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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목을 그런데로 잘 하는데, 꼭 역사과목만 밑바닥을 면치 못하는 학생의 학부형이 담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들이 다른 과목은 다 잘 하는데, 역사과목만은 왜 늘 땅바닥을 칠까요?”
담임 선생은 한참을 아이의 성적표와 학생, 그리고 아버지를 쳐다본 다음에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학창시절에 역사과목 공부를 잘 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아버지가 머리를 끍적이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 역사과목이 변변치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랍니다.”
왜 우리가 다니엘서 3장을 연구해야 하는가? 대답은 명확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의 과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싸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꼭 같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2장은 어떻게 마쳐집니까? 왕도 잃어버렸던 그 꿈을 다니엘이 분명히 말해주고 왕은 경탄합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단 2:45)
왕은 너무나 큰 감동을 받고 다니엘 앞에 절하기까지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역사를 다스리시며 통치하신다.
그 엄청난 진리가 그의 마음을 진동시켰습니다.
그런 마음이 지속된다면 느부갓네살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사탄이 아닙니다. 그는 곧장 은혜와 감동 다음의 후폭풍을 준비합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점토판 가운데서 발견되어 출판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年代記)는 다니엘서 3장의 배경 이해에 새로운 빛을 주고 있습니다.
「아카드(註: 신바빌로니아를 가리킴)왕 제10년 그의 땅에서, 제9월로부터 제10월까지 아카드의 반역이 있었다. · · · 그는 무기를 가지고 그 자신의 군대 가운데 다수를 죽였다. 그 자신의 손으로 그의 원수를 사로 잡았다.」
이토록 너무나 긴박하여 대왕 자신이 무기를 들고 백병전을 해야했던 이 반역은 느브갓네살의 재위 10년 제9월과 제10월이라 했는데 이는 기원전 595년 12월과 594년 1월 쯤에 해당됩니다. 그 사건에 대한 내용의 확인을 우리는 예레미야에서도 발견합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렘 51:59)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 째에 바벨론을 방문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봉신왕(封臣王)이었던 그는 종주국에 어떤 형식이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갔음은 있음직합니다. 유다가 최후로 망한 것은 시드기야 11년째였으므로 아직은 그가 바벨론을 반역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가을부터 시작되는 유대의 민력으로 계산하면 시드기야 4년은 기원전 594년 가을에 시작됩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방문한 것은 느브갓네살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지 1년이 채 못되는 때로 그의 바벨론 방문이 느브갓네살 재위 10년째에 일어난 반역과 필경 어떤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즉 본국에서 일어난 반역에 자극을 받아 다른 종속국들이 덩달아 반역하지 못하도록 충성을 재다짐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다니엘서 3장의 금신상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때 이때 일어난 반역을 계기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왕위를 다시 한번 공고히하고 그의 제국을 영구하게 함으로써 그렇잖아도 불안을 주는 다니엘서 2장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각 계급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기 위해 3장의 금 신상을 세우고 그 제막식에 그들을 참석시켜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2장에 꿈에 보여주신 금,은, 동, 철, 진흙의 우상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으로된 신상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정치적으로 권력을 다시 통합시키고, 종교적으로 우리나라 바벨론의 영광이 영원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줄만한 신적계시처럼 나타내 보여 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술수와 종교적 수단이 가미된 대단히 고차원적인 전략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단 3:1)
60규빗의 높이로 세워진 금신상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1규빗'은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하는데, 일반규빗은 45cm, 왕실규빗은 52cm를 적용했습니다. 27m~31m는 현대식 아파트 약 9층에서 11층 높이에 해당합니다. 평지에 이 정도 높이의 황금빛 신상이 서 있었다면, 멀리서도 그 압도적인 위용에 굴복되었을 것입니다.
충청도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높이가 33m에 달합니다. 이는 다니엘 3장의 60규빗(약 27~31m)과 매우 비슷한 규모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신상의 숫자속에 666의 코드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높이 60규빗, 너비 6규빗, 6개의 악기를 동원하여 숭배합니다.
그리고 왕은 그 나라의 모든 제후국들과 통치자들을 다 오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시야도 불려와 충성맹세를 해야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단 3:2-3)
그리고 악기를 불때에 그 엄청난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절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단 3:5-6)
이것은 놀랍게도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666짐승의 표와 놀랍게 일치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13장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우상을 강요하고, 누구든지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는 엄청난 사건이 있을 것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5-18)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생각할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전에 기록된 계시록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거래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오늘날에는 전자화폐로 신혹히 바꾸어지고, AI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화폐대신에 카드가 사용되고, 카드를 분실할 우려들이 생기자 이제는 카카오페이, 삼성페이, 다양한 디지털 화폐들이 대체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바코드로 기록하는 것들이 실용화되는 세상입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이 어떻게 짐승의 표와 연관되는지에 대한 내용들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의 종교가 통합되고, 정치가 종교와 연합되어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때가 신속히 도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온 세상이 우상에게 절하며, 매매권, 생존권을 보장받으려는 때에 누가 감히 서서 이 우상을 대적하겠습니까? 감히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왕의 권한에 정면도전하고, 좀전에 있었던 반역의 사건과 연관되어 반역자로 몰려 즉시 처단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절을 하는 그 순간에 바위처럼 우뚝 선 3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왕 앞으로 체포되어 왔고, 왕은 다시 한번 그들을 회유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단 3:14-15)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듣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풀무처럼 달아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 앞에서 세 친구가 말한 침착한 대답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왕이시여, 이 문제에 대하여는 저희가 달리 드릴 말씀도 없고 달리 취할 행동도 없습니다. 지금 취한 이 처신이 확고하고도 최종적인 것입니다. 왕이시여, 왕의 명령을 좇아 우상에게 경배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토론이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서 이토록 담담하게 최후의 진술을 하고 있는 세 젊은이의 심중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뿌리 깊은 감회가 맴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이 어린 나이들에 부모님 곁 정든 고국에 살지 못하고 이처럼 타향 만리 이국 땅에 포로가 되어 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며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때문입니다.
젊은 꿈이 한껏 부푼 나이에 정든 고향, 그리운 부모님과 가족의 곁을 떠나 이 곳으로 잡혀 오던 그 괴롭고 가장 길었던 여름, 우리 몇 사람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결심을 했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더욱 떳떳하고 후회가 없는 길임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와 우리 어른들의 경험에서 충분히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 뼈 아픈 민족의 비극을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이 비극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극의 막을 내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계명입니다(출 20:3). 우리의 패역한 조상들처럼 또 다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계명입니다(출 20:4, 5).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히브리 젊은이들은 100여년전 이러한 때를 위한 이사야 선지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구속자임이라」 (이사야 43:1-3).
풀무불이면 모든 것을 끝장내리라고 생각했던 왕에게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왕보다, 바벨론의 신보다, 더 높고 능력이 더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선언함으로써 바벨론의 권위는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잇는 세 젊은이의 다음 번 선언은 참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의 극치였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 · · 아옵소서”(But if not, be it known to you, O king).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왕에게서나 풀무불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그냥 죽게 되더라도, 풀무불에서 사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길이어서, 설사 우리가 죽게 된다 해도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조건 없는 절대 순종의 고상한 모본으로 결과를 묻지 않고 부르심에 응한 아브라함의 신앙(히 11:8)을 방불하게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일 · · · 을 해 주시면”(If · · ·, then · · ·) “내가 · · · 을 하겠나이다”라는 팥죽 장사하던 야곱의 실리주의(實利主義)적인 조건부 신앙에 머물러 있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처럼(수 24:14, 15),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시 57:7, 시 108편)라고 부르짖어야 하겠다. 그리고 에스라의 고백처럼(라 7:10),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 10:10) 신앙 경험이 절실합니다.
동방 교회 최대의 설교자로 불리우는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 407)은 젊었을 때 황제 앞에 서서 그의 신앙을 취소하라는 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때에 이러한 문답이 오고 갔습니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고집한다면, 나는 너를 네 조국으로부터 쫒아 내고 말겠다.”
“황제 폐하, 그러실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내 아버지(하나님)의 땅이 올시다.”
“그렇다면 나는 네 재산을 몰수해 버리겠다.”
“그렇게도 못하십니다. 제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럴진대 내 너를 말조차 나눌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쫓아 보내겠다.”
“그것도 안 되십니다. 제게는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나의 형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모실 것입니다.”
황제는 분통이 나서 소리쳤습니다.
“네 생명을 끊어 버리겠다.”
“그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제 생명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어있습니다.”
세 젊은이의 모본에서 우리는 장차 같은 경험을 가지게 될 남은 백성의 특성을 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왕은 분노하고,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세친구를 던져넣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단 3:22)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불속에 들어간 세청년이 불속을 걸어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깜짝 놀라 고함을 칩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단 3:25)
하나님은 그들을 고난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가운데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불구덩이야 말로 세친구뿐 아니라 모든 바벨론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위대한 광경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수많은 청중들의 이야기는 금신상이 아니라 풀무불속에서 세친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께 충성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충성의 자리에 서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신실한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앞에도 선택의 시간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 유익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일상에 직면하는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