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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 치하의 기록 - 한 대학생이 쓴 敵 치하 서울 90일간의 일기
한 대학생이 쓴 敵 치하 서울 90일간의 일기
나는 살아났다
갖은 고통을 참고 살아난 내가 막판에 아군의 포탄을 맞고 죽을 위기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잦아졌다. 고요한 아침이 밝아오는 듯했다. 나는 지하실에서 마당으로 나와 기운없이 쓰러져 버렸다
1950년 6월14일 수요일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자식을 위하여 어머니는 지금 떡을 만드시느라 땀을 흘리고 계신다. 어머니란 말은 보살이라 들었다. 포근한 고향의 품을 떠나는 내 마음도 안되었지만,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온 정성을 떡 만드시는 데 쏟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옆에서 서울로 가져갈 책 여러 가지를 보자기에 쌌다.
1950년 6월15일 목요일
시간이 있으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역 밑의 재목창고에 가볼 터인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 바로 어머니와 역으로 나가 차표를 샀다. 역으로 따라 나오려고 보채는 여동생 경자에게 돈을 주며 『학교에 가야지,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지』라며 타이르고 나왔다.
쓰라린 어머니와의 이별 시간이 곧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며 손짓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아!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소자는 성공을 위하여 서울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출세를 하여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손을 흔들며 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뜨거운 눈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차는 떠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차는 곧 아버지가 일하시는 재목창고 옆으로 지나갔다.
저 만큼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핑 돌았다. 아버지, 소자를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 꼭 성공하여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50년 6월18일 일요일
장억경, 유광섭, 신종환 친구들과 마포강으로 나갔다. 마포에는 지정순 누나가 있어 음식 솜씨를 자랑했다. 집에서 가져온 떡을 가방에 넣어왔기 때문에 나누어 먹었다. 떡이 맛있다고 해서 하숙집까지 데리고 와서 더 주었다.
1950년 6월21일 수요일
S가 몹시 그립고도 보고 싶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강변으로 나오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그 생각만 하고 걸어나왔다. 하루빨리 강의가 시작되어야지 잡심을 하다니…. S의 모습을 뿌리치고 전차에 올랐다. 집으로 가다 말고 곧장 도서관으로 나가서 소등시간까지 책을 보았다.
1950년 6월24일 토요일
학교에 나가 보니 흑판 게시판에 등기가 왔다고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등기를 펴보니 6000환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돈을 찾았으나 등록금은 내지 않았다. 왕태와 억경이가 등기 왔으니 한 잔 하자고 졸라댄다. 나는 속으로 「난 너희들과 같은 갑부의 자식도 아니며 여유 있는 돈도 아닌 등록금인데 한푼도 헛되게 쓸 수 없다. 이 돈은 부모님이 피땀으로 해서 보낸 것인데 내 어찌 함부로 쓴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전국 체육대회 육상여자 100m 경북대표 선수로 상경한 S를 만나기 위하여 7시 30분 서울역 앞 협동호텔에 갔으나 대구고녀 운동선수는 이 호텔을 떠나 서울역으로 나간 후였다. 100환짜리 입장권을 사 가지고 역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여학생이 모인 곳으로 가서 S를 찾아내었다. 못 만나고 떠날 줄 알았는데 내가 찾아와서 S는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눈과 마음으로 장래를 약속하며 아쉬움을 나누었다. 무정하게 떠나는 신호를 남겨두고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S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고 순간적이라 미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헤어진 마음의 공허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해서 S를 내 아내로 맞을 것이라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1950년 6월24일 토요일 밤 바로 이날이다. 내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날일 줄이야….
大文豪(대문호) 소설가, 신문사 편집국장이 되려고 많은 책도 읽고 습작하던 내가 서울에 상경, 그 뜻을 펼쳐 보려고 희망했는데 통신장교로 임관되어 지금은 편집국장이 아닌 전화국 국장으로 정년 퇴직하였으니 말이다. 이날부터 9·28까지 그리움과 고통으로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의 나날을 보냈으니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후일이요, 나에게는 이날의 비극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6·25를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신이 나를 지켜주었으며 무슨 어려운 일에도 굴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결단심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자신을 갖고 노력하는 인내심을 키운 것이다. 철저한 반공심으로 나는 살아난 것이다. 이 철저한 인생철학으로 갑종간부 42기 후보생으로 논산에서나 통신 20기 광주에서의 고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한창 치열했던 북한강 949고지 전방에서 통신장교의 직분을 잘도 이겨내고 제대한 것이 아니던가….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되었으며 명심보감에 말씀하시기를 천명을 순종하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오늘의 복을 누리게 됐다고 믿는다. 평소의 민주주의 사상을 건전하게 올바르게 지니고 있었음으로 나는 산 것이다. 자유진영이 반드시 승리하고 공산주의는 망할 것이며 서울탈환이 반드시 올 것으로 사상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2만4600환. 이것이 나를 살린 것이다. 모든 일에 절약하고 절제로서 처신하는 일이다. 세상의 인정은 곧 돈 있는 곳으로 쏠린다고 했다. 사람의 의리가 돈으로 인해서 끊어지고 돈이 살린다고 했다. 6월24일 등기로 올라온 6000환을 찾아서 등록하고 나머지를 썼더라면 그 어려운 시기에 무슨 돈으로 장사를 했더란 말인가? 또한 무슨 힘으로 생명을 보존했을까?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힘이요, 진실한 사랑은 오아시스의 샘이었다. 쓸쓸하고 어렵고 고생이 되어도 S를 꼭 만나야지 하는 마음이 위안이 되었고 딴 여자에게 곁눈질도 안하고 잡념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6월24일 저녁차로 내려갈 때 약속한 미래는 꼭 이룰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보람으로 S와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되었으니 사랑의 힘이요, 인연이 열매되어 결혼했다고 본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학교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무슨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꼈다.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옆으로 군용트럭이 폭주를 하고 군인들이 지프로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평상시와 다른 급박한 공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 불안한 마음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서울역에 내려서야 38선 이북에서 공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프 군용차가 서대문 쪽으로 질주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놀란 피난민들이 떼지어 서울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바람결에 은은한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두려운 생각이 든다. 피난민과 부상병이 계속 시내로 밀려들어온다. 나는 곧장 서대문 우체국에 가서 고향으로 전보를 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1950년 6월26일 월요일
전세(戰勢)를 알아보기 위해서 학교로 나갔으나 강의도 없고 별다른 조치도 없이 10시가 되었는데 하늘에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서 기관총으로 『따다닥』 쏘기 시작하더니 밑에서도 대포로 『쿵쿵』 하고 쏘지 않는가…. 아이고 정말 전쟁이 났구나 싶었다. 집합종이 울려 강당으로 모여 임시 휴교발표를 들었다.
친구와 노량진으로 나오니 한강 인도교가 차단되었음을 보고 한강 벽을 내려가서 친구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한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건너지 말라고 하는 한강을 건너서 서울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곧장 대구로 내려갈 것이지….
그때 내려갔으면 긴 고생과 굶주림을 면했을 것을…. 남산 위에 시꺼먼 먹구름이 덮이고 초저녁에 어둠이 깔릴 때 북쪽 골짜기 뒤에는 북괴군 2개 사단이 남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李承晩(이승만) 정부는 현재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오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강한 국군에 의해서 다시 통일될 것이니 정부의 성명서를 믿고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을 했다.
이를 믿었던 내가 너무나 어리석지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그런 말을 해놓고 28일 오전 2시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경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수천 명의 시민을 죽게 하고 한강 이북에 남아 있던 4만4000명의 병력을 묶어버리고, 또한 대포와 장비와 함께 선량한 150만 서울시민의 발을 묶어놓고 그 고생을 시킨 것이다.
1950년 6월27일 화요일
나는 아침을 먹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 서대문 경찰서 앞으로 나가서 신문을 샀다. 현재 북한 괴뢰군이 이남으로 개성 백전 응진 동두천 춘천 포천 문산 주문진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 국군은 격퇴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저녁에는 의정부까지 공산군이 쳐들어 왔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곧 짐을 정리하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서울역으로 나갔으나 오늘 오후 2시에 경부선 열차가 막차로 떠나버린 것이다. 대전으로 가는 차가 있을까 하고 알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초조한 저녁 때 부슬부슬 비까지 오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온다. 내 어찌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는고…. 원망스럽고 비통스러운 생각에 안절부절 방에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돈암동에서 오는 길인데 곧 북괴군 탱크가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맙소사 때는 늦었구나. 나는 속으로 울었다. 어머니 소자는 어찌하오리까…. 비는 점점 퍼붓고 있으니 피난 갈 방향조차 알 길 없다. 앞이 캄캄하다.
아! 서울도 최후가 되었구나, 상황을 전환시킬 아무런 힘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때 기나긴 사이렌 소리가 기분 나쁘게 억척스럽게 오는 빗속 사이로 들려온다. 나는 즉각적으로 서울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임을 알아차렸다. 한잠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1950년 6월28일 수요일
악몽의 밤이 지나고 밤새도록 오던 비도 말끔히 사라지고 날이 밝아졌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연대 친구를 찾아 철도관사를 지나 순화동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한강 인도교가 파괴되고 철교마저 끊겼으니 남쪽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지금 시청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 시내에는 탱크가 행진하고 있다고 했다. 맥이 탁 풀린다. 이 일을 어찌할까 앞이 캄캄했다.
총소리와 탱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요란하게, 가까이…. 나는 하숙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는데 어찌하랴. 멀리서 만세소리까지 들려오니 꼼짝없이 당했구나 싶었다. 나는 나갈 생각도 없이 누워버렸다.
구경을 나갔던 주인집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서대문 쪽에서 수천 명의 죄수가 문을 부수고 로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누워서 고향 부모형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모든 일이 꿈만 같다. 라디오와 신문을 믿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때 동대의 중호가 와주었으면 의논이라도 할 것인데 그의 주소를 모르니 한스럽기만 하다.
1950년 6월29일 목요일
지금은 학교에 나갈 수도 없다. 공산주의 학생들이 활개를 치고 있을 터인데 친구 만나러 나갔다가 큰일 날 것이 뻔하다. 강의가 없는데 나갈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북괴 비행기는 서울 상공을 날면서 무슨 삐라를 뿌리고 있는데 알게 뭐냐… .수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피난할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옮긴다고 했는데 갈 사람은 다 가고 바보만 남았으니 아득하게 보이는 천장만 쳐다보고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별 궁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1950년 7월1일 토요일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와 신문을 한 장 사서 보았다. 그것은 조선인민보였다. 그곳은 지리산 유격대가 벌써 함양 염양 진주 방면으로 설치는 보도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평양 상공에 나타난 B29기를 11대나 격추시켰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남대문으로 나가 구두 밑창을 500환 주고 단단히 수선했다. 그리고 시장으로 들어가서는 오징어 20포를 사 가지고 나왔다. 배가 고프면 그것을 씹고 견딜 생각으로 산 것이다. 1000환을 주었다. 옆에는 맛있는 떡이 눈에 빛났으나 꿀꺽 침을 삼키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 이후 어찌될지 모르는데 일전 한푼 헛되게 쓸 수 없는 것이다.
1950년 7월6일 목요일
하숙집의 눈칫밥은 참으로 거북스럽다. 한술 얻어먹고 나오는 마음은 무겁고 힘이 들었다. 할 일 없이 잠깐 밖으로 나가 신문을 사 보았더니 미군과의 첫 대전이 실려 있었으며 미군의 야포를 비웃으면서 그 옆을 지나가는 탱크부대의 자랑을 보도하고 있었다. 계속 남진하는 보도다. 내일이면 천안을 함락시킨다는 것이다.
1950년 7월7일 금요일
미군과 국군의 全병력이 금강으로 후퇴해서 사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나 탱크는 계속 진격한다고 보도했다.
1950년 7월11일 화요일
이른 아침 공산군이 조치원으로 쳐들어가니 10명 중 9명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더라고 보도했다.
1950년 7월12일 수요일
대전까지 탱크가 진격하고 있는 보도가 나오니 맥이 탁 풀린다. 어찌하여 미군과 국군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후퇴만 계속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저녁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여 한 차례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오징어를 씹으면서 먼 고향의 모습을 그리면서 답답한 가슴을 억누른다.
1950년 7월13일 목요일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한 술 얻어먹고 방에 와서는 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고 있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누가 찾아왔으니 일어나라고 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너무나도 반가운 중호가 찾아온 것이다. 『너는 참 세월 좋구나, 낮잠 자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얼굴은 웃고 있으나 건조되어 말라붙은 모습에 서글프게 찌그러져 있었다.
군복을 염색해 입은 옷차림에다 굶주리고 지친 마른 입술에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나의 손목을 잡고는 『한조야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죽든 살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나하고 같이 내려가자…』하고 말을 건네왔다. 나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모험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고향으로 가야 한다. 믿음과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자유진영이 얼마 후에 반격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1950년 7월14일 금요일
중호를 보내고 난 후에 나는 후회를 했다. 미군의 폭격이 위력이 없고 괴뢰군은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심정이다. 아침을 먹고 나는 곧 남대문으로 나갔다. 무슨 장사라도 해서 장기전으로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남대문 자유시장을 이곳 저곳 찾아다니며 무엇이 나에게 적합한 장사거리가 될 것인가를 살펴봤으나 하나도 내키는 것이 없었다.
점심 때가 지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기운이 하나도 없다. 왜 이렇게 먹고 싶은 것이 많을까.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눈물이 나오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까봐 피하듯 돌아왔다.
밖에서 저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배가 고프니 그 소리가 더욱 귀에 잘 들려온다. 눈칫밥이라도 얻어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참아가면서 견디었다. 고통은 시련이요 수양으로 이겨야 한다는 새로운 굳은 결심을 하고….
1950년 7월15일 토요일
잠이 깼으나 거북스러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그들 앞에 나가기가 싫었다. 그들이 마루에서 밥을 다 먹었을 즈음 슬그머니 나가서 세수를 하였다. 그들도 사람이라 밥을 먹으면서 모르는 체하랴….
그때까지 나는 싫어도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야윌 대로 야윈 내 몸에 무슨 피가 있다고, 언제부터 생겼는지 빈대까지 나와서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다. 아침에 물밀 듯이 찾아오는 잠을 나는 결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아침밥을 놓칠까 싶어 온 신경을 밖으로 쏟아야 했다.
아침을 먹고 나오는 나를 주인 아주머니가 붙든다. 자기들도 지금 돈과 양식이 떨어졌으니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내놓으라고 한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면서도 부탁하는 그들의 처지가 오죽 딱했으면 말했을까 짐작된다.
물론 내 호주머니에 생명과도 같은 돈이 숨어 있으나 200환밖에 없다고 나오지 않은 땀을 닦았다. 친척집에 찾아가보겠다고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나에게 서울 친척집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한 곳 있기는 하지만 아주 먼, 촌수도 없는 그런 집이 한 집 있기는 있었다.
1950년 7월16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난 뒤 주인 아주머니에게 친척집에 간다고 하고 나왔다. 참으로 막연하였다. 중호가 다시 찾아와 준다면 나는 그를 따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독하고 힘 없는 발길은 나도 모르게 남대문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인민군의 붉은 깃발이 이리저리 나부끼고 그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시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나는 우연히 좋은 장사거리를 발견하였다. 나는 생기가 돌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000환을 주고 런닝 셔츠 하나를 사 입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오늘 친척집에 가서 2000환을 얻어서 1000환은 런닝셔츠를 사 입고 남은 돈이라며 1000환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주인 아저씨는 동정하는 눈치로 나를 감싸주었다.
1950년 7월26일 수요일
인민군의 탱크는 낙동강 근방으로 진격중이라고 보도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남대문 한 모퉁이에 밥장사 하기에 좋은 자리 하나를 마련하고 왔으니 그곳에서 밥장사를 하자고 권했다. 자기들도 지금 굶주리는 처지라 귀가 번쩍했다. 쌀은 큰사위가 잘 아는 영등포에 가서 사오기로 하고 필요한 그릇과 의자를 준비하였다.
1950년 7월27일 목요일
오늘부터 하숙집 아주머니와 남대문 노상에서 음식장사를 시작했다. 막걸리도 같이 팔았다. 나와 큰사위는 영등포에 가서 쌀을 팔아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6·25 전에는 마포 파출서장으로 있던 위인이 굶주림 앞에는 그도 별도리가 없어 나와 함께 영등포로 쌀을 사러 가는 것이다.
1950년 7월28일 금요일
오늘도 큰사위와 영등포로 쌀팔러 나섰다. 쌀을 두 말씩이나 짊어지고 오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찌는 듯한 한여름이라 말라붙은 몸에 웬 그렇게 땀이 많이 나는지. 마포 모래사장을 걸어오니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얻어먹어야지 어찌하랴. 고생 끝에 낙이라, 오늘부터 대우가 달라지고 막걸리까지 곁들이고 오래간만에 주린 배를 채우게 되었다.
1950년 7월29일 토요일
큰사위가 몸살로 드러눕게 되자 나 혼자 영천고개를 넘어 20리나 되는 시골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쌀 팔러 나갔으나 없어서 사지 못하고 오는 길에 호배추를 사가지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오래간만에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오는 길가에 담배장사를 할 수 있는 시골 가게 집을 눈여겨보고 왔다.
1950년 7월30일 일요일
오늘부터 나는 아침 일찍 남대문에 밥장사할 물건을 실어다 주고는 담배장사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고 담배장사 도매집으로 찾아갔다. 담배는 진짜와 가짜가 있어 공작 샛별 화랑을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3000환을 준비해서 샛별 가짜 한 보루를 사 가지고 영천행 전차를 타고 독립문에서 내려 그곳에서 담배를 다 팔았다.
나는 꼭 살아남아서 그리운 고향으로 가서 부모형제를 만나리라….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비굴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리라. 담배장사로 1500환을 벌고 보니 아침을 조금 먹고 온종일 굶은 몸에서도 기운이 솟았다. 그렇다, 눈칫밥은 그만 먹으리라. 이 약한 몸으로 병이라도 얻으면 모든 결심이 허사가 될 것이다. 내일부터 독립하여 내 자신이 자취를 하며 살아가리라.
1950년 7월31일 월요일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주인 아주머니를 찾았다. 『지금까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이 어려운 때 나도 가만히 먹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친구와 무슨 장사라도 해서 그 돈으로 자취를 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밑천이 없으니 돈 4000환만 빌려주시면 5일 후에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솥과 냄비 그릇을 빌려주십시오』 했더니 선뜻 응해주었다.
물론 나에게도 돈이 있었지만 지난번 돈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빌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대담하게 공작 담배 가짜를 두 보루 사 가지고 영천으로 해서 시골가게를 찾아다니며 다 팔고 올 수가 있었다. 오는 길에 호박 2000환 어치를 사와서 저녁을 대신했다.
1950년 8월1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남대문으로 나가려고 나설 때 주인 아주머니가 곧 밥이 되니까 먹고 나가라고 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나는 속으로 내가 살아남아서 꼭 이 은혜를 갚으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어제 배가 고파서 참외로 점심을 했던 것이 탈이 되어버렸다. 약방에서 약을 사 먹었으나 별 효력이 없었다. 점심은 옥수수로 때웠다. 20리를 나가서야 담배를 다 팔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200환짜리 밥을 사 먹고 들어왔다.
1950년 8월2일 수요일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나가려는 찰나 주인 아주머니가 부른다. 밥 먹고 나가라고. 그러나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물건을 살 수 없다』하고 뛰쳐나왔다. 100환짜리 주먹밥을 사 먹고는 한 사발 물로 배를 채웠다. 많이 걸어다니다 보니 구두 밑창이 헐어서 발이 나왔다. 그것을 수선하다가 문득 마포에 사는 김도순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한때 그의 딸과 혼인 이야기가 어른들 간에 있었으나 S가 있는 내 마음에 될 법이나 했던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중호와 함께 그 집에 하숙했다가 얼마 후 이 집으로 옮긴 것이다. 마포에 찾아갔더니 모녀가 집에 있었다. 반가워서 야단치며 맞이하는 그 情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 꼴이 너무나도 안되었던지 서둘러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왔다. 밥 같은 밥을 정말 오래간만에 먹었다. 지난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그 집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보리쌀 한 되를 사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서글프게 쳐다보았다. 밥을 줄 터이니 이리 오라고 했다. 먹고 왔다고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와서는 눈물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열고 달을 쳐다보니 눈물이 더욱 나와서 옷을 적시고 또 적셨다. 어머니, 꿈에라도 좋으니 한 번 보여 주십시오. 아, 어떻게 이 전쟁을 피해 고향을 찾아갈꼬….
인민군은 계속 南으로 南으로 진격하고 아군의 반격은 어느 때 한단 말인가. 굶어죽고 난 뒤에 국군이 승리한들 무슨 소용인가. 밤에 B29기가 와서 공습을 하지만 희망은 없다. 하도 답답하여 건넌방으로 갔더니 그 집 사위가 숨어서 UN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건너가서 이 방송을 들으며 아군의 반격 날이 어느 때인가 귀를 기울이곤 했다.
1950년 8월3일 목요일
오늘 아침 나는 또 한 끼를 얻어 먹었다. 외출해서는 보리쌀 한 되를 더 사 가지고 왔다. 요즈음 갑자기 심한 공습을 보고는 혹시 외출할 수 없으면 곤란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4일 금요일
지난밤에 낙동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나마나 어두운 밤에 수천 명의 피난민이 강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
1950년 8월5일 토요일
UN방송에서 괴뢰군은 점령한 지방에 통치의 태세를 갖추고 치안유지를 하고 있으며 전직 관리였던 사람들은 한갖 서기에 이르기까지 투옥하거나 살해되고 있으며, 地主는 즉각 처형하고,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마구 죽이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서울에서도 수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북한 괴뢰군에 편입시켜 남쪽으로 보내며 나머지를 봉사대로 동원시키고 있었다.
1950년 8월10일 목요일
주위의 공기가 심상치 않아 담배장사를 나갈 수가 없었다. 영등포에 있는 친구 종한이 집으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보리밥을 해먹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무덥고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마포 강을 건너려니 여전히 식량 구하러 나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인민군들은 이쪽저쪽 보이지만 별로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숨은 듯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뜨거운 마포 모래사장을 지나 바쁘게 굴다리를 빠져 나가다가 김도순 아주머니의 딸을 만났다. 시골에서 식량을 구해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금 어디 가세요』
그는 반갑게 나를 대해 주었으나 친구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고는 떠나려고 하는데 우리 학교 경제과에 다니는 고향친구를 만났다. 그는 영등포동 인민위원회에 있다고 하며 무슨 서류를 잔뜩 가지고 뽐내는 것이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 얼굴을 살피니 별로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나 불안했다. 그가 떠날 때까지 도순 딸은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꼭 들를 터이니 가보라고 했다. 영등포역 앞에 있는 종한이를 찾아갔더니 시골에 가고 없다고 한다. 이틀이나 사흘이나 대중없이 온다는 것이다. 맥이 탁 풀리고 기운이 없어진다. 그 집에는 그의 아버지와 백모가 단 둘이 있었다. 양반에다 부잣집이라 쌀이 넉넉히 있는 모양이었다. 친자식처럼 나를 위로해 주며 쌀밥을 수북하게 한 사발 해서 콩기름으로 주물러서 만든 콩나물과 야채반찬을 차려주었다. 맛있게 먹고 그 집을 나왔다. 오는 길에 고구마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1950년 8월15일 화요일
점점 불안해진다. 지금쯤 종한이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종한이 집으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생각에 마포로 나갔다. 마포 강을 건너고 막 모래사장을 지나려는데 인민군 놈들이 젊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집합시키고 있었다. 이크, 큰일났구나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놈들이 다시 오는 배를 향하여 그곳의 젊은이를 잡기 위하여 가는 때를 놓칠세라 먼저 배에서 내려온 사람들 틈 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휙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도망치는 나를 보고 따라올 듯하더니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에 끼어 도망치고 있으니 총을 쏘지도 못하고 따라오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잡아놓은 젊은이들을 놓칠까봐 주춤한 것이다. 만일 이때 잡혔다면 어찌되었을까. 등골이 서늘해진다. 십중팔구는 의용군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나는 영등포에 들어갔다. 또 의용군으로 붙들릴까봐 방송국 뒤를 돌아서 역전 앞으로 가지 않고 시장 쪽 뒷골목을 돌아서 종한이 집으로 찾아갔다. 물론 종한이는 있을 리 없었다.
백모에게 위험한 고비를 넘겨온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백모는 나를 동정하여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아,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또 있으랴. 손잡고 고맙다고 울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우선 이 집에서 먹고 자게 되었다. 밤이 늦어도 종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1950년 8월16일 수요일
아침 일찍 종한이의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나갔다. 일손이 없어 풀이 나무같이 커서 엉망이다. 신세지는 처지에 자진해서 열심히 밭을 매기 시작했다. 속으로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이니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하루종일 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더워서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하는 것이다.
백모가 밭으로 찾아와서 아침이 다 되었으니 식사하라고 했다. 세상에 별일도. 지금은 남의 집 머슴이 되었으니 그것도 친구 집의…. 그러나 나는 좋았다. 그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이때까지 먹어보지도 못한 쌀밥을 먹게 되었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던가.
그날 밤 종한이가 돌아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눈시울이 뜨거웠다. 할 이야기도 많지만 자기 아버지에게 나에게 밭 매는 일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하는 고운 마음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목욕을 하고 마루에 앉아 다정했던 지난날을 밤 늦도록 이야기했다.
1950년 8월10일 토요일
생전 해보지 않던 밭 매기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자식처럼 위로하고 동정해주는 고모는 누룽지까지 남겨 두었다가 나에게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궁금해서 살며시 시장쪽으로 나가 동정을 살폈다. 인민군이 영등포에 무척이나 많이 집결돼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다가 인민군 장교와 부딪치고 말았다. 『동무 어디 가는가?』 하고 의심스럽게 묻는다. 『구위원회에 있는 동무를 기다리는데 같이 가려고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수고한다』고 했고 나도 그를 보고 『수고한다』고 했다. 속으로 「이놈들 너희들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데 어서 꺼져라」하고 싶었다. 그는 먹던 참외를 나에게 건네주었으나 거절했다. 내가 아무리 굶어죽을망정 너희들이 주는 참외를 먹을 것 같으냐, 나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슬슬 정보를 캐내고 싶었다.
그는 신의주에서 20일을 걸쳐 걸어왔다고 하며 내일 탱크를 인솔하고 南下하는데 낮에는 못하고 주로 밤을 이용해서 행동한다고 했다. 물론 잠은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인다고 했다. 학식은 없고 이론과 투쟁심이 강하며 철저한 훈련을 받고 온 듯했다. 오래 머물다가 탄로날까봐 시간이 되었으니 곧 가야 한다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1950년 8월20일 일요일
이곳에 며칠 묵고 보니 이 영등포가 남쪽 집결지임을 알았다. 모든 병력과 장비가 이곳에 집결되고 새로운 전투지시를 받고 南下하는 것을 알았다.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대문을 두드린다. 나는 방 안으로 숨어들어 문 사이로 밖을 살펴본 즉 3명의 인민군이 물을 얻으러 왔는데 백모와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농사짓다가 의용군으로 끌려온 듯하며 말씨가 유치하고 얼굴은 굶은 탓인지 말라붙어서 눈동자가 흐릿했다.
그중의 한 사람은 고향이 그립고 부모형제가 보고 싶다고 했으며 지금 자기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고 난 후에 백모 보고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 가만히 숨어 있으면 된다고 했다. 때마침 급습하는 제트기 B29가 까맣게 폭탄을 싣고 영등포 상공을 덮었다. 제트기야 『꽝 꽝』 부숴서 반격해다오. 백모와 한 구석에 숨어서 빌었다.
1950년 8월22일 화요일
이 집에 온 지 꼭 일주일. 등잔 밑이 어둡다고 공산군 굴 속에 있던 나도 이 집을 떠나야만 했다. 동네 사람들이 숨어 있는 나를 수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동회장 귀에 들어가서 종한이 아버지가 불려간 것이다. 자식 친구이고 볼 일이 있어 잠깐 들른 것이라고 잘 말했으나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 뻔했다. 종한이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붙들어도 나는 있을 처지가 못되는데 고마운 친구다. 나에게 쌀 한 말과 보리쌀 한 말을 자루에 넣어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 집을 나오면서 장차 꼭 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서있는 종한이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오는 길에 저쪽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고향 길을 바라보고 그리운 향수에 발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길로 곧장 내려가면 고향으로 가는데 그리운 어머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눈물이 흐르고 흘러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 자리를 떠나 무사히 마포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마포시장에 가서 보리쌀 네 되를 5200환에 팔고 한 되만 갖고 가기로 했다. 앞으로 장사를 하려면 자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마음이 좀 든든했다. 하숙집으로 들어서니 주인 내외가 걱정하며 가다리고 있었다. 저녁은 내 손으로 보리밥을 해 먹었다.
1950년 8월24일 목요일
요즘은 길가에서 청년을 보면 막 잡아다가 의용군으로 보낸다는 정보를 받고 집에 있기로 했다. 제트기가 쉴 새 없이 서울 상공을 급습하고 유엔 방송에 군산상륙과 인천 함포사격, 원산 함포사격이 개시되고 맥아더 방송에서도 총 반격전을 시도한다는 보도를 듣고는 전세가 달라질 가능성이 엿보여 마음이 놓였다.
1950년 8월28일 월요일
괴뢰군의 공격이 약화되고, 괴로운 지경에 이르고 전투능력이 전에 없이 저하된 것을 알았다. 전세의 전환점이 온 것이 분명했다. 서울이 적어도 한 달 후에 탈환되리라 확신을 얻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괴뢰군은 힘이 빠진 모양이다.
나는 앞으로 한 달을 지낼 수 있는지 따져 보았다. 식량으로는 15일간을 지낼 수 있고 남은 돈으로 15일간을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희망이 있음에 용기가 솟아났다. 그렇다. 그때까지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1950년 8월29일 토요일
고구마보다는 보리쌀이 훨씬 좋다고 생각되어 두 관에 2200환으로 팔고 보리쌀을 샀다. 현재 호주머니에는 17200환이 남아 있다. 밀가루를 1되 500환 주고 샀다.
1950년 9월2일 토요일
이불을 2중 3중으로 덮어쓰고 한국방송과 東京방송을 들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시작되는 우리 방송. 참아달라는 李대통령의 목소리와 격려해주는 맥아더 장군의 반격전의 보도를 들으니 꼭 살아날 것을 더욱 굳게 마음먹었다.
1950년 9월4일 일요일
밤새 비가 내린 후 맑고 무더운 날이 시작된다. 괴뢰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있는 보도를 들었다. 불덩이 같은 해가 굶주리는 나의 힘을 더욱 빼고 방에서 일어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힘이 없다.
1950년 9월16일 토요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D데이가 바로 어제 오전 6시30분에 시작됐다. 용감한 우리 해병대가 작전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을 둘러싸고 완전히 괴뢰군 목표물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확 덮어쓰고 들었다. 만약에 들키면 총살감이다.
李대통령도 눈물 섞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방송하고 있었다. 승리는 곧 우리의 눈앞에 다가왔으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호소하고 맥아더 장군의 東京방송도 역시 승리의 예고 방송이라 나는 너무 기뻐서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다. 아 어머니, 곧 어머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합장을 했다.
1950년 9월18일 금요일
얼마 후에 아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 큰 시가전이 벌어질 것이며 어느 때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니 숨어야 할 장소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인집 사위와 지하실을 말끔히 청소하고 입을 옷도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이부자리를 깔아놓으니 견딜 만했다. 입구에 빈 유리통을 막고 들어가니 누가 이 집에 들어와도 감쪽같이 몰라볼 것이다. 밤중에라도 누가 조사하러 올지 모르니 오늘부터 아예 이곳에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1950년 9월19일 화요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괴뢰군 소탕전이 개시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에서 영등포, 마포로 쳐들어오면 서울 시내가 戰禍 속에 며칠간 혼잡할 것이 틀림없으니 그때까지 먹을 것만 확보해두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국군방송은 벌써 인천에서 부평까지 들어와서 내일이면 영등포를 공격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마음은 뛰고 가슴이 벅차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나는 살았노라고.
그러나 나는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라 생각하고 변소는 밤에 나가고 조심스럽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대문을 황급히 열고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와서는 지금 이쪽으로 인민군이 오니 꼼짝 말라고 숨어 있는 나에게 알려준다. 얼마 후 대문을 열고 인민군 몇 놈이 들어와서는 『여기 젊은 사람들이 있소』하고 두리번거리며 이방 저방 열어본다.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는 우리 주인과 딸들밖에 없다』고 대답하니 마당에서 한참 머뭇거리더니 구둣소리를 내면서 대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최후 발악으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젊은 사람이 있으면 즉각 쏴 죽이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총 쏘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다. 주인 아주머니가 밖으로 망을 보러 나가더니 저쪽 골목에 젊은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고 했다.
1950년 9월20일 수요일
인천으로 상륙했던 해병대가 한강을 건너 용산역으로 진격해 오는 뉴스를 들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인천상륙작전 D데이와 동시에 국군은 美 제트기와 함께 낙동강을 건너서 총반격을 개시하고 유엔군은 함포로 군산 원산 청진으로 꽝꽝 쏘면서 총진군한다는 보도다. 대한민국의 승리는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었으나 모든 일은 마지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꾹 참고 국군이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숨어 있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었다.
살살 망을 보고 다니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니 동 위원회에는 한 사람도 없고 위원장도 도망가고 김일성 사진도 어느 사이 하나씩 떨어져 없어졌다고 했다.
1950년 9월 21일 목요일
한강과 마포 강을 건너 도망가는 인민군은 그 도망가는 길을 제트기가 쳐부수고 인민군 집결장소로 가장 많이 숨어 있었던 남대문 국민학교도 제트기가 맹렬히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2시쯤 나와서 해두었던 식은 보리밥을 좀 먹고는 곧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韓美 해병대의 치열한 공격도 괴뢰군이 숨어서 완강하게 막으니 서울 탈환이 무척이나 힘드는 모양이라 별로 진전이 없었다.
1950년 9월22일 금요일
원 이렇게 서울 입성이 늦을까. 영등포에서는 배급물자가 들어와서 굶주린 주민에게 밀가루 설탕 과자 등을 나누어주고 있다는데 발악하는 인민군을 어떻게 서울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발악은 극도에 이르러 우리 시민을 마구 쏘니 큰일이다.
1950년 9월23일 토요일
오늘은 정말로 다행한 날이다. 보통 2시쯤이면 나는 살며시 지하실에서 나와 보리밥이라도 한 술 먹고 다시 지하실로 숨어드는데 그 무렵 인민군이 대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주인 아주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 숨을 죽인다.
만일 이때 내가 지하실에서 모르고 밖으로 나왔으면 바로 죽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굶어서 쇠약할 대로 쇠약해서 축 늘어진 상태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인민군이 가고 난 얼마 후에야 나는 이 사실을 알았다. 이때 조상이 나를 잠에서 붙들고 있었던 까닭으로 살아난 것이다.
1950년 9월24일 일요일
해병대가 서울에 입성하고 남산을 점령하고 용산에는 우리 태극기가 휘날려도 그들은 좀처럼 도망가지 않고 마포로부터 후퇴해서 내가 있는 서대문 로터리 의주로 순화동 충정로 중림동에 집결하여 발악하고 있었다.
전매국 북쪽과 서대문 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지고 불꽃이 활활 타고 있어도 그들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아 서대문에 있는 시민은 인민군과 함께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것이다. 시가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동대문 쪽을 열어 놓았음에도 괴뢰군은 계속 숨어 있었다.
1950년 9월25일 일요일
아직 한여름이지만 새벽 2시, 3시가 되어 하늘에서 비 같은 차가운 이슬이 내리면 가마니 밑으로 올라온 습기는 홑이불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오전 5시쯤 총소리는 한층 심하게 마포 쪽과 영천 쪽에서 들려온다.
의주로 옆으로 졸졸 탱크가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아침이 되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옆 골목에서는 총소리와 함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젊은 사람이 인민군에게 발각되어 총살되고 있는 것이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있는 것이다. 최후 발악하는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만 계속 들리고 있었다. 시민을 위하여 공격을 함부로 못하는 미군은 얼마나 초조하게 눈앞에 있는 서울을 바라보고만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시민의 희생이 늘어난다. 무슨 결단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 9월26일 화요일
공포의 나날이 지나가고 오늘은 시꺼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무엇을 예고하는 기운이 도는 날이다. 밤이 되어도 미군은 서대문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정말 미치겠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방송은 서울이 탈환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나가면 바로 죽는 것이다.
1950년 9월27일 수요일
아침이 되었어도 서대문에 미군의 진격소식은 없다. 맥아더 방송대로라면 지금쯤 미군이 서대문에 당도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 굶어 지쳐있는 이 몸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늦을까.
탈환은 틀림없으나 내 몸이 어떻게 견딜 수가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지금은 물도 못 마시고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
1950년 9월28일 목요일
정확하게 오전 3시가 되니 들어보지 못한 포격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그것도 간격을 두고 계속 들려온다. 얼마 후에는 내가 숨어 있는 의주로에도 『꽝』하는 포탄소리가 앞과 옆으로 뒤로 규칙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속으로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해 멈추던 공격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완전 포격해서 진군하는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이크 큰일났구나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아군의 포탄에 죽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빌었다. 『신이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그때 바로 옆에 꽝하고 포탄이 떨어진다. 직감으로 이 집을 피해 양쪽으로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다. 나에게는 이상이 없으니 천만 다행스럽게 위기를 넘겼다.
포탄이 계속 퍼붓고 있으며 이곳 의주로에 집결된 괴뢰군을 완전 소탕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5만 발이나 포탄을 이곳에 쏘지 않았나 싶었다. 마포에서 이곳까지 완전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고요한 아침이 밝아오는 듯했다. 아, 나는 살았구나 정말로 살았구나 용케도 참고 견디더니 드디어 서울 수복이 되었구나.
의주로를 지나 광화문 쪽으로 해서 중앙청으로 우리 해병대가 소탕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지하실에서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마당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기 때문에 온몸에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자 기운없이 쓰러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찬물을 마시고는 흐릿한 눈동자를 바로잡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바로 했을 때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환희와 기쁨에 찬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나갔더니 골목마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인민군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으며 개천물에는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로터리로 나가니 미군이 양쪽으로 줄을 지어 광화문 쪽 고개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몇 번이고 했다. 그리고 로터리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아직 타고 있는 건물에서 시꺼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서대문 의주로1가 2번지 9통 28반. 서울수복 그날 가장 치열했던 의주로에서 지칠 대로 지친 괴롭고 외롭던 긴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마터면 마지막에는 아군 포탄에 쓰러질 뻔했던 내가 살아났다.
그후 나는 1953년 4월11일 통신장교로 임관하여 참전용사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4년 4월26일 S와 결혼하여 MBC와 여성잡지에 모범가정으로 보도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56년 軍에서 학창복교 제대하고 전화국에 취직하여 88올림픽 경기가 끝난 1988년 11월에 32년 만의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퇴직한 것도 그때 얻은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살아온 덕택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계속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