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정말로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제주대학교 철학과
2017101246 우어진
능력주의는 그 말 그대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 권력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이다. 영어로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하며, 이는 상벌, 보수, 공로를 의미하는 라틴어 meritum 와 그리스어 –kratia에서 유래한 –cracy의 결합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능력주의에서 논하는 능력은 ‘보수를 받기에 합당한’ 능력, 즉 사회적인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언어로 정제되어 메리토크라시, 능력주의라는 명칭으로 자리잡은 것은 마이클 던롭 영이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arcy)>이라는 저서에 의해서이지만, 개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지위와 권력, 재화 등의 희소가치를 배분한 것은 고대 중국의 진시황 치세, 능력에 따른 관료 임용을 법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움직임에 의해 그 싹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한정된 사회-경제적 재화를 배분하는 기준을 개인의 능력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형태를 바꾸어가며 혈통주의, 귀족주의와 같은 다른 정치 방법론들과 함께 이어져 왔고, 현대에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개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공로를 인정해 사회적인 위치를 결정하는 방식은 여전히 그러한 방식의 단점, 폐단보다도 안정적인 사회 유지에 주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 현대까지 채용되고 있다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능력주의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거나,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적 사고의 기준점이 되는 개인의 능력은 대부분 공교육 과정에서의 학업성취도와, 그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대학교 입시의 결과로 표면화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이 어떠한 기준을 통과해 사회에 그 기준만큼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통한 기여에 대한 보상을 내리는 시스템이다. 그러한 보상에는 사회적 지위, 자본, 명예가 포함되며, 종종 윤리-도덕적 우위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품고 있다.
첫째는 그 기준이 “실제로 사회의 수요에 맞는 도움을 주었음”이 아니라,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수준이라고 기대되는 능력”,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가능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사회의 수요에 부합하는 것”과 “개인으로서 총체적으로 유능한 것”, “개인으로서 윤리도덕적으로 우수한 것”이 전부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평가 기준이 “유능할 가능성”에 있다는 취약점이다.
비단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수준의 성취를 이루고 있는 인간 개인을 평가할 때는 그러한 성취에 걸맞는 개인적 능력이 수반되고 있으리라는 기대가 개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정 연령 이상이 되어 사회적, 법적으로 성인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최소 성인 수준의 판단력이 무의식적으로 전제, 기대되고 있고, 직장이나 군대에서 일정 계급 이상으로 근무하는 사람에게는 그 위치에 걸맞는 업무, 임무수행능력이 기대되며, 게임에서도 상대방의 랭크, 레벨, 장비 수준 등을 보고 상대방의 실력이나 게임에 대한 이해도를 유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인식되기까지의 역사적 맥락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수준 높은 명문대로 여겨지는 몇몇 수도권 4년제 대학교에 재학하는 사람들은 공교육 과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쟁력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쟁쟁한 사교육, 컨설팅을 받아 입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할 만큼의 지적 능력이 기대된다. 2020년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은 70퍼센트, 고등학생의 총 숫자가 약 120만명이라는 통계 결과로 미루어 보면, 매년 수십만에 이르는 학생들이 전국의 대학교에 진학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국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명문대의 취업 잘 되는 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만 명 정도일 것이다. 소위 말하자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부유한 부모 세대로부터 안정적이고 강도 높은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 부모 세대의 학벌, 부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종의 세습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미뤄 두고서라도, 까다로운 입학 과정을 거쳐 높은 성적, 즉 능력을 인정받고 고등교육기관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실은 그 개인의 사회적, 인간적 능력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는 점은 현대사회의 커다란 문제다. 현대의 능력주의는 어떠한 능력이 사회의 수요에 부합할 것이라는 가능성 위에 성립된 기준선으로 유지되고 있으면서, 어떠한 결과물이 사회적 지위나 부를 쟁취하는 것이었을 때 그 결과물을 이룬 사람의 능력이라고 인정해버리는 주객전도의 구조적 문제를 품고 있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기준에만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 사회 속에서 이미 능력주의가 필요로 했던 “능력”은 해체되고 사라져 버린다.
올해 여름,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이 있었다. ‘심심한 사과’ 논란이었다. 한 회사의 공식 SNS에서 사용한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라는 말에 수백 명이 “심심한 사과라니, 사과가 지루하고 무료하다고 소비자한테 농담이나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고, 이런 글들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기사화까지 되었던 사건이다. 심심한 사과의 심심하다는 말은 무료하다는 뜻이 아니라, 甚深한 사과라는 뜻으로 매우 깊이 사과한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지적받은 사람들은 그 지적을 수용하지 않았고, 외려 “알기 어려운 말을 써 사과하는데 어떻게 진정성이 있느냐?”며 응수했다. 단어 하나의 뜻은 모를 수 있다고 쳐도, 틀린 것을 지적받았을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틀린 것을 정정하는 것이 보통 사회적으로 성숙한 인간에게 기대되는 태도였는데, 문해력 부족에 더해 사회적인 부분도 미달하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이런 논란은 사실 우리 젊은 세대의 단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모 대학교에서는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공결 사유에 ‘병역’을 적어 제출하는 대학생들이 속출했다는 글이 올라왔었을 정도였고, 문해력과 관련된 부분이 아니더라도 높은 지적 능력과 책임의식이 기대되는 명문대학교 의대생들이 벌인 집단 성폭행 사건이나 의사들의 대리수술 논란 등의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능력주의의 최첨단인 고학력 엘리트들의 전반적인 도덕적 해이, 상식의 질적 저하를 엿볼 수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문해력이 저하되는 추세에, 고급 인력으로서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이들은 단순히 전문지식을 갖췄을 뿐 종래적 사회에서 요구되었던 직업의식과 윤리적 기반을 잃은 상황이다. 이는 사회의 발전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를 후퇴시키고 있다. 분명 그들 개개인은 사회가 정한 기준을 통과해, 사회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지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높은 학업성취도를 가진 사람은 사회에 공헌할 가능성이 높아야 하고, 이 척도를 능력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사회 구조는 진정으로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교육과 삶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다. 승리주의로 변질되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능력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능력 있는 사람을 감별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지표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작금의 상황 속에서 능력주의를 정말로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제조건이 되는 기준이 불명확하고, 수치화된 개인의 성적과 능력이 더는 개인이라는 실재의 능력과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지금, 능력주의의 이름으로 공정을 논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능력주의에서 보려고 하는 능력이 개인이 실제로 이룬 성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진 시점에서, 어떻게 그 결과물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존재로 역산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가 내린 기준점에 맞춰진 점수와 자격증, 학위는 대부분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검증보다도 어떠한 상위 카스트의 계층구조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티켓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당장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쌓아올려진 사회 전반의 인식을 뜯어고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능력주의를 대체할 다른 정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과 결탁한 능력주의가 겉모습만 능력주의고 사실은 세습적인 귀족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이 “유능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표면적으로나마 체화하고 있다는 점은 중세의 혈통주의와는 일선을 긋고 있다. 단지 그것이 가식적이라는 이유로 아예 귀족주의나 혈통주의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것은 보수적이다 못해 반동적이기까지 하고, 유효하지도 않다. 그 외에 사회의 재화를 어떤 식으로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그것이 능력주의의 이념보다도 바람직하고 공정한 것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능력주의의 사회 구조를 당장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내포된 부조리한 모순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다시금 검토해볼 필요가 있고, 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저 성적이 우수하고 업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사람을 배출하면 될 뿐인가? 아니면 성적보다도 그 개인이 사회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인간인지를 발굴하는 것이 중요한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회는 어떤 것을 사회 구성원에게 ‘능력’으로써 요구해야 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구조가 되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력도 상실한 “기대 미만의 인간들”이 양산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첫댓글 기술관료제 하에서는 "능력"이 "효율성"과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되지요. 하지만 정작 기술관료가 가진 능력이 주권자인 우리의 삶을 유리한 방향으로만 끄는 것은 아니랍니다. 요즘 문해력과 관련된 여러 가지 비평들도 결과적으로는 "능력주의"를 내면화하는 "라떼"의 비난으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이론적 배경, 문제점, 해결 방안까지 꽤 많은 내용을 진지하게 서술하였네요. 그런데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다시금 검토해볼 필요"는 진보정당이 능력주의 논리를 오히려 수용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