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히11:8)
성경은 삶을 다루는 책입니다.
세상에서 닥치는 모든 일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가르쳐줍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다수의 인물들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요컨대 “여기 특별하게 살았던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유대 역사 히브리인의 역사에 우뚝 서 있는 위대한 영웅들이다”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성공적 삶을 살았던 비결을 설명해 줍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 문제는 삶의 기본이 되는 중심 원리를 모르는데 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원리에 따라 자기 백성을 대해 오셨다.
이 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구약 시대에 백성을 대하신 방식이나
신약 시대에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원리에 따라 자기 백성을 대해 오셨다.” 그는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를 제시한 다음,
위대한 구약의 인물들을 한 사람씩 예로 들며 “이들을 보라. 이들의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매번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특별한 예로, 이 주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입니다.
그의 생애에 맨 먼저 일어난 사건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입니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말을 믿고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나도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큰 비결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나 삶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는 방식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더 이상 장래 일은 염려치 않게 됩니다.
갈 곳을 몰라도 나아가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든 개의치 않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을 몰랐지만 개의치 않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결이었습니다.
자기가 어디 있든,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염려치 않았습니다.
세상은 아브라함이 따랐던 원리와 삶의 방식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거짓 희망과 불필요한 불안 및 실망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언제 두려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안과 스트레스와 긴장 없이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반대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장차 생길 일을 미리 알아내고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을 모르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나아갔습니까?
기독교는 일종의 철학적 초연함이나 평정심 내지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난다. 세상 걱정을 다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다”라는 운명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나아갔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 놓은 옛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 알고 나아갔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비결이었습니다.
갈 곳이 어디냐는 염려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느냐만 염려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대한 비결입니다.
하나님만 함께 가시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습니다.
산을 넘든, 깊은 골짜기를 지나든, 늪에서 씨름하든, 평탄한 길을 걷든 상관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힘차게 길을 떠난 것은 누가 자기와 함께 가시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여러 가지 원리나 개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창 5:22).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알기에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 6:10).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성격도 살펴보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길을 떠나 유업으로 주실 땅에 도착할 때까지 생길 일들에 대해 세세히 알려 주시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삶의 절대적 기초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올해 무슨 일이 생기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영원히 지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정이 아닌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중요치 않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세상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나그네”입니다(히 11:13). 우리가 받을 유업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위대한 서신 앞장에서 밝힌 그대로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일에 참여하는 것, 오직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들었기에 갈 곳을 모르면서도 나아갔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이 확신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영광으로 데려가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그 거룩하심과 공평하심과 의로우심과 불변하심과 영원하심 때문에 그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 한 가지 위로를 주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전능하시기에 인생길에서 만나는 어떤 일도 그보다 클 수 없습니다(롬 8:38-39).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하나임의 사랑을 믿는데도 병에 걸리고 건강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잖아요! 그건 어찌 된 겁니까?” 그런 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가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역경의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8:28).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염려를 주저 없이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어떤 시련이 닥쳐도 상관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를 알고 그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