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는 목행동 농수산물 도매시장 북쪽 맞은편입니다. 충주 최씨 사당 《모선재(慕先齋)》뒷편에 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한글로 토를 달았으나 생략하였고, 《충주의 금석문, 2006년》을 참고했으나 잘못된 한자는 고쳤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인데 비석 원문이나 옮긴 원문에서 오류(誤謬)가 발견됩니다. 이 부분은 고치고 의견을 달았습니다.
《디지털 충주문화대전》에서 옮김.
2018년 2월 18일 찍은 사진.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옮김.
원문
前面:
《高麗班主檢校政丞諡良貞忠州崔公諱濂神道碑》
高麗班主檢校政丞諡良貞崔公神道碑銘幷序
公姓崔 諱濂 系出蘂城 蘂城卽忠州古號也 有諱陞 新羅末 爲大唐兵馬使 自中國淸河縣 東渡朝鮮 討平亂賊功成名遂而因居蘂城爲崔氏之鼻祖 于今千有餘載忠孝節義道德文章繼世相傳 公之五代祖 諱公義 高麗朝同知正 同知正公以上杞宋莫徵以下則歷歷可考也 高祖諱冽高麗忠肅王朝爲判宗簿寺事 曾祖諱沃門下侍中 祖諱伯淸門下侍郎 考諱原儒高麗忠惠王時密直承宣(비석 원문에는 翔으로 써있으나 宣이 맞으므로 고친다.)右常侍 從遊鄭圃隱 超選寶文閣直提學 諡忠獻 榮州縣尹時 有善政 故圃隱贈詩而賀 妣中原郡 夫人徐氏 墓在忠州市 牧杏洞 彌勒村 良坐合拊
公任于高麗朝官至檢校政丞 諡良貞 公 道學文章 冠于一世 竭忠衛國之功 莫大應垂竹帛 當太祖卽位 正人君子不得展志 公與鄭圃隱固守岡僕之義 竟謫于安邊 配鐵原郡夫人固城李氏 墓在高陽邑西合拊云 無表失傳矣 公之書院在京畿監營前及白川云而毀撤未可考也 有弟二人日澬日洵 澬篤修文學 行蹟昭著 官至吏曹典書兼晉陽都護府使 洵以聖節使 朝京師官至忠淸道都總制觀察使 有三男 長曰說露 文科行通政大夫兵曹參議 雲仍繁衍簪纓繼世
曰仁祚亦有忠烈之義 與仲兄入北而居永興之順寧 通政 有二男 長曰枰文科 通政大夫 承政院都承旨 次曰棕縣監 仁楨有一男曰敦仲 仁祚有一男曰峀
以下不盡錄 嗚呼 距今六百餘載 滄桑累變公之墓所無可尋處 故後孫不勝感慕之誠 建祠於中原郡東良面大田里恭修薦祀 庚申設祀壇爰樹神道碑於忠州市牧杏洞 忠獻公 墓下 以備不朽求銘于余其求也 不以文異乎人之求也 故辭不獲按其譜牒誌狀 而記之如右 系以銘
銘曰
惟公天資 間世以生 德崇官高 人物權衡
顯顯淸譽 千載無窮 我銘不謏 不朽其功
西紀 一九八〇年 庚申 仲秋節 忠州郡守 成均館 副館長 李壽源 謹撰
成均館 典儀 安商燮 謹書
良貞公派 謹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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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面:高麗班主檢校政丞諡良貞忠州崔公諱濂神道碑
高麗班主檢校政丞諡良貞崔公神道碑銘幷序
公姓崔, 諱濂, 系出蘂城. 蘂城, 卽忠州古號也. 有諱陞, 新羅末爲大唐兵馬使, 自中國淸河縣東渡朝鮮, 討平亂賊, 功成名遂而因居蘂城, 爲崔氏之鼻祖, 于今千有餘載. 忠孝節義, 道德文章, 繼世相傳. 公之五代祖諱公義, 高麗朝同知正. 同知正公以上, 杞宋莫徵, 以下則歷歷可考也. 高祖諱冽, 高麗忠肅王朝爲判宗簿寺事. 曾祖諱沃, 門下侍中. 祖諱伯淸, 門下侍郎. 考諱原儒, 高麗忠惠王時密直承宣右常侍. 樂遊鄭圃隱, 超選寶文閣直提學, 諡忠獻. 榮州縣尹時有善政, 故圃隱贈詩而賀. 妣中原郡夫人 徐氏, 墓在忠州市牧杏洞彌勒村良坐合拊.
公任于高麗朝, 官至檢校政丞, 諡良貞. 公道學文章, 冠于一世, 竭忠衛國之功莫大, 應垂竹帛. 當太祖卽位, 正人君子不得展志. 公與鄭圃隱, 固守岡僕之義, 竟謫于安邊. 配鐵原郡夫人固城李氏, 墓在高陽邑西合拊云, 無表失傳矣. 公之書院在京畿監營前及白川云, 而毀撤未可考也. 有弟二人, 曰澬, 曰洵.
澬篤修文學, 行蹟昭著, 官至吏曹典書兼晉陽都護府使. 洵以聖節使朝京師, 官至忠淸道都總制觀察使. 有三男, 長曰 說露, 文科, 行通政大夫兵曹參議, 雲仍繁衍, 簪纓繼世.
曰仁祚, 亦有忠烈之義, 與仲兄入北而居永興之順寧. 通政有二男, 長曰枰, 文科,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 次曰棕, 縣監. 仁楨有一男, 曰敦仲. 仁祚有一男, 曰峀. 以下不盡錄.
嗚呼! 距今六百餘載, 滄桑累變, 公之墓所無可尋處. 故後孫不勝感慕之誠, 建祠於中原郡 東良面 大田里, 恭修薦祀. 庚申設祀壇, 爰樹神道碑於忠州市牧杏洞忠獻公墓下, 以備不朽. 求銘于余, 其求也不以文, 異乎人之求也, 故辭不獲. 按其譜牒誌狀而記之如右, 系以銘.
銘曰: 惟公天資, 間世以生. 德崇官高, 人物權衡. 顯顯淸譽, 千載無窮. 我銘不誤, 不朽其功.
西紀 一九八〇年 庚申 仲秋節 忠州郡守
成均館 副館長 李壽源 謹撰
成均館 典儀 安商燮 謹書
良貞公派 謹立
번역문
《고려반주 검교정승 시호 양정 충주최공 휘 렴 신도비》
<고려반주 검교정승 시호 양정 최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휘(諱: 이름)는 렴(濂)이며, 본관은 예성(蘂城)이다. 예성은 곧 충주(忠州)의 옛 이름이다. 휘 승(陞)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신라 말기에 대당(大唐)의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중국 청하현(淸河縣)으로부터 조선 동쪽으로 건너와 난적(亂賊)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린 뒤 예성(蘂城)에 살게 되면서(因居) 최씨의 비조(鼻祖: 시조)가 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의 일이다. 충효와 절의, 도학과 문장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공의 5대조 휘는 공의(公義)이니 고려조의 동지정(同知正)이었는데, 동지정공 이상은 기록이 부족하여 고증하기 어려우나 이하로는 역역히 고증할 수 있다.
고조의 휘는 열(冽)이니 고려 충숙왕 때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증조의 휘는 옥(沃)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조부의 휘는 백청(伯淸)이니 문하시랑(門下侍郎)이었다.
부친의 휘는 원유(原儒)이니 고려 충혜왕 때 밀직승선 우상시(密直承宣 右常侍)를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즐겁게 노닐었고 초배되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올랐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영주현윤(榮州縣尹)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포은 선생이 시를 선물하여 축하하기도 하였다.
(고려 충혜왕(忠惠王)은 재위가 1330 ~ 1332년, 1339 ~ 1344년으로 두 번 재위에 올랐다. 그리고 1315년(충숙왕 2년)에 태어나 1344년에 사망했다.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충숙왕 복위 6. 충숙왕은 재위 1313 ~ 1330년, 1332년 ~ 1339년 두 번 재위에 올랐다. )에 태어나 1392년(공양왕 4)에 사망했다.
대략 따져도 최원유는 포은 정몽주보다 나이가 아버지 세대만큼 앞선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아버지 세대, 큰형님 세대와 어울리지는 않는게 상식인데, 포은 정몽주를 들먹이는 것은 최원유를 높이려는 의도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부친 최원유(崔原儒)의 행적은 신빙성이 없다. )
모친은 중원군부인(中原郡夫人) 서씨(徐氏)이며, 묘는 충주시 목행동 미륵촌 간좌(艮坐)에 합장되어 있다.
공은 고려조에 벼슬을 하여 관직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良貞)이다. 공은 도학과 문장이 일세에 으뜸이었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지킨 공이 더없이 크니 응당 역사에 기록될 만하였다.
그러나 태조(이성계)가 즉위함에 미쳐 바른 선비와 군자들이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포은 정몽주 선생과 더불어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강복의 의리(岡僕之義)'를 굳게 지키다가 결국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배위(부인)는 철원군부인(鐵原郡夫人) 고성 이씨(固城李氏)인데, 묘는 고양읍 서쪽에 합장되었다고 하나 묘표가 없어 전해지지 않는다. 공을 모신 서원이 경기 감영 앞과 백천(白川)에 있었다고 하나 훼철되어 고증할 수 없다.
동생 두 분이 있으니 자(澬)와 순(洵)이다. 자(澬)
는 문학을 독실하게 익혀 행적이 명백히 드러났으며 관직이 이조전서 겸 진양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순(洵)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명경(明京)에 다녀왔으며 관직이 충청도 도총제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公)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열로(說露)로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자손이 번창하여 벼슬길이 대대로 이어졌다.
차남은 인조(仁祚)로 역시 충렬의 의리가 있어 둘째 형과 함께 북쪽으로 들어가 영흥(永興)의 순녕(順寧)에 살았다.
통정공(說露)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평(枰)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고, 차남은 종(棕)으로 현감을 지냈다.
인정(仁楨)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돈중(敦仲)이라 하였고, 인조(仁祚)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수(峀)이라 하였는데, 이하 모든 명단을 다 기록하지는 못한다.
(이 부분에도 무언가 혼선이 보인다. 공(公)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순서가 바뀌었다.
○장남: 열로 (說露) — 문과 급제, 병조참의
손자(장남): 평(枰) — 문과 급제, 도승지
손자(차남): 종(棕) — 현감
○차남: 인정 (仁楨)
손자: 돈중 (敦仲)
○삼남(三南): 인조(仁祚) --- 次男이 아니라 三男이다. 둘째 형과 함께 북쪽으로 들어가 영흥 순녕에 살았다고 했다.
손자: 수(峀) )
아!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의 변화가 무쌍하여(滄桑累變) 공의 묘소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후손들이 사모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에 사당을 세우고 정성껏 제사를 올렸으며, 경신년(1980년)에 사단(祀壇)을 마련하고 이에 충주시 목행동 충헌공 묘소 아래에 신도비를 세워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준비하였다.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기에 그 청함을 보니 문장 때문이 아니요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의 부탁과는 달랐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그 족보와 지장(誌狀)을 살펴 위와 같이 기록하고 이어 비명(銘)을 적는다(求銘于余 其求也不以文 異乎人之求也 故辭不獲 按其譜牒誌狀 而記之如右 系以銘).
비명(銘曰):
오직 공의 타고난 성품은, 세상에 드물게 태어나셨네. 덕은 높고 관직은 높았으니, 인물의 표준이자 저울이었네. 드러난 드높은 청렴한 명성은, 천년이 지나도록 무궁하리라. 내 비문은 과장이 아니니, 그 공적은 영원히 썩지 않으리라.
서기 1980년 경신년 중추절(추석)에 충주군수 성균관 부관장 이수원(李壽源) 삼가 지음
성균관 전의 안상섭(安商燮) 삼가 씀
양정공파 후손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