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노정애
외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104세가 되신 2020년 새해 첫날이었다. 늦은 밤이라 장례는 다음 날부터 3일장으로 치른다고 했다. 남편이 장례를 맡아야 하기에 서둘러 출발했다.
장녀인 엄마와 살림을 합친 때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인 14년 전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외할머니가 지키고 있어 김해 친정에 가면 든든했다. 외할머니는 외갓집의 크고 작은 소식들을 전하는 소식통이었다. 밭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받은 전화를 술술 잘도 전했다. 맹장염 수술도 너끈히 받고 결석이나 감기로 입원하셔도 훌훌 잘 털고 일어났다. 비교적 건강했는데 지난해부터 심상치 않았다. 봄에 2주 정도 병원 신세를 졌고 12월 중순 다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2년 전 외할머니는 “정 서방아 내가 떠나면 자네가 내 장례를 맡아서 처리해주게.”라며 남편에게 부탁했다. “외삼촌들도 계시고 큰 손자인 영준이도 있는데 제가 맡아서 하다니요.”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정 서방 자네가 맡아서 해줘야 편히 떠나겠네. 그러니 꼭 해주게.” 손을 꼭 잡고 훌쩍훌쩍 우셨다. 눈물 앞에 약해진 남편은 그러마 하고 약속을 했다. 다음 날 당신은 이모며 외삼촌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서방이 장례를 맡아서 해 줄 것이라고 알렸다. 그는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작전에 넘어간 것 같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있어 그런 것임을 알기에 싫은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차는 많지 않았다. “여행 갔으면 어제가 귀국 날이었네요. 취소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내가 말을 걸자 운전만 하던 그도 “그럼 잘했지. 그냥 갔으면 여행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야.” 했다. 오래전에 북유럽 여행을 예약해 두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여행에 설레어하며 가방을 싸고 있을 때 외할머니의 중환자실 입원 소식을 들었다. 마음에 준비를 해 두라는 담당의 소견도 함께여서 위약금을 물고 여행을 취소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경찰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른을 넘긴 외할머니의 배 속에는 6개월 막내외삼촌이 있었다. 생선 행상, 포목 보따리 상, 튀밥 장사, 떡 장사등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4남 2녀의 자녀들을 혼자 힘으로 키웠다. 당차고 거침없는 성격에 한 번 화를 내면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가장의 자리를 지켰다. 자식들이 장성해 결혼을 시키고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출동해 해결사 노릇을 했다. 17명의 손주들 중 많은 아이들이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부산 광안리에서 시멘트블록 공장을 막 시작했던 즈음이었다. 다세대주택의 다락이 있는 단칸방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바빴다. 다섯 살 위의 오빠는 몇 해 전부터 맡아서 키워주고 있었다. 두 살 위의 언니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두 살 아래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일에 지친 엄마가 측은해 보였는지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서울행 기차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녁 출발이었는지 창밖은 어두웠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엄하고 무서운 외할머니 눈치만 살폈다. 창밖만 보고 계시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렸을 때 손수건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뺨에는 타고 내린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머리 한번 쓰다듬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오빠가 있는 외갓집. 초등학생 오빠는 몇 해만에 보는 어린 동생을 가끔 귀찮아했다. 난 잠에서 깨면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그런 나를 달래준 것은 외할머니였다. 큰외삼촌이 결혼한 직후였고 외삼촌들과 하숙생이 있어 식구가 많았다. 얼마 안 있어 외사촌 동생이 태어났다. 공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살림집도 지었다고 했다. 오빠가 먼저 집으로 가고 몇 개월 뒤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나왔다는 연락에 외할머니가 나를 데려다주었다.
2년 만에 보는 부모님도, 식구들도, 새집도 낯설어 외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울음을 터트렸던 나. 아버지에게 가보라며 등을 떠밀던 당신의 조심스러운 손길. 그날 밤 나를 꼭 안고 자면서 가만 가만 내 등을 토닥이며 내쉬던 깊은 한숨. 김해에 가면 모든 자손들에게 “내 강아지, 우리 금띠(금덩어리)왔나”며 손부터 잡았는데 이제는 외할머니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다음 날 가족들이 모였다. 작별인사를 위해 미리 와 있던 이모부 내외, 큰외숙모, 80을 바라보거나 훌쩍 넘긴 외삼촌 내외분들. 손자, 손녀들과 증손주들까지 대가족이다. 준비되어있는 이별임에도 받은 사랑이 깊어 슬픔도 컸다. 이웃이었던 동네 분들이 왔다. 들고 날 때면 안부를 묻는 어른이 안 계시니 동네가 텅 빈 것 같단다. 오랫동안 소식 전하지 못했던 먼 친척 분들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고 많이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자식들의 지인과 손자 손녀들의 지인들도 왔으니 마지막 인사를 할 분들은 다 다녀갔다. 장례를 치르는 2박 3일을 식구들은 함께했다. 당신과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장례 마지막 날 새벽 6시에 발인 예배를 보고 화장터로 향했다. 당신이 한줌 재로 돌아가는 그 시간 동쪽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대전현충원에 계신 외할아버지와 합장했다. 생전에 “너무 늙어서 네 아버지가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라며 걱정했는데 그간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한 아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마중 나왔으리라. 대전 현충원 휴게실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외할머니와 작별인사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외사촌 동생의 처인 종부가 “할머니가 종부야~ 부르시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해요. 시댁가족들과 이렇게 오래 함께 있었던 것은 처음입니다. 이제야 제가 이 집안의 식구가 된 것 같아요. 이게 할머니가 제게 주신 마지막 선물 같습니다.” 돌아가시고도 우리를 품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은 종부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받았음을 알았다.
며칠 뒤 남편은 외할머니의 연혁과 생전 모습들, 가족의 탄생과 새 식구를 맞이하는 결혼식사진, 장례사진을 담아 추모 앨범 두 권을 만들었다. 앨범을 받은 가족들은 당신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꿈에서 외할머니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봤다. 남편의 일처리가 마음에 드셨나? 외할머니는 이것까지 다 알고 계셨나보다.
한국산문 2022년 9월
노정애
부산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 문학상 수상
남촌문학상 수상
수필집 《나의 소확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