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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9
#성도의견인
성도의 견고한 인내의 내면적인 근원과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고,표면적인 의지와 행위의 주체는 성도 자신이다. 즉,성령께서는 성도의 령을 거듭나게 하시고 성도의 혼이 선한 의지를 가짐으로써 성도의 육으로 견인하도로 역사하시는 것이다.따라서 성도의 견인에서 성령의 사역을 배제해서도 안되지만,반대급부로 성도 자신의 의지를 배제해서도 안된다.성도의 견인을 하나님의 견고한 인내라고 보는것은 주제에 합당하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서 다뤄야할 사항이다.어떤 신학교수의 견해대로 견인을 견고한 인내가 아니라 궁극적 구원을 위한 보존이라 하는것도 타당하지 않다.그렇다면 용어를 perseverance가 아니라 preservation등으로 해야했을 것이다.용어가 성도의 견인인 이상,일차적으로는 성도에게 초점을 맞추는것이 타당하다.논외로,우리말로 견인이라 번역한것은 아마도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탁월하게 생각한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0.그리스도의 신성(1)
We believe that Jesus Christ, according to his divine nature, is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not made nor created, for then he would be a creature.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본성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며, 성부께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시나, 피조물인 것처럼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 고백에 추가되어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존재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신 분이시다.
He is one in essence with the Father; coeternal; the exact image of the person of the Father and the "reflection of his glory," being in all things like him.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더불어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셔서 함께 영원하시고, 성부의 위격의 적확한 형상이시며 성부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영광의 광채”가 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백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께도 적용되는 내용이 추가되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자와 연합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근본부터 하나님의 본체로서, 세 위격들과 더불어 영원하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그리고 세 위격들의 일체이신 한 본질 하나님의 적확한 형상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영광의 광채가 되신다.
He is the Son of God not only from the time he assumed our nature but from all eternity, as the following testimonies teach us when they are taken together.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증언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간 안에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으로나, 모든 영원성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시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까지의 성육신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피조세계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피조물로 조성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창세 전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계셔오셨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시다.
Moses says that God "created the world"; and John says that "all things were created by the Word," which he calls God. The apostle says that "God made the world by his Son." He also says that "God created all things by Jesus Christ."
모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함으로써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 칭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創世記 1:1, 太初에 하나님이 天地를 創造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In principio creavit Deus cælum et terram.
ΕΝ ΑΡΧΗ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요한福音 1:3, 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All things were made through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Omnia per ipsum facta sunt : et sine ipso factum est nihil, quod factum est.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히브리書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通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萬有의 相續者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世界를 지으셨느니라
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the heir of all things, through whom also he created the world.
novissime, diebus istis locutus est nobis in Filio, quem constituit hæredem universorum, per quem fecit et sæcula :
ἐπ’ ἐσχάτου τῶν ἡμερῶν τούτων ἐλάλησεν ἡμῖν ἐν Υἱῷ, ὃν ἔθηκεν 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δι’ οὗ καὶ ἐποίησεν τοὺς αἰῶνας·
태초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태초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의 능력으로써 성령을 명하여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당신의 인성의 형상으로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하늘의 사람으로서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태어나셔서 이 땅의 사람으로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셨으며,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내신다.
#20191229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5장.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고 확증하시며 더욱 상세히 밝히신다. 하나님께서 그리 하신 이유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난 후에, 비록 그리스도이신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그저 떠돌이 신세로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차올랐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보존하시기 위해서 그의 연약함을 계속 품어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만 특별하게 그의 믿음을 보존시켜 주신 것은 아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모든 신자들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보호하심의 은혜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삶에서 아무런 걱정할만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위해 세상 사람들 보기에 말도 안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손해도 보고 괴로움도 당하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을 천국을 소망함으로써 능히 이길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단지 오늘날에는 아브라함 시대처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고 우리 영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과 기도와 예배와 설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하지만 과거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효력이나 지금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효력은 동일하다. 우리가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선하고 올바르며 성경에 근거한 깨달음을 불현듯 주시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을 감동시키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듣고 보고 아는 말씀 안에서만 그런 영감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바른 성경 지식을 최대한 많이 습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당신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시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아브라함이라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이 연약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람은 미래에 어떤 일이 자기에게 발생하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되면 조그만 상황이 안좋아져도 자기 선택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아브라함이 지금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셔서 그를 지켜주시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스스로 아브라함의 상급이 되셔서 그를 가장 부유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특별하게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인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가장 확실한 언약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히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자녀로 삼아주셔서 하늘나라의 형언하지 못할 풍성한 기업을 우리로 상속받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심판의 날 이후에 모든 성도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패와 같이 지켜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육적인 생명을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 전까지는 죄의 댓가인 사망이 권세를 발휘하기 때문에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성도들이 10일 동안 마귀의 극심한 환난을 당하거나 짐승의 표를 거부하거나 하나님의 두 증인처럼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우거나 해서 그리스도께 충성하다 죽을지라도 그 믿음을 절대적으로 보존하셔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충성되게 목숨을 바친 성도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표를 보여달라는 아브라함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시면서 제물을 바치라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신 언약의 증표가 됨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라 제사와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을 반복해서 인식하였다. 그러나 구약 제사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해서 그 자체로 무슨 하나님의 죄사함 등의 효력과 은혜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구약 제사가 무효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멜기세덱의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 백성들의 죄를 이미 사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영원하고 참된 제물과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 또한 완전하고 영원하다. 그리고 각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사의 효력을 발휘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이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잡아 바치지 않아도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참된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서 선행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영적인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 제사를 드릴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 된 하나님의 언약을 더욱 확실하게 우리 심령에 인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당대에 겪지 않을 4백여 년 후의 일까지 보여주신다.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이 나지 않으면 4백 년 후의 후손도 없을 것이 자명하므로 이 먼 미래의 예언은 아브라함에게 더욱 확실한 증표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은 자기보다 자기 자녀와 후손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므로 아브라함은 먼 미래의 일을 보면서 지금 겪고 있는 고생의 험난한 길을 넉넉히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비록 자기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는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기뻐 감사하며 건축 재료를 차고 넘치게 준비하였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전부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등의 성경에 기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마지막 날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소망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험난한 인생이 헛되지 않은 것은 성경에 기록 된 마지막 날과 하나님 나라가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임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면서도 마치 아브라함이 스스로 믿은 것처럼 여기셔서 의롭다 하신 것이다. 오늘날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이 이와 같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철저히 숨기신 채 은연중에 은밀하게 성도의 영을 살려 깨우시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밝히시며 성도의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하셔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성도의 영혼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억지로나 강압적이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의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항상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성화의 과정은 성령의 소욕이 점점 커지고 육체의 소욕이 점점 작아져서 인생이 끝나는 때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혼동하는 많은 이단과 거짓 교사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믿어 그 믿음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왜곡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인간의 공로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순간 그 믿음은 한 방울의 독극물에 오염된 우물물처럼 우리 영혼을 해롭게 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만을 강조하면서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거나 교회 일만 거룩하고 세상 일은 더럽다는 식의 거짓 복음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사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이런 사상에 젖어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너무 하찮고 가벼운 것으로 여겨 방탕하게 행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교회가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불법을 저지르고서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미명하에 그 불법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거나 교회에 충성한다면서 자기 가족과 사업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어 보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선하다 인정받는 선행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고 맛과 향기를 내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비록 믿음의 조상이었어도 거듭되는 고난과 언제 이뤄질 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불거진 의심과 원망 등을 하나님 앞에 가감없이 쏟아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연약해진 심령을 비난해서도 비난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의인이고 우리 중 누구도 그보다 믿음이 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기꺼이 우리의 연약한 상품을 겸손하게 인정하되 가급적 우리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없기를 간구해야 한다.
#20201229
#민수기 #Numbers 21:1-3
호르마를 점령하다
1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가나안 아랏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지역 근처를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서는 백성들을 공격해서 몇 사람을 포로로 끌고 가버린다. 아마도 아랏 왕은 40여 년 전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역사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랏 왕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벌여 본진을 공격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큰 부담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아마도 이스라엘 진영 끄트머리를 갑작스럽게 게릴라전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썼을 것 같다. 이 공격에서 백성 중 몇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는 나오지 않고 단지 몇 명의 백성들이 생포되어 끌려갔다는 기록만 있다. 어쩌면 아랏 왕은 그렇게 생포한 인질들로 이스라엘과 불가침 협상을 맺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랏 왕의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환을 위한 협상에 나서지 않도 도리어 여호와께 서원하머 아랏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이는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인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한 내용은 무엇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랏에게서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않고 철저히 진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40년이 되어서야 여호와의 언약과 말씀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한편 백성들이 그렇게 전면전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비굴하게 굴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담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비유하자면 복음으로 무장된 순교자들과도 같다.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이 여호와의 절대 불변한 언약이었어도 이스라엘은 바로 아랏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먼저 여호와께 엄숙하게 서원하였다. 이는 아마도 자기들의 부모 세대가 40년 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듣고 자기들 마음대로 다시 진격했다가 참패를 당했던 사건을 보면서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먼저 여호와의 뜻을 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랏을 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서원은 여호와의 언약을 토대로 하며 여호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담겨있었다. 이는 오늘날 아무리 성경으로도 당연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내 욕심과 혈기를 앞세우지 말고 우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먼저 아뢰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그 사역이 정말로 성경과 성령을 근거로 하는지와 그 사역으로 인해 나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아랏의 이러한 강경대응은 먼 나라에서 온 사신을 가장하여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으러 온 어떤 이웃 족속의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아랏의 방식은 육적으로는 강하고 담대하며 지혜로워보였으나 영적으로는 최악의 수였다. 반면에 이웃 족속의 방식은 육적으로는 너무나 비굴해 보였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수였다. 그 족속은 비록 며칠만에 자기들의 거짓말이 발각되었으나 이미 이스라엘과 맹세를 치른 후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밑에서 부역을 할지언정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후자의 족속은 다른 가나안 족속들의 연합 공격을 당하게 될 때에도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여호수아가 이 족속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지나친 열정에 사로잡혀 이 족속을 침략하고 학대하며 많은 사람을 학살함으로써 다윗 왕 시대에 일곱 자손이 그 대가로 저 족속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과연 그들의 자유의지 때문인가 아니면 여호와의 창세 전 절대 불변의 예정 때문인가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펠라기우스와 아르미니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자기 자신들만의 자유의지로 서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여호와의 예정과 섭리와 성령의 인도하심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을 잇는 칼빈 선생 등의 신앙개혁가를 추종하는 자들은 사람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예정과 섭리, 그리고 성도에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후대의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성령의 은혜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니 인간으로서의 성도의 의지를 무시하고 기계적 순종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 모든 일을 절대 불변하게 계획하셨고 그렇게 섭리하셨다는 것과, 성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을 선하게 불러 일으키셔서 여호와께 거룩한 서원을 하도록 자원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께서 새롭게 불러 일으키신 심령에 의해 자기들 스스로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서원을 드렸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대로 순종하고 선을 행하며 이로 인한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견고하게 인내하는 원리와 동일하다.
#민수기 #Numbers 21:4-5
놋뱀으로 백성을 구하다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스라엘 백성은 호르 산에서 아론의 임종식을 치르고 나서 에돔 땅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멀리 돌아가다가 그 길이 험난하자 또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하고, 입으로 범죄한 부모 세대가 전부 광야에서 엎드러졌어도 이제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할 자녀 세대의 신앙은 그야말로 비참할 정도로 우려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으면 자기 부모 세대가 했던 독한 원망의 말을 그대로 내뱉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원망의 죄악된 방식이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들 중에는 모세와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봤자 최고령이 59세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 중에서 실제로 애굽에서의 고통과 핍박을 경험한 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자기들의 부모 세대가 겪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애굽에서 직접 생활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애굽이 좋았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내가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가 살기 좋았다고 하는 것과도 같은 허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한 불평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내뱉은대로 40년 동안 먹어온 하찮은 만나 말고 입맛을 충족시킬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40년 동안 매 끼니마다 만나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고역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정착민이 아니라 아무런 식물도 기대할 수 없는 광야를 떠돌아 다녀야 했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만나라는 완전 식품을 매일같이 내려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이런 자기들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비록 만나가 먹기에 지겨운 음식이었어도 그런 식으로 불평해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정 다른 음식을 먹고자 했다면 모세를 통해 정중히 간구하였다면 내려주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마실 물이 없다는 것도 원망할 이유에 해당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항상 어떤 반석이 따라다녀서 필요한 때에 모세가 그 반석에서 모든 백성이 마실만큼 충분한 물을 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마실 물이 떨어졌으면 다시 모세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40년이 지나도 거의 나아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라는, 마치 애굽의 바로와도 같은 자들에게는 끽소리 한 번 안하고 애굽 술사들처럼 온갖 알랑방구를 뀌다가도, 자기가 낳지도 않은 백성들을 자녀처럼 품고 40년 동안 인도했던 모세를 누구보다도 많이 닮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온갖 불평과 원망과 비방과 저주를 퍼붓기를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코로나 대응을 잘해도 한국 기독교는 흠집 내기와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4,500만 명 분의 백신을 마련했다고 하는데도 지금 당장 내놓지 않는다며 악다구니를 내뱉는다. 평소에는 정부지원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폄하하더니, 이제 와서는 왜 더 내놓지 않느냐며 손바닥 뒤집듯이 주장을 번복한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가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그렇게 입으로 중얼거렸어도 정작 코로나로 인해 여러 어려움이 닥치게 되자 그 모든 책임과 탓을 정부에 돌리며 감사를 버려버린다. 일반 교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성경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배울만큼 배우며 가르칠만큼 가르친 목사라는 자들이 정작 반성경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니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이다.
#20211229
#여호수아 #Joshua 24:14-33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도 신앙의 정점을 구가하고 있었음에도, 여호수아는 지금 이스라엘이 가장 잘 나가고 있으니 계속 정복전쟁으로 영토확장을 해야 된다라거나 부국강병을 위해서 이런저런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해야 된다라거나 자기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누구로 해야 한다라거나 하는 것을 유언으로 지시한 것이 아니라, 그 정점의 신앙에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더 힘을 내어 여호와 그리스도만을 섬길 것을 몇 번이고 당부한다. 더군다나 여호수아는 신앙의 당부에서 그치지 않고 역으로 백성들에게 지금이라도 좋으니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으려거든 섬길 이방 신을 마음대로 선택하라며 그들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여호수아는 설령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가솔들만큼은 오로지 여호와 그리스도만 섬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어느정도의 과장과 허언을 하기도 하지만, 여호수아의 말은 절대로 과장되지도 허언이지도 않으며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기꺼이 신앙을 지킬것에 대한 불변의 맹세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잘 일궈놓으면 3대는 이어갈 수 있지만, 신앙은 언제나 현재성을 띠기 때문에 지금은 탁월하게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방심함으로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어서 지금의 신앙 수준이 평생 이어질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의 내용을, 십계명으로 신앙의 행위를, 주기도문으로 신앙의 소망을 매일매일 점검해야 한다. 앞일을 알지 못한채로 1년 동안 먼 나라에 가서 장사해서 돈을 벌겠다고 다짐하는 미련한 자처럼 지금 자기의 신앙이 안전하고 탁월하다고 해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뜻과는 상관없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다가는 어느샌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가 명한대로 오로지 여호와 그리스도만 섬기겠다고 결연히 대답한 것에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는듯이 그들은 여호와 그리스도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고 그분께서 그들의 죄와 잘못을 재앙과 멸망으로 갚으실 것이라며 거의 위협조로 응대한다. 그러나 이는 여호수아가 정말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재앙으로 멸망을 당할 것을 바란다거나 내다보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그리스도만을 섬기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답을 재차 이끌어냄으로써 그들의 맹세와 다짐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오직 여호와 그리스도만을 섬기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와 다짐을 받는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그들중 몇몇이 몰래 가지고 있었을 모든 우상들을 전부 버리게 함으로써 입으로 고백한 신앙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보이게 한다. 야고보 사도가 가르친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없는 죽은 몸처럼 죽은 믿음이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은 언제나 선한 행위의 열매로써 검증되어야 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한 율례와 법도는 어떤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40년 전에 모세가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파한 그 율법을 이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난 지금에 다시 한번 재차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그리스도의 율법책에 기록한 모든 율례와 법도의 말씀에는 아마도 신명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율법을 공표하고 언약과 증표를 세움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신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각자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다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장로들과 수령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겼다고 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신앙이 그리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니, 이스라엘은 아론의 손자이고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살아있는 중에도 이미 패역할대로 패역해버려서 사사기 17-2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레위인이 정처없이 떠돌다가 돈을 받고 한 개인 또는 지파의 제사장이 된다거나 레위인이 첩을 두기도 하였고, 베냐민 지파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버려서 여행객의 첩을 윤간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다른 모든 지파의 공격을 받아 장정 6백명 외에는 마치 가나안 족속들처럼 멸절을 당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이 당하게 된 모든 것들은 여호수아 앞에서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마땅한 책임이었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의 신앙의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 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징벌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