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드믈겠지만 여름 산속에서 만나는 도라지꽃만큼 반갑고 예쁘기도
힘들 것이다. 이 맘때면 산속에 숨어 있는 도라지캐기가 좋을때다. 그 이쁜 자태을 뽐내려다
나같은 얼치기 심마니에게 걸려 뽑히고야 만다. 그 이쁜 도라지 꽃을 어떻게 캐어버리냐고
말한다면 농촌의 전원생활이 푸르르고 아름답다고만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신경 안쓰련다
도라지는 단순한 화초가 아닐뿐더러 어릴적엔 아버지를 위해서 지금은 마누라 다음(정말?)으로
담배를 좋아하는 남편의 목을 위해 캔다.
지나다니다가 도라지꽃이 보이면 차를 세우고 캤다. 꽃 한송이 보이면 그 근처는 도라지 밭이기 쉽다
왜냐 씨가 쏟아지면 거기서 또 자라므로. 아버지 묘소근처에는 여름마다 가서 캐는 데도 늘 도라지꽃 밭이다.
아마 막내딸이 너무 보고 싶은 아버지가 일부러 피우고 기다리시나 보다.
올라간 김에 잡초도 뽑고 그 앞에 앉아 있자니 그리움이 물결치듯 밀려 온다.
예전에도 도라지꽃을 좋아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제대로 이해해 웃게 되는 아버지의 조크처럼
지금은 더 정겹고 좋다.
엄니는 아버지 묘소자리가 싫으시단다. 내가 갈때마다 나 죽으면 여다 묻어다고 하시면서
잘린지 오래되어 썩어가는 나무 밑둥을 알려주신다. 동네 한바퀴를 돌다가 엄니가 말씀하신 자리에
앉아 보았다. 뒤를 둘러친 산세가 내려오면서 양팔로 감싸안듯 따뜻하고 멀리로 바다로 나가는 길도
보이는 것이 풍수 같은 건 몰라도 갑갑하지 않고 편안하다. 엄니의 부탁을 알 것도 같다.
'엄니 오빠 한테도 이 부탁 꼭 하구 가슈. 출가외인이라고 내 말 안들음 워쪄 '
'나중에 여다 묻어 놓구 엄니 좋아하는 꽃 둘러쳐 심어놓구 자주 보러 올틴께요'
'근데 와 봐야 뗏짱밖에 없을텐데 뭔 재민교 오래 오래 사슈 쭈글거려두 엄니 얼굴이 좋지'
'그나 저나 엄니 아버지가 못 알아보시겠네. 늙으셔서. 염할때 아주 이삐게 해드릴께'
했더니
'그래라 새각시처럼 이삐게 해다오 너만 믿는다' 하시며 미소를 지으신다.
아버지와 시할아버지, 주검을 딱 둘을 보았다. 태국승려의 옷이 주황색인 것은 주검의 빛깔이라서 그렇다지
둘 다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딸에게 금새 다정히 이름을 부르실 것 만 같았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며 정신을 놓으셨다가도 손을 잡아드리면 제사지내드릴 종부라서 그랬을까
시할아버지 쥔손에 힘이 들어가며 흐르던 마알간 눈물이 생각났었다.
풍장(風葬)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휴가 동안 아이들을 놀게 해놓고 감시하며 짬짬히 그늘막에서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특히 내 시선을 잡았던 것이 지금 흐르는 곡의 주인 '니콜로 파가니니'의 죽음이었다. 아니 죽음보다도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36년간이나 떠돌았다는 그의 주검에 관한이야기 였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1782) 프랑스 니스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난(1840) '파가니니'는
'악마의 제금가'가란 별칭을 얻을 만큼 19세기 최대의 비르투오조(대가)...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 가로 알려져 있다.
'파가니니'는 19세기 초엽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하였는데,
신기에 가까운 탁월한 기교에 전유럽이 떠들 썩하게 되었다.상식을 뛰어 넘는 연주기교에 귀신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 의복,장갑 등을 모방한 의류가 상점마다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다.
하지만 책속에 소개 된 초상화나 스케치에 담긴 그의 모습을 보면 괴기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로테스크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그의 아들이 석판화로 남긴 방부처리되어 두달간 침상에 뉘여 있었다는 그림은 참으로 엽기적이다.
죽은 침상에서 두달, 지하실로 옮겨져 일년 그리고 바위투성이 해안가 문둥이 집에 놓여있다가
죽은지 5년이 넘어서야 겨우 유택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가 사악한 생애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으므로
매장을 허가할 수 없다는 제노바 교회 니스주교의 판결은 1976년에 무효가 되고 그러니까 죽은지
36년만에야 묻힐 권리를 인정받은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묻힌 유해는 또 편히 쉬지 못하고 1893년 체코의 프란츠 온드리첵이 파가니니의 시체를 보기 위하여 발굴했었고
새로운 공동묘지가 개관됬을때 다시 한번 관이 개봉되었다 한다.
'파가니니(Paganini)- '작은 이교도'란 뜻의 이름처럼 그의 주위에는 뭔가 마술적이고 기괴한 분위기,
자신이 지하세계의 미지의 마술적 힘과 접촉하고 있다고 장난 삼아 말하기도 했고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자신의 분신인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힌 적도 있는 기행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하나
죽어서도 그러리라고는 아마 그도 상상하지 못했을 듯 싶다. 자기의 유체가 매장 되지 못한 시간만큼
그의 영혼도 떠돌았을까? 문득 궁금해 진다.
하지만 신기에 가까운 파가니니의 연주는 여성팬들을 까무러치게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전 모 CF의 그릇들도 그 연주를 접했다면 다 깨져버리지 않았을까...
약간은 부풀려 지기도 했겠지만 그의 행적과 함께 듣는 그의 음악은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아직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진지하게 사는 사람들은 유서를 써놓고 내일 죽을 각오로 산다고들 하지만 설렁 설렁 치고이너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죽은 뒤의 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 그거 과잉노동이라는 생각도 있다
몇년 전 기타의 사유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졸도했다가 한참있다 깨어난 적이 있었는 데
졸도하는 순간 죽는 느낌은 이런 것일까 잠시 생각해 봤을 뿐 먼먼 쏭바강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먼 별에서 여행을 왔든지 돌고 도는 것이든지, 어딘가에서 왔으니 돌아 가는 것이리라.
흙에서 왔다면 흙으로, 별에서 왔다면 별로, 어떻게 살았냐에 따라 간다는 지옥이든지 천당이든지 말이다.
하지만 죽음...그리고 죽은 후...에 대해 속 시원히 답을 준이가 있었던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려고 한다. 괴기스런 그의 풍모같은 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그의 음악이나 그저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