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믿는 기쁨
사43:1-2(요14:1-31
1. 들어가는 이야기
지상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져 있습니다. 유일신, 창조주, 구원자, 치료자, 전쟁의 승리자, 지혜의 근원, 목자, 반석, 인도자, 심판주, 역사의 주인, 사랑의 아버지, . . .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 하나님을 絶對他者, 절대 無限者,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 .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정의와 표현을 뛰어넘는 분이시며 그런 것에 갇히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이레네우스, 터툴리언, 클레멘트, 암브로시우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도, 임마누엘 칸트, 쉬라이에르마허, 바르트, 부른너, 불트만, 폴 틸리히, 몰트만 같은 신학자들도, 12 사도들도,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하나님을 모두 다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은 마지막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시면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이성과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는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알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도, 나이 많은 노인들도, 철없는 어린아이들도, 심지어 정신적 장애를 입은 사람들까지도 참 마음으로 <하나님!> 하고 부르면 언제나 <오, 그래! 왜?> 하시며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 하나 하나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이 있다(요10;16)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관계를 사람의 지식, 이성, 이해, 논리로 완벽하게 해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 교부 시대 이후 서구 신학과 철학의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비한 관계를 해명하려는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차가운 논리와 합리적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새벽빛 같은 직관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이며, 체계적 논리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각 사람의 영적, 지적, 정서적 수준에 따라 그 사람의 구체적 삶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란 무엇인가?
첫째. 저 영원한 인생의 고전적인 물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제 아무리 富貴榮華(부귀영화)로 도배를 한 인생이라도 절대 허무, 절대 고독, 절대 불안, 절대 회의, 절대 무의미 그리고 마침내 절대 절망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동서양 인류 역사가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 지날 때에 불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요,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삼키지 못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사43:1-2>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사람은 자기 인생의 근원과 인생의 목적,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뚜렷한 <존재론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황야 같이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으로,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으로, 그럭저럭 외롭고 힘없는 푸석푸석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실존에 처하였을 때 <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도와주셔요!>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런 희미한 작은 기도 소리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속에 들어 찬 불신앙의 반석, 무기력의 반석을 깨뜨리시고 사막 같은 내 실존 속에 강물을 내시어 내 삶을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셋째.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일상에 매몰되어 비전도 없이, 꿈도 없이, 하루하루 시시하게, 살아갑니다. 가슴 뛰는 일이라곤 하나 없이, 열정도 없이, 패기도 없이, 오늘도 일 갔다가 피곤에 지쳐 돌아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다음날 또 부스스 일어나 일 나갑니다. 그 무엇을 보아도 그 무엇을 들어도, 그게 그저 그거지 뭐 하는 무감각하고, 무감동하고, 무신경하게 삽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누구든지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르짖으십시오. 이 얼마나 큰 기쁨의 약속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