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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묵상글 ( 성토요일. -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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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마태 28, 1-10(부활성야)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입니까?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이 교환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파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그분을 받아드리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부활의 밤입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당신은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항상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가시는 분.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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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30406 묵상글 하단에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는 강론을 올리지 않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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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전 강론을 옮깁니다. 2012.04.07 03:23
성 토요일- 주님과 똑같을 수는 없다
오늘은 미사가 없는 날이니 말씀 나누기가 아니라
어제 성 금요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저는 오래간만에 양성 수도원,
특히 수련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우리만을 위한 전례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3시간에 걸쳐
아주 의미 있고 풍성하게 드렸고,
십자가의 길은 수도원이 아닌 밖에 나가서 6시간에 걸쳐 하였습니다.
어제 아침 키레네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었는데
나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까 고민을 하였지요.
고민고민하다가 저는 두 가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마음고생에 동참하고
12시부터 3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몸 고생에 동참하기로.
마음고생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까지 겪으신 것들,
겟세마니에서의 그 마음의 번민, 다시 말해서
수난을 피하고픈 마음과 감당해야 하는 것 사이의 번민,
감당해야 할 수난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이나 유대인들의 조롱으로 인한 수치심,
10처에서 옷 벗김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욕을 당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한 저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전역에 가서 구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 금요일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저는 새터민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도 구걸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후원회원들이 보내 주시는 것으로 편히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수치를 당해 얻은 것을 조금이나마 장학금에 보태고 싶었지요.
그러나 막상 구걸을 하며 수치 당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두렵고 떨려
대전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나오는 첫 사람에게 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대 남자였는데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 차디찬 무시를 경험하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져서
거의 1시간을 도움을 청하려다 그만 두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또 청하니 이번에는 “에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겟세마니의 주님처럼
그만 두고픈 마음과 한 사람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그 두 마음 사이에서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두 번 밖에 구걸을 못하고 12시가 되어 역을 떠났습니다.
이어진 몸 고생은 마라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번민만 하고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저는 보상심리로 혹독하게 몸 고생을 시키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2시간을 달리고 중간 중간 1시간은 걸었습니다.
아침, 점심을 굶고 3시간을 달리니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길 것이 못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몸을 학대하다시피 했는데도 마음은 찜찜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확실히 수치와 모욕의 고통이
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견디기도 힘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의 가난이 절실하거나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다면
저도 수치와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하지도 주님과 새터민을 너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민만 많이 했지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모욕과 수치를 당함,
이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제 사랑의 정도입니다.
그래도 제가 위안 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수치와 모욕을 제가 당하였고,
구걸도 많이 하였다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실패 덕분에 저는 겸손할 수 있었고
주님의 실패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해 빵 두 개만 가지고 섬에 들어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끝나갈 때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에
빵 두 개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완전 단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주님과 똑같이 완전한 단식을 하였다는 자만감과 허영에 빠질까봐
그리고 주님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겸손 때문에 반쪽만 먹었지요.
그러나 부끄러운 체험 덕분에 제가 얻은 더 큰 것은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에 비해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얼마나 작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난의 사랑을 Passion이라고 하지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Compassion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저의 작은 Compassion이지만
주님의 그 크신 Passion에 동참하고 동감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마치는 것이 죄송하지만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이지만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는 병아리처럼
주님의 따듯한 사랑에 감사드리는 성 토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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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쪽은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비자금을 지키기 위해서 29만원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자금을 이용해서 사업을 하고, 재산을 불려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민주주의 영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정한 축재를 고발하였습니다. 자신도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늦었지만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쪽은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희생자들의 영령 앞에 사죄를 하였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비자금도 모두 반납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의 유족들도 대통령 아들의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밭으로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간 아들입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환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율이 오르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수출이 잘되고 경제가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리면 수출의 가격이 떨어지고, 수입의 가격이 올라갑니다. 경제가 성장할 것 같지만 오히려 경제성장에 발목을 잡습니다. 환율이 내려가면 원화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체질개선을 하게 됩니다. 원화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해외에서의 투자가 높아집니다. 경제성장이 둔화 될 것 같지만 오히려 경제가 성장합니다. 이것은 통계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환율은 저평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외환보유고, 수출실적으로 보면 지금의 환율보다 더 낮아야 한다고 합니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높이면 당장은 좋을 것 같지만 금융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고, 왼 뺨을 때라면 오른 뺨을 내주라고 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꽃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주간 토요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나의 신앙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나의 신앙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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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은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만이 아닙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며,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도 스트레스가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스트레스를 앓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안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스트레스는 면역체계에 이상 반응을 일으켜서, 자가면역질환 환자가 갈수록 늘어나게 한다고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로버트 새볼스키 교수는 그의 책 ‘얼룩말은 왜 위궤양에 걸리지 않을까?’에서 사자의 추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얼룩말은 다시 평화롭게 눈앞의 풀을 뜯어 먹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공격했던 사자를 떠올려 분노하지도 않고, 내일 또 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냐고 미리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에 집중할 뿐, 그러다가 다시 사자가 나타나면 그때 다시 열심히 도망칩니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에 충실하니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떤가요?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하면서 편도체가 계속 활성화됩니다. 여기서 스트레스가 나오고, 신체의 건강도 조금씩 잃게 됩니다.
오늘은 성토요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내가 부활해서 보자. 복수하리라.’라고 하셨을까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지? 큰 혼란을 겪을 텐데….’라면서 걱정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모두 아니었지요.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지금’에 충실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먼 훗날 주님 곁으로 갈 때,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에 충실할수록 가능성은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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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작습니다. 함께 할 때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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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성토요일은 부활성야 강론을 미리 올리오니 미리 부활의 기쁨을 하루 앞당겨 사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부활 대축일 낮미사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드님을 살려내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좋으신 주님을 찬송합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빛으로 희망으로 생명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이제 예전의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자유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우리의 빛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도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성탄성야 미사중 성경독서 이사야서 11장1-10절 까지의 노래와 쌍벽을 이루는 “용약하라”로 시작하는 파스카 찬송이 주님 부활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시간되면 한번 힘차게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끝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구구절절 기쁨 충만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빛과 생명으로, 희망과 사랑으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으로 가득한 광야세상을 어찌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빛과 생명으로,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례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가 주님 파스카의 생명과 빛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위에 군림하지 못하고 그분께서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죄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세례의 깨달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덕분에 우리 역시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제 주특기가 하느님 자랑입니다. 예수님을 살려내신 하느님의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제2부 말씀전례에서 소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지요! 매번 독서를 요약하는 후렴 시편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차례대로 소개합니다.
1.“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제1독서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달라는 청원입니다.
2.“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2독서에서 죽을뻔한 이삭을 살려내신 하느님께 우리를 지켜 달라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2.“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분”
탈출기에서 모세의 영도하에 이집트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듯 우리 역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3.“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이사야서에서 보다시피 영원한 자애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구하시니 주님을 높이 기려야 할 것입니다.
4.“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야서 말씀후 후렴처럼, 주님의 구원의 샘에서 기뻐하며 생명의 물을 길으라는 고마운 충고말씀입니다. 바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이 주님 구원의 샘터입니다.
5.“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바룩서 독서후 후렴은 지혜의 샘이신 주님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라는 고마운 권고입니다.
6.“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에제키엘 독서후 시편 후렴은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주시는, 돌로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된 마음을 넣어주는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고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구약의 여섯 독서 말씀과 후렴시편이 얼마나 다채롭고 은혜롭고 풍요한지요! 생명의 말씀, 빛의 말씀, 희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입니다. 새삼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말씀의 종교요 우리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아, 이 모든 하느님 말씀의 종합이자 완성이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 그리스도님이십니다. 말씀의 신비, 말씀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단히 찾고 만나야 할 사랑하올 분은 파스카 예수님뿐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파스카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 제자들을 향해 달릴 때 다시 나타난 주님은 ‘평안하냐?’말씀하신후 당신 발을 붙잡고 절하는 여인들에게 자상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찾지 말고, 각자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는 우리의 형님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찾아 만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友情을, 우애友愛를 날로 깊이하며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게 하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은 자작 고백시,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아름다운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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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성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전부를 예수님께 투신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승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힘없이 처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걸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주님을 믿기 위해 내던졌던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고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소중하고 세상에 더할 수 없는 보물을 가져다주는 의미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던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이 부활 사건이 내세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겐 큰 위안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힘은 오늘의 현실 안에서도 발휘되고 있습니다.
무덤에 처음으로 갔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한참이나 주님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지만,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후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가슴을 움츠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며 가슴이 있어도 움츠려 있기만 하다면 이 어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펴고 우리의 가슴이 활활 타오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참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단 한 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쉽게 망각하고 식어버리기에 매년 이 부활을 기념하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매 주일 미사를 통하여 부활을 기념하며 뜨겁게 데워져야 합니다.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단순히 2,000년 전의 사실을 기념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을 통해 가져다준 참 생명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금 부활한 삶에 동참하도록 우리의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뜨거운 가슴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회비용
‘기회비용’이란 어떤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회를 위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비용은 시간, 돈, 노력, 성실함, 집중력, 이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딘가에 도착하고자 한다면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그것을 얻으려면 우리 신앙인들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의 이름은 바로 인내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 그리고 비움의 길입니다. 어쩌면 사실 길은 하나인데 그 이름이 다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걸으신 길도 이런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함께 걷자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신앙의 길이 쉽다고 누가 말합니까.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지만 혼자 걷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 서로가 있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길을, 천국의 길을 함께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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