니고 다가옵니다. 창세기가 알려주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첫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도록 미혹했던 뱀은 오늘날 더욱 교묘하고 무서운 기세로 현대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놓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도 더욱 우리가 용기를 내어서 신앙의 가치를 증거해야 할 때입니다. 태중에 주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갔던 마리아처럼, 말이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일은 이제 희망사항이 아니라 기본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에서도 신앙을 드러내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만남일수록 그 만남이 더욱 귀한 만남이 되도록 주님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도록 가꾸어 가십시오. 이미 우리 각자는 신앙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제는 각자가 마음으로만 모시고 있는 주님을 만남에도 모시고 가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