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된 것은 1957년 국민학교때 였다.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프랭카트가 거리마다 붙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호간에 주고 받을 것도 없는데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 신생 월남 대통령이 2번이나 한국을 방문하고 이승만이 58년 월남을 답방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2차대전 직후 독립한 식민지 중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매국노들이 득세한 단 두 나라라는 유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에게 고딘디엠으로 알려진 것은 원래 응오딘지엠(오정염, 吳廷琰)이어서 응오가 ngo로 표기되어서 영어권 사람들이 '고'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는 한 마디로 족벌정치에 온갖 부정을 저지르다가 반란 세력에 의하여 사살 되었으니 이승만 보다는 끝이 좋지 않았다.
20대에 월남에 전쟁이 터져서 갔다. 결과적으로 1년도 안되는 짧은 월남이 경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국가유공자가 되어 노년에 여러가지 혜택을 받고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아직 받지 못했다. 월남에서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은 떼어 먹은 측은 아직도 힘이 세어서 아무래도 받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포기 할 수는 없어서 다음 세대에서라도 받을 수 있도록 악이라도 써야 할 일이다. 그래서 악덕 사채업자보더 더 끈질기게 대를 이어서 빚독촉을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들 참전군인 말고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한국에 의해서 피해를 입은 월남 민간인들이다. 한국군으로서는 월남전은 돈 때문에 시작된 전쟁이었는데 역시 돈 문제만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참전수당 미지급 문제와 민간인 학살, 2 가지 문제에 대하여 모두 관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베트남으로 간다. 정인조 장로님과 같이 한베평화재단에서 계획하는 정기적인 기행팀에 합류하게된 것이다.
민간인 학살 문제의 난관은 참전군인 당사자들의 이해이다.. 물론 위안부와 징용노동자의 희생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죽어서 월남전에서 학살된 9,000여 명의 민간인들을 만나서 당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