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6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연중 제34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한 이후,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을 위해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결심합니다.
동정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남자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동정을 지키겠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받은 그대로 그것을 주신 그분께 돌려드리려는 순결한 봉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루갈다 성녀도 자신이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을 사랑하였습니다. 이 둘은 하늘나라에서 마치 천사처럼 사랑하며 사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 동정부부의 지상에서의 모습이 마치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천상에서 천사들처럼 사는 부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이 모습이 우리 부부들이 닮아가야 할 모델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여 그 분과 한 몸을 이루지 못하면 부부간의 사랑도 그만큼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하여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동정부부의 모델은 이 세상에서의 궁극적인 혼인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존재하고 있지 않았지만 육체와 영혼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그와 한 몸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마도 이순이 루갈다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영한 그리스도의 몸이 자신의 몸과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는 신비를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수녀님들이 혼인을 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이와 같이 인간의 궁극적 완성이 그리스도와의 혼인에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동정을 지키거나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이 세상의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혼인이 사랑의 시작이요 끝임을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태어날 수 없고 부모로부터 태어나듯이, 그리스도와의 혼인도 중재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중재자가 바로 성모님입니다.
오늘 성모님은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마치 이 루갈다 성녀가 그랬던 것처럼 의식이 있을 때부터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하느님의 신부가 되기에 가장 적절한 순결한 처녀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이듯이 그 완전한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도 완전해야 합니다. 죄의 흠이 있는 어떤 누구도 그 완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지만 원죄 없으신 성모님만이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 합당한 응답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도 성자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오게 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성자의 딸입니다. 마리아도 당신의 모든 것을 성자로부터 받았으니 당연히 당신의 모든 것이 성자의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성전에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이런 성모님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 그 분의 아들이 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에게서 태어나셔서 그 피조물과 한 몸을 이루십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서 하와가 태어나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고, 또 성부에게서 성자께서 나오셔서 두 분이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 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어떤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자신과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성령님을 아들에게 보내시며 아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높여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의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시어 교회를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봅니다. 성모님만이 깨끗한 그릇으로써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실만한 분이시고 그분이 아니시면 누구도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당신과 한 몸을 이루게 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중간에서 성령님을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의 혼인을 돕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 모습이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잘 나타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나오지 않습니다.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교회를 위해 포도주로 상징되는 성령님을 청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교회의 사제직을 통하여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고 포도주가 당신의 피로, 또 당신의 피가 성령이 되게 하시어 혼인 잔치에 참석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게 합니다.
교회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성모님의 중재를 통해 충만히 전해지는 성사의 은총인 성령님을 받아 모시고 그 사랑의 열매로 신랑인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성모님은 이렇듯 혼인잔치의 중매쟁이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순결한 신부의 원형은 성모님 자신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위해 갖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또 나중엔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에서 봉헌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참다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여, 어떤 것도 더 얻거나 잃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오롯이 나를 그분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창조되신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였다면 부족한 우리들이야 얼마나 당연히 성모님의 모습을 본받으려 노력해야겠습니까?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는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저 구슬들처럼 그 빛을 주고받으며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 연기법의 진리를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구조 속에서 더불어 존재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서양의 인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동양의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애틀은 땅을 팔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짝이는 개울물과 강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와도 같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우리 조상의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 형제이며 우리 목을 축여 준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 자매이고, 사슴과 말과 큰 독수리는 우리 형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나?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결국 미국의 대통령은 땅을 샀지만 원주민 추장의 숭고한 뜻을 받아들여서 도시의 이름을 ‘시애틀’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인드라망처럼 우리의 만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미국에 와서 서로 만났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과 신부의 부친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할아버지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의 우정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한인 성당으로 지난봄에 사순특강을 갔습니다. 신부님은 6월에 제가 있는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 본당의 사목위원이 저와 함께 일하는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이 뉴욕으로 오면 주방 자매님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엘 가면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착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인드라망의 세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시애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쟁, 폭력, 증오, 분노, 원망, 불평, 불만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겸손, 나눔, 친절, 온유, 절제, 사랑,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철학, 문학, 종교, 신앙은 바로 우리를 인드라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처럼 살라는 것은 아닐까요?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교회 전통에 따르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기념일에 교회는 마태오 복음 12장 46-50절을 봉독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근동 지방 전통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함합니다. 이어서 복음서의 저자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를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하시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
[부산교구 김창대 임마누엘 신부님]
모두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르코 복음의 순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3장 1절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펴주십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할 기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3장 6절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직내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투메와 요르단강 건너편과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라면 식사도 잠도 거를 만큼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를 질시하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군중들에게 매도했습니다.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있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의 건강도 염려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밥이 나오나, 돈이 생기나, 그보다도 그들이 마음 쓴 것은 가문의 명예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와 그리스는 물론 팔레스티나에서는 가문의 명예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으러 온 친척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었고, 그 밖에 가문을 이루는 친척들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여기 낀 것은 아들 예수의 건강에 대한 염려때문이었을 것이고, 아버지 요셉이 빠진 것은 요셉이 이미 작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찌기 혼자된 성모 마리아는 친척집에 몸을 의지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홀어머니를 혼자 버려두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랑 전도를 하던 예수님의 마음도 아팠을 것입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은 늦게 도착하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한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어머님과 형제들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라는 전갈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그러고는 제자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생을 가족에서 시작하고 가족 안에서 가족을 위해 사는 세속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민족 전체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범죄에 해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혈육 관계'를 무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르게 보셧습니다.
누가 진정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들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내 자매라 했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하나의 신념이지 믿음이 될 수 없고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념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또 그대로 된다는 보장이나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천지가 변해도 변함이 없는 약속과 보장이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이고 예수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머니를 모시듯이 사랑하며 형제, 자매처럼 대하십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몸으로 복음을 사는 사람입니다.
입술로는 섬기면서 몸으로는 기억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몸으로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좋은 강론을 들으려 주일마다 성당을 배회하는 이들이 아니라 들은 강론대로 살려고 몸부림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말씀이 좋다'고 몰려드는 이들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모두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모친이요, 주님의 형제요,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남처럼 사는 이들이 아니라 가족처럼 사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다 주님의 가족이 됩니다.
=====================
[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족을 대하시는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냉정합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으러 왔을 때에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면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배척하시는 듯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꼽으시는 것도 결국 가족과 애지중지하는 소유물입니다. 예수님의 냉정함은 사실 가족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모습은 바로 베드로 사도를 향한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도 그렇지 않으셨던 분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서는 주저 없이 최악의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베드로 사도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다는데, 그분을 사랑하는 제자로서 말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도 인간적인 이런 의문을 품다보니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십자가의 길이 부담스러운 예수님께는 베드로의 이런 반응이 너무도 고마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설로 꾸짖은 것은 베드로 사도가 아니라, 그 사랑의 마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가족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당부는, 가족의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최고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일 것이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순수함을 잃었다고 비난하곤 합니다. 특히 성모님을 공경하는 전통은 오직 믿음과 은총, 성경만을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계가 우리를 가장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에 등장하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란 표현에서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의심하거나, 아들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가족을 박대하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심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도 성경을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성령을 받아 성경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할 수는 있지만, 성경의 유권적 해석에 관해서만큼은 교도권,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가르침에 맡겨져 있다고 가톨릭 교회는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전승의 참된 의미를 지켜 가기 위함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마리아의 다른 자식이 아닌 ‘친척들’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사도들과 함께 사시며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교회가 세상에 선포되는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 공경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만큼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분이 역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육을 취하신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분의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말씀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리적 논쟁을 떠나, 예수님의 성심과 결합되어 십자가의 길을 평생 함께 걸어가신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하고 공경받으셔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가족>
하느님 뜻 따라
서로 믿으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바라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사랑하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안기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품으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스미니
참가족입니다
하느님 뜻 따라
서로 살리니
참가족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 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곳에 사랑이신 그분이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대 로마는 다신교였습니다. 하나의 신이 아닌 여러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신 중에 부부 싸움의 수호신이 있습니다. 비리프라카 여신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만 있어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도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호소하는 동안 흥분했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 여신을 찬양하면서 둘이 사이좋게 사당을 나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와 다툴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이야기하기에 더 바빴던 것이 아닐까요? 내 말을 통해 상대의 이해를 바라기보다, 상대의 말을 통해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 말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통해서 어떤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상대의 말을 잘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사는 비결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단순히 봉헌만으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봉헌을 자기 삶으로 더 거룩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율법학자들은 마귀 들린 자라고 떠들곤 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돌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성모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자기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성모님과 친척들이 서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특별한 분이시고, 하느님께 봉헌되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끌고 집으로 갔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도 마음에 간직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하십니까?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봉헌의 완성, 봉헌의 대물림>
오늘 성모 자헌 축일은 이름대로 성모님께서 자신을 봉헌하셨음을 기리는 날이지만 속 내용을 뜯어보면 두 가지 뜻이 겹으로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성모의 자헌에는 마리아가 부모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서 봉헌되었지만, 부모의 그 봉헌을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도 자신을 봉헌하셨으며 아드님을 봉헌하셨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자신도 봉헌하셨다는 뜻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봉헌은 부모의 봉헌입니다. 지금도 불교에서는 동자승이라는 것이 있듯이 마리아의 최초 봉헌은 부모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마리아의 봉헌이 이것으로 그쳤다면,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마리아가 봉헌되신 것이라면 칭송받아야 할 것은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이지 마리아 자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마리아가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꺼이 순종하여 부모의 봉헌을 완성하신 것이며 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틀림없이 당신을 봉헌하신 부모의 뜻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인 부모의 뜻을 완성하려고 순종하시고 봉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봉헌에도 이런 완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봉헌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의미 말입니다.
부모의 뜻이건 하느님의 뜻이건 거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기꺼이 순종하고 봉헌하는 데 있겠지요.
그러나 마리아의 봉헌이 더 완성을 이룬 것은
당신의 봉헌이 아드님의 봉헌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대물림이랄까 그것이 마리아의 자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진정으로 봉헌할 때 자식을 주님의 자식으로 봉헌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자식들도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봉헌의 완성, 봉헌의 대물림을 묵상하는 성모 자헌 축일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참가족>
- 늘 새로운 봉헌, 예수님 중심의 삶 -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도다.”(입당송)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약 20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의 기록을 기초로 하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던 자신들에게 딸을 준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봉헌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가 3세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것 근처에 비자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서방에서는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이 축일을 다시 기념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축일을 2등급 축일로 제정하였으며, 1969년 로마 전례력에서 그대로 남아 기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새삼 우리의 봉헌의 삶을 묵상하게 됩니다. 늘 새로운 봉헌을 통해 예수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참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 받아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 우리들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혈연가족이 아니라 부르심에 따라 예수님 중심으로 이뤄진 예수님의 참가족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입니다. 성격이, 마음이, 취향이, 성향이 같아서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기에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이런 일치는 고정불변의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평생 완성을 향해가는 미완의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평생 공동전례 활동을 통해 늘 봉헌을 새로이 함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참가족을 이루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즈키르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님 중심의 한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혈연가정공동체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되어야 온전한 공동체입니다.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하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유산문제등 돈의 마력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가정공동체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견고한 믿음이 있을 때 돈의 유혹을 넘어설 수 있겠기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런 말마디를 사용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믿음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예수님 중심으로 한가족을 이룬 제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주고 받는 내용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곧장 예수님의 답변이 뒤따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 중심의 삶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수행자로서의 삶입니다. 날마다 마음 깊이 주님께 나를 봉헌함으로 늘 주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도 이와 일치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
한결같이 주님 중심의 한몸 공동체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참행복이요 기쁘고 즐거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봉헌을 새롭게 하면서 주님 중심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의 모태는 복되시나이다.”(영성체송).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하느님의 참자녀들이 되자!>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성모님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자, 그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50)
우리도 예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세례와 서약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부를 때에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oo사장님, 의사님, 약사님, 교수님, 교장님, ...", 또는 "야~"라고 부르지 않고, "oo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와 서약으로 드린 나의 봉헌이 입으로만 드리는 '공염불'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것이 구체적인 나의 행실로 드러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참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치열한 삶의 자리입니다. 정말로 치열하게들 싸우고 있습니다. 그 치열한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참자녀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ZtEATSNf4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오르막과
내리막을
봉헌합니다.
봉헌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생활의 봉헌이며
가장 가까운
관계의 봉헌입니다.
자발적인 봉헌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된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시작하여
봉헌으로
마무리되는
봉헌의
이 여정입니다.
사랑의 봉헌은
흩어진 형제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치의 힘이
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까지 하나로
이어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깨끗한
우리의
첫마음입니다.
인격은 봉헌을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봉헌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장 고귀한
신앙입니다.
내어드려야
낮아질 수 있고
내어드려야
고요할 수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봉헌이 우리가
누군지를
다시 알려줍니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놓쳐버린 것은
봉헌의 정신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봉헌이며
봉헌은 우리의
참된 실행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봉헌으로 오시고
봉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봉헌이며
사랑의 봉헌입니다.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모든 삶의 시간이
봉헌이며
회개입니다.
만남을 봉헌하고
마음을 봉헌하는
참된 평화입니다.
봉헌은 그래서
평화이며
은총가득한
삶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봉헌의 실행입니다.
오늘도 기쁜
봉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삶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
{2)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가장 아름다운하느님의 뜻은 우리들의 정직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봉헌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기 때문입니다.
봉헌이 사랑입니다. 봉헌이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 때문입니다.
봉헌 안에는 믿음과 사랑, 자유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소통은 봉헌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관계를 아우르는 은총이 있다면 그것은 봉헌입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모든 여정을 사랑으로 이끌어 가실 하느님께 봉헌하는 용기어린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두가 정직해질 수 있는 길은 봉헌뿐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