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이 태어난 곳
鳳眼曉經|서울 목동 법안정사 회주
내가 종로 대각사에 살고 있을 때, 불광회가 대각사에서 태어났다. 대각사는 주지하다시피 일제 강점기, 새불교운동의 사상가였으며 실천가였고 또한 조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용성진종 조사가 제창한 대각운동의 근본도량이다. 불교나 민족의 입장으로 봐서 참으로 유서 깊은 명소이다.
그리고 광덕스님은 바로 그러한 조사의 직계 문손이고, 대각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이며 실천자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불광이 대각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조사의 대각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새 모습으로 광덕스님에 의해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러니까 1974년 8월경, 광덕스님은 먼저 불광회를 만들어 앞으로 펼쳐 나갈 새불교운동의 모체로 삼았다. 이 불광회를 모체로 월간「불광」창간을 준비하여 바로 그 해 11월에 창간호가 나왔으니, 광덕스님이 큰 서원으로 선도한 한국불교의 새물결운동은 이로써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본격 출발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만 1년이 지난 1975년 10월 16일에 불광법회를 개설하여 대각사에 매주 목요일에 정기법회를 열었다. 이로 보면 월간「불광」이나 ‘불광법회’는 불광회를 모체로 하여 대각사에서 모두 등장한 것이다. 즉 한국불교의 새로운 불교운동인 불광의 발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그 모습을 세상에 하나하나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월간 「불광」이나 불광법회가 종단을 대표할 만큼 성장하는데 별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큰 것 같지만 실로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많았고 역경도 무척 많았다.
광덕스님의 불광회 운동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항상 지켜본 필자로서는 특히 초기 불광회 성장과정의 증인이라고 자처해도 될 것이다. 잘 알다시피 불광회는 광덕스님의 뜨거운 신심과 탁월한 안목이 아니었으면 한국불교에 나타나지 않았을 실로 엄청난 일[사건]이었다.
세상일은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가면 처음 정신과 뜻은 잊혀지기도 하고 더러 소홀해지기도 한다지만 결코 불광회만은 그러지 않아야된다고 본다. 그것은 불광을 만들 때 광덕스님의 노고가 크셨다는 사실 때문에 아까워서가 아니다. 오로지 광덕스님이 불광운동을 통해 구국구세의 보살원력을 폈고 새로운 시대, 인류를 구제해야 하는 부처님 구세대비의 큰 서원을 스님이 실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광덕스님의 원과 뜻으로 이루어진 불광, 그 창립의 동기와 발전과정은 광덕스님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보살님의 크신 은혜이고 한국 불교도들의 간절한 염원이 서려 있는 새로운 희망이고 앞길을 밝혀 주는 횃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광의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은 잠실에 있는 절(불광사) 하나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한국불교가 인류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며, 불교가 어떻게 인류문명을 선도해야 하고, 어떻게 부처님 구세대비의 숭고한 뜻을 펼쳐나갈 수 있느냐 하는 절대 명제가 광덕스님이 펼친 불광운동에서 볼 수 있고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대각사에 상주하면서 광덕스님의 역사적인 불교 사상운동의 출발에 조그마한 협력을 더했다. 처음 불광회를 만들 때부터 광덕스님과 불광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협의했으며 조언과 편의를 작게나마 보탰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덕스님 자신의 간절한 염원과 뜨거운 열성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내가 불광회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자리를 빌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자찬 형식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자리를 빌어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앞에서도 내가 말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바로 불광회가 대각사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바꾸어서 얘기하면 불광의 탄생은 제불보살의 가호와 구세대비의 인도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용성조사의 지극한 서원력과 안목이 만들어낸 또 다른 대각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광회와 대각회를 따로 보지 않고 있다. 한줄기일 뿐이다. 다만 이름만 달리했고 겉포장만 바꾸었을 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광덕스님은 용성조사에 대해 물리적이고 눈에 보이는 기념사업을 왕성하게 일으켜서 대각교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조사의 가르침을 심어 가는 사상운동을 통해 조사의 대각교를 계승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용성조사 떠나신 지도 어언 육십 여년이 넘었고 광덕스님 가신 지도 벌써 2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사람은 오고가고 육신은 생멸을 보이지만 법신(대각운동과 불광운동)은 오고감이나 생멸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 진리의 완전무결한 원만구족상을 후대들은 잘 이루어야 하리라. 선각자들이나 초기의 개척자들처럼 보살 헌신과 놀라운 신심으로 현실 속에 법을 증거해야 하고 보살행을 원만하게 나투어야 한다라는 말이다.
불조의 혜명(慧命)을 잇는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함인가?
출가자가 삭발염의하고 출가위승한 것은 오직 불조의 혜명을 단절하지 않게 함이며, 대비구세의 서원으로 전등(傳燈)의 횃불을 높이 들어 일체 중생을 광명국으로 인도함이 그 장한 본래의 뜻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나는 오로지 대한민국시대, 광덕스님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한국불교의 새 물줄기인 불광운동이 눈덩이처럼 커가야 한다는 것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한 사람의 증인으로 간절히 바라고 싶다. 그것이 내 소원이고 불광에 거는 희망이며 광덕 사형님에 대한 나의 인간적인 신의이기도 하다.
끝으로 광덕스님의 원적 2주기를 맞이하여 스승의 일상 자취를 기록으로 남겨서 불광의 가풍을 길이 후세에까지 전하고자 하는 송암화상의 효심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출세간의 추상같은 법도와 존엄한 위의마저 세간의 휘몰아치는 변화의 광풍에 휩쓸려 빠르게 달라져 가는 작금의 우려와 염려에서 바라보니 『광덕스님 시봉일기』의 출현은 참으로 적절한 느낌이 들고, 또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스승을 하늘같이 받드는 송암화상으로 말미암아 출가의 뛰어난 법풍이 다시 크게 떨치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아무쪼록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려져서 무수한 보현보살, 즉 광덕스님이 속속 등장하기를 간곡히 바라마지 않는다.
나무보현보살마하살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월간 불광과 불광법회의 창립을 곁에서 함께 하신 스님의 생생한 말씀입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 한국 불교의 선구자적인 일을 한 불광운동이 한국불교의 새 물줄기로 눈덩이처럼 커가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스님의 애타는 심정이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동네 절이 아닌 불광운동의 본거지로 불광사가 거듭 나길~~~
이 글을 읽으며 며칠 동안 일어난 여러 일들이 가슴에 닿습니다.
불광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 이루리!!!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시봉일기에 나오시는 스님들께서 광덕스님의 불광운동에 동참해 주실 것을 기원해 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보현행이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서 절실한데 왜 광덕스님의 불광운동이 널리 퍼지지 못했을까? 보현행을 노래하는 불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내생명부처님무량공덕생명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